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zzolla Forever
아스트르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노래 / 이엠아이(EMI)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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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I에서 선보인 ‘피아졸라 포에버’는 피아졸라의 대표곡을 여러 가지 편곡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만 해도 안 트리오가 연주한 ‘봄’으로 시작해서 정통 탱고 연주 단체인 라울 가렐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여름’을 지나 에로이카 트리오의 ‘가을’과 마요르 6중주단이 연주한 ‘겨울’을 담고 있다. 때문에 각 연주의 특징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탱고라는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의 넓이 때문에 이런 연주가 가능하지 않나 싶다. 어느 악기를 통해서 연주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나 맛이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는 변함없이 탱고 나름의 개성이 살아 있게 마련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12 첼리스트가 연주한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중 ‘푸가와 미스터리’ ‘바친 궁전의 아이’에서도 마찬가지다. 12대의 첼로에서 뿜어나오는 음은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닮긴 했지만, 탱고 고유의 서정이 맘껏 표출되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탱고 전문 아티스트와 단체가 연주하는 게 제일 맛깔스럽다. 피아졸라와 함께 활동했던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레오폴도 페데리코가 자신의 악단을 이끌며 연주한 ‘리베르 탱고’ ‘천사의 탱고’, 피아졸라와 뉴 탱고 6중주단이 연주한 ‘천사의 밀롱가’, 마요르 6중주단의 ‘안녕 노니노’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은 그 자체로 탱고의 진수이다. 또한 탱고를 아르헨티나의 대중음악에서 세계의 음악으로 확대시킨 피아졸라 작품의 진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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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포레 : 레퀴엠 / 프랑크 : 교향곡 D단조
Ceasr Franck 외 작곡, Philippe Herreweghe 지휘 / Harmonia Mundi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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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헤레베헤가 13년 만에 다시 선보인 포레의 ‘레퀴엠’에는 과장됨이 없다. 의도적으로 감정을 꾸며 달콤하게 채색하지 않았고, ‘레퀴엠’이라는 곡명을 의식해 극적으로 음악을 이끌지도 않았다. 대신 헤레베헤는 민첩하고 풍부한 음을 통해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신선한 해석을 들려준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포레 당시의 음악양식을 꼼꼼하게 연구해 재현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전형으로 인식돼왔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해석방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며, 그가 줄곧 추구해왔던 음악양식의 원형 회복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가 13년 전에 발매했던 포레의 ‘레퀴엠’은 1893년 실내악 판본을 사용한 것이다. 이 판본은 말 그대로 소규모 악기만이 등장하는 실내악을 위한 작품이다. 포레는 당초 이 판본을 애지중지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 의해 1901년 풀 오케스트라 버전을 발표하게 된다. 이 판본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포레의 ‘레퀴엠’이다. 교회가 아닌 대형 콘서트홀용 음악이기 때문에 초기 판본에 비해 현악 파트가 한층 역동적으로 바뀌었고, 호른과 클라리넷, 바순 등 여러 악기 부분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헤레베헤는 풀 오케스트라 버전을 당시의 풍토대로 연주하길 원했다. 그래서 원전악기를 택했고, 당시 콘서트홀에 오르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사실을 고려해 오르간 대신 하모니움을 배치했으며(이는 포레가 용인한 사실이다), 또 가수와 합창단에게 프랑스식 라틴 발음(Gallic)으로 가사를 부르도록 요구했다. 이중 갈릭식 라틴 발음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던 것인데, 헤레베헤는 포레 시대의 프랑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갈릭식 발음이 쓰였다며 이를 연주에 과감히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상투스’를 ‘상튀’로 ‘피에 예수’를 ‘피에 셰수’로 발음하는 등 좀더 원전에 가까운 형식으로 곡을 해석하고 있다.


“포레는 동양사상에 상당한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그는 죽음이 우주의 조화 속에 있다고 믿었지요. 포레는 레퀴엠이 종교보다는 인본주의에 더 가까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레퀴엠은 가톨릭의 전통적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헤레베헤는 클래식 사이트 안단테 닷컴(andante.com)과 가진 인터뷰에서 포레의 ‘레퀴엠’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아니며 오히려 ‘죽음을 위한 자장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헤레베헤가 말한 이 내용적인 면은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극적 긴장을 유도했던 여타의 음반과는 다르게 그는 간결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 강조한다. 네덜란드 출신의 소프라노 요하네트 촘머와 독일 출신의 바리톤 슈테판 겐츠는 헤레베헤의 의도를 충실히 이행하며 내용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촘머는 바흐 칸타타 녹음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함께했습니다. 그녀는 소년들의 순수한 목소리에 걸맞은 깨끗한 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프라노는 쉽게 정할 수 있었던 반면 남성 성악가는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포레 시대의 성가대 목소리와 비슷하며 오페라풍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는 슈테판 겐츠를 찾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음반은 형식과 내용을 포레의 시대와 사고에 맞춘다는 헤레베헤의 의도가 돋보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함께 커플링되어 있는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뛰어난 연주이지만, ‘레퀴엠’에 밀려 당분간 빛을 보기는 힘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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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of Shadows
필 콜터 (Phil Coulter)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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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콜터의 ‘그림자 호수’(Lake of Shadows)에는 외형상 매우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그의 영롱한 피아노 독주를 비롯해 노래와 연주, 합창곡이 지루하지 않게 배열됐다. 특히 시너드 오코너, 오이페 니 페라이 등 여성 가수들의 참여가 돋보이는데, 이들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콜터의 피아노 연주와 더불어 이 음반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필 콜터의 음악은 여타의 다른 뉴에이지 연주가의 음반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뉴에이지 음악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과 자연의 풍경 묘사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필 콜터는 그동안 개인사와 사적인 감정, 역사의식을 결합해 다른 연주가들과 차별된 뉴에이지를 만들어왔다. ‘그림자 호수’도 그의 이전 음반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역사와 풍경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을 떼어놓고 콜터의 음악을 듣는다면 다른 뉴에이지 음악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도 하다. 서정적이고 신비한 선율, 활기차고 세심한 연주는 유키 구라모토나 앙드레 가뇽, 케빈 컨의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양하게 듣는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콜터의 음악은 이들의 연주보다 오히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스윌리 호수 주변에서 일어났으며, 또한 이 곳은 나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와 비극적인 시기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스윌리 호수는 아일랜드 섬의 가장 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북대서양을 향해 열려 있다. 때로는 고요하며, 때로는 위협적이거나 거친 이 호수는 그래서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

