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극성이 더 밝을까요, 태양이 더 밝을까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에이, ! 당연히 태양이 밝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나. “! 북극성이 더 밝습니다.” “? 왜요?” “단지 멀리 있기 때문에 어둡게 보일 뿐이죠. 태양은 지구로부터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 그닥 밝은 별은 아니에요. 북극성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하겠죠? 실제로는 찬란히 빛나는 별인데 지구인들은 알아주지도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별의 밝기는 두 가지로 말을 합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밝기인 겉보기 등급과 제각기 다른 거리에 있는 별들을 밀당해서 같은 거리에 놓았다고 가정해서 표현하는 절대 등급으로

과학적인 내용들을 가르칠 때마다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철학적인 사유와 접목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종종 감탄한다. 별과 우주에 대해 가르치는 시기에 빛의 과거를 읽어서일까. 소설의 내용을 음미하는데 뜬금없이 별의 밝기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보이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단어는 간극이었다.

 

한손에는 낮을, 다른 손에는 밤을 부여잡고 있는 대상. 노을이다. 노을을 의인화한다면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이랄까. 작가는 다름과 다름이 만나 섞이는 과정을 온도차로 느끼는 사람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인공은 여대 기숙사에 살게 된 20세의 나, 김유경과 또 다른 방에 사는 김희진이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성격, 외모, 생각, 출신지역 등이 제각기 다른 주변 인물들이 어우러진다. 20대였던 1977년과 60대가 된 2017년을 오가며 고립, 차별, 취향, 욕망, 정당화, 회피, 수긍, 방관, 적응, 왜곡, 부조리, 깨어있음, 행동, 비관, 기억, 망각, 진실이라는 단어에 담긴 인간의 본성이 날카롭게 펼쳐진다. 더불어 1970년대의 20대 청춘들이 피부로 느꼈을 캠퍼스의 풍경과 사회상이 세밀하게 덧대어진다.

작가의 나이로 추정해 보건데 상당부분 자전적 경험에서 소설의 소스를 얻었으리라. 은희경 작가는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p10)’이라며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논픽션과 픽션을 적절하게 버무리는 안전장치를 한다.

1977년의 이야기에는 3, 4월 등 구체적인 시기가 제목으로 등장하는데 8월의 한여름과 12, 1, 2월의 겨울은 빠져있다. 공간적 배경이 주로 기숙사 이다보니 방학과 맞물려 그 시기의 에피소드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미적지근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쩐지 시간적 배경과 닮아있다.

 

주인공 는 노을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선명함과 또 다른 선명함의 경계에 애매하게 서 있다. ‘나는 중간 지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간혹 무언가에 떠밀리게 되면 아무것도 결정 못 한 표정으로 거기 휩쓸리곤 했다.(p49)’, ‘나는 누군가 부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문을 잠가놓은 채 버림받고 잊힌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p178)’,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p245)’,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p281)’ 주인공의 담담한 독백을 좇다보면 심장의 민낯을 들킨 듯 얼굴이 화끈해진다.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며 과거 기숙사 친구들과의 시간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로 집필한 김희진. 그녀의 입장에서 우주의 중심은 자신이며 세상은 스스로 주인공이 된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밉상 서브 주인공으로 그려지지만 적나라하리만큼 떳떳한 그녀의 서사를 따라가면 나 역시 한 구석이나마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놓고 드러내느냐 공주인양 내밀하게 감추느냐 혹은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내내 동물원의 <혜화동>을 듣고 있다. 성시경 버전이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삽입된 박보람 버전도 좋지만, 이 소설에는 복고풍 냄새가 나는 동물원의 최초 버전이 어울려 보인다. 가사 두 군데가 고막의 과속방지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 덜컹거린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라는 문장이다. 소설 속 문장이 겹쳐진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랑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p277~278)’

두 사람에게 공유된 사건도 서술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한다. 주인공 4명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삶과 사랑을 이야기했던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p334)’빛의 과거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더라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제각기 비춰질 수 있다는 맥락의 개인 버전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러리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서브 남자 주인공과 나눴던 대화는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내가 동화 속의 유리성 같다고 하자 그는 쓰러져가는 낡은 서민아파트의 허름한 저녁 밥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뿐이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렸을 때 천변의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 개천 건너편에 밤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지는 환상적인 건물이 알고 보니 도살장이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p152)’ 학보사 기자로서 세상을 취재하면서 그녀가 느꼈던 감정도 비슷하다. 혼란스러운 현실과는 달리 학보 속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이쯤 되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이라 해야 할 지 경계가 애매해진다. 나름 서있는 위치에서는 진실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입장은 오현수라는 중립적인 캐릭터를 통해 또렷하게 제시된다.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p264)’ 모르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별을 볼 때마다 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금 내가 보는 별은 과거로부터 달려온 빛의 부스러기일터이다. 워낙 멀기 때문에 1초에 30km를 간다는 빛으로도 한참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존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를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아이러니라니. 200만 광년 떨어진 별이 빛을 내보낸 후 사라졌다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분명 눈앞에서 별이 반짝이는데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거다. 갑자기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실제로 밝은데 어둡게 보이는 별과 실제로 어두운데 단지 가까이 있어 밝게 보이는 별. 둘 중 어느 쪽을 밝다고 해야 하는가. 내 눈에는 어둡게만 보이는데 망설이지 않고 밝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코앞에 있는 촛불을 참으로 밝다며 감탄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둘 다 맞다 할 수도, 둘 다 틀리다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비단 별빛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에 이 글을 쓰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문장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은 과연 나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울까. 실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답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답은 없다. 나조차 나의 모습을 확실하게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별빛의 과거를 좇는 우리가 별빛의 현재를 결코 볼 수 없듯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하는 시간 -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김혜련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밥 대신 먹는 알약이 있었으면 좋겠어. 한 알만 먹으면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책속에 언급된 내용을 보며 웃었다. !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구나.

