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블룸이 헤밍웨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세계문학의 천재들 Genius:A Mosaic of 100 Exemplary Creative Minds]에서.

 

 

 

 

 

 

 

 

 

 

 

 

 

 

(블룸에게) 어쨌든 헤밍웨이는 천재다. 그럼에도 평은 묘하게 얄밉다. 블룸 역시 헤밍웨이의 단편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서정적인 정신의 소유자로서 글이 너무 길어질 경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방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지었다.

미처 떠들어보지 못하고 뒀던 이한중 번역의 [태양은 다시 뜬다]의 해설을 이제야 봤는데, 이한중은 이번에 번역을 하면서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고 한다. 솔직히 이 작품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오른 뛰어난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고 한다. 나도 그랬으니까(지금까지도, 뭐, 그렇다). 흐흐흐.

 

 

 

 

 

 

 

 

 

 

 

 

 

 

 

 

 

나는 이제야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사적인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헤밍웨이 단편들을 읽다가 급관심 생겼다고 봐야지.  

 

어제는 몹시도 흐렸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는데, 이상하게 그 바람이 싫지 않은 거다. 바람은 쌀쌀했고 머리카락을 주체할 수 없이 날리게 했지만 싫지 않았다. 찬바람 속에서 두텁게 밀려오는 깊은 봄의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듯했다. 일년 중 내가 가장 유혹되는 시기, 농염한 봄바람이 그리워서 마음이 급했다. 과도하게 마음이 들뜨면서 퇴근길에 도서관까지 가서 책을 빌려왔는데 ... 밤에 미열이 나는 바람에 급하게 드러누워 쉬어야 했다. 여러모로 내겐 환절기가 시작된 것 같다.

 

해럴드 블룸, 이 할아버지의 글들을 통해 작가들을 좀 만나볼 생각이고, 헤밍웨이도 시간나는 대로 좀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지막 못다한 이야기. 1917년부터 1961년 6월 15일자의 편지들을 편집한 책이다. 쌍연발 권총(엽총이 아니라)에 두 발의 실탄을 넣고 자기 머리를 향해 쏜 날은 7월 2일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A Moveable Feast]를 번역한 책인데, 표지만 보면 여행안내 책자인 것 같다.

파리에서 보낸 날들을 쓴 헤밍웨이의 회고록이다.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는 소설이다. 바로 [A Moveable Feast]'를 읽은 작가 폴라 매클레인이 헤밍웨이와 그의 첫번째 아내 해들리의 결혼과 파경까지를 소재로 해서 쓴 작품이다. 헤밍웨이는 네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도 그렇고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에서도 그렇듯, 부부 간의 애증을 다룬 대목이 내겐 흥미로웠다.

 

더불어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관계도 새삼 관심이 가서 이야기를 들여다 볼까 한다. 뭔 책이 있지?

 

 

 

 

 

 

 

 

 

 

 

 

 

 

 

 

소설인데... . ...... 그저 그렇고 그런 소설류가 아닐까? 차라리 좋은 전기나 평전을 읽는 게 좋은데 ...

 

 

 

 

 

 

 

 

 

 

 

 

 

 

 

스콧 도널드슨의 이 책은 어떨지 궁금하다. 벌써 절판이라 도서관에서 구해봐야겠네.

피츠제럴드를 검색하다가 뜬금없이 맨 첫번째로 뜬 소식이 2AM이라서 깜짝 놀랐다. 이번에 미니 앨범을 발표하는데, 방시혁과 김도훈, 윤종신이 참여한 이번 앨범의 부제는 '피츠제럴드식 사랑이야기'란다. 피츠제럴드 소설 속 인물들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와 닮은 노래들이라는데, 허, 참, 내 또,... 이런 식의 앨범 홍보(?)는 첨 보는 것 같다, 국내 가수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밍웨이가 왜 죽었냐... 하면 더이상 소설이 안써지자 총으로 빵, 끝낸 것이다... 는 식의 말을 읽은 것인가, 들은 것인가? 

어쨌든 머리속에 남는 말이었다.

어릴 때도 그렇고 최근에 다시 읽어봐도([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김욱동 번역)) 헤밍웨이는 끌리는 작가는 아닌 듯했다. 

그러다 한겨레21에 게재된 신형철의 글을 보고서야, 책무더기 속에 묻혀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2002년 8월 2일 구입 날짜가 써있었다. 

