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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가 이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한국의 속물적 경제관계 인사들에게 게이츠의 지적은 큰 충격으로 다가서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패러다임이 필자가 줄곧 주장해온 견해와 흡사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2006년 게이츠와 흡사한 견해를 한국사회경제학회 학회지 ‘사회경제평론’에 두 차례에 걸쳐 ‘공동체의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게재했고, 이를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바 있다.

게이츠는 이타심을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정조론’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경쟁에서 탈락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해온 신고전파경제학의 실패의 근원이 그 이론의 기본적 전제 속에 잉태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 대학 강단을 지배하는 신고전파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개인을 독립적 존재로 보고, 효용의 극대화와 이윤의 극대화를 절대적 가치라고 믿는 ‘경제인’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심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그에 훨씬 앞서 출간한 ‘도덕정조론’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며, 이타심이 없는 이기심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강조는 인간이 고립해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게이츠는 이기심만으로는 안 되고 이타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창했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패러다임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을 전제로 한 것으로부터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한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필자가 앞의 논문에서 강조한 것은 인류가 수만년 이상 공동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객관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결코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독립성이 강해졌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습성을 키웠지만, 이타적 공동체성을 저버리면, 수전노로 낙인 찍힌다. 경제정책도 이기적 영역은 사적 영역에 맡길 수 있지만, 이타적 공동체적 영역은 사회공동체, 즉 국가의 책임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이기적 사적 영역을 지나치게 키운 나마지, 이타적 공적 영역을 경시한다는 점에 있다. 종전의 경제학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론’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으로서 ‘공동체의 경제학’에 관한 토론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 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출처 : 경향신문
날짜 : 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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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코레아협의회 최현덕 소장 “함께 가는 상호문화로”
입력: 2008년 01월 28일 18:29:08
 


“ ‘다문화’라는 말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현상을 기술할 뿐이죠. 이 바탕에 ‘상호문화’라는 내용과 가치를 채워야 합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쓰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 땅에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독일 베를린 소재 민간단체인 코레아협의회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최현덕 박사(49·사진)다. 그는 지난 10~12일 전남대에서 열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에 ‘상호문화철학’을 처음 소개한 최박사를 지난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규정했다. “제 인생의 절반이 외국 생활이었죠. 오랫동안 외국에 살면서 정체성 문제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너는 너무 독일식으로 변했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말에 대해 제 입장을 갖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덕분에 한국 사회에도 익숙해진 말이다. 최박사는 디아스포라를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통은 면(面)에 있어야 자리가 있다고 인식하지만 선(線) 위에 있어도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 위에 있으면 면 위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어째서 이쪽에서 억압적인 것이 저쪽에선 아무렇지도 않고, 이쪽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는지 말이다.

이쯤에서 상호문화철학에 대해 궁금해졌다. 최박사는 이를 “철학계 내의 대안활동”이라고 했다.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 철학의 모든 분야를 통괄하되 ‘상호문화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철학”이다. 남미 철학자 호세 마르티가 1877년 “철학의 발생지가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있으며,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미 대륙에 존재했던 사유전통도 같은 권리로 철학에 포함돼야 한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 말 서구중심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최박사의 주도로 2006년 11월 전남대에 처음 국제대회가 열리며 소개됐다. 두번째인 이번 대회에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과 베네수엘라 문화부 차관 등이 발표자로 나와 각각 자국의 사회적 연대의 기초와 민중교육·철학교육 등에 대해 토론했다.

“철학은 타 학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도구를 가졌습니다. 서구에서 철학이 대학 강의, 연구서 출판, 철학회 결성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제도화됐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자(賢者)의 구술로 표현되기도 했죠. 문화적 맥락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철학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multi)문화와 구별되는 상호(inter)문화에 대해 물었다. “ ‘여러 문화가 한 사회 속에 공존한다(다문화)’고 할 때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문제됩니다. ‘다문화’는 여러 문화가 있는 속에서 나오는 정책들을 얘기할 뿐,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죠. 하나의 주류문화가 다른 것을 흡수하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 문화들이 서로 게토처럼 고립돼 존재할 뿐이죠.”

이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여성들이 한국의 주류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 내에 ‘다문화정책팀’이 신설되긴 했지만, 정부나 주류사회가 보여주는 공식적인 태도는 좋게 말해야 ‘보듬어안기’다. 서양이 낯선 존재를 만나온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종을 강요하며 ‘동일화’한다든지, 알카에다에 대해서처럼 맹목적으로 두려워한다든지,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경우처럼 ‘낯섦’을 자신을 보강해주는 쉼터 정도로 삼는 것이었다.