나만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지은 적이 있던가. ‘한 끼의 밥이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스스로를 위해 정성 들여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p9)’이란 문구를 보며 곰곰 생각한다. ‘오예~ 부양가족 없는 보기 드문 기회일세! 내일 아침밥은 안 해도 되겠군! 크크!’ 좋아라했는데 이 문장이 나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갑자기 혼자가 된 그날 밤, 다음 날 아침을 고민하게 되었다.

밥을 먹는 것은 과정이었다. 오롯이 밥이 목적이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 밥 먹기는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어쩔 수 없이 플러그를 꽂는 과정이었으니까. 책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밥 하는 시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서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한동안 내팽개치다 겨우 첫 장을 펼쳤다.

 

이 책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집과 몸과 밥에 대한 작가의 경험담이다. ‘평생 밥을 먹었지만 이 없었고, 평생 몸을 지니고 살았지만 이 없었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이 없었다.(p313)’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공감을 일으키며 영혼을 울린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그게 나의 이야기로 들어앉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처음에는 삐딱한 시선으로 출발한 책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에 관해 서술된 1장과 2장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는 문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가지가 많았다. 비유와 묘사로 둘러싸인 뛰어난 표현력은 인정할만했지만 내 취향은 역시 헤밍웨이였다.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이질감은 2장의 중반을 지나 3장에 들어서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몸을 돌보고 읽는 시간에 관한 3장의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술술 쏟아졌다. 실컷 운동하고 난 몸에서 땀과 더운 기운이 절로 훅훅 끼얹어지는 것처럼. 체험한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이후의 내용들은 <저자의 말>에 이르기까지 내내 좋았다. 참 괜찮은 책을 읽었다는 개운한 느낌으로 마무리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장과 2장을 읽어보았다. 전체적인 맥락을 알고 접하니 거부감이 사라졌다.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온통 헝클어지고 겹겹이 쌓여있는 물건들. 내내 우울해하던 친구의 마음속에 들어온 듯 씁쓸했다. 그녀를 담고 있는 공간은 그녀를 닮아있었다. ‘집을 청소하는 일이 나를 맑게 하는 일이고, 집의 고요가 나의 고요이며, 집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나를 아름답게 하는 일임을 경험으로 체득한다.(p19)’ 집을 정리하거나 청소를 하는 날이면 속이 후련해진다. 이 문장을 보니 그때의 공간이 떠오른다.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집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생각한다. ‘시간은 금이다.’ 란 말도 있지만, 집을 소유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생각한다면 공간은 돈이다.’ 란 말도 할 수 있겠다. 세상 속에서 한 두 겹씩 썼던 가면을 훌훌 벗고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집 같은 사람 한 명쯤 내 가까이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어도 존재 자체로 나를 따뜻하게 지켜볼 수 있는 존재. 상상만 해도 뭉클한 느낌이 스민다.

스스로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p72)’이라는 문장에 꽂힌다. 전후맥락 무시하고 자체의 의미로 다가오는 문장이다.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난다. 하루 가운데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나만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시간을 마련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함을 깨닫는다.

 

늘 특별한 순간을 꿈꾸어왔던 것 같다. 드라마틱한 사람과의 만남을 꿈꾸고 삶의 어느 순간에 굉장한 사건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십여 년을 돌아보면 그런 순간은 없었다. 간혹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대상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시작은 평범했다. 평범함이 점점 특별하게 변화하는 거지 처음부터 반짝이는 특별함은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평범한 나날들은 앞으로도 죽 이어지리라. ‘밋밋한 행위에서 빛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빛이 어렵다. 삶의 90퍼센트는 그런 밋밋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p118)’

악기는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음색을 지닌다. 악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점점 깊어지는 삶의 울림으로 살아가고 싶다. ‘스스로 깊어지는 악기 같은 몸이 되고 싶다.(p121)’는 작가처럼. ‘몸으로 살아낸 만큼 시간은 내 안에 쌓인다.(p267)’라는 문장을 보며 쌓이는 시간을 상상한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시간 말고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을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이란 빛나는 일상을 의미하겠지. 백년도 더 된 집을 가꾸어 정성껏 밥을 하며 살아가게 된 사람의 일상을 엿보다보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결국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잡곡밥을 해서 먹었다. 책을 읽고 나니 자꾸만 정성껏 밥을 하고 싶어졌다. 밥을 오래 씹고도 싶어졌다. 요즘은 밥과 반찬 하나하나를 정성껏 음미하며 먹는다. ‘쌀 알갱이가 톡 터지며 씹힐 때 입 안 가득 빛이 도는 듯 환한 느낌(p10)’을 느끼고 싶어서 정성껏 씹어 먹는다. 먹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소중해지는 듯 울컥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다음에 뭐를 할까 막연한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잦아졌다. 눈도 침침해지고 점점 기력이 쇠해질 텐데 언제까지 글을 쓰며 살 수 있을까 하고.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 ‘몸을 돌보는 과정 자체가 삶의 오롯한 의미가 될 때 삶은 깊은 차원에서 존재에 가까워지겠구나.(p113)’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 편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를 지닌다면 얼마나 든든하면서 따뜻한 삶이 될까.

