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잃은 ‘저소득 젊은층’ 증가…일본 미래 심각”
양극화 해법을 묻다 ①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한겨레 김도형 기자
 
 
»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세계 각국이 계층간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는 양극화 확대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쟁지상주의적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공통적 현상이다. 일본·중국·미국·유럽의 전문가들과 연쇄 인터뷰를 통해 양극화 해법을 모색해본다.

 

“전 세계의 경제구조가 바뀌어 점점 풍요로운 사회가 되어가는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정보통신산업이 발달하고 글로벌화와 서비스화가 진행되면 높은 수입으로 승부를 겨루는 사람과 수입이 낮아도 좋은 사람으로 나눠진다.”

일본 격차문제 전문가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교육학·가족사회학 전공)는 양극화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풍요로워진 사회’라는 말을 꺼냈다.

“공업으로 물건을 만들어 소비해가던 데서 물건에 뭔가를 부가하거나, 서비스·정보로 즐거워하는 시대로 변했다. 보통 물건의 가격은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점점 내려갈 수밖에 없다. 단순히 물건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의 인건비는 점점 내려간다. 역으로 새로운 물건이나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 등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생산성이 높아져 수입은 늘어난다.”

그는 일본의 격차(양극화) 문제에서 가장 우려할 대목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저소득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는 이들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어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지만, 부모 세대가 사라지는 15~20년 뒤쯤이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에 기생하는 일본청년들 당장은 ‘빈곤’ 못 느껴도 20년뒤엔 심각한 문제될 것”

-일본의 격차 문제에 대해 ‘희망 격차’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만의 특징인가?

=한국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의 저소득 젊은이는 대개 부모 슬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반항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패러사이트 싱글’(부모에 기생하는 독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비교적 넉넉한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수입이 낮아도 생활이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생활의 격차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지 않고 단지 장래가 불안한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위에 올라가지 못하고, 일을 해도 희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미국이나 영국이라면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생활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비해 일본에선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부모 밑에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니트 (직업도 없고, 교육훈련도 받지 않는 젊은이) 같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런 점이 일본 격차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저소득 젊은이는 얌전하다. 계속해서 저소득에 머물러 있지만 생활면에서 곤란하지 않다. 그렇지만 20년 뒤쯤 그들의 부모가 죽게 되면 부모의 연금이 없어져 격차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어떻게 하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저소득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얹혀사는 게, 일본의 격차 문제가 정치문제화하지 않는 이유와 관계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연 수입이 100만~150만엔에 불과한 젊은이가 수백만명은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수입으로는 생활하기가 불가능하므로 폭동이 일어나거나 범죄가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부모가 그 부족분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전 끝난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격차 문제가 선거의 초점이 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빈곤을 느끼지 않으니까, 생활이 곤란하지 않으니까 잠잠한 것이다. 장래를 생각하면 깜깜하니까 지금을 즐기자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나는 그것이 희망 격차라고 말하고 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초점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일본은 문제 해결을 일단 뒤로 미루는 사회다. 가정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그렇다. 그 대신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 젊은이가 늘어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아 생기는 저출산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는 게 일본의 현실이다.

-희망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책은?

=제대로 노력하면 평가받는 일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는 제대로 된 일자리의 숫자 자체가 모자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비정규직 등 생산성이 낮은 일에 종사하는 기간을 줄이고, 비정규직도 직장에서 승진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 다음 생산성이 높은 일자리를 얻으려는 직업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정규직 등 고생산성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또한 (주요 국가 가운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최저임금을 올려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노동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규제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해 비효율적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기회를 늘리는, 즉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노동규제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에게 경제적 성공과는 별도로 가치있는 일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해줄 필요도 있다. 그 수단으로는 환경보전이나 고령자 개호(수발), 육아지원 등 새로운 형태의 공공사업을 실시해 정규직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을 흡수하는 방안이 있다.

“제대로 된 일자리 늘리고 공공사업에 젊은층 흡수해야…최저임금 등 노동규제 필요”

-아베 신조 정권은 큰 성공을 거둔 영국 정부의 정책을 본뜨고 있지만, 예산투입에 소극적이어서 구두선이라는 비판도 있다.

=아베 정권이 무엇을 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예산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근본적 해결은 안된다. 소득세나 상속세를 예전 수준으로 올릴 필요도 있다.

-세금을 올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을텐데.

