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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지하실에서 듣는 빗소리
90년대 포크를 대표하는 엘리엇 스미스, 〈New Moon〉의 미발표곡으로 다시 만나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2호 2007년 5월 31일


1990년대 대중음악을 열었던 화두가 시대정신이었다면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던 말은 ‘취향’이었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음악이 그런지로 촉발된 얼터너티브 혁명이었고, 포크는 취향을 리스너들의 입에서 꺼내게 했다. 전통적인 포크가 아닌, 90년대의 감성을 담아낸 새로운 포크 말이다.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가 선봉에 있었다. 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믿었던 90년대 초반의 소년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좌절했다. 청년이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힌 그들의 귓가를 적셔주던 음악,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는 필청의 리스트와 마찬가지였다.

전사 커트 코베인, 패잔병 엘리엇 스미스



△ 엘리엇 스미스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었다. 마지막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달랐다. 벨 앤드 세바스천이 마음 한구석에 사랑과 낭만을 간직한 이들의 음악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사랑과 낭만에 마지막 좌절을 경험한 이들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1969년 스티븐 폴 스미스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2003년 10월 엘리엇 스미스란 이름으로 자신의 심장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꽂았다. 그 순간까지 35년.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해지는 걸 누구보다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때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던 노랫말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상처투성이였고 상처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제 발로 상처 곁으로 걸어가는 게 음악 속에서 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지친 영혼일지라도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증’ 쪽이 훨씬 많았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마음속 세상에는 언제나 빗줄기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원할 때 네가 원하는 걸 하라. 비록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을지라도. 거대한 허무일지라도’라고 끝을 맺는 〈Ballad Of Big Nothing〉. 음악평론가 성문영이 ‘거대한 허무의 발라드’로 해석한 이 노래의 제목은 어쩌면 그의 모든 노래에 담긴 주제어일 것이다. 사방이 온통 막다른 골목인 궁지의 공간, 엘리엇 스미스는 그곳의 지하실에서 노래했고 이야기했다. 도피할 곳 없어 세상의 틈새에서 방랑하는 이들에게 그의 노래만큼 위로의 담요 구실을 해주는 도구는 없었다. 소통에 힘겨워하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는, 세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억지로 웃음짓는 개인들에게 엘리엇 스미스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프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군단을 진두지휘하던 장수의 전사였다면, 2003년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와 몸부림치던 낙오병의 고립된 사망과 같았다. 그와 심정적으로 연결된 개인들만이 조용히 추모할 뿐인 쓸쓸한 죽음.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일반화된 인터넷 때문에 더 이상 ‘모여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사라진 이곳에서 그의 죽음은 오프라인 음악 공동체의 부고장이기도 했다.

적나라함 때문에 싣기가 곤란했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허무의 방랑자가 숨겨뒀던 또 하나의 일기장이 공개됐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엘리엇 스미스가 만들었던 노래들 중 미발표 곡을 모은 음반 〈New Moon〉이다. 미발표곡 모음집은 대부분 기대를 배신한다.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음반에 싣기에는 어딘지 함량 미달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음반 발매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곡을 만들고 레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엇 스미스는 일기 쓰듯, 평소에 곡을 만들고 녹음하곤 했다. 그렇게 쌓인 곡들 중에서 추려서 음반을 내곤 했다. 그에게 창작이란 곧 일상이었다. 그의 창작력이 급속도로 치닫던 시기는 1997년에 발표된 〈Either/Or〉 무렵이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가 남긴 여섯 장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New Moon〉은 전작 〈Elliott Smith〉부터 〈Either/Or〉 사이의 시간 동안 만들었던 노래들을 담고 있다. 최고조로 치닫던 창작의 잉여물들이다. 그러나 잉여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좋아 음반에서 누락된 곡들이지, 여기 담긴 스물네 곡의 노래는 마땅히 발표됐어야 할 음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반은 단순한 미발표곡 모음집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규 음반으로 추앙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New Moon〉은 어느 음반보다 감성적이고 적나라하다. 그 적나라함 때문에 오히려 정규 음반에는 싣기가 곤란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될 정도다. 서서히 차오르는 센티멘털이 한순간에 폭발한 뒤 모래처럼 바스러진다. 자물쇠로 묶어둔 비밀의 일기장에조차 쓸 수 없었던, 온갖 감정의 본원과 심연을 엘리엇 스미스는 벌거벗긴다. 그리고 노래한다. 시라고 해도 괜찮을, 아니 시 그 자체인 언어로. 음표와 단어와 목소리는 서로를 힘겹게 부축한 채,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이곳으로 뚜벅뚜벅 다가온다. 애도의 감정이 들기 전에, 경이가 밀려온다. 놀라운 재능과 불편할 정도의 진솔함에 대한 경이가.

돌이켜보면 그런 경이가 취향의 시대를 열었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낙오자들은 그들만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세대’로 90년대를 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취향’으로 그 시대를 마무리했다. 그들 모두 자살했다. 21세기는 20세기를 그렇게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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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1 통권 573 호 (p160 ~ 180)



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공백기’가 길어졌을 뿐”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 김추자 - 님은 먼 곳에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 선생님의 빅 히트곡인 ‘님은 먼 곳에’의 진짜 작사가가 누구인지를 두고 작사가 유호씨와 작곡가 신중현씨가 서로 자신이 작사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2심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심에선 유씨가 승소). 선생님도 증언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신중현 선생님이 (악보에) 4B 미술연필 같은 것으로 뭔가를 썼다는 기억만 나네요. 유호 선생님의 노랫말 글자 수가 많아서 신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신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과정은 못 봤어요. 다 된 것만 봤지. 그러니 잘 모르죠 뭐. 우리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됐으니까요.”
요즘 젊은 층에겐 조관우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 유명한 ‘님은 먼 곳에’는 1970년 동양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연속극 작가는 유호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이런 곡은 못 부르겠다”고 거절하면서 김추자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됐다. 데뷔 앨범(1969년)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종 가요상을 휩쓸던 김추자는 이 곡으로 스타의 입지를 완전하게 굳혔다. 그는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덩키스의 멤버로, 김추자의 히트곡 대부분은 신중현 작곡이다.
‘님은 먼 곳에’는 그 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가장 호응을 받고 있는 조관우조차 “김추자 선생님의 원곡을 따라갈 리메이크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김추자의 음색은 흉내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 워낙 히트를 하자 “리듬이 내게 맞지 않다”고 거절했던 패티 김도 후일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끼워 넣었다
가사 중 특히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대목에서 ‘꿈도 주고’ 부분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추자의 터질 듯한 몸매와 겹쳐지며 ‘몸도 주고’로 야릇하게 개사돼 불렸다.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이 ‘달려라 허동구’ 후속 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도 ‘님은 먼 곳에’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1971년) 된 바 있다.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 ‘님은 먼 곳에’가 거의 연습 없이 녹음됐다면서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시간 연습하곤 그냥 녹음했지요. 일일연속극 첫 방영이 다음날이었는데 그 전날 노래를 녹음한 거예요. 오전 8시에 콜을 받고 운현궁 스튜디오에 가서 악보를 받은 뒤 11시에 연습과 녹음이 다 끝났으니까요.”
▼ 몇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빗속의 여인’ 앨범도 아침 10시에 모여서 11시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다시 연습 들어가서 4~5시에 녹음을 다 마쳤는데요 뭘. 그 앨범에 20곡가량이 들어갔는데 그걸 2시간 만에 다 녹음했으니까요. 연습은 거의 못 했죠.”
▼ ‘님은 먼 곳에’를 리메이크한 가수가 많은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 다르니 어떻게 평을 하겠어요. 어떤 가수든지 곡을 받고 나면 자기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부르니까 말입니다.”

판소리+솔+사이키델릭
김추자는 2000년대 들어 7080세대 음악의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도 지금껏 TV 브라운관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형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다. 김추자 음반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이제 딱 두 사람 남았다. ‘그리운 사람끼리’ ‘목마와 숙녀’를 부른 박인희와 김추자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추자의 족적은 박인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관중을 압도하는 김추자의 현란한 춤사위와 섹시한 의상을 먼저 논하겠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창법부터 30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구성지면서도 시원스레 탁 트였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은 당시 전위 음악의 장르였던 사이키델릭 음악에 흑인의 한(恨)이 배어나는 솔을 합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성씨는 한을 내뱉는 듯 구성지면서 한편으론 탁 트인 김추자 노래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핫팬츠, 모자, 무릎 아래 리본 차림이다. 의상 설정이 놀랍다.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김추자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판소리나 창을 딱히 어디에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웬만한 노래는 몇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수심가’인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상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제가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국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궁중무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천흥 선생의 초대로 탈춤공연을 한 적도 있죠.”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反戰)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김추자를 두고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부적 재능
사이키델릭과 솔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가수는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추자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를 보였다. 1951년 춘천의 딸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무용학원), 노래학원(개나리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가다듬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김추자의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공부, 노래, 춤,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했으니 춘천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춘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모델이 돼달라고 해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추자 왔다’며 환호해 부끄러워 혼났다”고 한다.
▼ 고교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군요.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처음엔 미대에 가려고 했지요. 대학교수로부터 데생과 구상을 중심으로 레슨도 받고 실습도 열심히 했는데, 실기시험은 합격했지만 필기에서 떨어졌어요. 당시 동국대가 2차라, 그래도 예술 분야를 선택한다는 게 연극영화과였어요.”
▼ 가수가 된 건 어떤 계기였습니까. 신중현 사단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갔고요. 대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게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신 선생님 매니저이던 맹승호씨가 제 형부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 소개로 가게 됐어요. 그때 신 선생님은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대형 가수들과 작업하느라 매우 바빴어요. 그냥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죠. 그 자리에선 별말씀이 없었는데 며칠 후 ‘늦기 전에’라는 곡을 툭 던져주셨어요.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죠. 선생님이 저를 무척 잘 본 모양이에요.”
결국 ‘늦기 전에’는 그의 데뷔곡이 됐다.
▼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 배우던 얘기 좀 해주세요.
“신 선생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춰 노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 거지요. 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이죠. 사이키델릭이나 솔 창법도 신 선생님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 천부적 소질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아버지가 창도 잘하시고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하셨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하셨어요.”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때로는 ‘솔직한 아부’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법. 이번에는 기자의 경험담으로 이야기의 끈을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의 어조는 딱 부러졌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인터뷰가 계속됐다.
▼ 어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님은 먼 곳에’와 ‘봄비’를 불렀습니다.
“오! 그래요. 스케일이 아주 크군요.”
▼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아마 제 술친구들은 ‘내가 김추자와 얘기를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군요. 정 저를 만나기 싫으면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시죠.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방송 보도국인가에서 5분 뉴스에 잠깐만 녹음을 해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언론 때문에)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입도 감옥살이, 몸도 감옥살이.”
▼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듣는데요.
“그렇더라고요. 대개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그러더라고요. 속도 여리고 그런 경향이 있죠.”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김추자의 노래를 널리 좋아했던 것은 그의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김추자의 음악은 7080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인가가 돼 있었다.
▼ 인터넷에 있는 선생님의 팬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팬들이 선생님에게 정기모임에 꼭 한번 나와달랍니다.
“알아요. 회원분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늘 고맙지요. 저도 잠깐씩 들어가 보곤 하는데, 제가 닉네임을 써서 들어가는데도 귀신같이 다 알아요. 카페 회원 중에는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지켜보는지, 정원에 목련이 폈다 뭐가 어떻다 아주 유리문 들여다보듯,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카페 회원들을 취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아이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도 거기 가입돼 있어요. 그 선생님이 처음엔 제가 누구인지 몰랐죠. 아무개 엄마로만 알았지. 나중엔 이런저런 것을 다 상의할 만큼 친해졌지만 제가 김추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영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겨울 그는 다음 카페의 김추자 팬 모임인 ‘김추자 forever(cafe.daum. net/kimchooja)’에 자신의 옛 사진들을 공개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같이 언론매체에서 보지 못한 개인적인 사진들이었다. 카페지기 남종근(53)씨는 “2004년 4월 정기모임을 할 때 김추자씨는 오지 않고 남편인 박 교수가 꽃과 와인, 케이크, 카드 메시지를 들고 왔다”며 “처음에는 퀵 서비스 직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 교수였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 카페 운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이버에도 김추자의 팬 카페(cafe. naver.com/chooja)가 있다. 네이버 팬 카페는 다음 카페와 달리 김추자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한 30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음악적 색채가 짙다. 이곳에는 전문 뮤지션도 많이 속해 있다. 카페지기 김모씨는 “지난해 모임에 김추자 선생이 와인 7병과 카드를 보내왔다. 회원들 중에는 처음엔 신중현의 음악에 심취하다 김추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카페 회원들은 “김추자 선생이 다시 음반을 낸다면 젊은이들에게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의 음악은 너무나 신선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신선하다”니.
   




