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어야 한다. 젊으나 늙으나 여자나 남자나. 홀로 있는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게 되는 순간 불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 무료함은 애정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심심하다고 애정에 기대면 애정은 매정으로 변한다.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 은퇴하면 겪는 일이다. 그러니 늙어 죽을 때까지 홀로 있고,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해야 한다. 이런 말이 내 입에서 이렇게 빨리 나오게 될 줄이야. 잠깐입니다.^^

 

집 구석구석에 쌓이는 책이 번거롭고 흉칙해서 도서관에 열심히 드나들었다.(요즘엔 이런저런 물건을 하나하나 버리는 게 일이다.)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들을 마음대로 빌릴 수 있어서 좋은데, 마음에 드는 책을 빌리고 나면 갈등이 생긴다. 그래도 이건 사야되지 않을까? 흥! 언제 다시 읽겠다고! 책은 널려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며 조용히 마음을 접는다. 늘 일기를 쓰지만 다시 읽지는 않는다던 올리버 색스의 말이 떠오른다. 읽기도 한번으로, 쓰기도 한번으로. 다만 여운을 남기는 몇 권에 대해서 작은 기록을 남길 뿐이다.

 

 

 

 

 

 

 

 

 

 

 

 

 

 

 

 

이 책을 쓴 두 저자의 공통점.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한 사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한 사람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다는 점이다. 징집을 회피했다고 영원히 모국에서 배제당하지 않았다는 점도 같다. 올리버 색스는 뉴욕과 런던을 넘나들며 책을 출판했고 제이 파리니는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부동시'라는 해괴한 사유로 군면제된 사람은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 국적을 바꿔가며 징집을 회피한 어느 가수는 무릎 꿇고 읍소해도 끝내 모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각설하고.

 

<온 더 무브>에서 인상적인 부분.

 

*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게 하라' - W.H.Auden.

  (Let your last thoughts all be thanks.)

   이 말을 인용한 올리버 색스는 이런 말도 했다.

 

" Wystan's mind and heart came closer and closer in the course of his life, until thinking and thanking became one and the same."(Wystan은 바로 Auden)

 

 thinking과 thanking 이 하나가 되었다고라...

 

* p. 79~80  '런던으로 돌아와 의대에 다니던 시절에 마이클 형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야 했는데. 형하고 외출해 맛난 것도 사 먹고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가고(형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한 그런 일들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나를 그렇게 필요로 했는데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나쁜 동생이었다는 죄스러움)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복받쳐 오른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형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떨칠 수 없었던 색스의 슬픔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읽고 또 읽어도 눈물이 핑돈다.

 

<보르헤스와 나>

p.128. "나는 더 이상 체면을 차려야 할 이유가 없어. 노년이 되면 좋은 점 중 하나지. 어떤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p.202. "시간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물었다. "그렇지 않네." 그는 자문자답했다. 그러고는 쇼펜하우어를 인용했다. "그 어떤 사람도 과거에 산 적이 없으며, 미래헤도 절대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생명의 형식이다." 그러고 나서 보르헤스는 어느 불교 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삶은 생각이 지속하는 동안만 지속한다."

 

p.233. "아, 트라팔가 전투, 맞아. 사격수가 옆 배의 돛대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그를 저격했지. 그렇게 총을 맞고 죽어가던 넬슨 제독을 생각해 보게. 넬슨은 중위에게 말했다지. '하지 중위, 내가 총에 맞았네. 척추뼈가 으스러졌어. 이제 나는 죽을 거야.'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지. '최소한 나는 내 할 일은 다했네.'"

 

p241. "나도 괴물일세. 자네도 괴물이야. 마음속에 네시나 그렌델을 품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리는 한밤중이면 어두운 물속에서 수영을 하지. 나는 떨면서 잠에서 깨어난다네. 자네는 그렇지 않나?"

 

모두 보르헤스의 말이다.

 

 '삶의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고마운 생각'이기는 아무리해도 불가능할 것 같으니 '최소한 나는 내 할 일은 다했네' 하면서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생각.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언급했던 책을 찾아본다.

 

 

 

 

 

 

 

 

 

 

 

 

 

 

 

 

p.107  "소설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소설이지."

