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그녀는 굳어버린 짐승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에게 남은 건 웅크린 동물의 모습뿐이었다. p.47

 

 

 

 

 소설은 1945년, 두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2008년 5월,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들이 다루었던 벽장 속에 숨어 산 여자의 이야기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짚어보자면 여자가 숨어 산 그 집 주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는 일에 일찍이 실망하고는 나가사키 변두리에 사는 오십대의 시무라 고보가 집 주인이다. 특별할 거 없는 날들에 시무라 고보의 일상이 뒤틀린 건 아주 미묘하고 아주 사소한 줄자의 눈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구르트 하나, 음료의 양이 줄어들거나 사라짐으로 인해 독거노인, 시무라 고보의 공간이 벌어진다. 귀신이 아니라면 도둑이다. 기상관측사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시무라 고보는 자신의 부엌에 웹캠을 설치한다. 사건의 진상은 시무라 고보의 세 번째 눈인 이 웹캠이 모든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햇살, 그리고 피사체, 그리고 어떤 여인의 움직임.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밥을 지어 먹고 차를 마시고 햇살을 만끽한다. 제 집인 양 익숙한 동선과 여유로움이 시무라 고보의 시선에 잡히는 순간 수화기를 들고 신고를 한다. 그리고 그 후, 시무라의 감정선에 이상 신호가 반응한다. 그 반응은 여자가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건다. 여자가 절대로 받지 않을 전화를.

 

 일 년동안 남의 집 벽장 속에 살던 여자는 시무라 고보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다. '살 곳이 아무곳도 없었어요.' 라고, 진술한 여자는 판결에서 다섯달의 징역을 받는다. 여자의 숨어 살던 삶은 대체로 벽장이 아닌 시무라 고보가 집을 비우는 사이,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이나 부엌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시무라 고보의 집에 들어섰을 때는 잠깐 노곤한 몸을 쉬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 벽장이 여자에게 좋은 은신처로 몸에 익숙해지면서 일년이라는 세월이 흐른것이다. 동안, 여자는 자신이 숨어 사는 곳의 주인의 흔적을 쫓기도 하고 주인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집에서의 동선을 파악한다. 적어도 그 주인의 여동생이 그에 대해 아는 만큼 알 수 있을 때가 되었을 즈음엔 이미 그녀의 식성이나 습성들이 시무라 고보를 닮아있었으며 조심스러웠던 집에서의 삶이 결국 여자를 위태롭게 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꼭, 주인인 시무라 고보가 자신이 여기 이 벽장에 숨어 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적어도 자물쇠를 뜯고 들이닥치던 경찰에게 연행되기 직전까지도. 

 

 그리고 시무라 고보에게 전하는 여자의 편지. 왜 그녀가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집에 관한 애착은 시무라 고보씨에게 뒤지지 않을거라는 고백 아닌 고백. 여자의 편지가 시무라 고보에게 잘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의 편지는 잘 봉해져 중개업자에게 전해졌을 뿐이고 그 후로 시무라 고보가 그 편지를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있지 않다. 납득할 수 없었던 감정선에서 헤메였던 시무라 고보가 법정에서,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했을 때의 최악의 악몽이라던가-벽장 속에 살던 노인은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는 식의-, 독거 노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망한 고독함들이 엉키면서 소설은 급작스레 끝이 난다. 여자의 편지는 그저, 애틋함 혹은 정당성 혹은 회의성에 국한되어있다. 이 소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야했던 소재가 단 몇 페이지로 허무맹랑하게 끝난다. 나의 안목을 탓하라면 그러하겠지만, 여자의 애틋함조차 지지부진한 탓에 편지를 두 차례나 읽었음이다. 그리고, 독자가 궁금해하고 읽고싶었던 것은 벽장 속에 살던 여자를 모른체 살던 시무라 고보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이 아닌, 벽장 속에 웅크려 살던 여자의 삶이다. 

 

 아쉽다. 이런 실화를 이렇게밖에 구현내지 못한 이 소설이말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한 들, 빈약한 구성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음이다. 저자가 그저 기사를 토대로만 해서 실화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면 기름기 젖은 허구성을 쫙 뺀 소설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화제가 된 기사 몇 줄만 가지고 억지스레 끼워맞추거나 스토리를 있는대로 늘어뜨린 소설일뿐이다. 어떠한 에피소드도, 소설을 한층 돋보이게 복선도, 반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옮긴이가 '시작부터 한눈팔 틈 없이 단숨에 읽힌다'는 말에는 신빙성이 없다. 단숨에 읽히기는 한다. 페이지도 적었을뿐더러 벽장 속에 살던 여자의 삶이 언제쯤 발각될지, 그것을 쫓으며 읽었을뿐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그 때 그 시절, 원폭 투하가 되었던 삭막했던 시절을 곱씹으며 나가사키를 떠올린다해도 소설은, 화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놀라움에 대한 기대치를 완벽하게 무너트린다. 몇 차례 2008년 5월의 신문기사를 찾았지만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여자가 왜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적으려다 만다.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 이유만이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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