‘70년대의 효리’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 요즘 젊은 세대들도 김추자 선생님의 노래, 춤, 의상 등 모든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으니까 그렇겠지, 하하하. 내 노래가 왜 좋은가 하면…. 다른 좋은 가수도 많지만 순수함과 세련됨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을 입어야 꼭 세련된 건 아니잖아요. 화장을 안 하고 자연스럽게,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리는 것, 그러면서도 멋이 풍기는 것, 그런 게 세련된 거지. 난 뭘 바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음악도 그래야 제대로 나오지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음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지요.”
기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후반, 교실에서, 또는 소풍 가서 벌어지는 장기자랑의 주메뉴는 노래와 춤이었다. 열 중 아홉은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다.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의 춤도 따라 췄다. 007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손 모양과 비슷한 손가락 춤(이은하의 ‘찌르기 디스코’의 원조)이 그것이다. 골반을 묘하게 뒤흔들며 추는 춤은 내 아버지 세대에게는 수컷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꼬맹이들에겐 또래 속 인기관리 수단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세상 말세’라며 혀를 찼다.
어깨와 손, 골반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추자의 춤은 그에게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별칭을 안겼다. 관능적인 골반춤은 뭇 남성의 가슴을 ‘폭파’시켰다. 그래서 붙은 김추자의 별명이 ‘다이너마이트’다. 요즘 안무가들은 격렬하고 과격한 그의 춤 동작을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이효리가 추는 춤과 흡사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방송사가 대역을 시켜 김추자의 춤을 이효리의 ‘애니클럽’에 맞춰 다시 추게 해봤는데 전혀 무리 없이 잘 맞아 들어갔다.
과거에도 이금희나 펄시스터즈와 같이 노래를 부를 때 춤을 가미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추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이들의 것은 단지 율동일 뿐 노래와 하나 된 춤이 아니었다. 김추자에게 춤과 노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작곡가 신중현은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춘천여고 시절 응원단장을 지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또 어떤가.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몸이 터져라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1970년대의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간첩說의 진상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김추자는 이른바 그 전위적인 춤 동작 때문에 난데 없는 간첩설(說)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짓말이야’(1971년)를 부를 때 선보인 특유의 손짓이 ‘북한과의 수신호’라며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거짓말이야’라는 제목 자체가 유신정권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고 있던 터에 이런저런 이유로 스케줄에 줄줄이 펑크가 나면서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 어쩌다 간첩으로까지 몰리게 됐습니까.
“저는 음악이 주어지면 그때마다 동작이 저절로 나와 거기에 맞추거든요. 그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저더러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거든요.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청와대에서 부른 것과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팍팍 올라가던 저를 꺾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죠. 복합적인 이유로 저를 매장시키려 한 것이겠죠.”
▼ 청와대 제의를 거절해서 이른바 괘씸죄에 걸렸다는 뜻인가요.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가수가 중앙정보부 파티에 불려갔었죠. 1971~72년 언저리쯤입니다. 재벌회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 ‘저무는 바닷가’ 노래를 촬영하러 바닷가 인근의 컨트리클럽에 갔을 때는 녹화 도중에 모 언론사 사장이 밥을 먹자고 해서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블랙리스트 올라

1971년의 김추자.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誤報)가 되고 말았네요.
“만회해야지요 뭐. 그때 (음반을 내기 위해)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지요.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 그런데 왜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남편이 세종문화회관엘 갔는데, 글쎄 제가 그쪽 대관(貸館) 부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음반을 내기로 한 기획자를 비롯해서 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공연을 한다며 대관신청을 마구 해놓은 거예요. 그것도 골든타임에. 저는 동의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공연은 펑크가 났겠죠. 영문을 모르는 회관측에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거고요.”
▼ 음반을 내겠다고 했으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작곡가가 대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2~3명만 곡을 잘 뽑아냈으면 됐는데…. 이름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마음을 많이 썼는데….”

김추자 LP음반, 최고 호가 300만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속의 여인’ ‘비련’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이에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 테니까.”
중고 LP음반 경매시장에서 김추자의 중 희소가치가 있는 음반은 30만원에서 300만원을 호가한다. 그는 1969년 데뷔 앨범 발표 이후 2년 동안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아마 국내 가수 중 해적판 음반이 가장 많이 나온 이도 김추자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공식적인 가수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앨범업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판을 내고 싶어했다. 해적판도 보관상태만 좋으면 경매시장에선 비싼 값으로 낙찰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1971년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이 탄생했는데, 1호 음반의 주인공 역시 김추자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김추자 음반을 40여 장 소장하고 있지만 제일 비싼 것은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잡고 있는 재킷 사진이 실린 음반이다. 그건 내게 없는데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추자가 전부 몇 장의 앨범을 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김추자의 음반 재킷 중에도 쇼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최씨가 소유한 음반 중에는 남성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재킷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넣은 것과 성적으로 절정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을 담았다고 해 ‘섹스신 음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추자 LP를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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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음악취향Y Best 100 (1-100)

음악취향Y Best 100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선-

 

 

인트로


혹자들은 말할 것이다. 음악은, 예술은, 문화는 1위부터 100위라는 숫자의 액자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긴 하다. 같은 음반이라도 어제 들었을 때와 오늘 들었을 때의 감상이 같을 수 없고, 취향별로 즐기는 음악도 천지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대중음악 앨범을 대상으로 1위부터 100위까지의 위계를 세우는 모순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이야기 할 것이다. 어떻게 김민기가, 서태지가, 조용필이, 들국화가 그 순위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기필코 기억해야만 하는 명반이 누락되었다거나, 1위와 100위의 순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내비칠 수도 있다.


이 차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런 이야기들을 발생시키고 싶은 갈망이다. 음악이란 그저 사용하고 폐기해버리는 교환품에 지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80여년에 걸친 인간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도 함께 용도폐기 된다는 점에서는 유감을 금할 길 없다. 차트에 대한 사소한 의문에서부터 대중음악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일까지 차트에 대한 모든 논쟁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음악을 즐기는 건강한 시민의 일상을 조금 더 풍성하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작 100장의 음반을 고르고 순위를 따지는 일은 매우 즐거운 작업이었다. 음악웹진 [음악취향Y(www.cafe.naver.com/musicy)]의 음악블로거들이 각각 50장씩 총 330장의 앨범을 추천하고 선정회의를 열어 100장을 추린 뒤 최종순위를 선정하였다. 다섯 번에 걸친 열띤 토론에서 한국대중음악사를 관통하는 많은 주제들이 거론되었다. 결국 이 토론과 논쟁이 이 차트를 보는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확대 되고 재생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정 범위는 LP라는 매체가 등장해 본격적인 앨범 콘텐츠가 나오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2005년까지로 국한하였다. 그 전 시대는 SP라는 매체의 희귀성과 앨범이 아닌 음원중심의 시대였기 때문에 제외했고, 2005년 이후의 음반들은 이 차트가 매해 업데이트 되면서 꾸준히 반영될 것이다. [음악취향Y 부시삽 전자인형 최지호]

 

## 선정과정 및 방식 : http://cafe.naver.com/musicy/887

 

 

 

1. 어떤날 2집『어떤날 Ⅱ』, 킹레코드, 1989

 

이 앨범을 만들던 이병우와 조동익은 자신들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또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전해줄지, 그리고 나중의 음악인들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고 자라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련됨’이라는 한마디 말로는 그 깊이를 온전히 드러내기 모자란 우아함과 명징함, 그리고 재즈와 포크, 록의 언저리를 가로지르며 독특하게 구현된 지극히 한국적이고 꽉 찬 퓨전 사운드. 가볍고 순간적인 의미와 감정들이 오가는 흔하디 흔한 대중가요의 한계를 극복한 곡 쓰기와 노랫말의 깊이는 듣는 이들을 흥분시키고 또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들의 음악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고 즉각적인 감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 얼마간을 잠자고 있던 이 음악들은 문득 나의 삶 어느 한가운데에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의 순간을 만나면 다시금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오게 될지 모른다. 아름다운 멜로디, 세련된 연주, 좋은 편곡. 이 것에 부합되는 음악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감동을 세대를 건너 전해 줄 수 있는 음악이 몇이나 될 까. 「취중독백」, 「초생달」, 「그런 날에는」, 「11월 그 저녁에」는 감히 내 친구, 그리고 내 아이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음악들이다. 80년대를 마무리하며 조동익과 이병우, 영원한 두 거장이 마지막으로 손을 맞잡고 내놓은 이 음반은 우리 대중음악의 뮤지션과 대중들이 공히 행복함을 느꼈던, 그 길지 않았던 어느 순간을 눈물겹게 증언한다. 아무렴 삶과 땀과 눈물이 숨어 배인 그 어느 음악이 높지 않을까,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순위'라는 편협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분명 오만한 행위라 비난받아 마땅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훗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자극시키고 또 많은 후배 뮤지션들로 하여금 그들의 뒤를 쫒게 만들었던 이런 음반을 들을때면 우리는 비로소 이러한 작업의 작은 보람을 느낀다. 그야말로 우리의 이 힘든 작업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내주어 모자람이 없는 음악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투째지]

 

 

2. 조용필 7집 『조용필 7집』, 지구레코드, 1985

 