최박사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주변화하는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의 ‘동등성’과, 언제든 자신이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임하는 ‘대화’를 상호문화의 요건으로 꼽았다. 그런데 권력관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낯선 존재끼리 과연 ‘동등한 대화’가 가능할까. 그는 ‘낯섦의 해석학’을 언급했다. 곧 낯선 존재에 대한 이해다. 이 과정에서 해석 또는 번역이 필요한데, 낯선 존재 자신이 번역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낯선 자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그 모름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동시에 모름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지니고 열린 태도로 임할 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교과과정에서 국민윤리 또는 도덕으로 왜곡돼 있는 시민교육 또는 철학교육이다.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단지 교과과정의 내용으로 포함되는 것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반영해 도덕 및 철학교육 자체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디아스포라가 단지 소수자, 희생자인 데서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관점으로 다수자들이 그냥 넘겨버리는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 사회를 형성해가는 더욱 적극적인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적인 얼굴을 하게 되겠죠. 이제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반영된 교과과정을 고민할 때입니다.” 독일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많은 관련을 맺었던 이 여성 철학자는 이제 선 위에 서서, 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 최현덕 박사는? -

1980년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후 독일 유학, 97년 브레멘대에서 ‘사회비판 개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형성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 후반에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핵시대의 한국인’ 사진전, 구속 민중미술인 국제석방 캠페인 등을 벌이며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박사학위 후 일시 귀국,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지만 2000년 학내 분규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역시 그리스도신학대의 학내 문제로 재임용되지 못한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현 전남대 교수)과 함께 ‘거리의 철학자’로 일했다. 2001년 이후 독일에 체류하며, 한국에 있는 김교수를 끌어들여 2006년부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두 차례 열었다.

〈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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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3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연이어 출간한 우석훈 씨를 만났습니다. 한국의 20대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경제학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사회를 돌아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인문사회 독서 시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함께 나눴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김현주, 박하영)

   

20대를 위해 쓴 <88만원 세대>

알라딘 : <88만원 세대>는 출간되자마자 책이 품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출간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우석훈 : <88만원 세대>는 철저히 “20대의 입장에서 보고 20대를 위한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20대는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지 않는대요. 몇몇 출판사에서 386세대나 그 윗세대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일부를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처음 만드는 출판사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리 점검해야 하는 부분들을 미처 다 챙기지 못했어요.

알라딘 : 8월 22일까지 <88만원 세대>를 구입한 분들 가운데 20대 독자가 25%입니다. 예상하신 비율과 비슷한가요?

우석훈 : 예상보다 20대가 조금 더 산거죠. (웃음) 책을 기획할 때는 20대가 70% 이상 사주길 바랬는데 주위에서 “그건 무리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20대가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386세대나 50대의 눈에 맞춰 내용을 바꾸지 않고 처음에 생각한대로 마무리했고요. 20대 비중이 좀더 높아졌으면 좋겠는데, 지나봐야 알겠지요.

알라딘: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386세대나 50~60대 분들은 어떤 소감을 밝히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책을 읽은 20대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요, 서평으로만 접한 20대는 “그래서(위기라서) 어쩌라는거야?” 하는 식이죠. 50~60대는 “문제를 어떻게 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요, 386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별 피드백이 없었어요.

알라딘 :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를 2권 더 출간할 예정이시죠? 이 시리즈를 기획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올해로 박사(경제학) 12년차거든요. 10년째 되었을 때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에 대해 그간 생각해온 내용들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기회가 안 됐어요. 그걸 올해 하는거죠. 대선이 끝나고 내년이 되면 사회가 바뀔거고 그때는 이런 책을 출간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내 살길만 찾겠다’는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다

알라딘 : 2007년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보면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이 종합 15위, 신간 가운데서는 4위를 차지했습니다.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위기의 본질이 ‘조직론의 부재’에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기업은 외부와 경쟁하고 내부에서는 경쟁을 줄여야 한다는 게 경제학의 기본 통찰이라고도 하셨는데요. 이른바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 류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조직론의 부재’에 대한 개인 차원의 대응일까요?

우석훈 : 경제학은 구조를 봅니다. 열 명이 가운데 아홉명을 떨어뜨리는 게임일때 그 가운데서 한 명이 되는 게 처세술의 접근이라면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열 명을 살릴지’를 고민하죠. 개개인이 열심히 살려고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고 회사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어요. 사회나 회사가 어떻게 되든 ‘나는 내 살길만 찾겠다’는 건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개인이 그렇게 해도 회사에서 자르기로 한 사람을 안 자르진 않을 거고요. 개인이 대응전략을 세우면 조직은 그것을 솎아내기 위한 대응전략을 금방 만들죠.