 

 

  

 

 

 

 

 

 

 

 

 

 

 

 

 

암호처럼 '6-3'이라는 숫자를 기입해뒀는데 이건 또 뭘 가리키는 것인지, 그날 6권을 샀다는 말인지... 아, 젠장할, 자기도 뭔지 모르는 걸 써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내가 헤밍웨이를 찾아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게다가 읽지도 않았다. 사놓고 처박아둔 것이다.

 

주말에 [킬리만자로의 눈(외)] 단편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단편이 표제작 [킬리만자로의 눈]이다.

저 유명한 조용필의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으로 시작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양인자 작사)은 이 단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눈]은 연보에 의하면 1936년에 발표됐는데, 1933년 동아프리카로 수렵여행을 떠났고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정부군 원조자금 조달에 노력했던 헤밍웨이가 이처럼 삶에 '지쳐' 격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짐작을 하면 먹먹해지게 하는 단편이었다.

1899년 생인 헤밍웨이 나이 37세 때다. 그로부터 25년 뒤에 엽총으로 자살했다.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도 행복한 생애]인데, 허무한 희열로 고양되어 가는 위태로운 스릴이 압권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살인청부업자]. 이 단편 또한 기막힌 작품이다. 왜 이 단편이 영화의 원작으로 활용되었는지 수긍할만큼 영화적이면서 묵직하고 ... 굉장하다! 굉장하다, 고 말하는 것 외에 아직 달리 표현할 말을 못찾았다.

이제야 발견하다니.

 

그래서 이종인 번역의 열린책들 판 [노인과 바다]를 구입해야 한다.

 

 

 

 

 

 

 

 

 

 

 

 

 

 

 

여기에 실린 단편은 표제작 외에 7편이 실렸다.

 

킬리민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하얀 코끼리 같은 산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살인자들(살인청부업자와 같은 작품인 듯)

세상의 빛

인디언 부락

 

[킬리만자로의 눈(외)](오미애 역, 범우사)에 실린 단편은,

 

킬리만자로의 눈

하루 동안의 기다림

노름꾼과 수녀와 라디오

아버지와 아들

이국에서

살인청부업자

5만달러

프란시스 매코머의 짧고도 행복한 생애

 

명불허전'. 클래식이란 것, 허명이 오래도록 전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헤밍웨이,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1899년 출생 1961년 자살. 예순 둘. 짧지는 않았는데 행복한 생애였을지.

 

 

 

 

 

 

 

 

 

 

 

 

 

 

 

연보에 의하면 [여명의 진실]은 헤밍웨이 사후 1999년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둘째 아들 패트릭의 편집으로 출간된 책이라고 한다.

만년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라는데,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 특히 부부의 미묘한 긴장을 담고 있다고 하니 더욱 흥미가 당긴다.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단편에도 종종 나오는데 헤밍웨이에게는 부부, 연인 간의 위악적인 비아냥과 조롱이 담긴 대사들을 보는 맛이 좀 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데 왜 그때마다 싸움으로 이어지는지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가 보여준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들여다볼만 하겠다. 

 

헤밍웨이와 아프리카. 사냥. 죽음.허무. 뭐, 찾아보면 이런 주제삼아 숱한 논문이나 글들이 있을 법하다.

사냥과 총. 로쟈님이 예진작에 편집증이냐 분열증이냐로 헤밍웨이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한 적이 있었군. 페이퍼 더 읽어보고 싶지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다.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내일 생각하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되도록 도서관에 들어오면 순서를 기다렸다 읽곤 하는 책이 주로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같은 작가의 소설인데, 이번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은 북유럽 스릴러인데다 하도 재밌다는 말들을 많이 접한지라 호기심을 가지고 구입했다.

어쩌면 애써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찾아 읽으며 구입해야 할, 읽어야 할 동기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킬링타임용 영화가 있듯이 소설들도 그러한데, 킬링할 타임이 그다지 많지 않다면 또는 아깝다고 느껴진다면 호기심을 끊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영화화를 위한 설계도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또 다른 설계도를 필요로 하지만 참고할만한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받을 수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좋은 것이지.그런 장르도 있는 것이지.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문체는 서정적이고 문학적이다. 시적 느와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작품은 전성기 시절의 레이먼드 챈들러에 비견되기도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요즘은 일단 구입해서 책을 읽고 다시 되팔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야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가볍게 읽고 쉽게 되팔아 돈으로 받거나 다른 책을 구입하는 이런 소비 패턴을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월을 두고 다시 읽어도 좋은 책, 소설. 그런 책이 주는 기쁨과 감동이란 각별한 것이다.