밀가루 반죽이 된 마음을 끌어안은 기분이다. ‘나는 비로소 일상을 즐기고 일상을 통해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유쾌한 몸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내가 전환한 삶의 핵심에 이 있다.(p116)’ 푸석거리는 가루 같던 마음이 질척이며 겉도는 시간을 지나 몰랑한 느낌의 부드러운 반죽이 된 듯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익반죽의 덩어리처럼. 가벼워졌다, 그 반죽에서 만들어진 크루아상처럼. 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빵을 한 입 베어 문 듯 유쾌해졌다.

 

 

p226, 마지막 줄 : 마침표 없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느리게 밥을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밥알에서 달짝지근한 맛이 날 때까지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날,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 생각 역시 느리게 흐른다. <노인과 바다>는 이런 날 읽기에 적당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125쪽의 분량을 읽기에는 다소 긴 시간이다. 난해한 내용도 아닌데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묵직한 몰입감이 나의 손을 사로잡았다. 바닷물이 조금씩 내안에 스며들어 마음이 점점 확장되는 느낌이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 뒤표지에 실린 문구이다. 이보다 더 심플할 수 없는 내용이다. 화려한 표현도, 감탄할만한 은유도, 반할만한 캐릭터도, 역동적인 반전 드라마도 없건만. 무엇이 나를 매료시킨 걸까. 매력적으로 다가온 요소를 짚어보았다.

 

첫째, 주인공 설정이다. <소년와 바다>였다면 감동이 덜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p10)’있는 노인, 삶의 마침표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다가올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음에 대한 답이 책안에 있다. 바다로 나아가 거대한 청새치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마주하는 노인의 태도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음이 늙으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관점으로 판단하면 주인공 산티아고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내가 100세까지 살 것 같지는 않다. 아득하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도 간혹 고개를 든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걸어갈 날들을 상상해본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글을 쓰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눈도 침침해지고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 몸을 지니게 될 나는. 줄거리만 파악하며 읽었던 학창시절과는 느낌이 달랐다. 소설의 내용이 바짝 다가왔다. 도전하는 노인의 모습은 50대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복잡해진 나에게 계속 도전할 용기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위안을 안겨주었다.

 

둘째, 주 무대인 돛단배이다. 자그마한 배안에서 두 다리를 딛고 선 노인은 철저히 혼자이다. 말벗이라고는 그 자신뿐이다. 청새치와 싸우고 속속들이 다가오는 상어들과 싸우는 노인. 그의 모습과 어쩐지 닮아있는 단출한 배를 보며 저마다 홀로 끌고 가는 삶의 모습을 연상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차지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은 무엇인가. 몸뚱어리 하나 드러누울 수 있는 공간과 수의 한 벌. 소유한 돈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는 보이는 존재의 크기 만큼이며 입을 수 있는 옷은 단 한 벌 뿐인 거다.

노인이 탄 배가 화려한 유람선이나 우람한 해적선이었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에서 마주하는 날것 그대로의 대상과는 인공의 껍데기 다 훌훌 털어버리고 말간 모습으로 대면하는 것이 어울린다. 청새치나 상어와 싸우는 노인을 지켜보며 민낯으로 역경과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어떤 물건에도 기댈 수 없는 공간에서 오직 본성으로 마주하는.

 

셋째, 공간적 배경인 바다이다. 바다는 삶을 연상시킨다. ‘라 마르(la mar)’라 부를 정도로 다정한가하면 엘 마르(el mar)’라 부를 정도로 치열한 공간이다. 수많은 생명을 품은 채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야누스의 얼굴로 돌변하는 무대이다.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할 삶의 속성과 닮아있다.

흔히 육지보다 바다에 삶을 중첩시키는 이유는 공간감으로 입체적이어서 아닐까. 바다는 눈에 보이는 물로 채워져 현실감을 더욱 또렷이 전해주니.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는 경계에 발만 디딘 채 2차원에 존재한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바다는 이런 관점에서 3차원이다. 삶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바다가 삶의 무대를 비유하기에 적당해 보인다.

거리를 걷다 뺨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이 느껴질 때면 입체적인 육지를 상상한다. 하늘까지 뻗어있는 공간이 눈에 보이는 덩어리라면 어떨까. 가령 공기를 구성하는 기체에 색깔이 있다면? 산소는 파란색, 질소는 초록색, 이산화 탄소는 붉은색, 수증기는 하얀색, 방귀는 노란색,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기를 가르며 걸어가는 우리는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고, 길바닥에 소복한 은행잎은 노란 조개껍질처럼 구르는 풍경. 이런 식으로 가시적인 질감이 느껴진다면 삶을 헤쳐 나간다는 느낌이 실감나지 않을까.