         "태평양 어느 섬에 갇힌 도망자, 살인자. 시간은 해체되고 현실도 해체되죠." 알래스테어가 말했다.

         "독자도 보이지 않게 되지. 심지어 독자 스스로에게도. 이야기만이 살아있을 뿐이야. 그래, 사라지는 건 작가의 운명이기도 한거야." 

 

 

 

 

 

 

 

 

 

 

 

 

 

 

 

p.112  "공간이 부풀어 오르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의 무한한 확장에 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70년, 아니 100년을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p.132  "나는 <베오울프>를 사랑해. 그래서 북해를 좋아하는 거야. 베오울프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 큰 칼을 차고 수영을 하지. 아홉 마리의 괴물이 그를 바다 밑으로 끌고가. 베오울프는 하나씩 다 죽여버리지. 쉭쉭! 주변으로 퍼지는 핏물을 상상해 보게. 베오울프는 탈진해서 핀란드로 쓸려가지."

 

나는 대학 때 이 책을 읽긴 읽었으나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고, 그 후 영화로도 봤으나 역시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

 

p.135 "저는 아무 생각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남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대부분 아무 생각이 없긴 하지만요."

  "젊은 남자의 운명이야. 집중력이 제한되는 것 말이야. 내가 눈이 멀어서 갖게 된 몇 안 되는 이점 중 하나는 발기의 대상에 시선을 더 이상 고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일세. 이제 나는 내면을 본다네. 물론 그 내면에는 산도 있고 위험한 절벽도 있지만."

  "'아, 정신이여, 정신에는 산도 있고 폭포 절벽도 있다네.'"나는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유명한 시를 인용하면서 말했다. 보르헤스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본 제라도 맨리 홉킨스.

 

 

 

 

 

 

 

 

 

 

 

 

 

 

큰글씨 책으로 나와 있다.

 

 

 

 

검색해보니, 예전에 뮤지엄 산에서 찍었던 요것이 '제라드 맨리 홉킨스를 위하여'라고 한다. 이 시인의 '황조롱이 새'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나. 하여튼 퍼즐 맞추는 기분.

 

 

-------------------

 

p.110  "그래! 그리고 주세페 자네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면 레오폴도 루고네스도 추천하겠네. 예수회의 역사에 대한 그의 책을 먼저 읽게. 얼마나 걸작인지! 하지만 요즘 누가 루고네스를 읽나? 그는 내 젊은 시절의 영웅이었지. 시인 겸 번역가, 신학자, 역사학자, 에세이스트, 극작가, 소설가였지. 요즘 그렇게 많은 장르를 다 쓸 줄 아는 작가가 누가 있겠나?"

 

그래서 찾아 본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책

 

 

 

 

 

 

 

 

 

 

 

 

 

 

 

 

----------------

 

p.109  "미국에서는 아예 읽히는 게 거의 없지." 보르헤스가 말했다. "나는 자네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지. 강연하려고. 예를 들면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있는 하버드 대학에 말이야.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라고 말하지. 스티븐슨, 체스터턴, 웰스, 그리고 치디옥 티지본. 이제 시인이 나왔구먼."

  알래스테어가 눈썹을 치켜떴다. "티치본을요?"

  보르헤스는 우리의 관심에 표정이 밝아졌다. " 그 시인은 사실 단 한 편의 시만 썼네. '애가'라는 시지. 자기 자신을 위한 애가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시해할지도 모른다는 혐의로 런던의 탑에 갇혔어.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나. 그가 갇힌 건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 여왕을 왕좌에 앉히려는 배빙턴 음모사건의 일부였어. 그 시는 가장 완벽한 시야.

 

내 청춘의 전성기는 근심거리로 뒤덮여 있을 뿐,

내 기쁨의 연회에는 그저 고통 한 접시밖에,

내 작물의 수확은 가라지밭에서일 뿐,

내 모든 선(善)은 수확의 헛된 희망일 뿐,

대낮이 지나가지만 나는 태양을 볼 수 없고,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그래서 찾아 본 원문.