위기가 오면 난파선에서 쥐가 먼저 뛰어내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 책이 그 쥐가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건데, 그건 대중적 인기는 높죠. 반면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에서는 배를 가라앉지 않게 할 방법을 논의 하고요.

20대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20대에게 난파선이 아닌 멀쩡한 배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죠. 이런 얘기들은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이 하는데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똑같은 얘기를 개인들한테 하면 거기엔 관심이 있고요. 기본 학문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흐름이죠.

이른바 명문대에서 논술 채점을 하는 교수님들께 들으니 학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논술 채점의 기준이 된대요.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혼자 책을 읽고, 더듬더듬 하면서도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을 찾는거죠. 학원에서는 트랜드라고 가르치지만 결국 논술 답안지에 있어서는 굉장히 떨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회사도 그렇고요. 회사는 유능한 사람을 원하지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사람은 원치 않아요. 처세술 책의 마음은 이해 가지만 개인에게 그렇게 도움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알라딘 : 네, 최근 2~3년 사이에 자기계발서 시장이 정말 크게 성장했습니다.

우석훈 : 사회가 불안해서죠. 어려울 때 종교나 예언서가 유행하잖아요. 사회가 안정되고 삶이 좀 평온해져야 끝이 나죠. 옛날에는 예언서가 유행했다면 21세기에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는 것 같아요. ‘이런 주문 외우면 총 맞아도 안 죽는다’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자기계발서가 주는 처방이 몇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겠죠. 하지만 평균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 한 번도 검증된 적은 없어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신문독자로서 20대가 열악하기 때문에 신문들이 20대를 그저 ‘얼굴 없는 세대’ ‘부모들에게 기생하면서 독립을 포기한 세대’로 치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석훈 : 당연한 거죠. 우리 사회도 마케팅 사회로의 전환이 끝났어요. 마케팅이란 건 구매력 있는 집단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일 아니에요? 20대가 무슨 신문이든 구독을 많이 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20대가 신문을 끊으면 큰일이다고 하면 신문도 20대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겠죠. 한 줄로 뭉뚱그려 쓰지 않고 20대 가운데서도 21살은 이렇다. 22살은 이렇다 하고 풀어 쓰겠죠. 화장품도 마찬가지거든요. 30대가 여성 화장품 시장의 중심이잖아요. 30대 용으로 신제품을 개발해서 라벨링을 없애고 포장을 싸게 하면 20대 용이 되요. 피부민감도는 20대, 30대 모두 다른데 20대용 화장품은 안 만든다는 거죠.

알라딘 : 20대 문제를 고민하는 책을 찾기 힘든 것도 같은 이유일까요?

우석훈 : 어차피 안 살거니까. (웃음) 예를 들어, 농업에 대한 책은 잘 안 쓰잖아요. 농민들은 책을 잘 안 읽으니까. 책 한 권을 쓰려면 저자가 최소 6개월에서 1년을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책을 써도 읽어주지 않으면 결국 고민을 하지 않게 되죠. 90년대 초반을 보면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그 20대의 애환을 담은 소설이 굉장히 많았어요. 공지영 씨 책이 대표적이죠. 그 세대가 이제 서른이 되었다. 또 마흔에 가까워졌다. 그런 걸 담아가는 게 삶의 기록이거든요. 근데 지금 20대를 위한 삶의 기록은 거의 안 나와요. ‘너네는 무식하다’ 너네는 나약하다‘ ’너네는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꾸짖는 책이 좀 나오는데 그것도 주류가 아니죠. 이런 게 결국 고민이 적어진다는 얘기에요. 20대를 다룬 소설도 나오고 시도 나와야 그 다음에 분석서가 따라갈텐데 지금은 그것조차 없어요.

알라딘 : 반면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같은 책이 눈에 띕니다.

우석훈 : 그런데 미치면 더 불행해지죠. (웃음)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거죠.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짱돌이 있을까요?

"짱돌" 얘기는 고민 많이 했어요.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는 모두 생태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해요. 생태적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제개 주문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란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모든 20대를 구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좀 과하죠.

결국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 관심도 없는 거고, 문제를 풀 수도 없어요. 토플책을 덮으라는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 변화로는 문제를 풀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구조화되었다는 것이에요. 그 구조화에 맞서기 위해 자기도 구조화되어야하죠. 제가 생각한 것은 ‘20대 국회의원이 나온다 ’ ‘기업의 주니어 보드 같은 이사회에 20대가 들어간다’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목표로 하면 굉장히 많은 20대가 모여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해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찾는 답이 뭐라고 좋으니 모여서 답을 찾기라도 하라는 거죠. 답이 안 나오면 20대가 아니에요.