 

넷째, 상어와 대결할 때 사용된 도구들과 이를 대하는 노인의 생각이다. 칼을 갈 숫돌을 가져왔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은 없는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걸로 뭘 할 수 있을지 그거나 생각하도록 해.(p115)’라며 독백을 한다. 마지막에 남게 된 노와 몽둥이와 키 손잡이로 어떻게 무시무시한 상어들과 대적할까 싶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도구가 하나 둘씩 떠나가는 장면들은 은근히 긴장감을 안겨준다. 암담한 상황이 올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이를 극복하는 장면은 인간 존재의 의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온다. 위기의 상황을 만났을 때 떠올릴만한 지혜로운 태도로 소중히 품어본다.

 

다섯째, 군데군데 경구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문장들이다. 좌절할만한 일이 닥쳤을 때 종종 떠오르는 질문은 이다. 왜 이런 일이? 왜 나에게만? 헤밍웨이는 를 던져버리고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소용없는 질문을 하지 말고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갈까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노인의 독백은 따로 놓고 음미해도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보물찾기의 쪽지라도 되는 양 비슷한 일상과 만나졌을 때 빛을 발한다. 이를 테면,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p33-34)’,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p57)’,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p64)’, ‘이대로 항해나 계속하게. 그러다 일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워.(p108)’라며 행동 지침으로 삼을 만한 문장을 건네어준다. 몇 번이나 곱씹다보면 마음속으로 힘이 고인다.

 

여섯째, 과장하거나 미화되지 않은 과정들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짜잔 당당하게 700킬로그램의 청새치를 득템하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평범했을까. 청새치를 잡는 게 끝이 아니었던 데서 매력이 확 다가온다. 고생하며 잡은 물고기를 상어에게 물어뜯기는 상황을 마주한 노인은 치열하게 대응을 한다. 작가가 이 부분에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만신창이가 되면서, 눈앞에서 상실을 마주하면서, 기도문을 언급하면서,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이나 아쉬워하면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노인의 모습에는 삶에서 만나게 되는 상황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들이 담겨있다. 나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노인을 따라가며 나만의 답을 찾아보았다. 나라는 인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일곱째, 승리와 패배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p108)’ 스스로 말했듯이 뼈다귀만 남은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 노인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청새치를 잡은 순간의 성취를 고스란히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는 바로 네가 패배했을 때 편하게 누울 수 있는 곳이지(p126)’ 편하고자 하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으면 될 터이다. 작가는 시도하지 않음을 패배라 말한다. ‘그런데 널 패배시킨 것은 누구지? (중략) 아무도 아냐. (중략)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p126)’ 침대에서 떠나 바다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 노인은 진정한 승리자로 우뚝 선다. 삶에서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돌아와서 사자 꿈을 꾸는 듯한 노인의 모습으로 작가는 삶의 진정한 성취를 매듭짓는다.

 

물고기의 아가미와 닮은 책이었다. 공간은 별로 차지하지 않아도 켜켜이 접힌 주름을 펼칠수록 삶의 즙이 배어나와 마음과 접촉하는 면이 넓어졌다. 주름 하나하나를 펼치며 읽을수록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책을 읽으며 삶과 도전과 의지와 패배와 역경과 상실과 존재와 공존과 꿈과 위안을 생각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를 극복해나가는 노인 앞에서 죽음이나 늙음이란 단어는 의미를 잃었다. 오롯이 날 것 그대로의 삶이 싱싱하게 펄떡이며 뜨거웠다. 노인의 삶에 나의 삶이 더해져서 두 권의 책을 읽은 듯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코끝이 찡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9-11-2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지내셨나요, 나비종님? 어쩌다가 벌써 11월도 다 갔네요ㅎㅎ
이번 책은 금방 읽었는데 리뷰를 완성하기까지 열흘은 더 걸린거 같네요. 분량이 많은 책들은 그만큼 할말도 많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너무 짧아서 쓸 내용을 엄청 쥐어짜야 했어요... 하하하.
이미 한참전에 올리신 리뷰를 살짝 눈팅했는데 진짜 자괴감이 들더군요. 그 짧은 내용으로 어떻게 이런 풍성한 글을 쓰시는지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전 사실 이번 작품은 내용보다는 작가의 글 스타일에 더 집중했던거 같아요. 워낙 간단 명료한 문체로 유명한 분이라서 오래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저또한 그쪽 방향의 글을 추구하기도 해서요. 근데 말년에 쓴 작품이라 그런지 느낌이 좀 다르더군요. 이건 아직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아 그리고 저는 작가의 연보를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말로가 영 좋지는 않았군요. 이건 좀 충격이네요, 우울증이라니... 어쩐지 책속의 노인도, 글의 분위기도 그것과 비슷했던게 이해가 되네요.