=부자들을 상대로 세금을 올리자는 얘기이므로 일반인들의 저항은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 정부의 세금낭비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지만, 격차대책은 세금을 낭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문제다.

-격차대책을 위해 기업의 부담을 늘려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면, 대기업은 여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중소기업들은 쓰러진다. 국민 전체의 부담을 늘리려는 방향이라면 모를까.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것보다는 세금을 늘리는 편이 낫다. 중소기업은 정말 힘들다.

-영국 국방부가 얼마전 앞으로 30년 뒤면 양극화가 격화돼 중류층이 없어지면서 ‘마르크시즘’이 부활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유럽에서 비정규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젊은이가 늘어난다면 마르크시즘이 부활하느냐, 아니면 이들이 종교에 빠지느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즉, 잃어버릴 게 전혀 없고, 지금의 생활이 계속해도 좋은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혁명을 요구하거나 종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떡하든 이런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다.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야마다 마사히로는
일본사회 특유의 ‘희망격차’ 주목

지난해 일본 사회에서 널리 쓰인 10대 용어 가운데 하나로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선정됐다.

이 말을 퍼뜨린 주인공은 도쿄가쿠게이 대학 교육학부의 야마다 마사히로(50) 교수다. 2005년 발간한 <희망격차사회>라는 저서를 통해, ‘희망격차’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의 일본 사회를 포착해 그 배경을 추적하고 처방전을 제시했다. 그는 표면적인 경제 격차만을 보지 않고, 일본의 독특한 사회·가족적인 구조가 잉태한 장래의 격차 위험성에 주목하고 있다.

야마다 교수는 격차 세계화의 요인이 경제의 글로벌화를 낳은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무조건적인 비판은 ‘뉴러다이트운동’(신 기계파괴운동)이라는 양비론적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조와 소득·상속세의 과감한 증세를 해법으로 내놓은 또다른 전문가 다치바나키 도시아키(도시샤대학 경제학과 교수)에 비해 약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야마다 교수는 2006년 9월 자신의 처방전을 좀더 구체화한 <신평등사회-희망격차를 넘어서>를 펴냈다. 1981년 도쿄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 사회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빈곤률 10년새 2배
비정규직 늘어난 탓

한때 ‘1억 총중류’라는 말이 구가될 만큼 세계적인 평등사회였던 일본은 이제 ‘격차사회’말이 널리 쓰이는 양극화의 나라로 변모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를 보면, 일본의 빈곤율은 1996년 8%에서 2005년 15.3%로 급증해 주요국 가운데 세 번째로 높게 나타났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 붕괴 이후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1/3 가까이로 크게 늘어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현재 일본은 전후 최장의 경기확대 국면을 맞고 있으나, 그 과실이 골고루 미치지는 못한다. 기업들이 부담 상승을 이유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5년 재임기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단행해 지금과 같은 경제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감세 등 경제 활동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양극화 확대라는 부정적 유산도 남겼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격차문제를 최대 선거쟁점으로 삼을 태세다. 그러나 지난 4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바 있어, 쟁점화가 가능할지 불투명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한국을 바꾼 지식인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경향신문-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50:26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지난달 30일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현대마르크스 경제학’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강의실. 21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지만, 빈 자리가 많아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손제민기자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김종목·손제민기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29:28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1971년 전태일 추모기도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구국강연을 펼치고 있는 함석헌 선생.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이념분포’ 지식인 명단
강내희(중앙대 교수)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강정구(동국대 교수) 강준만(전북대 교수) 고미숙(수유+너머 연구원) 고병권(수유+너머 연구원)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장)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김명인(인하대 교수) 김상봉(전남대 교수) 김상조(한성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김수행(서울대 교수) 김영민(한일장신대 교수)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김원(서강대 연구교수) 김은실(이화여대 교수) 김일영(성균관대 교수) 김정배(전 고려대 총장)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김지하(시인) 김태동(성균관대 교수) 김호기(연세대 교수) 나성린(한양대 교수) 나임윤경(연세대 교수) 민경국(강원대 교수)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박지향(서울대 교수) 박태균(서울대 교수) 박효종(서울대 교수)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백영서(연세대 교수) 복거일(소설가) 서경석(목사) 서길수(서경대 교수)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손호철(서강대 교수)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 송호근(서울대 교수) 신광영(중앙대 교수)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용하(이화여대 석좌교수) 신율(명지대 교수)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염재호(고려대 교수)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 우석훈(성공회대 연구교수) 유석춘(연세대교수) 윤평중(한신대 교수) 윤해동(성균관대 교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 이문열(소설가) 이병천(강원대 교수) 이석연(변호사)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이영훈(서울대 교수)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 이정우(경북대 교수)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필렬(에너지전환 대표)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 임지현(한양대 교수) 임헌영(문학평론가) 임혁백(고려대 교수) 임현진(서울대 교수) 장상환(경상대 교수) 장하성(고려대 교수) 장하준(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회익(녹색대 석좌교수) 전상인(서울대 교수) 정성진(경상대 교수) 제성호(중앙대 교수)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 조국(서울대 교수) 조순(서울대 명예교수) 조순경(이화여대 교수) 조정래(소설가) 조정환(문학평론가) 조한혜정(연세대 교수) 조효제(성공회대 교수)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최갑수(서울대 교수) 최광식(고려대 교수) 최원식(인하대 교수) 최장집(고려대 교수) 하영선(서울대 교수) 하용출(서울대 교수) 한상진(서울대 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홍성태(상지대 교수)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홍윤기(동국대 교수) 홍진표(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황석영(소설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 설마 여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만 지식인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오프 신문에는 지식인들의 계보도가 이념적으로 구분되어 그려져 있다. 그게 재미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2006년 유신체제를 재평가한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다 4·19유족회원에게 멱살을 잡힌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3년 입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

