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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평점 :
편견이 깨졌다. 정치인이 쓴 글은 고리타분하고 제 잘난 맛으로 도배되어있을 거라는, 만화가의 글에 정치나 사회가 연결되면 재미없어지거나 감동을 느끼기 어려울 거라는.
이 책을 통해서 두 사람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어서인지 예상하지 못한 보물을 발견한 듯 뿌듯하다. 두 작가의 팬이 되었다. 작가 이름으로 검색해서 그들의 작품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한 권의 책으로 마음이 확 당겨지는 작가 두 명을 알았으니, 전문 용어로 ‘일타쌍피’다.
글쓰기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생각해보게 해 주니, 고마운 책이다. 같은 주제로 표현된 두 작품. 큰 맥락은 이어져있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두 사람의 글은 각기 다른 색깔의 매력을 지닌다. 독후감도 그래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쓰고자 한다.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이란>
솔직함과 당당함이 인상적이다. 고정관념 없는 쿨함이 깔끔하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도 느껴진다. 간혹 TV 패널로 등장한 모습을 지나치듯 본 적은 있지만, 정치인이라는 거부감에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의 다른 글을 읽고 싶어진다.
1장 ‘왜 쓰는가’ 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조지 오웰이 나누었다는,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충동,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p18)’ 등 네 가지 목적 중 마지막에 언급된 ‘정치적인 목적’이다. 글쓰기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정치가 이런 의도로 이루어진다면 좀 더 밝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나를 돌아본다. 나는 왜 쓰는가. 딱히 돋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타인과 나누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역사적인 사명감도, 정치적인 의도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쓰는가. 고대인이 생각했다던 4원소설을 넘어 영화 《제5원소》가 나온 것처럼, 오웰이 제시한 목적과 미세한 차이가 있는 다섯 번째 이유로 내가 쓰는 목적을 결론짓고자 한다. 나는 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쓴다. 마음이 복잡할 때 글을 쓰면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다. 슬픔이나 외로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글로 꺼내 놓다보면, 1인칭의 글을 쓰는 나는 3인칭의 인물이 되어 글을 읽게 된다. 객관화된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침잠시키지 않는다. 욕심을 더 부리자면 나를 위한 글이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어 동병상련식의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유 작가처럼 뚜렷한 정치적 목적은 아니지만, 조금 쉬다 다시 나아갈 그루터기의 역할이라도 한다면 정치적인 목적의 변방에라도 서성이는 것이 될 지도.
틀린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의견이 있을 뿐. 2장에서는 야구에서 직구를 던지 듯 진보와 보수에 대한 편견을 정면으로 깨뜨린다.
‘진보’와 ‘보수’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본 적이 있다. 둘 다 나름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의미대로 실현만 된다면‘공산주의’역시 유토피아 급으로 이상적인 개념이다. 문제는 이권이 개입되어 변질 적으로 표현되는 과정이다. 한 쪽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적용되어야 할 방법이 다를 뿐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쪽 저 쪽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내 생각과 감정을 나다운 시각과 색깔로 써야 한다.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생각과 표현에서 멀어져야 한다.(p42)’
이 문장들을 보고 놀랐다. 오규원의『현대 시작법』에서 말하는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진보냐 보수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작가 의견에 동의한다.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는 의견에도.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p60)’
내가 쓰는 글에 부끄럼 없이 당당하려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시선을 가지고 가치 판단을 해 봐야 하리라.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이가 가져야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악플에 대해 말한 3장에서는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첫째, 화살로 비유한 내용이다.
‘악플 때문에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하거나 우울해 하는 것은 악플러가 쏜 화살을 주워서 자기 스스로 자기 심장에 꽂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p75)’
살아가면서 내가 악플러의 화살을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만천하에 글을 공개하는 유명 인사도 아니고, 기껏해야 온라인 블로그 서재에 쓰는 개인적인 독후감에 악플이 쏟아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살아가면서 받게 될 크고 작은 자극에 대한 반응에 응용해도 손색이 없겠다. 저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다른 이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이서 쏜 화살일지라도 깊숙하게 심장을 가격하는 일은 없다. 문제는 내 곁에 떨어진 화살의 처리 방법이다. 나의 행동에 따라 내게 미칠 영향력이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화살에 대한 비유는 적절하면서도 지혜로운 대처 방법이다.