이번 리뷰는 유독 제가 캐치하지 못한 것들을 잘 집어주셨네요. 공수래공수거 인생에게 허락된 공간은 결국 땅 한평이 전부인 것도, 인생의 무대는 헤엄치지 않으면 빠져죽는 바다라는 것도 신선한 관점이었어요. 그중에 저는 다섯번째 요소가 가장 눈에 들어왔는데요. 왜?가 아닌 어떻게?를 생각하고 대처하는 노인의 모습이요. 저는 단순히 불평하지 않고 자족하며 묵묵히 견딘다는 것까지만 보였는데, 나비종님 눈에는 더 깊숙한 곳까지 보였었군요!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p33-34)’,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p57)’,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p64)’, ‘이대로 항해나 계속하게. 그러다 일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워.(p108)’> 이런 빛나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노인의 캐릭터도 작품의 메시지도 간파하지 못한 제가 한심하네요 ㅋㅋㅋㅋㅋ

연륜이 있는 사람이 쓴 글은 확실히 다르게 읽혀져요. 그것이 책이 되었든, 리뷰가 되었든 말이에요. 그래서 이 책은 젊었을 때 읽은 것과 나이들어서 읽는 것의 갭이 클 것 같아요. 작가가 이 책을 마지막으로 쓰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노인으로 정한건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죽음과 늙음은 의미를 잃어버린 작품이었습니다. 마음이 늙지 않은 청춘을 오래오래 유지하는 나물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이 모임도 6번이나 진행되었네요~~ 다음 한달은 쉬시면서 한해를 마무리하는걸로 해요 ㅎㅎ 익월중에 책선정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11월도 수고많으셨습니다^^

나비종 2019-11-26 23:2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다음 주면 12월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나의 독서 기록‘을 보았어요. 서양고전문학 글씨가 중앙에 떠억 하니 가장 크더군요.ㅎㅎ 물감님 생각이 났어요. 물감님 덕분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고전문학의 세계에 조금이나마 발가락이라도 담가본 한 해였습니다~^^

저는 문장을 메모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는 스타일인데 이번 책은 리뷰를 어떻게 쓸지 마지막 부분까지 감이 잘 오지 않더군요. 대개는 한 권의 책을 다 읽어갈 때쯤 되면 리뷰의 방향이 대략적으로 그려지거든요. 그래서 좀 난감한 책이었어요.
오히려 전 물감님의 문체를 매번 감탄하면서 읽거든요. 가독성과 스피드함, 유머러스한 편안함이 제가 꼽은 물감님 글의 장점이예요.^^ 간단명료한 글을 추구하신가는 점은 저와 공통적이구요.

우울증은 <노인과 바다>이후 두 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를 계기로 확산된 듯 보여서 작품에서 우울의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를 위하여~>이후 10년만에 발료한 작품이 혹평을 받고, 그후에 <노인~>이 발표되었으니 이미 조금씩 찾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물감님이 캐치하지 못하셨거나 깊숙한 곳을 보지못하셨다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저역시 물감님의 리뷰를 보면서 아, 이런 생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하며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독서모임의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는 바람직한 예인거죠.ㅋㅋ

요즘 도전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서 그런 문장들만 눈에 띄었나봐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귀걸이를 사면 길거리에 온통 귀걸이 인간들만 보이고, 신발 사면 온통 신발만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느낌, 아시죠?^^

마음이 늙지 않는 나물모임, 우리 오래오래 유지해봐요~^^
 
읽거나 말거나 - 쉼보르스카 서평집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금 세수를 하고 부드러운 수분 크림을 한 겹으로 바른 듯 깔끔한 글.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본 느낌이다. 전후맥락 하나 몰라도 그 자체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말끔하다. , 내가 이런 느낌과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구나! 새삼 나의 취향을 깨닫는다. 노벨문학상을 탔던 작가라고는 하지만 처음 접하는 폴란드 시인의 글에 이토록 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인터넷 알라딘 서점의 서재친구 syo님의 페이퍼를 통해서였다. 춘향전을 언급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을 읽고 어찌나 후련하던지! 먼 나라 시인의 정서와 유머 코드에 공감이 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나머지 서평들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책을 소개하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번역은 반역이다와 같은 맥락의 이유에서이다. 책을 읽은 사람의 관점을 통해 원저는 한 번의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읽은 책이거나 대략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다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생소한 책에 대한 서평을 먼저 접하면 편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책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서평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주었다. 서평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록된 책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은 문이랄까. “궁금해?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당신도 그럴까? 궁금하면 읽어보시던가.”라는 도발과 함께.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작가가 썼던 562편의 독서칼럼 중 137편을 추린 서평집이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두 번 놀랐다. 예상보다 두꺼워서. 두께가 주는 은근한 압박감에 살짝 주춤했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님은 결코 나를 절망하게 만들지는 않으실 거야. 춘향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호기롭게 책표지를 넘긴 나는 후루룩 차례를 훑어보며 다시 놀란다. 차례에는 서평의 대상이 된 책과 작가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이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몇 권 정도일라나? 이것도 읽은 거, 이것도 읽은 거하며 짚고 싶었지만. 쩜쩜쩜. 나의 검지는 네버 엔딩 질주였다. 하아~ 이 많은 책들 중에 어찌?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유일하게 찾은 책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한데 이마저도 까마득한 과거에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다 집어던진 것 같기도 한 거다. 읽어본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아무리 비필독도서 칼럼이기로서니 이토록 도화지 같은 배경지식이라니! 과연 저자의 서평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해져서 서둘러 첫 장을 펼쳤다.

 

내가 본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 줄 요약이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서평을 하는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포착한다.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읽어도 별반 소용없으리라는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점 별 다섯 개짜리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책은 저자가 찾은 매력을 덩달아 찾고 싶어지고, 별 한 개로 예상되는 책은 서평대로인가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어지니 이래저래 궁금증을 일깨워준다.