조용필 음악의 본령이 록이었던 것은 최종적인 지향점도 록임을 암시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6집까지의 그것은 밴드의 형태로 록음악을 연주하고는 있으되, 감성의 측면에서 쉽게 동화되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물론, 그의 과거 히트 넘버에는 「단발머리」 등의 팝 스타일이 다수 존재하지만, 앨범을 아우르는 감성은 트롯에 보다 더 가까운 경향이 있다. 하지만, 7집에서는 최첨단에 해당하는 음악 조류를 누구보다도 완벽하면서도 세련되게 소화한다. 훌륭한 조력자였던 위대한 탄생은 역대 최강의 멤버 - 정원영, 김광민, 유재하, 송홍섭 등 - 로 구축되어, 앨범에 수록된 모든 싱글이 장르를 불문하고 일정 이상의 수준을 보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곡 전반을 감도는 신디사이저가 인상적인 록 넘버 「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아시아의 불꽃」과 하드록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그리고 당시의 최신 조류인 뉴웨이브(「프리마돈나」)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물론, 보사노바 스타일의 미디엄 넘버 「내가 어렸을 적에」, 유재하의 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랑하기 때문에」등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음악의 성찬이 어떤 것인지를 이 한 장의 앨범으로 증명해준다. 그를 논외로 하고 80년대의 대중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이 앨범이 존재한다. [마이너]

 

 

 

3. 들국화 1집 『들국화』 서라벌레코드, 1985


80년대를 조용필과 들국화의 시대라고 규정한다면 오만한 이야기일까? 사실 두 아티스트의 비교는 주류와 언더그라운드라는 대중음악 시스템에 대한 환유이다. 그리고, 이 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미디어라는 전달 장치 때문이었다. 경제호황과 함께 음악산업도 나날이 매출을 늘려가던 80년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의 관심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형성했다. 75년 대마초 파동 이후로 미디어는 자유로운 음악정신을 기피하는 현상을 보인다. 들국화의 신화는 미디어의 소외 속에서 형성되었다. 지하 녹음실과 열악한 소극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이다. 언더그라운드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조금 더 애틋한 애정을 가지게 된다. 순수한 음악지상주의자들에 가까웠던 들국화의 ‘행진’은 결국 많은 예술가들과 대중들에게 음악의 명징한 감동을 선사한다. 들국화의 폭발적 성공은 주류와 비주류라는 경계를 모호한 것으로 만들고야 말았고, 그렇게 들국화는 한국대중음악 ‘순수의 시대’(혹은 순수의 공간, 언더그라운드)를 대표하게 되었다. 1985년 들국화의 데뷔앨범은 당대의 가장 세련된 팝음악이며, 연주가 뛰어난 뮤지션쉽의 역량을 뽐낸 음악이었고 포크의 서정과 록음악의 파격까지 탑재한 앨범이다. 이런 다면적인 특성이 들국화로 대변되는 언더그라운드의 역량이었다. 여전히 영미 팝음악에 대한 열등감을 지울 수 없었을 때, 이 앨범이 있어서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법은 의미 없는 상상일 뿐이지만 만약 80년대 한국대중음악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로 구분지워지지 않았더라면, 혹은 더 거슬러 올라 75년 이 땅에서 청년문화의 자유가 거세되지 않았더라면 들국화는 진정한 슈퍼스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역사적인 데뷔앨범을 내 놓고 부침 심한 멤버교체의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중의 별이다. [전자인형]

 

 

 

4.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컴백홈』, 반도음반, 1995

 

서태지는 대단한 존재다. 그의 음악에는 팬이 아니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음악적 능력에 더해 상업적인 영리한 마인드까지 갖춘 보기드문 뮤지션이었고 이는 가요사전반을 통틀어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면모였다. 1집『난 알아요』와 2집『하여가』두 장의 앨범을 통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며 수많은 팬들을 확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3집『발해를 꿈꾸며』부터는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음악들을 발표하며 그것들을 주류로 끌어 올리는데 한 몫을 한다. - 혹자들은 시나위 시절부터 추구했던 록음악으로의 회귀라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 4집『컴백홈』은 어떤 면에 있어서 분명 그의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3집『발해를 꿈꾸며』에서 보여준 모습도 좋았지만 보다 대중적이면서도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 4집『컴백홈』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앨범에서 펼쳐진 그의 역량은 분명 동시대 다른 가수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시대유감」, 「필승」등 록을 기본으로 「Come Back Home」,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같은 힙합은 물론, 마지막임을 암시했던 팝적인 사운드의 「Goodbye」까지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그 어느 때보다 대단했다. 어찌보면 잡탕스럽지만 그동안 그가 해온 음악들의 총집합이자, 그가 가진 음악적 능력의 결정체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전의 앨범에서도 늘 그래왔듯 대중적인 사운드와는 일정부분 거리를 둔 음악들이었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대중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도 분명 서태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Come Back Home」의 이미지가 훗날 H.O.T와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스타들에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시대유감」을 통해 사전심의 철폐의 기반을 닦은 것도 마찬가지. 컴백소식이 9시 뉴스의 메인을 장식했던 유일한 가수, 아니 가수를 넘어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편지]

 

 

5. 신중현과 엽전들 1집 『미인』, 지구, 1974 / 재발매 - 신중현 MVD, 2003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 듣게 되는 한국적 록을 완성한 “신중현”, 그리고 그의 대표곡「미인」. 그 유명한 신중현의「미인」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음반이 바로  신중현과 엽전들의 첫 앨범 『미인』이다. 1974년 작품이라 믿기 힘들만큼 간결한 구조와 독특하고 세련된 멜로디로 가득한 이 음반은 강렬한 록으로 그득하다. 서구적 음악인 록으로 채워져 있지만, ‘한국 음악’이라는 생각이 음반 처음부터 끝까지 떠나지 않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록 음반이다. 저열한 녹음 상태가 내내 맘에 걸리지만 이는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녹음 기술의 한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음반을 폄하할 수준은 아니다. 그나마 우리가 흔히 접해온 판본, 즉 재판의 경우 기타 더빙이 시도되어 나름대로 안정적인 수준의 음질을 제공하지만, 흔히 초판이라 불리는(2003년 재발매 된 바 있다) 신중현-이남이-김호식 버전은 오버 더빙 없이 단 한 번의 녹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초판은 즉흥성과 정제되지 않은 힘에 비해 답답한 음질의 한계가 청자들에게 일종의 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신중현 본인은 초판에 담긴 5분에 가까운「미인」을 진정한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초판의 버전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재판의 버전에서 느껴지는 헨드릭스(Jimi Hendrix) 스타일의 리프가 좀 더 텁텁하고 신중현 식의 개성으로 버무려져 연주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버전을 듣건 엽전들의 첫 음반은 본인들은 물론이고 여타 한국의 록 밴드, 그리고 음악팬들에게 글로벌한 록과 토착화 될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를 던져준 ‘터닝 포인트’라는 데 있다. 이 음반이야 말로 댄스 클럽(소위 고고장)에서 춤추는 수준에 머물던 한국의 록 음악/록 음반을 실험적인 시도와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격상시킨 장본인이다. 비슷한 시기 등장했던 또 다른 슈퍼밴드 검은나비도 이러한 아티스트 시대의 개막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나는 너를 사랑해」,「저 여인」, 재판에만 수록된 「떠오르는 태양」의 싸이키델릭한 실험은 이 음반이 한국 록 음악 전성기의 정점이 서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한국적 록이 완성과  동시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의 대중음악은 어떤 모양새가 되었을까 자꾸만 공상하게 만드는 절대 명반. [헤비죠]

 

 

 

6. 산울림 『2집』, 서라벌, 1978

 

산울림은 괴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괴물이다. 산울림처럼 국내외의 어떤 족보도 통하지 않는 록 음악은 대한민국 음악사를 통틀어 오직 산울림 하나뿐이다.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삼형제는 그 어떤 기존 음악도 카피하지 않고 집구석에 처박혀 무작정 곡을 써대고 무작정 연주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레코드사를 찾아가 무작정 음반을 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세상에 불쑥 등장한 노래가 데뷔 앨범의 「아니 벌써」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다.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 속에서 삼형제는 얼렁뚱땅 1년도 안 되어 3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어설픈 연주와 어설픈 노래와 어설픈 레코딩으로 점철된 이 3장의 앨범은 한국의 록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결과물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앨범은 산울림표 아마추어 사이키델리아가 가장 광범위하고 농밀하게 녹아있는 걸작이다. 중독적인 베이스 라인과 저만치 뒤에서 긁어대는 퍼즈톤의 기타 전주가 장장 3분이나 펼쳐지다가 돌연 김창완의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가 등장하는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는 백 번이면 백 번, 들을 때마다 최상의 쾌감을 제공한다. 지구 상에 둘도 없는 능청맞은 프로그레시브록 넘버 「안개 속에 핀 꽃」, 역시 지구 상에 둘도 없을 것이 분명한 「어느 날 피었네」의 리듬워크, 구수한 타령을 몽환적 경지로 전환시킨 「떠나는 우리님」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나른한 발라드 「둘이서」와 가녀린 포크송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까지 생각한다면 삼형제가 처박혀있던 작은 골방에 혹 도깨비 방망이라도 있던 건 아니었을까? [호떡바보]

 

 

 

7. 이문세 5집  『시를 위한 시』, 킹레코드, 1988

 

오동식, 신중현 등의 노래를 부를 당시의 이문세는 지금으로 치면 그저 입담 좋은 가수로 불리는게 타당하다. 게다가 그들에 의해 구축되어진 이문세의 음악적 노선은 이후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관심의 대상일뿐 시도에 의해 격상시킬 이유는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작곡:이영훈, 편곡:김명곤'이라는 체제가 확립되어진 세번째 정규 앨범 『난 아직 모르잖아요/휘파람』(1985)부터의 이문세를 말하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단지 외견상 보편적이고 음악적 평가가 결여되기 쉬운 발라드라 해서 평가절하될 수 없고 흔히 대한민국 발라드의 완성이고 향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적 사실이 뒷받침된 유재하의 단 한장의 정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 이전에 이문세가 존재하고 있었다는게 때때로 간과되어지고 있다는건 아쉬운 일이다. 물론 유재하의 극적인 삶이 반영된 천재적인 음악성을 두고 오늘날에 와서 재고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이문세가 이영훈을 만나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을 만개하고 절정에 오른 기간동안에 만들어진 음악들은 비평적으로나 감성적으로 1980년대를 대변해주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이영훈과 김명곡은 따로 또 같이 놓더라도 이미 증명되어진 대중성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평적으로도 언제든지 재발견할만한 결과물을 그 당시에 발표하였고 무엇보다 이문세의 출중한 노래 솜씨는 마찬가지로 소흘함 없이 다뤄져야한다. 이문세의 5집(1988)은 전작 『사랑이 지나가면/깊은 밤을 날아서』(1987)보다 다소 복잡한 구성과 쉽게 와닿지 않는 가사 등으로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으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과 같은 성찬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최고 수준의 함량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아놀드]

 

 

 

8.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서울음반, 1987

 

