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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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겉만 훑는 여행을 해온지라 늘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중 몇 가지를 해소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

 

2007년에 적었던 글을 소환해본다. 마카오 여행기의 일부이다.

 

https://blog.aladin.co.kr/nama/1113975

 

<<<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2012년에 썼던 글도 불러본다. 말레이시아 여행기의 일부이다.

 

https://blog.aladin.co.kr/nama/5455153

 

<<<말라카의 유명한 유적지 중에 역시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이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곳은 동방의 사도 자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1849년에 지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라고. 경내에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자비에르 동상이 서있고 그 옆에는 일본에서 그를 모셨던 일본 신부의 동상이 나란히 있었다. 마카오의 자비에르 성당에는 일본 순례자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곳도 아마 그럴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2005년 인도 고아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시신 관람후, 마카오의 유적지를 거쳐 말라카의 유적지까지, 나는 뜻하지 않게 프란시스 자비에르 순례를 하게된 셈이다. 마카오기행문에서 '엽기적'이라고 썼던 표현을 수정해야겠다. 나의 순례행위를 엽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정리하면, 나와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인연(?)은 2005년 남인도 고아 → 2007년 마카오 → 2012년 말레이시아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 궁금했으나 더 이상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걸 몰라도 사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었으므로.

 

 

그런데 가이드북 저자인 전명윤의 이 책에서 드디어 사비에르를 만났다. 그 반가움이라니. 이 양반도 분명 가는 곳마다 사비에르를 만났을 테고 적잖이 탐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왜 일본에서는 카톨릭이 영향력을 잃고 마카오나 말라카, 인도에서는 받아들여졌을까...하는 의문이 풀렸다. 아울러 사비에르 소속의 예수회가 중국 포교에도 나섰으나 일본에서처럼 경쟁 단체인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가 '중국에서도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제사를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으로 인정해주는 카톨릭을 개신교보다 훨씬 너그럽다고 여겼는데 여기에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 종교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것. 제사 허용 문제를 놓고 식구들끼리 골 깊은 갈등을 일으켰던 과거의 어느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 편의 코미디와 다름 없었다.

 

 

▶일본 음식은 왜 달까?

 

오키나와 사탕수수에서 뽑아낸 흑당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됐다. 조선 후기까지도 신하가 아프면 왕이 특별히 설탕을 하사했을 정도니 당시 설탕의 가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오늘날 일본 요리는 짜고 단 게 특징인데, 오키나와에서 흑당을 대량 생산하기 전까지는 그저 짜기만 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수탈의 결과가 바로 단맛이고, 그로 인해 일본 요리도 달콤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탕수수의 대규모 재배가 물가능했다. 설탕의 가격도 훨씬 비쌌기에 한식은 20세기가 넘어서야 단맛을 내기 시작했다.   -268쪽

 

 

일본 음식의 단맛이 오키나와 수탈의 결과라니... 난 도대체 오키나와까지 가서 뭘 보고 온거야?

 

 

 

▶그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하라.

 

나는 한국에서는 꽤 까칠한 편이지만 여행을 할 때는 눈치껏 행동한다. 외국인 여행객은 낯선 여행지에서 자칫하면 사면초가 신세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행지의 주민에게 친근히 다가가는 일이 중요하다. 나는 가끔 외국 공항에서 북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북한'이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예상 밖의 호의를 돌려받기도 했다. 외국의 북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종업원이 쓱 하고 다가와 대동강 맥주 한 병을 주고 간 적도 있다.     -218

 

 

반공 → 승공 → 멸공으로 이어지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나로서는 순간 '그래도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부지불식간에 새마을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다가 마치 뭐라도 밟은 것처럼 깜짝 놀라곤 하는데, 한번 철저하게 세뇌당한 것은 몸 속 깊숙히 박히기 마련인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공화국' 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으려면 나의 뇌가 얼마나 부드러워져야 할까?

 

 

여행 고수는 다르구나 싶다. 인도 관련 이야기는, 나도 내 딴에는 인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새롭고 흥미로웠다. 역시 인도는 스토리가 강해.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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