대표를 만들고 스스로 조금씩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딪히는 수밖에 없어요. 윗세대는 룰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요. 그들이 제시하는 룰을 하나씩 깨지 않으면 바꿀 방법이 없죠. 이를테면 고시를 보는데 거기에 부당한 문제가 나왔어요. 그럼 다같이 모여서 문제를 그렇게 내면 안 된다고 해야 그게 바뀌죠. 자기 혼자 방에 앉아서 ‘이번에는 떨어졌지만 내년에는 잘 풀어야지’ 해서는 답이 안 나와요.

싸워야죠. 안 되는 걸 안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그런데 20대가 싸워본 경험이 한 번도 없거든요. 소리 지르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 하고, 정색해서 말하면 바로 입을 닫아요. 그래도 싸움을 좀 해봐야죠. 정의롭고 명분있는 싸움 있잖아요. 나와는 상관 없어도 ‘저 사람들 불쌍하다’하며 나서서 싸우는 경험이 필요해요.

386세대는 지금도 ‘우리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하면 광화문으로 모이죠.(웃음) 근데 20대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그래도 참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죠. 그렇게 하면 실체가 못 되는 거에요. 프랑스의 68세대는 평생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어요. 10대때 한번 화끈하게 싸우고 ‘우리 건들면 알지?’하게 된거죠. 그 사람들은 은퇴해서도 풍요롭게 살게 되는 거에요. 혼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렇다는 거죠. 한 두 명은 살 수 있지만, 내가 그 한 두 명이 되긴 힘들어요.


알라딘 : 20대가 쓰는 책도 “짱돌”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20대 저자가 거의 없어요.

우석훈 : 두 가지가 문제인 것 같아요. 일단은 습작기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안 되요. 두 번째는 과감하게 나오는 20대에 대해 사회가 용인하는 분위기가 죽었죠. 요즘은 20대를 애들 취급 하잖아요. 불만이 있으면 날것으로라도 그게 나와야 하거든요. 그래야 피드백이 있죠. 20대 가운데 정교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대신 그때는 메시지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세대간 협동진화죠. 새로운 것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약해졌어요. 결국 이런 게 전체적으로 약자들, 어린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좁힙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만 힘든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힘들어져요.

우석훈이 말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알라딘 : <88만원>세대에서는 20대에게 지금처럼 책 안 읽고는 386세대와 경쟁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일주일에 책 두 권도 안 읽으면서 무슨 엘리트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0대에게 책을 읽으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것 같아요.



우석훈 : 책이라는 게 단순한 정보가 아니에요. 책을 붙잡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끈기를 요구하는 일이거든요. 책은 재미없어요. 좋은 책일수록 그래요.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참고 읽지요. 386세대는 해방 이후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세대인데요. 그렇게 책을 읽은 사람들의 지적, 예술적 능력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또 그 사람들의 자식들이 지금 10대인데요. 청소년 책 시장도 크거든요. 제가 책에서 ‘세대간 경쟁’을 강조했는데, 지금 20대는 그런 386세대나 10대와 경쟁하게 되요. 그러니 책을 읽으라는 겁니다.

알라딘 : 20대때는 어떤 책을 주로 읽으면 좋을까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주세요.

우석훈 :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책을 불신하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그 대신 읽고 싶은 주제를 하나 택해서 가장 최근에 잘 나온 책을 하나 골라요. 거기보면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책들이 쭉 소개되어 있잖아요. 그 계통을 따라 읽고 정리를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식으로 읽으면 자기 지식으로 남아요. 아무거나 막 읽으면 남는 게 없는 것 같고요. 또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쓰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전체를 포괄해서 서평을 쓰기 보다는 읽으면서 배운 것, 기분 나빴던 것 등을 그때그때 정리하는 거죠. 서평에는 과시적인 면이 있는 것 같고요.

알라딘 : 재미를 위해서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우석훈 : 일본 만화를 봐요. 또 요즘은 19세기 영국 소설들을 읽고 있고요. 디킨스나 홈즈 시리즈도 다시 읽고요. 19세기 영국을 다시 읽는 건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유행이에요. 최근에 나온 예술이나 창작들은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에 대응해서 원형들을 보려는 시도를 하는 거죠. 19세기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의 심장이었어요. 21세기 미국 중심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게 파편화되어 있으니까 19세기로 돌아가 그 사람들이 품었던 고민을 보려는 거고요.