오히려 우려되는 것은 요절로 인한 '신화화'의 기운이다. 정말 듣고서야 확인할 수 있는 본작의 투명함과 음악적 진실성이 요절이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서 가려진 것은 아닌지 매번 대하면서 체감하게 된다. 작사-작곡-편곡까지 혼자서 해낸 젊은 음악 장인의 탄생,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흔적으로써 유작의 내용물이 보여주는 성과들. 이런 본연의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본작을 대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발라드라는 장르가 '감히' 자신에 대한 성찰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 「지난날」등은 투명한 거울 같은 트랙들이다. 그리고 그 투명한 정서를 전달하는데 있어 유재하의 보컬색이 큰 강점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물론 그 특유의 보컬색과 유작이라는 기정사실이 어우러져 앨범에서 비극의 기운을 운운하는 축들도 있음은 사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그의 본작은 유재하 자신이 창출해낸 자신만의 소우주라고 칭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한 나라의 대중음악사 반 세기를 압축하는 리스트의 상위에 위치하는 것은 어떤 계보도 없이 클래식 작법을 기초로 한 고급스러운 성과물, 걸작 앨범이 가지는 미덕 중 하나인 수록곡들 간의 균형감각에 기인한다. 대중적인 호소력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가 보여준 흡족함과 더불어  「그대 내품에」, 「우울한 편지」가 남기는 뒷 여운의 애상함은 그야말로 유재하라는 이름의 인상적인 문체다. 수년 후 발매된 헌정반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97)에서 음악 동지들이 밝힌 헌사는 결코 허언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렉스]

 

 

 

9. 015B 5집 『Big 5』, 대영AV, 1994

 

90년대가 배출해 낸 또 한명의 천재는 바로 정석원이었다. 서태지와 마찬가지로 정석원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적 '아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전달방식은 매우 직선적이고 간결했기에 대중들의 이해범위의 바깥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의 작곡방식과 편곡의 형태는 매우 독특하고도 미묘한 세련미를 숨기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투박하고도 가벼웠는데 이는 전통적인 '대가'들의 접근법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어찌보면 그는 작가로서의 위엄에 무관심한 채  '훌륭한 음악'의 금기에 끊임없이 도전해 갔던 것이고, 그 출신성분이 불분명한 괴팍한 음악을 선보이는 015B의 태도는 평단의 엇갈린 평가를 이끌어 내곤 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정석원과 015B의 감각이 당시 대중들의 수준을 일정부분 리드하고 있었고, 이들의 새로운 사운드는 곧바로 당대의 '트렌드'로 이어져갔다는 것이다. 『Big 5』는 90년대 뉴웨이브의 선두주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던 015B가 가진 위상, 그리고 정석원의 유니크한 음악성을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앨범이다. 기계음이 범람하던 시절을 비웃듯 불쑥 내놓은「슬픈인연」의 처연한 복고주의와 「단발머리」를 가로질러대는 풍성한 음악적 아이디어, 「바보들의 세상」의 광기어린 테크닉은 이들의 스펙트럼과 깊이을 웅변한다. 상당부분의 녹음과정을 개인 작업실로 끌고 내려온 시도는 몇년 후 본격화될 홈 레코딩의 흐름을 예고하고 있었으며,「아주 오래된 연인들」을 통해 하우스테크노의 원형을 제공했던 이들이 다시금 제시한 것이 무한속도경쟁이나 지루한 샘플들의 Cliché가 아닌 사운드와 녹음방식의 다변화(「그녀의 딸은 세살이에요」)와 룰을 파괴한 편곡의 독창성(「Netizen」)이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운드를 통해 입증된다는 이들의 고유한 태도는 당대의 뮤지션들에게는 찾기 힘든 모습이었고, 오히려 2000년대 이후 주목을 받고 있는 인디씬의 모던록/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과 그 음악적 성향이 닮아 있었다. [투째지]

 

 

10. 노브레인 『청년폭도맹진가』, 문화사기단/쿠조,  2000

 

1990년대 중반, 홍대 부근은 한참 술렁거리고 있었다. 문화에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한 물결이었다. 유속이 빠르고 힘차게 굽이를 치는 물결, 거기에 가만히 손을 넣고 있으면 따뜻하게 살랑거려 온 감각을 일깨웠다. 소위 ‘인디 음악’, ‘클럽 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앙지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많은 젊음들이 그 정서를 공유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권위주의 시대를 끝내고 소비시대로 이행하던 시기, 가장 예민한 감각을 가진 청년들은 새로운 표현과 솔직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펑크라는 장르는 억압된 뚝을 허무는 가장 직설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노브레인은 그 정중앙에 위치했다. 성대가 찢어지도록 외쳐대는 괴성, 한없이 파괴적인 리듬의 연타, 단순하고 명료한 멜로디……. 마침 같은 시기 영미 록음악계에도 펑크가 재림해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그리고 어느 정도 그 흐름을 받아들인 현상이었지만), 노브레인과 그의 동지들이 이뤄놓았던 ‘조선펑크’라는 브랜드는 독특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치적 지향에서 자유로운(그러나 기댈 이데올로기를 상실한) 세대, 무섭게 밀려드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로 내던져진 세대, 쇼윈도우의 욕망이 체념과 좌절로 번역되기 시작한 세대……. 모던 록이 그들의 불안한 내면 풍경이었다면 펑크는 그것보다 더 불안한 외적 발현이었다. 노브레인의 정규 1집 『청년폭도맹진가』는 새로운 세대의 불안을 고스란히 기록해 놓고 있다. 그들이 예찬하는 청춘은 「성난 젊음」이고, ‘시계 불알처럼 정처 없이 왔다갔다’하는 일상의 환멸 때문에 「제발 나를」‘사정없이 난자해’ 달라고 보챈다. 그러므로 이 펑크 키드들은 세상과 난투전을 벌여야 했다. 그들에게 난투전은 곧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슬픈 싸움이었다. -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음악적인 부분이다. 펑크는 연주보다 태도가 우선시 되는 음악으로 생각되는 면이 있는데 이 앨범은 그렇지 않다. 특히 블루스의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리듬 기타의 도발은 태도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명반으로 치켜세우게 된다. [전자인형]

 

 

 

11. 블랙홀 4집 『Made In Korea』(EMI, 1995)


한국적 헤비메탈이라는 절대명제를 데뷔시절부터 쫓아온 밴드 블랙홀의 첫 번째 음악적 쾌거가 바로 본작 『Made In Korea』다. 블랙홀은 이 전에도 굴곡진 이 땅의 역사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표명하며「녹두꽃 필때에」,「잃어버린 신화」등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이 앨범에 이르러 전곡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적 상황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태도에 대해 토로하며 이러한 관심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연주곡인「서곡」의 무거운 테마로 시작된 앨범은 호쾌하고 직선적인 헤비메탈 「공생관계」를 통해 폭발하기 시작한다. 또한「마지막 일기」, 「고란초의 독백」, 「잊혀진 전쟁」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세 곡은 밴드 블랙홀이 만들어 낸 음악적 성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서정성 넘치는 멜로디와 헤비메탈다운 강렬함과 스피드의 조화는 다시 찾기 힘든 독특한 감상을 남긴다. 영미 밴드 같은 사운드와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이던 한국의 헤비메탈판에서 헤비메탈의 작법과 톤을 유지하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성공적으로 담아낸 블랙홀의 본작은 헤비메탈/록 씬 전체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추가적으로 송필원 기사가 담당한 두터운 사운드는 순수한 한국 기술로 뽑아낸 헤비메탈 녹음의 쾌거이기도하다. 이 음반에 코러스로 참여한 이원재는 이후 블랙홀의 기타리스트로 참여 현재까지 주상균-정병희와 함께 블랙홀의 주축이 되고 있다. 한국적 정서가 살아있는 강렬한 헤비메탈에 대한 집착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City Life Story』(1996),『Hero』(2005)라는 멋진 작품들로 이어진다. 블랙홀의 음악적 성취의 시작과 완성은 바로 여기『Made In Korea』에 뿌리내리고 있다. [헤비죠]

 

 

 

12. 듀스 3집 『FORCE DEUX』, 월드뮤직, 1995

 

1995년 3월에 발표된 듀스의 3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FORCE DEUX』. 이 앨범은 이현도가 서태지와 함께 90년대 최고의 뮤지션으로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현도는 이미 『DUEX』,『Deuxism』,『Rhythm Light Beat Black』세장의 음반을 통해 독특한 사운드와 빠른 랩은 물론 랩에 있어 라임의 시도, 그리고 비트박스와 스크래치 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며 한국적인 힙합을 구축해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상업적으로도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FORCE DEUX』를 통해 그것을 결집시키며 자신만의 음악을 완성시켰다. 이 앨범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듀스의 색깔이 완성된 「굴레를 벗어나」와 「상처」를 비롯, 오리지널 힙합에 가까운 「의식혼란(意識魂亂)」이나, 자메이칸 랩의 「Nothing But A Party」, 재즈가 가미된 「반추(反芻)」등 그들의 음악적 틀 안에서 시도된 다양함은 『FORCE DEUX』가 듀스의 음반들 중에서도 최고라 평가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록 상업적인 결과로는 이전 앨범들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수많은 듀스 매니아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힙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 『FORCE DEUX』는 분명히 ‘아, 이건 이현도의 음악이구나!’라고 느낄 만큼 이현도만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을 보여준 음반이다. 듀스 해체 이후에도 김성욱, 룰라, 힙합구조대등 다양한 앨범들을 제작하며 뛰어난 음악적 센스를 보여주었지만 『FORCE DEUX』안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니 넘어서지 못한 건 이현도가 자신의 능력이 최고조에 있을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만든 앨범이기 때문은 아닐까. [편지]

 

 

 

13. 김민기 『1집』, 대도레코드, 1971

 

역사에는 왜소한 개인이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김민기의 존재가 그렇다.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87년, 광화문에서 신촌까지 들어찬 군중들이 한목소리로(기나긴 시위행렬 때문에 돌림노래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김민기는 한국 역사에 다시없을 노래의 저작권자인 것이다. 그러나 김민기는 결코 투사가 아니었다. 「아침이슬」의 시작은 기타를 잘 치던 약관의 미대생이 가진 섬세한 감수성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침이슬」이 역사의 장관을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앨범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맥없는 대답인 것 같지만 그것은 진실성이었다. 외국 팝송과 그것을 모방하던 가요, 애상에 젖은 트로트가 노래의 전부일 때, 김민기의 데뷔앨범은 전혀 다른 식으로 노래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땅에 싱어-송라이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부른다는 싱어-송라이터의 의미는 일면 단순한 것 같지만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약관의 감수성이 바라본 세계를 담은 것인데 그 행간 어딘가에 불온한 시국(72년 유신의 직전상황)을 살아가는 젊음의 분노, 패배감, 슬픔 따위의 감정들이 녹아 있었나보다. 이런 진실함이 사람들에게 노래를 전염시켰다. 이 강력한 ‘전염’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영롱한 모국어 활용법에 있다. 말과 선율이 절묘한 지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김민기의 모든 곡들이 그렇지만 오랜 심사숙고 끝에 노래를 만드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앨범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노래의 힘을 깨달았고 조금 더 진실한 음악이 보다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김민기가 여전히 거장의 대우를 받는 이유이다. [전자인형]