예전에는 긴 글쓰기가 어려운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짧은 글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는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 짧은 글에 담긴 메시지가 가벼운 것은 아니므로. 몇 줄의 문장 안에 핵심만을 담아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보면 글이 장황해진다. 시를 쓰면서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의 독후감은 길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매번 하는 고민이다. 좀 더 짧게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을 바꾸고 문단을 나누고 적당한 분량으로 토막을 내지만 맘에 차는 리뷰는 거의 없다. 작가의 서평을 보며 나의 글을 돌아본다. 너 댓개의 문단으로 끝나는 글들을 보며 부러웠다. 쌓는 것보다 잘라내기가 힘든 법인데. 그녀의 과감한 버리기에서 날카로운 결단력이 느껴졌다.

 

창작의 비밀이 실제로는 훨씬 단순하고 덜 감상적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노인과 바다>의 겉표지에서 본 문장들이 떠오른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헤밍웨이는 한 줄로 주 내용을 요약했다. 이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에 차곡차곡 작가의 인생관이 담기는 것이다.

시를 쓸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섬광처럼 스치는 단순한 문장 하나, 순간적으로 심장을 흔드는 느낌표 하나가 시로 이어질 때가 많다. 얄팍한 화장지로 시작한 발상이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여 흠뻑 묵직해질 때도 종종 있다. 엄청난 이야기로 화려한 변신을 할 때 최초의 소박한 모습을 아는 창작자만이 의미심장하고 멋쩍은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감정은 공식이나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것일까.

검은 눈물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소개된 일화가 마음에 남는다. “처음으로 아내를 배신한 건 어떤 상황에서였습니까?” 완벽한 아내를 두고 위태위태한 여인에게 끌리던 남편의 답변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완벽함과 불완전함에 대하여. 모든 이의 심장이 완벽을 향해 뛰지는 않음을. 결핍으로 향하는 시선에 대하여. 나와 내 주변의 심장에 대한 생각이 뒤엉킨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에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생각한다. 위대한 사랑이란 본래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쉼보르스카의 생각에 동의한다. 모든 관계는 각기 유일한 연결선으로 존재하는 걸까. 두 영혼과의 공식으로만 흘러가기에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감정의 울림은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 건가.

 

간혹 이름을 들어보았으나 잘 몰랐던 인물, 처음 들어보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정치가, 예술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평에 등장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파블로 카잘스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빛이 나는 사람에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당하다는 것. 그저 그 자신일 뿐이라는 노년의 음악가에 대한 글을 보며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지면서 간혹 위축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들에 기대어 위안을 받았다.

쇼팽에 대한 새로운 일화를 접하면서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네가 뭘 하든, 그건 전부 옳고 좋은 일일 거야.’ 쇼팽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편지로 했다는 말이다. 내게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이 참 따뜻할 텐데.

쉼보르스카가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라고 평한 찰스 디킨스는 또 어떤 인물이었을까. 서평에 등장한 예술가들의 새로운 면을 접하면서 궁금해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하나의 의미 있는 문장이나 내용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그 문장이 행동으로 이어져 읽는 이를 들썩이게 한다면 더욱 중요한 의미가 되리라. <쉼보르스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과 위트와 함께 하며 따뜻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456쪽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세 단어가 떠올랐다. 유쾌! 상쾌! 통쾌! 전체적인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 생각해보니 쾌변 CF로구나! 하지만 이보다 더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단어는 찾지 못하겠다. 심오한 내용의 끄트머리에 툭 내뱉는 문장에 유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상쾌했고, 이건 아니지 않냐 며 대놓고 까는 내용에 짜릿할 정도로 통쾌했으니. 자유로운 정서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용은 촌철살인의 문장 주변으로 날개를 펼쳤다. 이런 게 제대로 까는 거지. 오만함이나 무조건 깎아내리는 치졸함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감으로 근거를 대며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동시에 방대한 분야에 대한 깊은 사유가 풍겨 나와 참으로 묘한 스릴감을 주는 책이었다.

어찌나 애매모호한 언어를 구사하는지, 그 어떤 실수를 해도 대중들 앞에서 절대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꼬투리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그들의 평론은 빈틈없이 불분명하다.(p216)’ 이 통쾌한 문장은 작가의 팬을 추가하는 데 쐐기를 박았다.

 

 

p414, 밑에서 4째줄 : 자체가 당키나 → 자체가 가당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라 온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2
알베르토 푸겟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몽땅 수분을 빼앗겨버린 얼굴인양 심장이 푸석거렸다. ‘말라 온다를 읽으며 서서히 말라 가기라도 하듯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음습한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끈적임 속에서 뿌연 구름이 들쭉날쭉 하늘을 뒤덮은 날,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아득한 시야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간다면, 걷고 또 걸어도 비는 내리지 않고 꺼끌꺼끌 목구멍의 질감만 전해진다면, 지금의 이런 느낌이 들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문장에 속이 터졌다. 책을 읽는 나를 캐리커처 한다면 둥둥 떠다니는 고구마를 배경으로 ㅈㅈ’(자체 모자이크 처리) 두 글자가 담긴 말풍선이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렸을 거다.