알라딘 : 20대에게 어떤 책을 권하고 싶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소설로 먼저 읽고 <스팀보이>라는 일본 만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스팀보이>는 19세기의 영국과 미국 자본의 갈등을 일본 사람이 해석한 거거든요. 일본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고민들이 예술적으로 담겨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그 소설이 나쁜다고 말하는 <스팀보이>를 보면 민족주의, 쇼비니즘, 자본주의의 지나친 경쟁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요.

알라딘 : 마지막으로 알라딘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80~90년대에 아카데미 같은 걸 했잖아요. 조금 길게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강좌를 마련하거나, 책을 읽은 사람들이 창작을 해보거나 토론을 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매개로 사회와 소통하는 부분에서 구심점이 되면 좋겠어요. 또 대부분의 출판사나 작가는 자기 책밖에 모르는데, 알라딘에서 일하는 분들은 출간되는 책을 다 접하잖아요. 그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가 있을텐데, 그런 정보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우석훈 :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인생의 1/4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의 외국에서 지냈고, UN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를 마지막으로 국제협상과 공직생활에서 은퇴했다. 한겨레신문에 '여기는 명랑국토부'을 연재하던 시절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지은책으로 <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국부론>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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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여 서양에서 벗어나라
서양사학회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한겨레 강성만 기자
 






최갑수 교수 ‘한국 현대사 연구 개입’ 주장

“서양을 운위하는 것으로 서양사의 존재성이 인정받는 시대는 지났다. (중략) 아예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올해로 한국서양사학회가 꾸려진 지 50년이 된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5~6일 한국서양사학회 주최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및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리는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에서의 서양사연구, 근대성의 인식과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에 발표한 논문 ‘한국의 서양사학과 근대성의 인식’에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과 이에 대한 서양사학계의 구실을 강조했다.

최 교수가 보기에 지난 50년 국내 서양사학은 ‘근대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해 온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암묵적 합의” 때문에 서양사 연구자들은 단순히 서양의 역사적 경험이나 역사 이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근대성의 핵심 이념을 ‘발전’으로 본 국내 서양사 연구자들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제국주의로 다가온 점이나 (근대성의) ‘인권 혁명’이 예속을 해외로 수출하는 과정을 수반했음을 명쾌하게 짚어내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이런 ‘인식지평’은 해방 직후 한국 역사학이 일본 선례를 따라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삼분돼 출범한 것과 잘 맞아 떨어진다. 서구를 특화시켜 주는 동시에 역사학 내부에 칸막이를 만들어 장기적으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국내 서양사학의 선구자들을 일본이 ‘공급’했다면, 이를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키워낸 ‘원동력’은 미국이었다. 1차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 국민윤리과목으로 도입된 ‘문화사’는 해방 직후부터 각 대학 교과과정에 예외없이 포함됐다. 서양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 과목은 유럽이 이룩한 근대성의 밝은 면만을 주로 부각시켰다. 친서방적인 태도를 길러준 것이다.

서양은 이제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근대화’에서 ‘선진화’로 바뀐 구호가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서양사학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최 교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양사 연구와 교육에 적극 반영하려는 노력”을 넘어서,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최근 몇몇 서양사학자들이 연구중인 ‘과거청산과 집단기억의 역사학’ ‘대중독재론’ ‘영국을 통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비교’ 등의 주제가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그는 서양사학이 역사분쟁을 헤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했던 동아시아 역사세계의 공통의 구조를 발견해봄으로써 자국과 지역사(동아시아사) 사이의 괴리를 뛰어넘어 소통을 꾀하는 것이 온당해보인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02)820-5167.

강성만 기자




 
기사등록 : 2007-07-04 오후 05: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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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이광수를 다시보다

“연옥에서 사후인생을 보내는 근대성에 반하는 근대론자”
이광수 다시보기: 민족과 문학사

 

신동준 코넬대 교수 master@dambee.net

 

최근 99회째 만남을 마치고 대망의 1백회 모임을 앞두고 있는 부산대 인문학담론 모임이 인문학의 논쟁적 담론의 수혈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 지난번 석굴암 재해석 논문 이후 이번 99회째에는 이광수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 문화론적 민족주의 해석의 한 모델을 선보였다.
아래의 글은 신동준 코넬대 교수가 지난 5월 17일 모임에서 발표한 글이다. 신 교수는 한국에 연구년으로 나와 이광수에 관한 단행본 준비를 하면서 그 책의 기본 골격과 메시지를 요약해 발표했다. 아래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주