둘째, 처세술에 대한 생각이다.
‘저는 타인에 대한 기대 수준을 바닥으로 내리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여깁니다.(p81)’
철학자 강신주와 법륜 스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해 그분들이 제시하는 대처 방법 때문이다. 인터넷 강연 동영상에 나오는 답변 내용이 위 문장과 연결된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이 없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선물을 주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주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대 수준을 최대한 낮춰야 한다. 주는 행동을 하면 은근히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의식적으로라도 기대 수준을 낮추면 의외로 큰 기쁨이 따라온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40대 중반을 넘어 경험으로 깨달은 사실이다.
그의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든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우기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의견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말한다.
‘말이나 글로 남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죠.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p95)’
4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사람이 가진 고정 관념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여러 사람들을 대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작가의 의견대로 스스로의 의지만이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데미안』에서 말하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기존의 세상을 깨뜨려야 달라진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계속 글을 쓸 것이라 말한다. 나 역시 생각이 바뀐다는 사실에는 희망을 갖는 쪽이다. 바뀌기 어렵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것이니.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은 없다. 굳이 자기소개서를 제출해야 했던 직업군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자기소개서를 볼 일은 간혹 있었다. 내용의 손상 없이 글자 수를 맞춰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문맥의 수정이었을 뿐, 직접 써본 것은 아니기에 내용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5장에서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방법이 나와 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과 사실을 쓰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이 자기한테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도록 써야 한다.(p112)’
‘자기소개서는 자기 자신보다는 그것을 읽을 사람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여길 만한 사실을 중심으로 정해진 분량만큼만 써야 합니다.(p119)’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둘째 아이가 2학기 때 써야 할 자기 소개서로 고민했을 때, 문장은 둘째 문제이고 일단은 써야 할 내용이 중요하니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5장에 진정한 ‘표현의 기술’에 대한 노하우가 적혀있다며 좋아라 웃었다.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는 방향을 잡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에게 5장을 보여줘야겠다.
내 알라딘 서재는 방문자 수가 적다. 하루 방문자 수가 내 서재의 몇 달치 방문자 수를 훌쩍 넘는 서재를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음, 부러우면 지는 건데, 꼿꼿하게 나의 길을 가겠다는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서재에 글을 쓰는 첫 번째 목적이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함이니 뭐 그리 개의치는 않지만, 사실 부러운 점은 방문자 수가 아니라 댓글이다. 독후감에 담은 생각이 옳은 지, 매번 허접하다는 생각을 이겨내고 올리는 시가 잘 써진 건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이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어야 하지만 너무 빠져있다 보면 스스로를 좁은 세상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6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라는 베스트셀러가 갖춰야 할 요소가 나와 있다. 문장을 쓰는 기술, 훌륭한 생각과 감정,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도록 공감을 일으키는 글 등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평소 싫어하는 유형의 글이 있다. 첫째, 지 잘난 맛에 온통 어려운 용어로 도배한 글이다. 읽는 이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어설피 알면 설명이 장황해진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조차 초등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긴 문장으로 된 글이다. 아나콘다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은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 난감하다. 매력이 없다.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도록 써야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이 책 역시 이해가 쉽고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368페이지의 책을 사흘도 안 되어 독파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책만 붙들고 있던 것도 아니고 독서 속도가 상당히 느린 내게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독서모임에 참여하다보면 잘못 탄 가리마처럼 나와는 맞지 않는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있다. 시험공부를 하듯 꾸역꾸역 읽어낸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감정이입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7장에서는 그런 책을 일단 덮어 두라고 조언한다.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덮어두는 건 아니고 내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나중에 다시 도전해보라고 한다. 읽어보려다 실패하고 잠시 덮어둔 몇 권의 책이 떠오른다. 억지로 읽을까 말까 엉거주춤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다. 좀 더 내공을 쌓은 후에 다시 도전해보아야겠다.