〈장관순·손제민기자〉

- Copyright ⓒ 1996 - 2007 . 이 페이지의 모든 저작권은 (주)미디어 칸에 있습니다 -

* 경향신문이 요새 기획기사를 잘 하고 있네요.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기인 > 맑스꼬뮤날레 1회 조정환 선생 vs 이경천 선생

"네그리에 상당히 경도" vs “가치법칙 근원 정의는 오류”

[맑스꼬뮤날레](주관단체) - 자율평론

맑스꼬뮤날레취재팀 / 2005년05월30일 18시24분

맑스 꼬뮤날레가 열린 첫날 오후 자율평론 주관의 토론에서 발제자와 플로어간에 격렬한 토론이 이뤄졌다. 이날 세션에서 ‘비물질 노동과 가상실효적 포섭’을 발제한 조정환(자율평론 )씨와 플로어의 이경천(맑스와 자본론 연구소)씨는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에 관한 입장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했다.

왼쪽 조정환씨, 오른쪽 이경천씨

이경천 씨는 먼저 조정환 씨에게 “맑스이론이 시대적 부합성을 잃었다고 보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맑스는 가치라는 범주, 가치법칙이라는 범주에 기반해서 수많은 범주들을 재구성 했으며 이러한 범주들 자체들이 가치법칙이나 가치라는 범주의 재구성이거나 그러한 범주에 관철된다고 봐야 한다”면서 “가치법칙을 폐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맑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또한 이경천 씨는 “조정환 씨가 다분히 무정부주의 자율주의자인 네그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도 맑스 이론을 꼼꼼히 분석해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가치법칙에서 파생된다”면서 “가치법칙이 맑스 이론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 범주인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맑스이론의 부정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대안을 부재하게 만드는 무정부주의로 귀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씨는 “가치법칙에서 모든 것들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경천 선생님의 독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단언 했다. 조정환 씨는 “계급투쟁이라는 것마저도 가치법칙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맑스하고도 정면에서 사실상 대립하는 것”이라면서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했지 가치법칙의 역사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정환 씨는 덧붙여 “가치법칙이 그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핵심적이고 우선적인 원리라는 생각에 정면에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다”면서 “가치법칙이 끝난다 할지라도 맑스는 끝나지 않고 맑스의 정신과 맑스의 눈은 결코 그 위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경천 씨는 다시 반론을 전개했다. 이경천 씨는 “조정환 선생께서 계급투쟁을 마치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풀이를 하면서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주의주의 내지는 자율주의에서 얘기하는 계급투쟁이론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다시 지적하고 “ 가치법칙을 무시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의 가장 결정적인 맹점이고 이것 때문에 자율주의가 정통 맑스주의에서 철저하게 비판을 받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조정환 씨 역시 이경천 씨의 반론에 재반론을 펼쳤다. 조정환 씨는 “가치법칙을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계급투쟁과 가치법칙은 분화되지 않지만 가치법칙을 근원적인 계급투쟁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근원적 원리로 정의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일시적으로 등장했던 하나의 전략 형태를 영구화하고, 가치법칙이 위태로워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 맑스주의의 위기이고 혁명의 전망의 위기라고 설파할 때, 지금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적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반박했다.