지난 25년간 미국 역사학계에서 일어난 핵심 논쟁 중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문화학(cultural studies; 혹은 포스트모던이즘)과 역사, 양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80년대 문화학이 등장하면서 기존 역사학계는 위기를 맞았다. 당시 이 둘의 논쟁은 주로 보수 대 진보 였다. 진보쪽은 역사학계의 핵심개념들을 공격했고 보수쪽은 포스트모던니즘의 피상성과 비합리성을 비난했다. 이제는 첫 위기가 끝난 것 같아 보인다. 최근에 한 학자는 이런 논쟁이 이제 지루하다고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문화사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10년전부터 문화사는 미국 한국사학계에도 도입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문화연구가 한국학내에서 지배적 동향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다. 또 한편으로는 문화이론을 많이 활용한 역사책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문화연구 (문학이론)는 역사학한테는 타자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역사학은 역사학방법론으로서 이같은 이론을 수용하기 싫거나 아니면 수용하지 못 하는 것 같다. 시대적 과제는 아직도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모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발제는 첫째, 내가 이해하는 문화연구, 그리고 (그것의) 무엇이 유용한지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문화연구의 한계를 살펴보기 위한 일환으로, 문화이론에 대한 비판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문화이론은 보수 역사학한테 비판을 받았는데, 최근에 진보쪽에서 심지어 초기 문화연구를 주창하던 학자들이 문화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세번째 부분은 내 책에 대한 구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난 25년간 학계내 흐름중 가장 두드러진 은것 문화학의 등장이었다. 문학학은 원래 1960~70년대 등장했는데 당시 미국내 사회과학계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근대화이론이었다. 유럽중심주의와 여타 metanarratives에 대한 비판의 한 방법으로서, 비판적 학자들은 근대화이론이 귀기울이지 않고 폄하했던, 특히 이데올로기나 의식같은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근대화이론은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구조적 요인을 중요하게 여기기때문에 이 시기 지성사는 당연히 하향추세였다.

문화학은 1980년대 이데올로기나 의식을 연구하는 작업에 새로운 추동력을 제공하였고, 역사학계내에서는 그 영향이 ‘새로운 문화학’의 등장으로 표출되었다. 문화학이 학계에 기여한 공헌 중의 하나가 이데올로기 연구를 조약한 경제결정론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학자간 편차는 다양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데올로기를 경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산의 한 형태라고 이해하는 알뛰세의 개념을 수용했다. 탈근대주의, 탈구조주의, 탈식민주의 역시 부분적으로는 이같은 이데올로기 인식의 소산( 그리고 하나의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지성사 기존의 저자-텍스트-청중(독자)의 이해방식을 뛰어넘기 위 한 한 방법으로, 문화학을 통는 담론분석이라는 형식을 도입했다. 무엇보다 담론분석은 텍스트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텍스트라는 용어는 단순히 인쇄된 것 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시각자료, 심지어 사회적 혹은 개인적 삶, 기호 체계로 구성된 모든것을 의미했다. 아주 단순화시키면 종래의 지성사는 주요 사상가의 사상을 설명하고, 그들이 그 시대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담론 분석은 종래 지성사의 ‘초월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텍스트를 저자의 사상의 표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기호학이 발전시킨 방법을 사용해서, 담론분석은 intertextual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일련의 텍스트내에서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담론 분석의 또다른 초점은 기구(institution)와 담론간의 상호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연구한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문화학은 사상의 내용보다는 텍스트와 지식이 권력과 관계맺는 방식, 가령 어떤 담론이 어떤 권력을 생산하는지를 검토한다.

주지하듯이, 문화학의 등장은 민족주의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일으켰다. 물론 기념비적인 저서는 1983년에 초판된 Benedict Anderson’s Imagined Communities, 같은해 Eric Hobsbawm and Terence Ranger의 The Invention of Tradition이 있다.

문화학은 민족이 먼 과거의 ‘ethnic’ 공동체의 원시적 형태라기 보다 근대적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 경향중 하나는 공식적 의례(ritual)와 기구에 초점을 두어 국가가 엘리트 중심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민족을 이용하고, 소수자와 서발턴 그룹을 배제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문학이론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대중 문화가 ‘민족’을 서술하는 형태를 검토하고 ,어떻게 대중 소비가 기존 권력구성에 동의하는지를 밝히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같은 연구들의 공통 지점은 계급 혹은 경제수탈이라는 분명한 형태의 지배보다 다른 형태의 지배방식을 밝히는 것이다. 푸코나 들뢰즈 이론의 영향하에 문화학 학자들은 ‘미시정치’ 영역내에서 ‘모세혈관처럼 작동’하는 권력에 초점을 두어왔다. 국가 혹은 경제와 관련된 법적인 형태로서의 권력보다는 일상생활 수준에서의 권력의 작동을 검토한 것이다. 최근 연구는 이같은 이론을 민족주의에 적용하여 민족 정체성을 창출하는 재연적(representational), narrative 전략을 밝히는 개념과 분석도구를 만들어냈다.