 

 

 

14. 노이즈가든 1집, 『nOiZeGaRdEn』, Bay, 1996

 

80년대를 관통하던 언더그라운드를 대체하는 ‘인디’라는 개념이 갓 생겨날 즈음에 이미 태산과 같은 공력으로 관조하는 밴드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노이즈가든이라 하겠다. 이 가공할 데뷔음반의 위력은 그들이 대한민국 록음악의 어느 계보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 흐름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발하며, 대중의 눈높이가 아닌 자신들의 목표 지점을 탐색해나가는 장인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밴드의 음악적 지향성을 이끄는 윤병주가 지휘한 사운드 톤의 관점은 이전의 어떤 밴드도 이루지 못한 진정한 의미의 헤비니스를 창출해낸다. 이는 윤병주 자신이 언급하기도 했던 ‘연주자’이기 이전에 ‘매니아’라는 큰 틀에서의 정체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블루스에 기초를 둔 감성의 소유자로 연주의 테크닉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 이외에도 최종적인 소리를 밴드가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방법을 이미 깨달은 상태였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본작 전체에서 일정 이상의 질적 수준을 담보해주고 있다. 본작의 성격을 규정해주는 「기다려」가 발산하는 무게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곡 「타협의 비」에서나, 가장 스피디한 「말해봐」까지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일관된 수준으로 전체를 관통한다. 하이테크 기타연주와 초 고음역의 보컬로 상징되던 당대 헤비메틀의 고정 관념을 일거에 바꾼 본작은 과거, 현재, 미래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록이 낳은 최고의 작품 중 한 자리에 영원히 위치할 것이다. [마이너]

 

 

 

15. 송골매 2집 『어쩌다 마주친 그대』, 지구레코드, 1982

 

송골매는 캠퍼스 그룹 출신(항공대의 활주로와 홍익대 블랙테트라의 결합)으로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밴드다. 이 앨범은 구창모가 가세한 새로운 라인업이 만들어낸, 송골매 역사상 가장 에너지 넘치는 음반이다. 캠퍼스 그룹 출신이라고 하지만 이 앨범에서 보여주는 송골매의 음악은 젊은 패기 못지않게 프로페셔널리즘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개성 있는 톤을 가졌지만 아마추어적 느낌의 지덕엽과 달리, 김정선의 기타 연주는 전곡에 걸쳐 거침없이 화려한 솔로를 내지르며 밴드 사운드의 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승동과 김상복의 드럼-베이스 배터리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내 마음의 꽃/길지 않은 시간이었네」와 같은 훵키한 업비트를 능숙한 필인과 슬래핑으로 매끄럽게 소화하고 있다. 이봉환의 키보드는「빨리빨리」의 훵키한 피아노 솔로에서 「모두 다 사랑하리」의 무드 넘치는 배킹까지 적절하게 변신한다. 이러한 밴드 위로 구창모는 소울과 록을 오가는 감각적인 창법으로 음악을 완성한다. 소녀팬들의 가슴을 녹이던 구창모의 보컬과 대조적인 텁텁하면서 거친 배철수의 보컬 역시 밴드의 연주와 딱 떨어지는 궁합을 자랑한다. 송골매의 2집은 산울림에 이어 캠퍼스 사운드의 주류화를 이끌었다는 면에서도 중요한 지점에 놓여있다. 이 앨범의 성공이 있었기에 김수철(작은거인), 조하문(마그마) 등이 연이어 가요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하드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훵크를 소화할 수 있던 송골매는 두 보컬리스트의 카리스마가 교차하면서 대중성과 실험성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었다. 「우리들」과 「내 마음의 꽃/길지 않은 시간이었네」는 바로 이러한 송골매의 음악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숨겨진 명곡이다. [헤비죠]

 

 

 

16. 신촌블루스 2집『신촌 블루스 II』,동아기획/서라벌, 1989

 

사실 신촌블루스는 블루스를 좋아하던 음악인들의 동호회적인 성격이 짙은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1집은 뛰어난 음반이었음에도, 엄인호와 이정선의 색깔 차이만큼이나 정제되지 못한 감상을 남겼다. 하지만 두 번째 음반에 이르러 신촌블루스 밴드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비로소 완성된 형태의 음악적 성과물을 내놓는다. 이정선과 엄인호는 각자의 곡에서 연주하고 있지만, 곡  배치, 기타 톤과 연주 수위 조절에 이르기까지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앨범을 위해 서로 배려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새롭게 시도된 혼 섹션도 (섹소폰, 트럼펫, 트럼본) 이정선의 뛰어난 편곡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밴드에 녹아들고 있다. 엄인호와 가장 잘 어울리는 보컬리스트인 김현식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환상」과 「골목길」을 뿜어낸다. 이정선은 「산위에 올라」를 통해 전작의 「Overnight Blues」를 능가하는 날카로운 선이 살아있는 일렉트릭 블루스를,「아무말도 없이 떠나요」에서는 대가다운 여유와 관조가 담긴 연주를 들려준다. 엄인호의 곡쓰기는 좀 더 드라마틱하고 정제되었으며 기타 연주 역시 테마를 중심으로 프레이즈를 풀어내고 있다. 엄인호 본인은 감성에 충실한 연주를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밝힌 바 있으나 최소한 이 음반에서만큼은 곡 자체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1집에 이어 참가한 여성 보컬리스트 정서용은 전작의 맑은 목소리에 관능적이면서 힘 있는 개성을 더해 한영애 못지않은 뮤지션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음반의 커버처럼 푸르스름한 차가움과 냉정한 듯 뜨거운 블루스의 정서가 가요와 만나 이상적인 타협점을 찾은 것이 바로 신촌블루스 2집이다. 블루스를 가요에 접목시키고자 열기를 불태웠던 이들의 정열은 어떠한 평가 잣대를 들이대도 만족스런 수준의 음반을 주조해냈다. [헤비죠]

 

 

 

17. 델리스파이스 1집 『Delispice』, Music Design, 1997

 

‘U2나 R.E.M을 좋아하고 편견없이 음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이텔 소모임의 구인광고로부터 시작된 이 밴드의 등장은 작게는 이 글을 쓰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조금 더 크게는 마니아층에게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음악을 할 수 있구나!’하는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며, 더 크게는 한국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 중 하나였다. 락스피릿과 은근한 문화사대주의로 똘똘 뭉쳐있지만 스스로는 가장 개방적인 귀를 가졌다 자부했던 락마니아층... 소위 빡쎈음악이라 불리는 음악들만이 진정한 락이거나, 혹은 브릿팝이나 모던락은 국내에서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이 작품 앞에서 여지없이 부셔졌다. 「챠우챠우」로 대표되는 세련된 사운드는 정말 그들이 꿈꾸던 U2나 R.E.M, 스미쓰(The Smiths)의 그것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깔끔하고 약간은 사이키델릭하게 느껴질만큼 훵키(Funky)한 기타플레이와 키보드의 사용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작품속에 잘 녹아들어있다. 거기에 곁들여지는 시니컬하고 폐부를 사정없이 찌르는 날카로운 가사는 결코 이 쉽고 듣기 편한 멜로디를 가볍게 들을 수 없게 한다. 90년대 중반, PC통신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국형 모던락, 브릿팝에 목 말라있던 마니아층은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진보적인 음악을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다. 많은 음악인들이 PC통신을 통해 세상밖으로 나왔지만 그 중 가장 성공적인 활약을 펼친 팀이 다름 아닌 델리스파이스였다. 그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선택은 결국 한국음악사의 전설이 되었다. [아미고]

 

 

 

18. 이승환 『Cycle』, 드림팩토리, 1997

 

90년대 중반, 압도적인 물량과 의욕적인 도전정신을 무기로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고급스러움에 도전해갔던 이승환의 커리어에서『Cycle』은 분명 그 정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시도들은 단순히 ‘더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진 가요쯤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벽’이었던 ‘팝’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한 치열한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자, 그 열등감을 극복해 낸 중요한 결실이었던 셈이다. 이미 전작 『Human』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놓았던 그는 조금 더 능숙해진 방식으로, 조금 더 역량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금 더 세련된 미학의 텍스트를 선보이게 된다. 앨범을 여는 역동적인 모던록 넘버 「붉은 낙타」의 위용를 시작으로, 그의 전매특허로 인정받기 시작한 고풍스러운 대작 발라드 「애원」은 록과 발라드라는 양극단을 오가면서도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을 수도 있음을 증거하는 매우 모범적인 사례물들이다. 지극히 세련된 리듬 앤 블루스 넘버 「푸념」, 80년대 스타일의 팝을 디즈니 스타일로 재해석한「사자왕」등, 그 우열을 가리기 힘든 다양한 장르의 수록곡들이 드러내는 수준은 이미 당대를 뛰어넘어 가요계의 긴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 유래를 쉽게 찾기 힘든 단단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파고다 계보의 끝자락에 위치한 세대로서 기본적으로 록을 지향하는 뮤지션이었지만, 말랑말랑한 80년대 팝을 동경하며 자랐고, 90년대를 수놓은 흑인음악과 얼터너티브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앨범 크레딧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동 프로듀서 유희열의 기량이라던가 욕심을 현실로 가능케 해준 '진정한 프로' David Campbell의 탁월한 편곡, 그리고 유래를 찾을 수 없을정도로 압도적인 음의 홍수를 이뤄낸 엔지니어들의 기량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투째지]

 

 

 

 

19. 장필순 『Soony 6』, 하나뮤직, 2002

 

전작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로 홍대 앞의 그 어떤 밴드보다 완성도 높은 모던록 앨범을 만들었던 장필순은 『soony6』에서 또 한번의 기적을 일군다. 하나뮤직의 재정적인 압박 속에서, 작업의 절반을 폐기처분하고 새로 곡을 만든 완벽주의의 진통 끝에 선보인 사운드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렉트로니카였다. 전작에서 환상의 라인업을 이뤘던 함춘호, 김영석, 박용준이 모두 빠지고 조동익 혼자서 모든 편곡과 악기와 프로그래밍을 해치웠지만 앨범의 중량감은 오히려 곱절로 늘어났다. 새로 만들었다는 1~3번 트랙, 8~10번 트랙은 실로 21세기 내내 회자될 소리의 진경(眞景)이다. 황홀경에 다름 아닌 「헬리콥터」와 [신기루]의 사운드 중첩,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조화가 눈부신 「고백」과 「햇빛」, 그리고 인공의 사운드에서 왠지 모를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Soony rock」에 이르기까지 조동익은 조동익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소리를 창조해냈다. 여기에 장필순의 목소리가 전해주는 독특한 질감, 스산하고 황량하지만 한편으론 포근하고 나른한 기운이 더해지고 나면 이 앨범은 어느 순간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의 경계를 넘어서는, 두 영역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절대적인 소리의 바이블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현대인만이 갈망할 수 있는 궁극의 복음이 아닐까? 물론 앨범의 가운데에 포진한, 전작의 감성을 계승한 곡들도 하나같이 뛰어나다. 장필순과 윤영배는 좋은 곡을 썼고 조동익은 빈틈없이 소리의 풍광을 둘렀다. 『soony6』은 한국 대중음악의 소용돌이에서 항상 비껴 서있던 자들, 이름하여 하나뮤직이라는 천진난만한 관조의 언덕이 전해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호떡바보]