난 역시 옛날 사람이고 올드하고 보수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 실핏줄이 터진지 3일짼데 핏기가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붉다.

쉬어줘야하는데 새벽이 다 되도록 잠들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그러고 난 다음날 아침에 눈뜨기란 얼마나 무거운지.

다 때려치고 싶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 맨]을 주문해놓고 한숨 쉬다.

6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그 설렘을 또 피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죽기 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고작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읽고 싶어 사둔 거다. 내 옆에 둔 거다. 그러니 그것들을 다 읽어줘야 할 거 아닌가.

나 없는 세상에 읽지 못한(내 옆에 둔 것조차) 책들을 남겨놓고 간다는 게 무책임한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소설들만은 반드시 다 읽고 가고 싶다.

그럴려면 눈이 시뻘개질만큼 책속에 처박고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오늘 또 624페이지가 온다.

 

 

나는 상대방의 말에 대한 첫 대응으로 '정말요?', '아, 진짜요?', '저요?' 이딴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싫다.

이건 온전히 이해하거나 생각하고서 반응하기 전에 일단 방어적으로 치고 나오는 말 같다.

시간벌기. 무기력하고 약아 보인다. 익숙한 대응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 정도만의 대응만으로 얘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뜻 같다.

최소한의 예의만으로 응답하는 외에 더 이상의 관계 맺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건지.

나는 정말 까다로운 사람인가, 제길.

624페이지가 오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 SF문학쪽을 좀 뒤져보니 작가 몇 사람의 행보가 두드러져보였다. 그 중 김보영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멀리 가는 이야기]는 그녀가 2000년대에 쓴 단편과 중편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기이하게도 표제작일 것 같은 '멀리 가는 이야기'는 없다. 작품집의 제목으로 쓰인 것일 뿐. 그럼에도 SF 작가로서 초기 작품들을 모은 하나의 '유작' 작품집의 제목으로는 기막히게 좋은 제목 아닌가. 언제, 어디까지 멀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떻게' 멀리 갈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게도 하니까. 시간여행자가 되어 돌아올지 모를 시간, 장소에 동력 삼을 씨를 뿌려놓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당히 재밌다. 읽게 하는 힘이 있다. SF라는 장르를 의식하는 작가로서 인식의 지평을 개척하면서 상상력을 이야기로 조탁해내는데 힘쓴 점이 돋보인다.

클론은 나의 꿈을 꾸는가? 인간의 감각 중 하나를 봉쇄당한 세상에서 그 하나를 가진 '초인'임을 알게 됐을 때 어떠할까? 99%가 1%를 위해 사는 세상이, 더 지독해져서(?) 다른 종들인 것처럼 완전 분리된 채 살아가는 세상이란? 스카이돔과 원시촌락 같은 키바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반전을 통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우수한 유전자>.

로봇종만의 세상에서 유기생물의 탄생과 기원 연구에 드리워진 창조자들의 광기 또는 히스테리? <종의 기원>.

시간여행자로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의 피로감과 고독감을 지닌 시간여행자 '(예수)성하'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미래로 가는 사람들>. 

솔직히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광속이니 뭐니 물리적 설명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뭔가 장엄하고 '판타스티카'스러운 분위기를 담뿍 담은 이야기를 시도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우주SF, 거기다 판타지는 아직까지 좀 부담스럽다.

 

어쩌면 역전, 뒤집기를 통해 질문을 하면서 시작됐을지 모를 작품들을 읽으면서 뭐랄까, 전체적으로 과도한 무게감과 감탄, 놀라움, 경이로움이 과장된 감정으로 표현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특히 <종의 기원>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 같은데, 로봇이 녹색식물의 향연과 인간에 대해 갖는 감정은 클리셰 같았고, 거기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같은 꿈을 꾸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라리 외설적 표현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뭐, 이게 또 케이의 파괴적 히스테리에 대해 이해시키는 중요한 요소라해도 고급스러운 장치는 아닌 것 같았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에서 초반의 발랄함이 점점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

작품 속에서 작가가 자신의 질문에 지레, 뭔가 장엄한 느낌에 젖어 있는 SF는 재미 없지 않은가.

한국 SF작가들의 작품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어봐야겠다.

 

고장원은 한국 SF 작가 10인에 대한 작가론을 시작하는 모양인데(사이언스타임즈),

 

한낙원, 복거일, 이영수(듀나), 백민석, 김영래, 배명훈, 김보영, 박성환, 윤이형, 박민규

나는 이제 김보영의 작품집 하나 본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