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마 이야기
나카무라 후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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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모두가 아픔으로 점령된다

정신을 잃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고통에 엎어지고 쓰러지면서

이것이 인간의 길에서 벗어난 자에 대한 벌이라고 절절이 깨닫는 것이다. p.535

 

 

 

 나카무라 후미, 일본인 작가 이름만 봐도 안타까움에 자연스레 긴 숨이 흘러나왔다 . 나카무라 후미의 첫 작품을  손에 쥐었을때는 질서정연했던 일본은 그야말로 처참히 부서진 후였고 현재까지도 최악의 상태는 나아지지않고 생지옥의 현장으로 끝없이 치닫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원수라해도, 속절없이 눈물이 찬다. 아는 이가 일본에 거주하거나 유학생활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얼마나 유약한 생명체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만개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시기일텐데, 절망뿐이다. 할 수 있는 건 손 끝을 모으는 것 뿐 달리 방법이 없다. 다만, 모두가 무사하길 이제 그만 멈춰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나카무라 후미의 「염마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 제 1회 대상 수상 작품으로서 불로불사의 문신을 손바닥에 새긴 채 살아가는 한 염마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무사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막부시대부터 일본이 지나 온 역사를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본의 문신 역사를 살펴보면 그 최초기록이 17세기 말에 발행된 한 소설 작품이라고 한다. 주로 하급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인것으로 되었다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문신은 연인들의 이름을 일본 발음대로 새기는 문신이나 종교적인 맹세를 새기는 것이였다. 소설 속 염마의 문신은 일종의 주술이 걸린 마물과도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자신의 강한 의지와 함께 신귀를 불어넣어 새기는 것으로 염마는 불로불사의 문신을 새기면서 죽을수도 그렇다고 순리에 따라 늙을 수도 없는 생을 살아가게 된다. 칼에 맞아 헐떡거리면서도 살고싶다, 라는 의지 하나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에 강한 타격을 입지 않은 이상 그리고 몸에 든 신귀가 수명을 다하거나 신귀가 숙주의 몸을 싫증내지않는 한, 염마의 목숨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타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문신으로 인해 치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 할 만큼의 즉사가 아닌 이상은 멈춰버린 시간속에 외로이 살아야하는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사무라이가 활발했던 시절, 그러니까 염마가 아직 신귀 문신을 새기기 전,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들어갔던 염마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적의 부대로 부터 도망을 치면서 시작된다. 손바닥에 신귀의 문신을 새겨준 스승 바이코부터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있을 때 염마를 챙겨주었던 오카자키 그리고 바이코의 마지막 후계자라 믿었던 불로불사의 살인마 야차. 처음, 사무라이 이야기가 불거져나왔을때는 무협인가, 싶을 정도로 뜨근미지근할 뿐 도통 소설의 장르를 정의 할 수 없었다. 무사를 다룬 무협지나 문신으로 주술을 거는 판타지체계의 소설이라면 오랜만에 접하는 장르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즐거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카자키의 죽음으로 염마에게 남겨진 나쓰라는 소녀의 출현으로 소설은, 진정한 삶과 죽음을 다룬다. 염마의 멈춰버린 시간으로 딸이자 여동생, 누이,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 되기도하는 나쓰는 불로불사의 능력을 지녔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행복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사랑마저도 한량없음을, 주어진 생의 감사함을, 세상에 영원함을 부여할 수 있는것이 있다 해도 그만큼의 고통이 동반함을 이야기한다. 몇 백년을 홀로 살아가야 할 염마의 곁을 함께 지켜 줄 수 있는 건 염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뿐일지도 모른다. 문신으로 인한 연으로 염마를 비호해주던 무타 노부마사나 자신과 같은 신귀의 능력을 가졌지만 그 수명이 다해 염마를 떠난 고양이가 그러하듯 생명이 다 하는 것에는 각자의 때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손바닥에 불사의 신귀 문신을 새겨 살인을 저지르고 죽은 자의 심장을 태워 먹던 바이코의 후계자 야차, 그와 동행을 해야할지도 모를일이다.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닌적이 있었다. 대일밴드로는 상처가 가려지지않아 어쩔 수 없이 뜨꺼운 물에 손목에 화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둘러댔다. 죽자고 벌인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자고 대충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욕조에 몸만 담그면 끝나는 일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가까스로 지혈하며 터져나오던 피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모르겠다. '살고'싶어서 그런건지, '살아야'해서 그런건지는. 다만, 죽음이라는 문턱이 그리 쉽지만은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나 온 시간이 많을수록,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을수록 생에 집착은 더욱 더 강해질뿐이다. 누군가 내게 불로불사의 생을 견디겠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 다. 생각컨데, 이 질문의 답은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두고 보면 분명 대답은 달라질것이다. 아니오, 란 대답이 현재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서른해는 더 어쩌면 당장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 할지언정 구태여 운명을 거스리고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염마의 마지막 말 처럼, 나 역시 오직 내일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각자의 생이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면 그 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존재여부를 따질 수 없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얇은 습자지 한 장, 그 차이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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