문화학에 대한 비판

하지만 최근들어 문화학도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 비판적 흐름에는 초기 문화학을 주도했던 역사학자들까지도 참가하고 있다. 우선, 문화학에 대한 비판은 문화학의 극단적인 형태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망각’(obliteration of the social) 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사(new cultural history)는 사회사가 유지했던 계급과 사회구조에 대한 고민 혹은 관심이 거의 없다. 문화학의 도입이 기존의 국가-시민사회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 동시대 사회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 패러다임의 갖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데 유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사는 국가-시민사회 패러다임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하지 못했고, ‘사회적인 것’을 재개념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로, ‘문화가 사회적인 것을 전반적으로 대체’하였기 때문에 핵심 용어가 문화 담론에서 소멸하고 있다. 가령, 자본주의는 점차적으로 근대성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대체되어 왔다. 이 전환이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의 감소이다. 탈구조주의의 과잉속에서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을 띤 하나의 생산 양식으로 축소되어 또 하나의 metanarrative가 되었다.

민족주의 연구와 관련해서, 민족이 구성되었다는 문화학의 지적은 옳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충분치 못하다는게 또 하나의 비판이다. 민족은 구성물 이상이다. 민족은 국가와 자본의 형태(예를 들어 정치경제), 양자에 의해 성립됨에도 불구하고, 문화학에서는 이 두가지 요소가 생략되어 왔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증거는 민족에 대한 비판과 세계화가 탈민족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의 지속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민족의 개념을 살펴보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문화 연구는 후기 자본주의 단계에 이른 미국 이데올로기의 학문적 반영이라는 비판도 있다. 풀어 말하자면, 문화연구때문에 학자들이 70년대 이후 일어난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들을 놓치게 되는 (misrecognize)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미국자본주의의 근본원리였던 포디즘(Fordism)은 70년대부터 하비(David Harvey)가 말했던 소위 유연한 축적(flexible accumulation)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flexible accumulation란 노동, 금융, 상품, 생산의 이동성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연구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비판이라고 하지만 그 비판은 사라지고 있던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Fordism에 대한 것이지, 그 이후 새로이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형태에 대한 비판이 아니였다.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Flexible accumulation 체제하에서 기존 사회관계가 불안정하게 되면서, 학자들이 사회구조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됐다. 금융과 생산의 비중이 역전되어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니 자본주의는 그 중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소비의 비중이 커지면서 언어, 기호, 표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있다. 즉, 문화연구는 flexible accumulation 시스템 밑에서 일어나고 또 겪는 경험들을 학문 차원에서 표현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인종관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다. 문화연구는 서구중심주의를 부정하지만 그 부정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전통안에서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또다른 서구중심주의 (또 다른 전통)를 창출한 것입니다.

이광수와 민족

앞으로 내가 쓸 책의 목표는 이광수의 텍스트와 행적을 통해 3.1운동 이후 핵심 담론으로서 민족의 등장을 밝히는 데 있다. 이광수는 가장 유명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한국의 민족주의를 보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이광수 이름에 붙어다니는 ‘반역자’, ‘친일파’라는 꼬리표는 검열의 형태로서 작용해 왔다. 연구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친일행적에 집중된 관심은 이광수의 텍스트가 생성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까지 억압되어 왔다.

최근 이광수에 관한 연구는 이광수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식민지 시기 역사를 재해석하는데 유용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이광수와 한국의 민족 정체성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이용해서 한국 민족주의의 본질을 조명하려고 한다. 이광수는 민족내에서 중심부와 주변부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같은 모순된 위치는 민족 내부나 외부에서의 비판을 용이하게 한다.

이광수는 보기드문 연옥에서 사후인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왜 그는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협력하였을까? 그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잃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광수가 갖는 패러독스중의 하나는, 그 수수께끼가 답을 요구하면서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패러독스는 이광수에 대한 연구에서도 반영된다. 한편으로 어떤 학자들은 친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 이광수가 어떤 시기에도 진정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는 듯이 이광수의 초기 행적을 검토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다른 일각에서는 친일 문제를 제쳐두고 문학과 지성사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킨다. 최근까지, 김윤식의 ‘이 광수와 그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정면으로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는 없었다. 이광수에 대한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다. 요약하면, 이광수는 한국 근대성의 유령과 같은 존재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의 주요 목표는 3.1운동 이후 담론의 주요 용어로서 ‘민족’의 등장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민족’의 계보를 만드는 데에는 몇가지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광수의 텍스트와 행적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광수는 1910년대 등장한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하나였고 2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그의 텍스트는 1919년 이전과 이후의 담론 변화를 추적하는데 적절하다고 본다. 또 한편으로, 이광수는 국내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 인물이었기때문에 그의 행적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맞물려 있었다. 이광수는 그가 민족주의담론의 형성과 민족주의 엘리트의 형성의 교차점에 있었다는 점에 그의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광수는 텍스트와 사회적 과정을 연결을 보여주는 접점이다.