필 콜터가 음반 내지에 밝힌 이 말은 ‘그림자 호수’의 전체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이 말은 다시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곧 ‘역사적 비극’과 ‘개인적인 행복과 불행’이 그것인데, 콜터는 아일랜드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며 이 두 가지 주제를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다.

보컬로 참여한 오이페 니 페라이의 신비스런 목소리가 특히 인상적인 첫곡 ‘그림자 호수’는 전체 음반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곡으로, 스윌리 호수를 칭하는 ‘그림자 호수’에 대한 감정을 잔잔하게 묘사한다. ‘그림자 호수’는 그에게 불행을 안긴 무서운 곳이기도 하지만, 그리운 고향이며, 편안한 안식처이기도 한 곳이다. 행복과 불행, 비극이 공존하는 장소인 이 곳을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적인 가지를 치기 시작한다. ‘이니쇼엔이여 안녕’에서 그는 자신이 존경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작곡가 션 오리아다와 랜디 뉴만을 추모한 뒤, ‘귀족들의 탈출’에서 조국 아일랜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16세기 영국의 학대에 밀려 고국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암흑시대를 그는 단조풍의 피아노에 키보드, 현악기 반주로 사람들의 슬픈 감정을 감각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언뜻 듣기만 해도 비극적인 느낌이 드는 ‘프랑스 시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피아노 독주가 길게 이어지고, 어느덧 부드러운 바이올린이 피아노를 뒤따른다. 굉장히 매력적으로 전개되는 곡이지만, 콜터는 이 곡을 18세기 ‘아일랜드 봉기’ 때 프랑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던 민족의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희망이 잔뜩 묻어 있는 ‘라 오셔 만세’도 마찬가지로 그 당시 프랑스의 배 라 오셔가 들어오는 광경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곡이다.

이밖에 아일랜드 출신의 가수 시너드 오코너의 감각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스윌리 해변’(여동생의 죽음을 애도한 곡)과 고향을 위해 만든 ‘섬으로 돌아가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고향에 데려다 주오’ ‘바다의 별’ 등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곡들을 들을 수 있다.

필 콜터는 1942년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태어났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지금껏 수십 장의 음반을 선보인 바 있다. 1999년에는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으며, 팝과 클래식, 크로스오버를 넘나들며 광범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특색은 역시 아일랜드의 색채가 강하게 풍긴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의 민요나 선율을 차용해 많은 음악을 발표했고, 아일랜드 출신의 가수나 작곡가, 연주가를 발굴, 후원해 오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90년대 후반 아일랜드 출신의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골웨이와 듀엣 음반 ‘겨울항해’ ‘전설’ 등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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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와의 사랑 1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머리털을 뽑는다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음모를 잡아뜯는다
대머리를 위하여 그녀는 겨드랑이털을 깎는다
검은 털이 수북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녀는 추억 속의 벗겨진 머리가죽 말라붙은
가죽 위에 털들을 꼼꼼히 심는다 대머리가
만족할 만한 가발을 가지고 대머리에게 간다
枰?머리털보다 더 진짜 같은 가발을
대머리에게 준다 이걸 만드느라 일찍 오지
못했어요 대머리는 가발을 던져버린다
기다리느라 비를 너무 많이 맞았어 머리가
불어서 이제 그 가발은 나에게 맞지 않아
대머리의 육체 가득 출렁이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공들여 만든 대머리를 위한 가발이
찢겨진 우산처럼 빗속에 버려져 있다.

성미정

1967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고 97년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을 냈다.

"‘대머리와의 사랑’을 별난 시집으로 만드는 것은 거기 묶인 작품들이 독자의 감성이 아니라, 주로 지성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미학’이나 ‘심미적’이라고 번역된 유럽어 단어가 본디 ‘감각학’‘감각적’이라는 뜻이었던 데서도 드러나듯, 예술은 주로 인간의 감성을 겨냥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런데 ‘대머리와의 사랑’은 지성에 호소한다. 이 시집은 좌뇌를 간질이는 지적 언술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지성에 대한 호소는, 오래지 않아, 우뇌까지 집적거리며 우울한 감성의 침전물을 만든다. 지성은 감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 둘은 꽈배기처럼, DNA 사슬처럼, 전위적 춘화도 속의 두 육체처럼 꼬여 있다."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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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야기들은 전에 들었지만 또다시 듣고 싶은 이야기들, 어디에서든지 들어가 편하게 깃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스릴과 의외의 결말로 우리를 속이지도 않고 예기치 못한 내용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나 연인의 살 냄새처럼 익숙하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인다. 마치 어느 날엔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사랑을 쟁취하고 누가 그러지를 못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다시 알고 싶어한다.

그것이 위대한 이야기의 신비한 매력이다.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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