조정환vs이경천 토론의 일부 요약

이경천 : 맑스이론이라는 것이 시대적 부합성을 잃었다고 보십니까?

조정환 : 신앙 고백을 하라고 하시니...(웃음)

우리가 하나의 생각들을 검토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역시 현실화되어진 것과 현실화 되어지고 있는 것에서 맥박치고 있는 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19세기에 태어나 19세기에 죽은 사람이죠. 그래서 맑스는 우리가 지금 겪는 많은 것들을 함께 겪지 못하고 현실적인 체험에서 우리가 겪는 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맑스는 초기 헤겔, 포이에르바하 비판에서 사회주의 비판과 어떻게 부르주아 사회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대안까지 총제척인 가르침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맑스가 이론의 현실적인 체계속에서 서술하는 것들의 다양성 중에서 꽤 많은 부분이 우리시대의 현실 적합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맑스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적,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기나긴 역사과정에서 파악해야 하며 맑스 개인 비난으로 귀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서술된 이론체계의 꽤 많은 부분들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의 노동에 대한 맑스의 분석으로서 결과로서의 사회속에서 추상노동으로 종합될 수 있지만 분산된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질노동을 분석의 초점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화된 시간의 공간화 자체만을 문제 삼을 수 있었고 시간의 초시간화, 혹은 실제적 포섭 같은 것을 자기이론에 담을 수 없었다는 것이 맑스 이론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물론 상당한 해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근대성 속에 매몰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사회적 노동과 같은 점은 정치경제학 비판 같은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데 바로 지금 우리가 읽어도 우리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가능 한 역사를 넘어서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혜안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맑스라는 사람이 역사속에 살면서도 현실속에 완전히 봉인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맑스와 주어진 역사적 경험을 넘어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맑스의 속뜻을 통해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속에서 제한된 역사성을 극복하고 극복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고민해 갔던 맑스 자신의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경천 :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 같은데 저는 맑스 이론이 시대적 적합성을 가지고 사람들이 이것에 대한 진정한 맑스가 자신의 이론속에서 남겨낸 수많은 범주들이 있을 텐데 그러한 범주들이 현실에서 이론적 적합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그런 답변을 기대 했는데요. 어쨌거나 본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관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양식이라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비물질 노동이 지배적이라고 본다면 본질적 정치경제학에서, 경쟁 자본주의 시대에 관철되어있던 가치법칙이 유효성을 상실해 버린다는 그 말씀이시죠. 그런데 맑스 이론을 통독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은 발견하는데 맑스라는 사람은 가치라는 범주, 가치법칙이라는 범주에 기반 해서 수많은 범주들을 재구성 해내죠. 대표적으로 조정환 선생님께서는 직접적으로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지 비물질적 상품이라는 표현을 안 썼는데요. 이러한 상품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수많은 이러한 범주들 자체들이 가치법칙, 가치라는 범주의 재구성이거나 그러한 범주에 관철된다고 봐야 하는데 이렇게 가치법칙을 폐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맑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과연 쉽사리 상품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 선생님께서는 다분히 무정부주의 자율주의자인 네그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는데 그 사람 같은 경우에 계급투쟁을 필요이상으로 침소봉대 시키거든요. 그런데 이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도 맑스 이론을 꼼꼼히 분석해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가치법칙에서 파생되거든요. 이처럼 가치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맑스 이론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 범준데 이것을 부정하고 나서 맑스 이론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맑스이론의 부정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결국 대안을 부재하게 만드는 무정부주의로 귀결하는, 그런 이론을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의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조정환 : 우선 상품에 대해 말하자면 비물질적 상품이라는 말이 발제에는 나오지는 않았지만 하트나 네그리의 제국에 보면 비물질적 상품을 생산한다는 표현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품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얘기 해 본다면 자본론의 맨 첫줄은 부르주아 사회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상품들의 더미입니다. 상품의 무더기라고 말하는데. 맑스의 자본론 첫줄에서 제시된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면 무더기라는 표현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맑스는 농민들에 대해 농민들이란 피티와는 달리 푸대 속의 감자들이라고 표현 하면서 개체들 간의 네트워크의 횡적인 단절성을 얘기 했습니다. 즉 감자을 담고 있는 외적인 힘(주권이나 권력)이라는 틀에 의해서만 묶여질 때만 집합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비판이었죠. 맑스가 부르주아 사회를 바라보는 첫 문장이 부르주아 사회를 감자 푸대처럼 취급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상품들이 부르주아 사회라는 감자 푸대 속에 무더기로 담겨 있다는 느낌인데요. 그것은 근대자본주의의 초기국면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초기국면에서 물질적 생산물들, 상품들은 생산되면 유통되고 분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 분산된 것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들을 연결 짓는 것은 국가가 사회간접 자본들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엮어졌으니까요. 그러나 탈근대에서는 각각의 상품들이 감자 푸대안에 있지는 않는 것이죠.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형식적 관계를 넘어 내용적 축면에서 고찰해 보면 개개의 힘들은 결코 절대적으로 분리 되서 감자처럼 집합화 될 수 있는 분산된 개체가 아닌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들이 보편적(공통적) 네트워크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더기라는 표현은 현대 상품을 지칭하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 이경천 선생님은 가치법칙에서 모든 것들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하시는데 이것은 이경천 선생님의 독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계급투쟁이라는 것마저도 가치법칙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맑스하고도 정면에서 사실상 대립하는 것이고요. 예컨대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말했지 가치법칙의 역사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급투쟁의 과정은 가치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인간들만의 역동적인 사회적 관계이지 시간을 분절하고 있는 자본의 근대적인 지배전략이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일무이하게 지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저는 가치법칙이 그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핵심적이고 우선적인 원리라는 생각에 정면에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가치법칙이 끝난다 할지라도 맑스는 끝나지 않고 맑스의 정신과 맑스의 눈은 결코 그 위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천 :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말을 했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그 말은 맑스나 엥겔스가 한말이 아닙니다.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그 말이 고전적 브루조아지가 한 말이다’라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급투쟁이 가치법칙과는 서로 무관하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셨는데 사실은 무연한 것이 아니라 맑스는 그것을 초역사적 계념으로 만들지 않고 자본주의의 특수한 역사적 개념으로 계급투쟁을 재해석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 가치법칙과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데, 선생께서는 계급투쟁을 마치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풀이를 하면서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갖다가 주의주의 내지는 자율주의에서 얘기하는 계급투쟁이론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거는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시각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맑스의 계급투쟁을 가치법칙과 무관한 상태에서 얘기하게 되면 맑스계급투쟁은 주의주의밖에 안됩니다. 다시 말해 의지는 의지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계급투쟁이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내면에선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 조건에서 나오는 것인가. 선생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로 환원해 버리는데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서 밝히는 것은 계급투쟁의 특정한 성격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자본과 연관해서 그것은 분명 가치법칙과 연관된 것인데 가치법칙을 무시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의 가장 결정적인 맹점이고 이것 때문에 자율주의가 정통 맑스주의에서 철저하게 비판을 받는 지점입니다.

