- 나는 의사선생님을 잘 믿는 편이다. 일년마다 위내시경을 받아야한다고 해서 오늘 숙제를 했다. 수면내시경으로. 혈액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등을 함께 했는데 비용이 137,800원 나왔다. 약간 한숨이 나왔다. 또 일년마다 받으라는 담낭초음파를 예약하고 있는데 정산을 다시 해야 한단다. 가보니 좀전의 결제를 취소하고 새로 결제를 한다고 한다. 43,900원으로 바뀌었단다. 예? 했더니 '중증질환'이어서 그렇단다. 반가운 마음에 헤헤 웃음을 흘리면서 '고마워요'라고 했는데 중증질환이 고마운 건가...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 엇그제 세탁기에 삶은 행주를 헹구기 위해 세탁세제 투여기능을 해제한 줄도 모르고 빨래를 돌렸다. 세제 한 방울 넣지 않고 순전히 물빨래를 한 셈이다. 벌써 한두번이 아니어서 이젠 한숨도 안 나온다. 세제를 넣지 않았는데도 앞자락의 음식물 흘린 부분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한숨을 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부러야 세제를 안 넣을 수 없지만 종종 깜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세수할 때 비누를 사용하지 않아도 얼굴에는 물길의 흔적이 남는다. 빨래도 그렇다.
- 어렸을 때 아버지와 라디오로 판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적이 감탄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저도 판소리 배워볼까요?" 했더니 아버지는 조용히 입을 다무셨다. 하라는 말씀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없이. 가당치도 않은 얘기에 아버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셨겠지. 아마도.

이제서야 생애 처음으로 판소리 완창을 들었다. 270분 동안 펼쳐지는 심청가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공연이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보았던 몇 편의 뮤지컬은 그저 장난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비교불가. 뮤지컬을 보면서 저러다가 피 토하고 쓰러지지는 않을까 염려한 적은 없었으니까. 서양의 뮤지컬과 닮은 점은 가사 전달이 어렵다는 것. 예전에 셰익스피어 고향인 스트레포드 어폰 에이본에서 보았던 연극 <한 여름밤의 꿈>을 생각하면 지금도 창피한데 글쎄 한마디도 못알아들었다는 것. 나중에 영국 출신의 원어민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자신도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조금 위안을 받았다. 이번 완창 심청가를 1/3이나 알아들었을까. (더군다나 내 왼쪽 청력은 청신경이 30% 정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우리말이 영어처럼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면 판소리는 대단한 공연예술로 사랑 받았을 텐데...
뚝, 꿍딱, 따다닥, 쿵쿵...고수의 북소리가 그렇게나 아름답고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소리꾼과 주거니 받거니하는 맛도 각별하지만 그 자체로도 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소리꾼 없는 고수만의 북소리는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읽은 책 중에서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쓰기에 관한 책으로 읽었다. 에세이의 지평을 넓혀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자기계발서로 읽혀서 실망할 뻔했으나 사실을 토대로 한 픽션으로 읽힐 정도로 숨이 막혔다.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나의 꿈을 빼앗긴 소설. 역시 소설은 문체 읽는 맛...을 선호한다면 잘근잘근 씹어가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책. 문장에 매료되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책. 이런 책을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는데 내내 후회를 했다. 이런 책을 안 사면 어떤 책을 사려고...그 돈 아껴서 뭐하려고....
184쪽
"멋지군, 자네도 비상용, 그 아가씨도 비상용. 자네 인생 전체도 하나의 커다란 비상용이군. 내가 자네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진 않겠지만, 자네 인생에서 진짜는 논문밖에 없어. 근데 누가 알겠어? 그 논문이 다를 것들보다 훨씬 더 기만적인 비상용일지. 이해가 안 가는군.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본 수아레."
따다다다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갔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세계에서 그도 비상용이라는 잠정적인 지위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이지도 모르겠다. 비상용 삶이 넘쳐나는 비상용 도시에서 피어나는 비상용 우정.
아주아주아주 야무진 잡지. 김진해, 신형철, 이라영. 이 세 분만 실렸어도 충분히 만족했을 터. 한겨레의 믿음직한 구석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잡지.
- 도서관에서 빌렸으나 빌린 걸 후회하며 읽게 되는 책으로는, 이런 책은 사야지....
- 삼천포로 빠져서 이내 흥미를 잃게 된 책으로는
한 나라에 대한 여행기는 비판보다는 애정이 실린 글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인도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쓴 책은 되도록 적게 인용하고.... 여행은 체험.
- 원하던 실물을 접했으나 이내 관심이 시들어버린 책
몇 개월 동안 이 책을 빌리고자 틈틈이 대출 확인 작업에 들어가서 결국 내 손에 넣었으나, 그 지난한 접선 과정에 비해 막상 책을 몇 쪽 못 읽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인연이 아닌가보다.
마음(정신)을 다루는 책은 케바케라서 딱히 잘 읽히지 않는다. 마음의 풍경은 천차만별. 도움이 될까 읽어보지만 당신은 당신의 문제, 내 문제는 따로....이런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