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 시장 상인들의 처절한 시위와 굳건한 반대를 무릎쓰고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내에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내가 거주하는 ㅎ시에서의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건물을 지을 당시부터 '부자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그도 그럴것이 높은 분양가로 인해 입주시기가 몇 차례씩 밀려나며 분양가가 급격히 하락했고 가까스로 아파트 전 세대에 불이 켜진것이 불과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부자 아파트에 지하 5층짜리 대형마트의 입점은 당연한 결과로 납득할 수 있겠지만 300미터 반경에 있는 전통시장은 그야말로 폭격탄을 맞은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따른 시장 상인들과 대형마트는 극단적인 갈등에 부딪히며 불철주야 시위로 번져가려는 찰나 겨우내 대형마트의 오픈은 시장 상인회와의 상생안 타결이라는 명목하에 수차례 진행되어 온 양측의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 상생안 타결이라는 것이- 점포자체의 과도한 행사 자제를 비롯 가두판매, 무료 배달 서비스, 지역방송 홍보 금지등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 그 종이 한 장 달랑이었다. 오픈 이틀 째, 구경도 할 겸 장을 보고 나오는데 세상에나, 수십 년 동안 교통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지하도가 그냥 묻힌게 아니구나 싶었다.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 것이었다. 아파트 앞으로는 시청을 비롯한 높은 아파트들을 바로보고 뒤로는 아파트 하나 없이 울퉁불퉁 낡고 스러질듯한 시멘트집이 전부였다. 전통 시장으로 향하는 골목 지름길이 단번에 모습을 감추고, 출구 조차도 그쪽으로는 통하지 못하게 오로지 지하철 개통 확정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몇 년째 펄럭이는 시청을 향해 있었다. 불현듯, 버려진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쓸쓸히 가슴께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흔히들 떠드는 강남과 강북의 경계 편차는 결단코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이 작은 시 마저도 몸살을 앓게 만들었다.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여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첫 번째, 자본주의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우습지도 몰상식하지도 않은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갓 중학교를 졸업했 때, 궁핍하고 어려웠던 생활고가 못 견뎌워 생각의 끝에 걸린 것은 단연 몸을 파는 것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갖는 마음가짐의 문제였고 직업의 좋은 예든 나쁜 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때의 나에겐 오로지 돈, 목적은 그뿐이었다. 소설 속 여자의 삶 또한 그랬다.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할 기반은 뭉개져 주저 앉아버린지 오래였다. 뒷걸음질 쳐 끌어앉힐 수 있다면야 좋을 대파, 쪽파하며 서로 사랑해를 부르던 시절의 남편은 메마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의 삶을 견디고 있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더미로 전락해가던 여자가 사는 구시가지에서 적어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매춘을 하는 여자 자신과 무능력한 남편의 삶처럼 무력하게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꿈, 그것, 바로 마지막으로 품을 수 있는 여자의 희망이자 세상 모든 부모의 간절함일 것이다. 여자에게, 걸어서도 뛰어서도 향할 수 없는 신시가지는 네 발로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현 주소였다. 여자에게 물어야 할 것은 매춘을 왜 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시대가 여자, 어머니가 매춘을 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시대가 행하는 폭력, 그것은 비단 얼굴에 멍이 들고 팔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아닌 가슴에 포도알 같은 피멍을 방울방울 안고 사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초로한 횟집에서 자폐아 아들과 사는 남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두 번째,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다. 유독성 폐기물을 싫고 달리는 차들의 악취로 인해 아내를 잃은 남자는 결국 자신의 아들을 공해로 인한 자폐아로 품에 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인 구시가지의 버려진 횟집, 그 횟집을 찾기 위해 남자는 부유한 이들의 재산을 훔치는 도둑질을 감행한다. 밀림에서나 나올 법한 '타잔', 남자의 삶. 한 때, 그런 자가 있었다. 부유한 이들의 재산만을 훔치는 현실 세계의 '타잔'말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청춘의 길목에 발을 들인 시기였고 소설 속 주민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타잔'을 마냥 나쁜 놈이라 치부하지는 않았다. 더 말할 것 없이, 도덕성을 따지기 전 통쾌하게 쓸려내려가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본능적으로 끓었기 때문이다. 매춘을 통해 만난 여자와의 만남과 피어나던 동질성 사랑은 그야말로 자본주의를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와도 같다. 무더기무더기 피던 이팝나무 한 그루가, 현재를 견디게 하는 과거이 듯 무더기무더기 불어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견딜 수 있게 하는건 마음을 나누는 이의 작은 어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마지막 세 번째는, 자본주의의 퇴폐와 파멸이다. 남자의 아들이 유독성 폐기물로 인한 자폐증상이 퇴폐요, 스스로 비즈니스 맨을 자처했던 시장은 파멸이라 할 수 있다. 매춘을 하는 여자가 입은 자본주의 폭력의 결과는 퇴폐를 불러오기 마련이고 남자가 행하던 자본주의 정당성은 비즈니스만이 자본주의에서 우선시되던 것에 대한 파멸을 불러온다. 신시가지를 위해 존재했던 구시가지의 모습은 낯설지않다. 현재 사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면이 겨우내 소설에서 부각이 된 것이다. 시인인 황지우 선생님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지않고 혁명의 조짐에 관여한다고' 했다. 소설은, 그저 허구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 마련이고, 언론이 말하지 않고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한 소수자들의 진실 된 언어의 소통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라면 알면서도 등 떠밀려 휘말려가는 현대인들은 피해자다. 남자의 '타잔'을 모방하는 열망의 범죄가 결코 도덕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확신 할 수 없 듯, 자본주의는 몰락 직전까지 이율배반의 성격을 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서러운 하층민들의 딜레마적인 삶이다.

 

 올해, 스물 여덟이 된 나이가 우스워질때가 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급을 받아 쥐던 봉투의 감촉은 그야말로 짜릿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나 일한 만큼의 댓가였고 더 열심히, 더 많이 하고 받고 싶은 욕심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졌다. 적어도, 그 때에는 백 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도 훗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갈망하는 이른 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지리멸렬한 이 사회의 자본주의를 모르고 살아야 했다. 돌고 도는 돈에 쩔쩔매는 삶은 살지 않아야 맞는 것이다. 스무 살이 그러했듯 스물 여덟의 지금 역시,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버티고 있다. 한 살 한 살, 내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 사회 역시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내 나이보다 열곱절은 더 많이 높아진다. 그것이 내가 하층민에서 위로 오를 수 없는 이유이다. 그저,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것. 그저, 그런 희망 하나 등불처럼 달고 이 사회를 걸어나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무언의 폭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