조정환 : 지금 제가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이 무관하다고 말씀했다고 주장하시는데 그건 결코 아닙니다. 그 양자 간의 관계에서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우선성을 이야기 한 것이고 가치법칙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채택한 계급투쟁의 전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긍냥 살아가다 보면 가치법칙으로 살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거든요.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의 노동활동의 성과물들을 교환이라는 방식으로 변환해서 맞바꾸고 그걸 통해서 공통적 사회관계를 구축해 나아가게 된 어떤 과정. 여기에 끼어들어서 그 교환 과정을 착취와 축적의 과정으로 변환시키고자하는 욕망이 작동한 것이고 그것이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독특한 계급의 형성을 가져온 것이니 만큼. 이미 가치법칙의 형성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등장과정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축과정이 있는 만큼 계급의 형성과정을 맑스는 계급투쟁과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가치법칙을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의 전략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계급투쟁과 가치법칙은 분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치법칙을 근원적인 계급투쟁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근원적 원리로 정의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일시적으로 등장했던 하나의 전략 형태를 연구화하고, 그것이 위태로워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 맑스주의의 위기이고 혁명의 전망의 위기라고 설파할 때, 지금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적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기인 > 저만치 앞, 손에 잡힐듯한 좌파 문화운동의 전망

저만치 앞, 손에 잡힐듯한 좌파 문화운동의 전망

[맑스꼬뮤날레](주관단체) -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맑스코뮤날레취재팀 / 2005년05월30일 22시13분

29일 오후 2시부터 117호에서는 '문화과학' 편집위원회가 주관하는 발표회가 열렸다. '우리 시대 좌파 문화운동은 가능한가 : 새로운 전망'을 제목으로 한 '문화과학' 발표회는 원용진 서강대 교수의 사회로 약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발제는 모두 네 개로 제1발제로 '한국 문화권의 사회적 실천과 문화운동의 미래'를 이동연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가, 제2발제로 '좌파의 바깥, 부안항쟁의 경계'를 고길섶 문화과학 편집위원이 발표했고,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사무국장과 김철규 고려대 교수가 각각 토론을 붙였다.