이광수의 텍스트와 행적을 같이 보는 것은 다른 종류의 역사서술을 가능하게 한다. 직선적인 지성사는 이광수 사상이 민족주의 운동에 끼친 영향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다른 한편 전기적인 접근은 이광수의 일생과 텍스트가 서로를 반영한다는 듯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담론과 사회적 발전, 둘 중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지 않은채, 일정 형태의 담론과 사회발전과의 관계를 이광수를 통해 보는 것이다.

각 장은 민족의 특정 측면을 보기 위해서 텍스트이건 기관이건 이광수와 관련된 각기 다른 ‘실마리’를 볼 것이다. 이 광수가 분명히 이 책의 초점이긴 하지만, 이광수는 어떤 장에서는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목표는 어느 한 요소에 치우지지 않는 ‘결합적인’(conjunctural) 역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이 책은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3.1운동을 통해 어떻게 결합하였고, 당시 핵심 담론으로 등장하였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사회사와 문화사의 방법을 조합해서 이 책의 목표에 접근하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광수의 텍스트를 통해 민족 담론을 분석하고, 이와 동시에 이광수의 행적을 통해 당시 민족주의 지식인의 사회사를 결합하려고 한다. 사회사의 방법론은 문화사의 민족주의 접근법이 갖고 있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째, 이 책은 ‘민족’에 있어 사회사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이 책에서는 민족이 단지 구성물이거나, 일종의 신화 혹은 상징이 아니다. 민족은 행동과 사회내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례(social practice)의 하나이다.

사실, 이 광수는 민족이 재연(representation)과 사회적 관례(social practice), 양자의 표현임을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기때문에 이광수의 텍스트를 통해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를 검토하는게 가능하다. 둘째, 식민지 한국은 국가-시민사회 패러다임의 유용성을 시험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1919년 이전의 한국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는데에는 유용하지만, 그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는데에는 새로운 사회적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민족의 등장으로 미시정치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지배의 형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이지만 그래도 가능해 보이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잠식하려는 의도에서 일상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었다.

셋째로, 이 책은 민족담론이 어떻게 인쇄자본주의라는 기구를 통해 생산되었는지를 검토한다.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지적하였듯이, 민족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자본주의 형태이다.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앤더슨은 인쇄 자본주의의 문화적 측면, 시공간 인식상의 효과에 주목했다.

민족은 자본과 지식 생산의 관계망에 위치하면서 지식 생산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식민지 맥락에 있어서, 인쇄 자본주의는 피식민지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안되는 기구중의 하나였기때문에 더 중요하다. 식민국가는 감시와 생체권력(biopower)의 조직(apparatuses)을 실질적으로 독점하였기 때문에, 식민통치기 동안 인쇄 자본주의는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기능했을 뿐 아니라 피식민 자본가에게는 가장 성공적인 사업 아이템 중 하나였다. 이 맥락에서 식민지 부르주아의 형성과 담론생산에 있어 인쇄 자본주의의 역할을 검토할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자본주의 발달과정 속에서 ‘민족’의 등장을 재정립하는데 기여하리라 본다. 1990년대 당시 남한 역사학계의 젊은 세대들은 계급적인 맥락에서 식민지기 사회-지식인 운동을 살피는 중요한 연구물을 내놓았다. 민족의 등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계급분석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상품의 역할에 초점을 둘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과 사회적 삶의 상품화의 관계이다. 민족으로의 전환은 ,한편으로는 도시의 거리 생활, 사회주의 운동등으로 보여지는 근대성의 과도함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했다. 다른 한편, 민족 등장의 전제 중의 하나는 상품의 생산과 전국적 시장의 형성이었다. 레이몬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면, 이광수는 여러 면에서 ‘근대성에 반대하는 근대론자’ (modernist against modernity)의 고전적 예였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1919년 이전이고, 후반부는 3.1운동 이후 약 10년정도의 이야기이다. 각 부분의 앞부분은 사회사, 뒷부분은 담론과 ‘민족’의 문학적 나레이션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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