 

 

 

20. P-Type 『Heavy Bass』, Hungry School, 2004

 

P-Type의 『Heavy Bass』(2004)는 발표된지 이제 3년째에 접어들었을뿐인 근작이다. 명반을 말함에 있어 시간의 흐름이 깊이를 증명해준다고 했을때 분명 이 앨범을 명반의 반열에 올린건 다소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힙합의 개념 정리와 교과서 편찬과도 같은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훌륭한 결과물이 현재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부여 받을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P-Type은 이미 4WD나 Verbal Jint 등과의 작업을 통해 정규 앨범이 가장 기대되는 MC로 분류되었고 Keeproots로부터 공수받은 비트를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 메세지적인 측면에서 가볍게 흘려 듣는다면 지금까지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상대적인 비교에 따른 우월함을 과시의 동어 반복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P-Type은 결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고 체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동어 반복 차원이 아니라 비교적 뒤늦은 작업이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바라본적 없었기에 시도될 수 없었던 곳에 최초로 깃발을 꽂을 수 있었고 P-Type은 그와 같은 역사적인 순간에 뮤지션으로서 요구되는 진정성과 MC로서 요구되는 기술적인 측면을 손색없이 담아냄으로써 가치는 더욱 빛난다. 따라서 업적을 남기고자 수없이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녹아들어있는 이 역사적인 앨범에 수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기록에 기뻐하라. 그리고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들려주어라. P-Type이 남긴 이 기록을 기억한 아이들이 자라나 이 땅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게끔. [아놀드]

 

 

 

21. 봄여름가을겨울 4집「I photograph to remember」, 동아기획, 1993


본 앨범의 부클릿에 이런 글씨가 적혀있다. ““아직도 떨고 있을 동아기획 식구들””. 김영 사장이 대중적 호소력이 미미한 앨범의 최종결과를 두고 적잖이 난감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당시 대중들은 타이틀곡 「영원에 대하여」의 내공이 예전만 못하다며 투덜거렸고 봄여름가을겨울은 이 앨범으로 인해 스타로서의 위치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팬들마저 이들의 음악적 과욕을 나무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이켜보건대 당시의 냉대는 모두 틀렸다. 이 앨범 전까지 봄여름가을겨울이 쌓아놓은 퓨전 가요는 단지 기나긴 서막에 지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말랑말랑하고 쾌활한 과거의 히트곡들이 이들이 도달한 최고의 모습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판매고와 명성이 최고조에 도달해있던 시점에 봄여름가을겨울은 착각에 도전했다.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들어보라! 곡의 전체적 맥락에 과도하게 끼어드는 브라스, 키보드의 건조한 그루브, 김종진의 시니컬한 목소리는 의식적으로 대중의 밀착을 거부한다. 「잃어버린 자전거에 얽힌 지난 이야기」는 보컬이 사라진 뒤 중독적인 밴드의 합주를 보란 듯이 길게 늘어뜨리고, 「디밥」은 남이야 듣든 말든 생경한 로커빌리를 끌고 와 과거 속에서 진탕 논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마스코트라 할 연주곡에도 일말의 배려가 없다. 「이성의 동물, 감정의 동물」은 너무 과(過)하고 「기억을 위한 사진들」은 너무 불급(不及)이며 「페르시아 왕자」는 너무 화려하다. 그런데 바로 이 모든 것들이 김종진과 전태관 두 남자가 진정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소리였고 예술이었다. 이것을 미국의 녹음 기술과 세션을 빌어 드디어 현실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에서 가장 밴드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가장 블루지하고 가장 풍부하고 농밀한 이 앨범을 한국의 관성은 외면해버렸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앞날을 맥 빠진 중견밴드로 예약해놓은 채로. [호떡바보]

 

 

 

22. 정태춘/박은옥 『1992년 장마, 종로에서』, 삶의 문화, 1993


「시인의 마을」, 「탁발승의 노래」로 시작한 정태춘의 음악은 지극히 서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항쟁을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개인의 서정만을 노래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시대의 아픔이야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었고 정태춘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 변혁에 가담하기로 결정한다. 80년대는 민주주의를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시대였다.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조차도 핏발선 투쟁으로 얻어내야 하는 시대였다. 그는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을 노래했다. 전국의 시위 현장을 발로 뛰었고, 시대를 고발하는 격문을 불렀고, 슬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노래의 메시지가 강렬하다보니 현실 변혁을 이야기 하던 시기 정태춘 음악의 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앨범,『92년 장마, 종로에서』의 예술적 가치는 분명히 재평가 받아야 한다. 이 앨범에는 묘한 회한이 녹아 있다. 90년대 초반, 내분과 외압으로 피폐해져 가는 운동권의 모습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화시켜야 할 숙제들을 남긴 상황에서 흐트러지는 연대를 목격한 음유시인은 슬픔 가득한 바이브레이션으로 회한(悔恨)을 노래한다. 이 회한이 메시지와 음악 사이에서 황금비율을 선사한다. 현실에 대한 한탄을 타고 정태춘의 서정이 올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 이런 가사는 결코 머리만으로 쓰지 못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체화된 경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가슴 저미는 서정이 아니었다면 노래가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을까? 이 앨범은 민중가요의 단선적 주장도 아니고 개인의 서정만을 담은 노래도 아니다. 암울한 시대와 재능 있는 예술가, 그리고 선한 의지가 우연히 만난 극적인 순간이다. 이 앨범으로 음반사전심의 제도라는 몰상식이 폐기되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 실려야 할 기본적인 상식이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전자인형]

 

 

 

23. 사랑과 평화 1집  『한동안 뜸했었지』, 서라벌, 1978

 

2000년대의 우리는 흑인음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주류 음악은 R&B라는 장르가 접수했고, 언더그라운드 문화마저도 Hiphop이 대세이다. 하지만, 진정한 흑인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은 흔치 않다. 어떤 이들은 동양인과 흑인의 차이를 지적하며, 우리가 낼 수 있는 흑인적 사운드의 태생적 한계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1978년에 발표된 사랑과 평화의 데뷔 음반 『1집(한동안 뜸 했었지)』는 이러한 의문이 잘못된 것임을 단박에 깨닫게 해준다. 대중적으로 가장 히트한 「한동안 뜸 했었지」는, 오리지널 멤버인 이철호와 이남이의 공백에도, 완벽한 ‘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그루브’란 무엇인지 들려준다. 이들의 음악이 리듬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래여 퍼져라」와 「어머님의 자장가」가 이어진다. 블루스와 레게, 재즈 등이 절묘하게 믹스된 이 노래들은 리듬은 말할 것도 없고, 멜로디로서도 완벽한 음악이다. 비-사이드(B side)에 위치한「저 바람」과 「달빛」은 기타리스트 최이철의 작곡으로 궁극의 훵크(funk)음악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음반에 대해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클래식을 흑인적 감성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베토벤의 「운명」과 「여왕벌의 행진」은 신시사이저와 기타로 마치 애초에 훵크 넘버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는 키보디스트 김명곤의 편곡으로 서정적인 슬로우 블루스곡이 되기도 했다. 음반의 어느 한곡이라도 ‘사랑과 평화’의 오리지널리티와 흑인적 감성을 느끼지 못할 노래가 없다. [쏭구]

 

 

 

24. 코코어 3집 『Super Stars』,Ssamzie/T엔터테인먼트, 2003

 

1997년 거친 그런지 사운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밴드로 등장한 코코어는 어느 순간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끊임없이 자기변신을 해나가는 노력파 밴드다. 그리고 변신 혹은 진화의 결과물은 언제나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수준을 보이며 팬과 평단 모두를 만족 시키고 있다. 이우성과 황명수는 일렉트로니카, 제 3세계 음악 등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끊임없이 흡수하여 코코어로 재생산한다. 이 음반에서 처음으로 곡쓰기를 시작한 김재권 역시 일렉트로니카에 경도된 개성 있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단 하나의 틀로 규정지을 수 없지만, 이 음반은 1970년대 다양한 록, 훵크의 기초(1970년대는 그런지와도 일맥상통하는 뿌리다) 위에 다양성과 세련됨이 이상적으로 조합된 음악적 결과물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우성이 만든 「오늘밤에 우리 둘이 나쁜 일을 벌이자」,「슬픈노래」,「속삭여줘」등은 좀 더 거칠면서 끈적하고 내면적인 록의 밑바닥에 접급하는 스타일이며, 황명수는 「Jungle Fever」,「축복」,「부머랭」과 같이 다양한 리듬과 악기가 혼란스럽지만 묘한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이다. 본작은 이전의『Boyish』(2000)나 『Odor』(1997)처럼 음반 전체를 규정짓는 하나의 스타일은 없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마치 라디오헤드(Radiohead)처럼 음악적 촉수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후 『Fire Dance With Me』(2006)에 이르면 거의 각자의 작업물로 음반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멤버 개개인의 능력이 확대된다. 코코어를 마주하면 따로 또 같이 함께 커나가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밴드의 모습을 마주하는 기분에 흐뭇해진다. [헤비죠]

 

 

 

25. 크라잉 넛 3집『하수연가』, KM Culture, 2001

 

「말 달리자」는 말 그대로 핵폭탄이었다. 이들은 1000장도 팔기 힘든 인디씬에서 무려 7만장의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진정한 락스타로 급부상했으며, 『서커스 매직 유랑단』으로 사람들의 뇌리속에 인디음악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수연가』는 이런 그들의 아성이 거품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무조건 쓰리코드(Three Code)로 만들어내는 강렬한 펑크음악으로 대중들을 선동하던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대신 다양한 장르와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하는 실험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다소 모던한 느낌마저 드는 타이틀 곡 「밤이 깊었네」를 비롯하여 크라잉 넛 스타일의 트로트 「붉은 방」외에도 스카(Ska), 폴카(Polka), 포크(Folk)에 심지어 뉴메탈(Nü Metal)의 냄새까지 풍기는 곡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들만의 재기발랄함으로 한데 잘 묶여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펑크음악이 죽었느냐? 그렇지도 않다. 「만성피로」,「지독한 노래」는 이전의 그들의 노래와 맥을 같이하며 무게중심을 확실히 잡아주고 있다. 당시 음악적으로나 그들에 인생에 있어서나 과도기에 들어서있는 때라 그런지 이 작품에선 세상에 불만만 가득했던 철없던 악동들은 이제 세상의 풍파에 조금 길들여지며 자아성찰로 그 관심의 시선을 돌려놓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그들이 대중들을 선동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같이 호흡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델리스파이스와 함께 인디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렸지만 정작 그들의 음악성에 관해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말 달리자』가 제도권에 날린 스트레이트 펀치라면 『하수연가』는 대중음악계에 날린 카운터어택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아미고]

 

 

 