 

Elegy

 

My prime of youth is but a frost of cares,

My feast of joy is but a dish of pain,

My crop of corn is but a field of tares,

And all my good is but vain hope of gain:

The day is past, and yet I saw no s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My tale was heard and yet it was not told,

My fruit is fallen, and yet my leaves are green,

My youth is spent and yet I am not old,

I saw the world and yet I was not seen:

My thread is cut and yet it is not sp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I sought my death and found it in my womb,

I looked for life and saw it was a shade,

I trod the earth and knew it was my tomb,

And now I die, and now I was but made:

My glass is full, and now my glass is run,

And now I live, and now my life is done.

 

 

각운이 a,b,a,b,c,c 로 입에 척척 달라붙는 맛이 있다. '내 젊음은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늙지 않았고'.......

 

 

 

 

 

 

 

 

 

 

 

 

 

 

 

 

 

왼쪽은 구매하고, 오른쪽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도서관에서 구매하게 한 책. 담배보다는 커피 마시는 게 내 취향인 듯....

 

 

 

 

 

 

 

 

 

 

 

 

 

 

 

 

 

책 먼저 읽다가 넷플릭스로 영화 보고 다시 책 마저 읽었다. 책에 비해 영화는 생략이 많아서 좀 무뚝뚝하게 여겨졌다. 필히 책을 보시기를.

 

p.68

"....피터, 남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남들은 너의 깊은 속을 절대로 모르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게요."

"하지만 피터,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단다. 남의 말을 아예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그런 사람은, 보통 모질게 자라서 모진 사람이 되게 마련이거든. 넌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해, 상냥한 사람이 넌 어쩌면 남들한테 큰 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왜냐면 넌 강하니까. 너 상냥함이 뭔지 아니, 피터?"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래, 그럼 가르쳐주마. 상냥함이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앞길에 놓인 걸림돌을 치우려고 애쓰는 거란다."

"그런 뭔지 알겠어요."

조니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피너, 난 이때껏 걸림돌 같은 거였단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하구나.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다. 자,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p.341

"음, 네 손으로 편하게 해줘라." 필이 명령했다. "제일 빠른 방법은 모가지를 비트는 거야. 우습지, 안 그래? 그렇게 배짱이 두둑하지만 않았어도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세상의 이치를 보여 주는 것 같네요." 피터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꼬맹이는 철학자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필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내 생각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은데."

 

 

이런 대화를 나누는 부분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피터의 아버지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만 보면, "자,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이 대사가 얼마나 섬뜩한 말인지를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은데."라는 대사가 자기의 운명을 암시한다는 것도 알 수 없다. 독자에게 힌트를 주는 이런 말들을 읽는 맛이란....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2-03-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마 님 은퇴라시니 그동안 열심히 일한 만큼 이제 많이 쉬면서 또 좋은 시간 엮으시길 바랍니다. 잠깐인 거 맞는 것 같아요 ^^
페이퍼 보다 몇몇 겹치는 것들이 있어 반갑습니다. 특히 원주 뮤지엄산의. 저 붉은 조형물이 그런 것이었군요. 몰랐어요. 홉킨스 시집 찜해 갑니다.

2022-03-16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6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je 2022-03-1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ma님 덕분에 저는 퍼즐을 찾았습니다. 뮤지엄산의 저 작품에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저도 오랜만에 사진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퍼즐을 맞추는 일이 남았습니다 ㅎㅎ

nama 2022-03-16 17:55   좋아요 1 | URL
겨우 퍼즐을 맞추었더니 홉킨스의 <황조롱이>라는 시가 숙제로 남았습니다.ㅎ

라로 2022-03-16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너무 좋아요!! ˝삶은 생각이 지속하는 동안만 지속한다.˝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저도 요즘 환자들을 보며 생각해요. 제가 간호사이면서도 너무 매정한 것 같지만, 기구에 의존해 생명을 부지하는 환자들을 보면 이렇게까지 하고서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너무 자주 해서 요즘 괴로워요. 하지만, 그들 덕분에 저는 제 삶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인생은 참 오묘합니다.

nama 2022-03-17 08:27   좋아요 0 | URL
참 어려운 문제예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
라로님 글에서 늘 에너지를 얻고 있어요. 잘 이겨내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