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 오후 11시 20분. 잠드는 시간이 늦어도 오후10시를 넘기지 않는 나로서는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게 몹시 낯설다. 이때쯤이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도 침침해야 하는데, 정신도 또렷하고 눈도 잘 보인다.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온다. 물론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언제부턴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늙은 어린이.
우리나라보다 8시간 느린 런던에 도착한 날 저녁은 다음 날을 위해 수면제를 먹고 잤다. 수면제 덕분에 잘 자고 일어나 오전에 ★코번트 가든부터 시작해서 ★영국박물관, ★리버티 백화점, ★뮤지컬 관람까지 꽉 찬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날밤을 보냈다. 하룻밤 숙박에 13만 원 하는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쪽방에 가까워 화장실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밤에 잠을 설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잠을 안 자면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잖은가.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날락하는 덕에 좁은 복도와 ㄷ자로 꺾인 묘한 구조의 호텔 분위기에 뭐 금방 적응이 되긴 했다.
머리에 기운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발에 피를 모으는 동작을 열심히 해보았으나 그도 소용 없었다. 낯선 곳에서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다보니 사람이 좀 겸손해진다고 할까, 그간 나의 어리석음과 미련함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사람들이 하나씩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 미사 중에 자기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진심으로 읊조렸다. 내 가족들의 아픔이 모두 내 탓인양 가슴이 저려왔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꾸중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조용히 엎드리기만 해도 잠이 스르르 왔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혼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차례 나를 혼낸 후 이번엔 진심과 기원이 담긴 기도를 올렸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염원했다. " 우리 00에게 축복을 기원합니다." 이 문장을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한사람당 삼십 번씩 읊조렸다. 처음엔 가족과 일가친척, 나중엔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을 생각나는대로 한 사람씩 떠올리며 축복을 기원했다. 축복을 기원했다기 보다는 나중엔 내가 축복을 내리는 기분이 절로 들어 그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배어나왔다.
그래서 잠이 들었는가. 한순간도 잠이 들지 않은 맑디 맑은 밤을 보냈다는 얘기. 다행히 그 다음 날 밤은 죽은 듯 잠에 빠져서 시차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건 지난 일요일인데 벌써 며칠 째 이렇게 날밤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남들이 일어나 출근할 시간이 되면 그때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벌써부터 흐트러지면 안되는데.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멀쩡한 대낮에 일을 하고 싶다고.
코번트 가든: 상설 시장과 풍물 시장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너무 일찍 간 탓에 아직 장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꽃집은 일찍 문을 열었다. 요즘 런던에서는 이 장미꽃이 유행인 듯 다른 곳에서도 이 꽃을 손에 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 색깔은 뭐라고 부르는지....
무료로 입장하는 영국박물관.
박물관내에 있는 서점.
150여 년 된 리버티 백화점. 간판부터 영국스럽다.
나무로 된 엘리베이터
가구 매장?
리버티 백화점은 그 자체가 문화유산이다.
뮤지컬 맘마미아. 미리 영화를 보고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용파악도 못할 뻔 했다. 야한 장면이 나오면 껄껄껄 큰 소리로 웃으며 흥겨워하던, 앞좌석에 있는 저 하얀민소매의 영국 아줌마,
제지를 당하며 찍은 사진. 본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을 저렇게 놀아주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연이나 기타 등장인물도 완벽한 연기와 춤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다.
* 사진은 카메라와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스마트폰이 손에 익지 않아서 어색한 사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