26. 배호 『스테레오 힛트 앨범 No.1』, 아세아, 1969


인기 절정이던 60년대 후반에 발명한 신장염,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는 장면, 고풍스러운 중절모와 검은 뿔테 안경을 벗을 줄 몰랐던 이미지. 우리가 배호하면 연상하는 것들이다. 그의 이른 죽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트로트란 장르가 오랜 생명력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음악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 배호의 위상은 어떤 파괴력이 느껴진다. 그것은 우선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저음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깊은 저음에는 분명 60년대 근대화의 이면을 살아가던 도시서민들의 비극성이 담겨 있다. 당대의 트로트의 소재들이 ‘섬마을 선생님’이나 ‘동백 아가씨’ 등 근대화의 반발로 인한 추억의 제제들에 치우친 반면 배호는 지독한 도시의 슬픔을 노래했다. 환타지가 아닌 일상의 트로트였던 것이다. 이것이 당대의 그에게 열광한 이유이고, 스물 아홉의 죽음이 더 가혹한 이유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똑같은 슬픔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유이다. 배호의 첫 녹음은 1963년(『김광빈 작곡집』, 오리엔트 LO-1003)에 확인되지만 이 앨범이 최초의 독집 앨범이다. 그 전까지는 다른 가수들의 음악과 함께 실린 스플릿 음반이었다. 독집으로 발표되었다는 것은 최고의 인기 가수임을 알 수 있는 서지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신장염의 투병 중에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시점이었다. 첫 히트곡인「돌아가는 삼각지」를 비롯해서 대표곡인 「안개낀 장충단 공원」등 기발표곡이 5곡이고 「초가삼간」, 「남강의 비가」등 5곡은 이 앨범을 통해 발표되었다. [전자인형]

 

 

 

27. DJ D.O.C(디제이디오씨) 『The life... Doc blues 5%』 , DMR, 2000

 

그야말로 '와신상담'이었다. 인트로 넘버 「Intro(와신상담)」을 필두로 「포조리」, 「D.O.C Blues」, 「Alive」등의 넘버는 전작 4집(97) 이후 이들이 경험한 다사다난함을 다루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격한 철없음의 젊음의 모습이 감당해야 했던 한국적 상황의 압력이었는데 이것들을 디오씨는 일종의 '양아치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이런 기미는 사실상 전작에서부터 슬슬 보였던 것이지만, 경제적 압박으로 인한 개인적 상황들과 수년후 발매하는 17개의 트랙의 정규작이라는 음악적 야심이 뒤섞인 어떤 뜻밖의 소득이었다. TV 무대에서 가장 익숙했던 힙합 장르 차용 파티 댄스팀이 본작으로 보여준 이 반골과 심술투성이의 비전이 이후의 씬(Scene) 후배들에게 끼친 영감은 당사자들에게조차도 뜻밖이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싸이(Psy)류의 '양아치어조'의 후배격에서부터 간접적으로는 '랩하는 하늘이형' 등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졌을 본격적인 연원의 앨범. 물론 TV 무대에서 위세를 떨친 「Run To You」같은 트랙과 「Boogie Night」의 감각은 출중했으며,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모르게」,  「비」같이 김창렬의 비중이 중요한 넘버들도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역시 중핵은 문제의 트랙들이 아닐런지. 「L.I.E」,  「알쏭달쏭」등이 시원했던 이유는 그것이 비단 '악다구니'가 아닌 '말이 되는' 즉 아귀가 맞는 작품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아치어조'의 후신들이 보여준 위악들과 디오씨 자신들의 후속작 『Love & Sex & Happiness』(04)의 성과가 본작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렉스]

 

 

 

28.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킹레코드, 1995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인생의 한 부분을 조용히 음미해 보는것과 같다. 비록 저 당차고 정감있는 목소리를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시 들어볼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크나큰 슬픔일테지만, 먼지 쌓인 레코드는 우리에게 수백번이고 수천번이고 똑같은 목소리와 감동을 다시 전해줄테니, 이것이야 말로 음악과 레코드라는 취미가 전해주는 커다란 기쁨이 아닐까. 언뜻보기에『다시 부르기2』라는 제목은 너무도 소박하여 차라리 겸손한 인상을 준다. 솔직히 '다시 부르기'라는 말로는 이 음반이 가진 힘과 깊이를 온전히 표현해 내기는 힘들다. 그것은 이 작업에서 그는 단순히 '다시 부르기'만 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광석은 생명력이 다해가던 이 노래들에 다시금 힘을 불어 넣었으며 동시에 그 맥을 잃어가던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더듬어 가면서 그 음악들이 가진 변치 않는 매력과 중요성을 이야기 해주고 싶어했다. 그가 직접 고르고, 조동익의 뛰어난 음악적 감수성으로 재단되어 나온 이 열한곡은 그 자체만으로도 물론 손색없는 한장의 훌륭한 포크 음반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김광석의 목소리에는 '가수'라는 직업의 한 사람이 목소리 하나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가장 극한의 감수성이 담겨 있다. 거기에 더해 조동익이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음악파트는 김광석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서도 가장 정제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날」과 한대수의 「바람과 나」, 김의철의 「불행아」, 그리고 동물원의 「변해가네」로 이어지는 이 매력적인 선곡은 김광석 스스로가 정립한 한국 모던 포크의 짧은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에는 더없는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그 마지막 자락에 자연스레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음으로써 그의 음악생활에 중요한, 그리고 잊지 못할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투째지]

 

 

 

29. 이상은 『공무도하가』, 폴리그램 ,1995

 

『공무도하가』는 충격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도약에 모두 숨을 죽였고 ‘아티스트’라는 칭호를 기꺼이 헌납했다. 1991년 자신을 옭아맸던 「담다디」의 사슬을 끊고 뉴욕의 망망대해로 떠난 후 괜찮은 팝송 앨범을 몇 장 내는가 싶더니만, 어느 날 돌연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가슴에 새긴 코스모폴리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코리안이었고 아시안이었고 뉴요커였으며, 또한 「보헤미안」이었으며 「새」였다. 『공무도하가』의 방대한 스펙트럼은 기획에 의거한 퓨전이 아니라 순전히 세계 속에서 자아의 길을 찾으려 했던, 내면의 방랑자가 남긴 흔적의 결과물이다. 바로 이 점이 본 앨범을 ‘한국적인 무엇을 담은 기특한 대중음악’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그녀가 거닐었던 길의 일부일 뿐이다. 「삼도천」의 풍류를 뒷받침하는 것이 다케다 하지무가 이끈 일본 세션맨들의 리듬워크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녀는 무한히 자유롭다. 「보헤미안」과 「September rain song」에선 각각 모던록의 거침과 매끄러움을 느낄 수 있고, 「Come, the children do」에선 엠비언트 테크노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으며, 「Don’t say that was yesterday」와 「Summer clouds」에선 뉴욕의 어느 구석에 몸을 웅크린 인디 뮤지션의 애상과 마주할 수 있다. 그리하여 「Spring」으로 대변되는,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자연과 우주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마침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든」이라는 마지막 노래를 만들기에 이른다.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한 뮤지션의 예민한 내면 답사가 이처럼 넓고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된 경우는 없었다. 그녀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다른 누구에게도 찾아오지 않을 경지다. [호떡바보]

 

 

 

30. 강산에 - 『강영걸』, 다음기획, 2002

 

앨범 타이틀에 아티스트 스스로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셀프 타이틀’ 앨범이라고 한다. 자신의 음악적인 것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담아냈을 때, 그만큼 자신 있을 때 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강산에는 자신의 여섯 번째 앨범에 셀프 타이틀의 개념을 넘어서, 아티스트로서의 이름이 아니라, 본명을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강영걸’을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아닐까. 포크와 록을 아우르며,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는 음악적 에너지, 그리고 ‘자유로운’ 뮤지션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강산에. 1996년의 『삐따기』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1998년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에서는 이상향을 좇아 사는 삶의 고독을 보여주었다. 본작에서는 이러한 강산에의 고민들이 정점에 올랐다는 느낌을 준다. 아니, 이제는 그러한 고민들을 초월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솔직한 ‘강영걸’의 모습을 들려주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명태」의 재치와 「와그라노」의 재치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앨범이며, 「영걸이의 꿈」, 「이해와 오해 사이」와 같은 곡에선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다가, 정작 「나」라는 곡에선 ‘natural born dancer and singer’라는 가사로 너무나 쉽게 대답해버리는 ‘강영걸’인 것이다. 「Moon Tribe」의 평화로운 공존(共存)의 메시지처럼, 질문과 해답이 공존하며, 포크와 록, 그리고 팝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앨범이다. [쏭구]

 

 

 

31. 송창식 『사랑이야 / 토함산』, 서라벌, 1978

 

1970년대 중반 대마초 파동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송창식이 3년여의 준비 끝에 내놓은 이 앨범은 말 그대로 송창식 음악세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송창식은 이미『바보들의 행진 OST』(1975)에 실린「왜 불러」와 「고래사냥」과 같은 빼어난 자작곡을 통해 이미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본작에 이르러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음악적 개성과 완성도를 겸비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국악의 리듬과 창법으로 훵크, 포크 등 서구의 팝 형식을 감싸 안는 시도가 이 음반에서 처음 시도되었으며,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토함산」,「돌돌이와 석순이」는 바로 이 새로운 방향성이 극에 달한 통쾌한 작품이다. 「사랑이야」와 「잊읍시다」는 송창식의 시원한 발성과 섬세한 정서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며, 「나의 키타이야기」는 포크에 기초한 곡 위에서 훵키한 베이스가 수를 놓으며 송창식의 목소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곡이다. 이호준, 조원익, 배수연, 김석규, 그리고 사브르를 비롯한 이태리와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밴드가 곡에 따라 적절하게 세션으로 배치된 본작은 자신의 음악을 완전히 장악한 송창식의 음악감독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소탈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랫말도 서정적인 악곡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태극기 새겨놓은 가슴”을 노래하는 「병사와 향수」(병영국가 속에서도 낭만을 찾는 송창식의 낙천성도 함께 느껴진다)와 송결이라는 가명과 부인의 이름을 작사, 작곡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시절이 음반 속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가장 암울한 시기였음을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신 말의 업압된 분위기 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존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헤비죠]

 

 

 

32. 김현철 2집 『32℃ 여름』, 동아기획, 1992

 

89년의 데뷔 앨범으로 일약 ‘천재 키보디스트’가 된 김현철이 대형 교통사고의 악재를 딛고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이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 「동네」의 따뜻한 감성을 기억했던 사람들에겐 본 앨범의 「그런대로」 「누구라도 그런지」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다소 차갑게 느껴졌겠지만,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시대의 부름이었다. 윤상, 신해철, 정석원 등과 마찬가지로 김현철 역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새로이 발굴하고자 했던 신세대 뮤지션이었다. 「그런대로」에서 후렴이 마지막으로 변주되기 전에 등장하는 키보드 솔로와 프로그래밍 사운드의 조합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선진적인 뮤지션이었는지 알아챌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어쿠스틱의 활기로 가득한 「32℃ 여름」이 음산한 「그런대로」와 똑같이 내러티브 없는 가사, 김현철 특유의 보컬 애드립, 개성이 뚜렷한 키보드 연주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김현철표 음악으로 동질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까만 치마를 입고」의 유려한 보컬라인을 들어보면 그 종합은 보다 분명해진다. 이건 재즈이기도 하고 팝이기도 하고 발라드이기도 하며 데뷔 앨범의 따뜻한 감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현철이다. 청춘의 고뇌를 담은 노래에 「나나나」라는 싱거운 제목을 붙여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당시의 김현철은 음악적 생기로 충만해 있었다.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와 함께 퓨전 연주 프로젝트 야샤(Yasha)의 일원이었으며 영화 『그대 안의 블루』의 사운드트랙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던 92년의 김현철은 명실상부한 ‘돌아온 천재 키보디스트’였다. [호떡바보]