‘느끼는 책읽기’에 도전하려면 텍스트를 넘어 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뭐든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관심이 가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 세심하게 관찰을 해야 하듯이, 책이라고 다를 건 없다. 모르면 메모하고 찾아가며 파고들다보면 어느 순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깨달음이 온다.
고미숙의『나의 운명사용설명서』를 읽을 때 그랬다. 노트에 메모해가면서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사주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다. 어려웠다. 어렵게 기술되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생소한 분야여서였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마도 그 책은 나와는 맞는 책이었나 보다.
학창 시절을 지나온 지금, 뭔가를 공부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우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7장을 읽고 책장을 바라본다. 꽂혀있기는 하지만 절반 이상은 손길이 닿지 않은 책들이다. 깊이 있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앞으로 이 책들 중 얼마나 많은 책들과 공감할 수 있을까. 마음이 설렌다.
특허 검색을 하면 발명 분야 역시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발명품들이 기존의 것을 바탕에 두고 더하거나 빼기를 한다.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런 점진적인 시도들이 세상을 조금씩 편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8장은 표절에 대한 글이다. 홍세화는 『생각의 좌표』에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 질문을 던지며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함을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말이나 생각도 온전히 나의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음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절. 글 역시 표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글을 쓰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야 할 때가 있고,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 나 역시 다른 이의 저서와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표절은 인용과 다르다. 저자는 표절과 아닌 것의 차이를 의도의 문제라 해석한다. 표절로 허세를 부리려는 욕망이 없다면 표절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는 나는 그래서 표절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인터넷 알라딘 서재에서 ‘cyrus’님의 페이퍼 중 리뷰와 독후감의 차이에 대한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서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댓글을 남겼다. 알라딘 내 서재에 올리는 리뷰는 독후감에 가깝다. 독후감이든 뭐든 기록을 남겨야 책의 내용이 마음에 좀 더 깊숙이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읽은 책 모두를 쓰지는 못하지만 되도록 독후감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9장은 서평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서평의 조건은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 해석이다. 이 기준에 비추어 봐도 주관적 해석이 주를 이루는 내 감상문은 여전히 독후감이다.
서평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의 글을 평한다는 것이 내게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 것이지, 글 자체의 단점은 아니라는 생각에 섣불리 글로 드러내기 어렵다.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안 들거나 내게 미친 영향이 없다고 판단되는 책은 아예 독후감을 쓰지 않는다. 맘에 안 든다는 내용을 굳이 시간을 내서 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후감을 쓴 책에 대한 평점이 항상 높은 이유다. 5점 만점에 3점 정도라 생각되면 아예 글을 쓰지 않으니까. 5점을 매기는 경우는 내 취향일 때,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진 책이었을 때다. 4점을 매기는 경우는 대부분 내 취향과 썩 맞지는 않을 때, 취향과 맞지 않아도 저자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9장을 읽고 나니 감상이 주를 이루는 내 독후감에 책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 보니 이 지경으로 길어져서 누가 읽을까 싶지만. 그래도 책의 내용도 정리하고, 내 생각도 정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업무적으로 일을 요구하는 메신저를 보낼 때가 있다. 그럴 때 창작의 고통을 살짝 느낀다. 목적은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끔 하는 것. 이 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두 가지이다. 웃으면서 하게 만들 것, 무엇을 해야 하나 명확하게 알릴 것.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 다른 메시지가 오면 짜증부터 나지만, 내 메시지의 팬이 되었다는 분도 있으니.
10장에서는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과, 생활 글부터 보고서와 회의록에 이르기까지 글을 잘 쓰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소개한다.
‘일상적으로 쓰는 글은 무엇보다 유머코드를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자신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글로 사람을 웃게 만들고 싶으면 글 쓰는 사람 자신이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p232)’
번거로운 일을 부탁할 때 소개한 팁을 읽고 살짝 소름이 돋는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흡사하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되도록 짧고 명확하게 쓸 것, 읽는 사람이 웃을 수 있도록 쓸 것. 유명한 사람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나의 방식이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글이든 행동이든 관계든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진리인 것 같다.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어야 하고.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자기표현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표현하고 싶어야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p250)’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이란>
10대에 접했던 순정만화 속에는 상상하는 모든 로망이 담겨있었다. 만화 속 캐릭터들은 분위기 쩔게 폼 잡고 때로는 나쁜 남자 포스로 야성미 팍팍 풍기면서 소녀의 심장을 확 끌어당겼다. 내게 만화는 두 종류였다. 순정만화와 순정만화가 아닌 것.