제목을 보고 두 번 놀랐다. 띠지에 적힌 설명을 보니말라 온다가 스페인어(mala onda)라는 거다. ‘말라비틀어지다, 다이어트로 몸이 점점 마르다와 같은 의미로 번역된 우리말인 줄 알았건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작명센스에 감탄했다. ‘불만, 불쾌감, 답답하다, 마음에 안 든다, 기분 나쁘다, 시시하다라는 뜻의 구어체라니! 제목과 내용의 싱크로율이 놀라웠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촌철살인의 제목 아닌가!

 

198093일부터 10일까지 칠레 소년 마티아스가 겪은 일주일을 그려낸 성장 소설. 나름 기대를 안고 첫 장을 펼쳤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설정에서 추리소설의 서스펜스를 기대했나보다.

94. 하루가 지났는데 당최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루했다.

95. 분위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점점 창대해지면서 나아지겠지, 설마.

96. 설마가 아니었다. 일관적인 답답함이 적립금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일주일이 끝날 때까지. 상실감, 체념, 욕망이 마약, 섹스, 록 음악에 둘러싸여 기분 나쁘게 심장을 눌렀다. 작가의 문장들이 책속에서 튀어나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이토록 답답한 기분, 오랜만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틈만 나면 끈질긴 스팸문자처럼 튀어나오던 줄 세우기 말이다. 코카인 가루 줄 세워서 콧구멍에 빨대대고 들이마시는 장면이 잊을만하기도 전에 수시로 출몰했다. 910일까지 지났어도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성장이라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갑툭튀한 914, 애벌레의 껍질 안에 갇혀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날개를 펼쳤다. 464페이지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야 성장의 의미가 훅 다가왔다. 매미 같은 소설이었던 거다. 땅속에서 7년을 기다린 후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매미처럼 배경의 무게를 견뎌온 주인공은 세상으로 뛰어들려는 액션을 취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미괄식 구성에 가깝다. 끝까지 읽어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감이 온다. 18일 동안의 밤을 지나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소름끼치는 어감이다. 어쩌다보니 나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반영한 기간동안 붙들고 있었나. 중간에 책을 읽지 못할 이러저러한 사정들이 있긴 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날은 그 기간 중 8일 동안이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에도 책을 펼치지 않았으니 그냥 읽기 싫었던 거다. 문장 하나하나가 깊숙이 박힌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로 독자를 지그시 누른다. 주인공이 그의 세계에서 느꼈을 속 터지는 심정을 덩달아 느끼도록 만든다.

무엇이 그런 된장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는가. 다소 거리를 두고 책속의 세상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빅 픽처가 보인다. 분위기에 익숙해 지다보면 찾지 못하게 되는 답이 간지처럼 곳곳에 등장한다. 바로 피노체트 군사정권이다. 칠레의 정치적 상황은 도화지 인양 밑바탕에 깔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폭력적인 정권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몇몇 정치 상황을 연상케도 한다.

부모님 혹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사랑에의 갈증,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선명한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의 좌절, 공허와 무력감은 소설에서 툭 튀어나와 현실을 그대로 물들인다.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가끔은 경험해보았던 감정이다. 소통의 부재, 양키 파워를 선망하는 분위기 등은 도화지에 덧칠해져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얼핏 타락한 개인의 문제로 간주되는 방황이 반드시 그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게 한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이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뭐 이런 그지 같은 소설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작가들이 그리는 세상을 상상하며 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니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보인다. 작가들은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글로 표현한다. 어떤 이는 맑은 햇살 가득한 봄을, 또 다른 이는 녹음 우거진 초록의 숲을 그릴 것이다. 허나 혹독한 겨울이나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는 세상도 현실 안에 버젓이 존재한다. 예컨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를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하다. 쓰레기가 역겨운 거지 그걸 치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감사해야하지 않은가. 소설 속 상황이 쓰레기 같은 거지 사진인 듯 적나라하게 상황을 묘사한 작가가 형편없지 않음이다. 얄팍한 겉모습만 보고 깊은 데 자리한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작품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내 취향과 180도 반대편에 자리하는 작품이다. 수채화 같은 세상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칙칙한 모습을 처발처발한 글은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다. 사실 그런 글을 쓸 자신이 없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내 관점으로 보면 작가는 대담한 인물이 된다. 그가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조선시대 윤두수 자화상처럼 눈가의 주름과 군데군데 얼룩진 검버섯과 점들까지 적나라하게 그렸으리라. 완성작을 건네어주면서 한 마디 하겠지. “이게 당신의 현실입니다! 이런 모습인데 어쩔!”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칠레의 생활상에 무지하다보니 소설 속 문장들을 매끄럽게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옮긴이의 주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읽다보니 독서속도가 느려지고 맥이 툭툭 끊어졌다.

문장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읽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99일에 언급된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였다. 아직도 선명한 첫 문장을 본 순간, “심봤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안토니아가 개츠비 속 여주인공 데이지를 연상시킨다는 문장에 안토니아의 캐릭터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홀든 콜필드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오마주로 이 책의 주인공 마티아스가 언급된다. 아직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보지 않았다.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니 대략 스토리의 전개는 비슷해 보인다. 칠레의 문화와 책속에 등장하는 록 음악과 인물들, 언급된 책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했더라면 이 책을 좀 더 의미 있게 수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무지함으로 이해의 폭이 좁아졌다고 생각하니 많이 아쉬웠다. 언젠가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늘 추웠던 사람과 한 번의 따스함을 경험한 사람 중 어느 쪽이 추위를 더 잘 버틸까. 한때나마 온기가 스며들었으니 후자가 나을 듯싶지만 의외로 전자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랬던 사람은 관성의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며 머물지만, 온도차를 겪은 사람은 그 간격만큼 견디기가 어려워져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될지도.

