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죽음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흰 색이 적절할까, 검은 색이 적절할까?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옷을 입은 직장 동료를 마주한다. 아버지를 잃은 눈이 슬픔을 넘어 처연하다. 젖어있는 흰 자위에 검은 눈동자가 탁한 듯 맑아 보인다. 오래 전 우리의 선조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흰 소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죽음은 흰 색과 가까울까, 검은 색과 가까울까?

 

한강의 소설 <>은 죽음을 흰 색으로 묘사한다. 제목만 보고 흰 색 표지만 보고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가, 먹먹한 마음을 안고 마지막 장을 덮게 되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주인공 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스물세 살의 엄마가 낳았다 두 시간 만에 죽어버린 언니의 죽음이다. 하얀 배내옷이 수의가 되어버린 아기의 죽음을 전해들은 는 배내옷과 수의 사이에 펼쳐질 수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펼친다.

1에서는 내 시각에서 바라보는 흰 것들에 대한 사유가, 2그녀에서는 그 때 태어났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언니의 시각을 상상하며 이끌어간 흰 것들이 있다. 3모든 흰에서는 그녀로 일컬어지던 주인공의 언니가 당신으로 지칭되며 그녀와 나의 이야기가 마무리하듯 서술된다. 소설인 듯 수필인 듯, 산문인 듯 시인 듯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서술 방식은 소설에 흐르고 있는 흰 것의 상징과 어쩐지 닮아있다.

글을 쓸 때에는 반복을 경계한다. 같은 의미라도 그것을 표현할 다른 낱말을 찾아 대체하려 한다. 어떤 단어나 문장을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죽지마라 제발’(p21 배내옷, p36 빛이 있는 쪽, p38 그녀, p128 작별)이다. 언니가 죽지 않았기를, 자신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탕화면처럼 주인공의 마음에 깔려있다.

찬란한 컬러 사진이 등장했을 때 한동안 흑백 사진이 볼품없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사진이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인다. 흑과 백을 사이에 두고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채도로도 무언가를 표현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흑백 사진에는 그 미묘한 색감의 차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있는 차미혜 미술가의 흑백 사진이 글과 잘 어우러진다. 눈인지 별인지 얼핏 보면 구별이 되지 않는(p102~103)사진이 가장 좋다. 한낮에 펑펑 내리는 눈도 벅차지만, 한밤중에 펑펑 내리는 눈은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더욱 포근하다. 별의 본질은 스스로 타는 천체이니 뜨거운 별이 쏟아지는 느낌이라서 일까.

 

한글 문서를 작성하며 글자색을 바꾸려 할 때 간혹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양을 클릭하면 ‘RGB 255, 255, 255’, 검정은 ‘RGB 0, 0, 0’으로 뜬다. 흔히 흰 색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데, RGB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숫자라니.

초등학교 때 물감을 사용하며 여러 색이 겹쳐질수록 어두워지는 장면만 보다가, 빛의 3원색을 배우고 나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겹쳐질수록 점점 환해지다 모든 빛이 합쳐지면 흰 빛이 된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지면서도 놀라웠다.

흰 색의 물체는 부딪히는 모든 종류의 빛을 반사한다. 그 빛들이 합쳐져서 우리 눈에는 흰 색으로 보인다. 어떤 종류의 빛도 허용하지 않으니 흰 색은 그런 면에서 차갑다. 반면, 검은 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여 우리 눈에 도달하는 빛이 없어 검게 보인다. 그런 면에서 검은 색은 따뜻하다. 그런데, 어쩐지 검은 색은 차갑게 느껴진다. ‘차가운 어둠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빛이 있는 낮이 따뜻해서 그런 걸까, 늘 빛과 공존하는 색이라서 일까. 흰 색은 차가우면서 따뜻하다고 표현하는 게 적당해 보인다.

 

작가의 말을 연상케 하는 서두에서 강보, 배내옷, 소금, , 얼음, , ,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p9~10)라는 단어들을 나열한 작가는 독백처럼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p10)이라 내뱉는다. 잠시 작가의 마음이 되어본다. 그녀는 흰 색 죽음을 통한 깊은 사유의 치열함 끝에 삶을 매달고 싶던 것은 아니었을까.

빛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된 후로 흰 종이에 검은 펜으로 글씨를 쓸 때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 펜으로 쓰는 글이 모든 것을 반사하는 흰 종이 위에 따뜻함을 꾹꾹 불어넣고 있는 장면을. 검은 펜으로 쓰는 글은 어쩐지 따뜻한 마음의 숨결을 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끄러미 표지를 바라본다. 헝겊처럼 보였던 표지의 배경이 배내옷이며 수의였음을 깨닫는다. 검은 글씨로 쓰인 이란 제목을 바라본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담긴 소설의 내용을 생각한다. 작가와 나 사이에 경계처럼 놓인 책을 바라본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찡함이 내게서 온 건지 책에서 온 건지. 모든 경계에는 찡함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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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나미 검정색 펜을 흰 종이에 쓰면 똥이 생겨서 오래전부터 잘 안 쓰게 됐어요. ^^;;

나비종 2016-11-13 21:01   좋아요 0 | URL
한동안 나의 친구(mon-ami)였는데 말이죠ㅎㅎ
필기감은 ㅈㅌㅅㅌㄹ이 정말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