명랑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꾼 건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 이었다. 찡한 감동을 준 최초의 명랑 만화였다. 글자 하나하나를 샅샅이 읽다보면 풋 웃음이 나왔다. 이로서 ‘순정만화가 아닌 것’의 지위는 대폭 상승한다.
만화로 감동받은 경험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그의 작품은 최 작가와는 다르다. 두 작가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겨우 한 작품씩만을 읽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시건방진 시도이기는 하지만, 순정 만화의 세계만을 헤엄치던 인간이 어느 날 명랑 만화 두 편에게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기록하고 싶어서라 해두자. 최 작가의 작품이 사회의 그늘에 서서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토닥토닥 보듬는 느낌을 준다면, 정 작가의 그것은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햇살 아래로 끌어와 장난을 걸며 위로하는 느낌을 준다.
차분하게 1장을 읽다가 p21의 ‘입새’에서 빵 터졌다. 쉬는 시간처럼 읽는 이들의 경계를 풀어 무장해제 시킨다. 동떨어져 보이는 정치와 사회를 친숙하게 끌어와 펼쳐놓는다. 이모티콘 하나(p69)로도 웃길 수 있는 사람, 단 몇 글자로 보는 사람의 심장에 임팩트를 주는 그는 진정 ‘촌철살인의 달인’이다. 어떻게 매 작품마다 웃음을 끌어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결정적인 한 방이 있는 정훈이식 유머는 그의 다른 작품까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기발한 유머 코드를 담고 있는 인간적인 시선이다. 그것이 웃음 속에서도 찡함을 이끌어낸다. 11장,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은 이 모든 매력을 다 담고 있다. 남의 얘기에 이렇게 몰입되는 것이 얼마만인지. 11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 중에 가장 좋았다. 10장까지 중간 중간에 등장했던 그의 만화가 큭큭 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면, 11장에 등장한 그의 자서전에는 뭉클하게 하는 감동이 있다. 전체적으로 담겨있는 담담함과 솔직함도, 가슴 찡하게 하다가도 웃음 포인트를 자극하는 점도,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의 구성도 좋다.
‘한 장의 그림으로 사람을 웃게 하든,
한 줄의 글로 사람을 울게 하든,
한마디 말로 감동을 주든,
그냥 무심코 한 행동이든 간에
가장 좋은
표현의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p360)’
한 편의 시 같은 그의 말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아서 행과 연을 모아서 쓸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훈이는 표현의 고수임에 틀림없다. 내 마음을 이리도 많이 움직여놓았으니. 명랑만화에 감동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 만화에 대한 독후감을 쓰게 될 줄이야. 여러 가지로 새로운 경험이다.
주인공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오버랩 되며 지나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p364) 컷도,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같은 (p366~367) 컷도 인상적이다. 깔끔한 마무리이다.
<그렇다면 나의 표현의 기술이란>
유시민의 글이 어떤 주제에 대한 정의와 해석을 내려준다면, 정훈이의 만화는 적절한 비유를 들어 요약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몇 층으로 쌓아놓은 샌드위치를 맛본 기분이다. 유 작가의 글이 담백한 식빵이라면, 글 사이사이에 끼워진 정 작가의 만화는 햄, 치즈, 계란, 양배추와 같다. 그 자체가 독립적이면서도 빵의 맛과 묘하게 어우러져 맛깔난 샌드위치를 만든다.
책이란 여러 가지를 보여주는 존재이다. 무생물이지만 생물인 듯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 책을 통해 나와 마음의 코드가 맞는 두 명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 작가가 보는 세상을 보았고,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보았다.
이 책은‘표현의 기술’에 대한 이론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두 작가의 표현의 기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표현의 기술이란? 릴레이를 하듯 바톤을 건네받은 기분이다. 나만의 표현을 위해 달려가는 일만 남은 듯이. 어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