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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책 읽기 - 여자들의 책 읽기 책 속의 여자 읽기
안미선 지음 / 이매진 / 2016년 9월
평점 :
“우와! 엄마, 모자 샀어? 이쁘다!”지난 토요일,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커플티를 사드리려고 부모님을 만났다. 멋진 자주색 모자를 조금은 어색한 듯 쓰고 나오신 어머니. “머리가 자꾸 빠져서 샀어. 괜찮니?”유방암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인가. “너무 멋져! 하나 더 사 줄까?”5만원도 넘는다고 비싸다며 손 사레를 치신다. 딸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신 지 배시시 웃음이 맑다.
<여자들의 책 읽기, 책 속의 여자 읽기>란 부제가 달린 『모퉁이 책읽기』에는 여자들의 삶이 등장한다. ‘모퉁이에게 날갯짓하다, 경계의 문턱 너머, 모퉁이 길을 품다, 모퉁이에서 만난 세상’등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공통적으로 여자가 있다.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리뷰이면서 저자 주변과 세상의 풍경을 묘사한 수필의 냄새가 강하다.
책을 읽으면서 답답했고, 화가 났고, 외로우면서도 따뜻했다. 모퉁이에 있는 책 속의 여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기 소리를 낼 수 없거나 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모르는 존재이다. 굳어져가는 어깨처럼 화석화된 구조 속에서는 가운데로 나아가 자신의 말을 외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퉁이를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담겨있다.
<엄마의 세월, 여성의 시간>은 제목만으로도 울컥하다. 기억 저편에 계신 젊은 시절의 어머니로부터 며칠 전에 뵈었던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지며 겹쳐진다. 더듬어보면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거나 어머니의 욕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늘 가족을 위하던 어머니의 삶 속에서 모퉁이로 내몰려졌을 여자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주변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주로 구석을 찾아다니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목소리가 없고 바보스럽기까지 했던 나는, 저자의 말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모퉁이의 함정은 고립이고, 모퉁이가 줄 수 있는 축복은 연결이다.’(p8)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고, 이런 글을 읽고 공감하는 여자들이 조금씩 자기 소리를 내다보면 또 다른 연결 고리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라고 느낄 때 내 앞에서 유일하게 마주보는 친구가 책이었다.’(p7) 마주보는 친구라니! 책이란 대상을 마주보는 친구라고 여겨본 적은 없었는데. 책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글을 읽어가는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볼 수 있으니 어쩌면 거울과도 같이 나를 비추고 위로를 주는 존재일 수 있겠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저자와 나 적어도 두 명은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니까.
힘들었고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싶은 생각이 온통 머릿속에 가득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넘어왔기에 내 몸에 켜켜이 쌓인 경험들이 굳은살이 되어 그만큼 나를 강하게 했으리라 믿는다. ‘결국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 우리의 책이 된다고 믿는다.’(p9) 이제 조금씩 나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가 다가오는가 보다. 이런 글을 읽고, 여러 문장에 공감하고,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다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혼자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이번 겨울에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려 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적고 하나하나 실천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다가온 느낌과 생각을 나의 목소리로 조금씩 말하고 싶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우리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p110)고 말한 저자처럼.
어머니는 식사하시는 내내, 옷을 입어보러 탈의실로 들어가시는 순간에도 모자를 벗지 않으셨다. “엄마! 다 갈아입었어?”얼핏 탈의실을 들여다본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윗머리가 생각보다 더 많이 훵하다. 마음이 짠하다.
매장에서 나오니 첫 눈이다.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는 어머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의 모자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이뻤는데, 너무 이뻤는데, 이뻤던 만큼 마음이 아팠다. 소녀처럼 예쁜 털모자를 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