이동연, "다양한 소수 문화 영역의 출현이 문화정세의 중요성 높여"

이동연 교수는 문화권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차이로서의 문화권'과 '접근과 참여로서의 문화권'을 든다. "문화권은 보편적인 시민으로 단일화할 수 없는 서로 많은 차이를 가진 '다중'의 문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문화정세, 즉 문화권이 중요한 정세가 된 배경으로 △문화적 종다양성의 위기 △대량소비의 확산으로 문화적 지불이 늘어난 점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노동시간의 감소, 자율성, 여가시간이 늘어남 △다양한 소수 문화 영역의 출현 등을 들었다.

이동연 교수는 "2000년 이후 담론 재구성을 보면 문화적 권리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라든지 창작자의 권리 뿐만 아니라 볼 권리, 수용자 권리로 확대되었고, 소수자의 권리 표현 여성 욕망 표현, 문화적 공공성도 활발해졌다"고 말하고 "청계천, 도시공간, 문화적 시설, 숙박 등도 그런 투쟁이고 문화운동이 생태환경운동과 결합되면서 문화환경운동으로 확대되었다"며 문화운동의 전개과정을 요약했다.

이동연 교수는 발제 말미에 △다양한 문화적 권리 투쟁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담론화 △문화적 권리의 자율적 표현 수단과 공적 생산수단의 이중적 확보를 위한 투쟁△서로 다른 문화적 권리 투쟁들 간의 연대와 네트워크 △급진적 표현수단과 사건의 조직화를 사회운동의 장으로서 문화운동의 토픽이 되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고길섶, "부안항쟁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사회적 주체성"

고길섶 편집위원은 부안항쟁을 자세하게 돌아보고, 이 속에서 문화투쟁과 새로운 사회적 주체성이 출현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발표문 6절 '주민투쟁과 좌파적 접속'에서는 주민투쟁과 좌파운동의 접속이 좌파문화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빈번하게 발생하는 주민투쟁들이 "자본운동이 수행하는 계급투쟁의 핵심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것과는 비대칭적인 사태, 즉 '계급투쟁 없는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어 보인다"고 바라보고 그런 점에서 "주민투쟁과 접속하는 가장 큰 약한고리는 문화적 실천 즉 문화정치"라고 말한다.

나아가 "주민운동에의 좌파운동적 접속은 좌파문화운동으로 활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간다. 고길섶 편집위원은 이러한 실천적 의미를 최근 '참세상'에 쓴 자신의 칼럼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발제를 마무리한다.

이동연 교수의 발제에 대해 오병일 사무국장은 최근 저작권을 둘러싼 논란을 소개하고, 과거 정보기본권으로 고민했던 추상적 권리를 정보인권으로 구체화하게 된 사례를 소개했다. 오병일 사무국장은 문화권을 적용하는 문제와 관련, "저작권자, 권리자의 주된 수혜자는 실제 독점자본이다. 수용자 뿐 아니라 창작자조차 문화 관련 제도에 의해 소외 위축되고 있다"고 말하고 "수용자와 창작자 권리를 포괄하는 개념이어야 하고, 문화자본에 대한 전선 형성의 개념으로서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철규 고려대 교수는 고길섶 편집위원의 발제에 대해 큰 맥락에서 동의하는 가운데 "두 가지 결론, 공부나 운동이나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중, 대중, 풀뿌리 주체들이 갖고 있는 창발적 역능성, 힘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인데 부안항쟁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하고 "결과로서가 아니라 운동 과정이 중요했고, 운동의 성격 변화 즉 기획, 개입. 환경과의 교류, 진화의 과정이 결과 자체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짚었다. .

약 10분간 휴식을 가진 후 제3발제 '문화 공공성 투쟁으로서의 점거예술운동'을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이, 제4발제 '소수자(성), 매체문화운동 좌변화의 일단'을 전규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이동연 사회자는 앞의 두 발제자의 스타일이 느린 반면 뒤의 두 발제자의 스타일은 빠른 편이라며 남은 시간 경쾌한 진행을 유도했다.