브라질 리우의 화려함을 맛보고 온 주인공 마티아스가 칠레로 돌아와서 더욱 힘겨워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쭉 살았으면 추웠던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리우에서의 경험이나 록 음악은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늘 마약에 찌들어 살던 소년이 움찔하며 세상을 향해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어린 왕자에서는 길들인다는 말이 꽤 로맨틱하게 등장한다. 여우로부터 그 말의 의미를 들었을 때 어찌나 간지가 나던지. 이와 대조적으로 푸겟의 길들인다는 최악의 상황에서 언급된다. 작가가 지닌 문제의식이 독보적으로 드러난다. 낯설던 냄새에 익숙해져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그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세상은 관성의 지배를 받은 채 묵직하게 굴러간다. 때문에 변화는 작은 것조차 어렵다. 바꾸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려면 100도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올라야하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전히 물로 존재하기에 얼핏 지루해 보이는 상황 말이다. 말라 온다는 관성으로 굴러가는 빌어먹을 세상 속에 던져져 0도의 물에서 100도의 물까지를 견뎌내야 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 아닐까. 용기내기 직전의 기초 공사와 같은 의미를 담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수증기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물로만 머물 것인가, 수증기로 날아오를 것인가. 경계에서의 용기는 비로소 당신의 몫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9-10-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소개글만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진이 빠질줄은... 마케팅에 낚인 기분이 드는군요ㅎㅎ그래도 얻어가는게 있긴 했어요~~

말씀하신 7년을 기다린 매미같은 소설이라는 말이 너무 와닿네요. 땅 밖으로 나와야만 세상을 볼 수 있죠. 본능대로 움직이는 미물과 달리 인간은 달리 보는 관점을 가져야만 전혀 다른 형태로 탈바꿈하는 듯 싶습니다.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 책이었어요. 나름의 재미를 찾은 게 요거에요ㅎㅎ

저는 칠레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작품속 정권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어요. 근데 보면 볼수록 남북한 정권과 오버랩 되더라구요. 그래서 더 찜찜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안그래도 그지같은 내용인데 배경마저 그래버리니 미운정도 안들더군요. 그래도 데미안의 문장처럼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노력을 하게 해준 이 작품에 뭣모를 감사함도 들었습니다ㅋㅋㅋ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길들여진다는 것은 참 심오하군요. 악조건도 익숙해지면 개선할 필요를 찾지 않게 되는 현상을 꼬집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봐주셨네요. 99도까지 올라간 물이라도 1도가 부족해서 수증기가 되지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거였네요. 역시 나비종님의 통찰력은 베리 굳입니다^^

이렇게 또하나의 산을 넘었네요. 난코스일수록 정복했을때 더 짜릿한 법 아니겠습니까ㅋㅋ재미는 없었지만 우리가 남긴 영광의 발자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한달간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노인과 바다‘입니다. 짧으니까 편하게 읽도록 해요ㅎㅎㅎ

나비종 2019-10-26 14:13   좋아요 1 | URL
저역시 칠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인터넷 정보를 찾아서 ‘음! 나~~쁜 넘!이로군.‘정도로만 이해하고 책을 읽었었거든요. 근데 조금 아까 한 번 더 자세히 찾아보니 그냥 나~~쁜 넘이 아니라 엄~~~~~~~~청 몹쓸 넘이더군요. 군사 쿠데타로 1973년부터 17년 동안 독재 정치를 펼친 인간이었다나요. 1980년에 화려하게 휴가가신 분이 오버랩되었습니다. 91세까지 살다 워낙 원한 관계가 그물망으로 뻗쳐있다보니 무덤이라도 파헤쳐질까 화장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이 책의 출간년도가 1991년이더라구요. 피노체트의 독재가 끝난 시기는 1990년이구요. 정치적인 배경이 그 정도였다면 출간 당시 핫한 반향을 일으켰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정도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독재정치를 씹는 문장이 많았을텐데 살짝 아쉽네요.^^;

관점이란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세상을 해석하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특히 더요. 소설 자체의 재미는 없었지만 작가가 언급한 세상의 모습이나 사람들과의 소통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으로 판단해보면 형편없다며 까일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재가 끝나자마자 작품을 발표했다는 건 독재기간내내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런 문제의식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감탄했어요.

0도는 얼음과 물이, 100도는 물과 수증기가 공존하는 경계의 온도예요. 같은 액체 상태라도 0도와 100도는 차원이 다른 거죠. 책에서 길들인다는 내용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작가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뭣모를 감사, 난코스 짜릿! ㅎㅎ 격하게 공감이 되어요~ 그 어떤 밋밋한 책이 다가와도 다 무찌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나누는 대화가 좋아요. 책을 3번 읽고 글을 쓰는 느낌이 들거든요. 처음에 한 번, 물감님 리뷰를 읽고 또 한 번, 제 리뷰에 대한 물감님의 댓글을 읽고 다시 한 번. 그 때마다 곤충인양 후르르 탈피하여 지적인 성장을 도모하며 유식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나비종~!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