이원재, "점거예술운동은 대안적이고 급진적인 문화공동체의 실험장"

이원재 사무처장은 오아시스프로젝트의 점거예술운동을 "남한 사회 맑스주의 문예운동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냄과 동시에 맑스주의 예술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으로 정의한다.

스쾃의 점거예술운동을 자세히 설명한 이원재 사무처장은 문화 공공성, 예술의 사회적 공공성과 점거예술운동을 정리하고, 자율적 문화공동체로서의 의미 즉 "예술가의 창작권을 표출할 공간의 확보를 넘어 점거 공간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대안적이고 급진적인 문화민주주의, 문화공동체의 실험장"의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원재 사무처장은 2004년 2월말 결성된 후 현재 범국민대책위 활동까지 벌이고 있는 오아시스프로젝트팀의 목동 예술인회관 점거예술운동을 이러한 맥락에서 살핀다.

전규찬, "반란하는 것만이 정의다"

제4발제를 맡은 전규찬 교수는 발제문의 제목 '소수자(성), 매체문화운동 좌변화의 일단'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목에서 "'(성)'에 괄호가 있는 것은 인쇄가 잘못된 것으로 '자'에 괄호가 있어야 한다"고 정정하고 '좌변화'란 '좌경화'를 의미한다고 부러지게 말했다.

전규찬 교수는 "며칠 전 미국 미사일방어 계획에서 텅스텐 우리늄 금속봉을 우주 공간에서 시속 1만1천 킬로미터로 보내는 무기가 발표되었는데 그 이름이 '신의 회초리'였다"고 알리고, 이걸 보고 처음에 우스웠는데 웃다가 울다가 울게 되더라고 말했다.

부시가 우주로부터 내리꽂는 매체를 '신의 회초리'라고 하는데 '신의 회초리' 자체가 매체고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핵폭탄을 매체로 살생을 '신의 메시지'로 표현하는데 우리가 이를 일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서 "좌익, 레프트는 절대 유일의 옳다는 고집은 옳지 않다. 롱(wrong)이 라이트(right)에 맞을 수 있다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버려지는 것, 찌꺼기, 쓰레기 같은 것이 레프트이다. 국민적 룰, 반국민적 주체성. 주변인, 소수자, 소수성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왜 '자'에 괄호를 쳤냐면 반드시 소수자 사람, 집단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전규찬 교수는 발제문을 펼치고 "대마, 문신을 언론으로 봐야 한다. 문신은 언론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3자적 자세가 아니라 문신, 대마 자체를 언론으로 해석해서 고발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나아가 "국민이라는 추상적 이념적 주체를 깨고 인민이라고 하는 보통 사람을 부르는 일"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매체문화운동의 소수(자) 되기를 강조한 전규찬 교수는 발제문의 뒷부분에서 "소수(자)적 분열과 자율, 연대가 대중매체 뿐 아니라 언론운동 진화의 열쇠다. 경직된 이념과 표준적 가치, 일원적 언어의 체계를 파열시킬 차이와 행복, 상상력의 백터들이 지유롭게 폭발해야 한다. 반란하는 것만이 정의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체제의 진화 및 매체문화운동의 민주적 구성을 위한 실천 강령이자 탈영토화, 재급진화 프로젝트의 전략이며 목표라고 강조한다.

발표에 나선 서동진 연세대 강사는 "재미가 없네요"라고 인사말을 던지고, 이원재 사무처장의 발제에 대해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과연 멋있는가. 과연 반자본운동이고 진보적 문예운동을 대신하는 획기적인 대안인가"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진보적 문예운동의 성과들을 청산적으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80년대 문화는 오리혀 비옥했다. 그다음이 90년대이고... 문화가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근본적 문제에 육박할 때, 문화가 정치화 될 때 가장 풍요로웠다"고 주장했다.

서동진 연구자는 "공공성을 넘어 반자본으로, 좌파정치와 함께 사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오늘날 공공성이 남용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일상의 공공성을 접하는 곳이 다름 아닌 쇼핑몰이라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과거 공공의 장이 싸롱이나 광장이었다면 지금은 쇼핑몰이 그 기능을 대신하는데 쇼핑몰에서는 구걸이나 유인물 배포와 같은 공공적 행위가 불가능하다고 사실을 환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