 

 

 

33. 크래쉬 2집『To Be Or Not To Be』, Metal Force, 1995

 

『Endless Supply Of Pain』은 음악도 음악이려니와 콜린 리차드슨(Colin Richardson)이라는 이 바닥 최고의 프로듀서와 함게 작업하며 한국 메탈의 격을 올려놓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To Be Or Not To Be』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이 앨범은 전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우선 팀의 보컬이자 베이스인 안흥찬이 당시 공익요원으로 복무 중이었고, 더 이상 콜린과 함께 엘범작업을 할 수도 없었으며, 대중들의 관심과 데뷔엘범의 어마어마한 판매량으로 인해 생기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많은 적들과 싸워야만 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노파심은 「Machine Of Silence」의 강력한 리프와 비트에 의해 부셔져버린다. 전작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강력한 스래쉬(Thrash)사운드는 고막을 따가울 정도로 때려댄다. 본작의 주를 이루는 것은 역시 강력한 메탈사운드다. 지난 엘범 만큼이나 레코딩 역시 정교하고 훌륭하게 작업되어 있고 윤두병의 날카로운 기타플레이와 미칠 듯이 울부짖는 안흥찬의 목소리, 그리고 정용욱의 정확하고 파워풀한 드러밍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한다.  음악적인 실험을 과감히 시도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Really Discord」에선 거친 그로울링 창법이 아닌 나래이션만으로 곡을 전개하고 있고, 전작에 수록되어 있던 「My Worst Enemy(War Mix.)」는 더 빠르고 전자음을 많이 사용하여 마치 하드코어 테크노를 듣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에 「Dead Point」의 뒤에 숨어있는 보너스 히든트랙은 랩음악이다. 이런 음악적 실험은 후에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사운드에 가까워지는 그들의 행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미고]

 

 

 

34. 김현식 3집 『김현식 Ⅲ』 동아기획, 1986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김현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이례적이다. 70년대를 주름잡던 한국 포크의 마지막 세대이면서, 매체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단히 훌륭한 팝 발라드 넘버(블루스에 가깝긴 하지만)로 대중의 인정을 받는 거의 첫 사례인 동시에 안타까운 요절에 따른 신화화과정까지. 어떻게 보면, 그 자신이 시현했던 음악보다도 더욱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의 궤적이 그의 음악을 가릴지도 모른다. 동시대의 어떤 보컬리스트보다 ‘열창’의 근원적 의미로 다가오는 그 자신만의 보이스컬러는 본작을 기점으로 정착단계에 이른다. 본인의 명의를 내걸고 발매된 음반이지만, 뒤를 받쳐주는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 김종진, 전태관 (봄여름가을겨울), 장기호, 박성식(빛과소금), 故유재하 - 는 팝 성향의 작품 전반에 걸쳐 블루스의 질감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는 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빗속의 연가」, 「비오는 어느 저녁」, 「떠나가 버렸네」 등은 독특한 심상을 지닌 블루스 보컬리스트 김현식과 그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작곡가로서의 김현식이 갖는 능력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박성식이 만든 메가히트싱글 「비처럼 음악처럼」의 성공은 동아기획으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입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 넓히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김현식이라는 가객의 최전성기를 알린 본작은 과잉된 에너지를 발산하진 않지만, 80년대의 한국 팝이 지나온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마이너]

 

 

 

35. 이정화(덩키스) 『싫어/봄비』, 킹/신향, 1969

 

1964년 심혈을 기울인 ‘애드4’가 대중에게 외면받자 신중현은 다시 미8군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음악이 통용되지 않는 한국 음악계를 떠나 베트남을 통해 서구 음악계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신중현의 발목을 잡은 것은 펄 시스터즈였다. 1968년 펄 시스터즈의 센셔이션은 한국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여기에 힘입어 신중현은 보다 밴드 중심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같은 해 김추자의 성공에 철저히 가려지게 되지만, 이정화를 전면에 내세운 덩키즈의 데뷔 앨범은 초기 신중현 음악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이정화는 5인조 사이키델릭 록 밴드 덩키즈의 리드보컬이다. 즉, 이 앨범은 이정화라는 가수의 앨범이라기보다 덩키즈의 앨범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다는 이야기다. 첫 곡 「싫어」는 당시 소울&사이키 음악이라 불리던 보컬 중심의 흥겨운 곡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봄비」부터는 놀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후 ‘퀘션스’ 박인수의 목소리로 많이 알려지게 되지만 「봄비」는 신중현 특유의 한국적(?) 송라이팅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곡이다.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와는 다르게 미성의 편안한 보컬리스트인 이정화는 신중현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어지는 「먼길」과 「내일」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이 앨범이 대중적으로 실패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못했는데, 신중현식 작법이 뛰어난 트랙들이다. 특히 「먼길」의 아련한 가사들과 대위법으로 얽히는 현 세션, 오르간 연주의 조화는 신중현 음악의 뛰어난 감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16분 34초 동안 펼쳐지는 사이키델리아, 「마음」에 이르게 된다. 와와와 딜레이를 활용한 화려한 기타연주, 오르간 터치의 매력, 드럼 솔로로 기나긴 즉흥연주를 마감하고 보컬 멜로디에게 바톤은 넘기는 이 고요한 환타지는 신중현 음악의 한 정점이자 당대 한국대중음악이 성취해 낸 커다란 봉우리였다. [전자인형]

 

 

 

36위. 신해철 『Jungle Story』, 대영AV, 1996

 

황금기라고 해야겠다. 넥스트의 이름으로 나온 2장의 컨셉 앨범은 평단의 관심과 팬층이라 불리는 교도들을 형성하였고, 밴드의 이름으로는 같은 해 라이브 앨범이 나왔으며 대한민국에서 락 밴드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수혜를 누렸던 시기였다. 밴드의 브레인이었던 신해철의 창작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다소간 거대한 기름기'가 빠져나간 개인적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결과물은 영화 사운드트랙이라는 명분을 띈 의외의 솔로작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여유로움보다는 급조의 강박함이 있었지만 결과물은 실로 알차다. 메인 테마가 3번 반복되는 구성상의 얄팍함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 사이를 구성하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조심스럽고 소탈한 언급(「70년대에 바침」)과 오마쥬의 감각(「내마음은 황무지」), 무한궤도-신해철-넥스트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가사의 문제 의식(「그저 걷고 있는거지」)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 무엇보다 세상이라는 길에 들어선 입문기의 청년이 30대가 되어 내뱉는 처절한 실존의 버거움이 오르간과 백보컬이라는 장치와 섞여 「절망에 관하여」로 표현되는 순간은 이 앨범의 백미. 우리가 이 앨범을 그의 경력 중 가장 중요한 넥스트의 앨범들 보다 수위에 선정한 이유는 여기에 기인한다. 신해철이라는 뮤지션의 블럭버스터적 감수성과 음악적 야심이 덜 표면화된 이런 솔로작들에서 되려 그의 역량과 일관된 세계관의 확장을 재발견하는 순간, 「Jungle Strut」 같은 실험작과 「아주 가끔은」같은 팝넘버까지 실은 그가 모두 껴안고 있었던 가능성이었고 이 앨범은 그들을 담은 좋은 그릇이었던 것이다. [렉스]

 

 

 

37. 조용필 4집 『못찾겠다 꾀꼬리』, 지구, 1982

 

조용필은 1980년대 대적할 가수가 없는 절대적 슈퍼스타였다. 그러나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단순히 그의 막강한 인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완성도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한국적 ‘주류’ 대중음악을 완성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창 밖의 여자」가 담긴 1집으로 가요계에 복귀할 때부터 실험성과 대중성의 조화에 있어 탁월함을 보여줬다. 음반 녹음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은 한 번씩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을 거쳐 갔다. 최고의 프로페셔널 연주자들과 교감하며 앨범이 쌓여갈수록 조용필의 음악은 점점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1기 위대한 탄생(곽경욱(기타), 이건태(드럼), 김청산(무그, 피아노), 김택환(베이스))과  이룩한 최고의 음반이 바로 본작이다. 훵키한 「못찾겠다 꾀꼬리」, 절절한 조용필의 목소리가 빛나는 대곡 지향의「생명」, 한국적 리듬과 록의 접점을 찾은 「자존심」, 1980년대 ‘발라드’라는 장르의 단초가 된 「비련」등이 포진한 앨범은 가히 한국적 스텐다드 팝의 견본시라 할 만 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스텐다드 팝이란 이미 검증된 스타일의 안전한 차용이지만, 조용필에게 스텐다드 팝은 서구적 악기와 음계를 가지고 한국적인 음악으로 완전히 재해석하는 고독한 길이었다. 라이브 버전으로 실린 「민요메들리」는 이러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노력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들려준다. 민요, 트로트, 록, 훵크, 발라드 등 물과 기름 같은 다종다양한 장르가 조용필이라는 이름과 만나면 하나가 된다. 암울하던 시절 한국 주류 대중음악계에 조용필과 그의 완성도 높은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헤비죠]

 

 

 

38. 리쌍 2집『재, 계발』, 서울음반, 2003

 

힙합이 언제부터 대세가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수많은 힙합 뮤지션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결과로 나타난 것. 그중에서도 리쌍이 친근하게 다가온 건 바로 '정인'과 같은 매력적인 여성보컬의 피쳐링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남성의 거친 랩과 여성의 부드러운 보컬이 서로 대비효과를 이루며 더욱 귀에 잘 들어오는 가장 대중적인 형식의 팝에 가까운 힙합. 비슷한 예로 성공한 이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리쌍은 돋보이는 존재다. 매니아와 대중을 동시에 사로잡기란 쉽지 않은 법인데 이들은 분명 매니아들의 지지를 얻으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독특한 랩과 직설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가사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개리와, 한국인이 좋아하는 멜로디를 잘 알고 이를 만들어내는 능력 또한 훌륭한 길. 이 둘은 이런 면에서 분명 최고의 듀오다. 이미 1집『Leessang Of Honey Familly』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선보였고 2집『재, 계발』을 통해 그것을 확고히 했다. '그들은 결코 랩과 노래 중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양자가 한쪽에 치우칠 경우 매니아와 대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사로잡기 어렵지 않나 싶은데 리쌍은 그렇지 않다. 개리의 랩은 분명 독특하지만 튀지 않고 길이나 다른 싱어들의 보컬, 그리고 멜로디와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리쌍의 장점이 아닐까. 또 하나 장점은 그들의 노래에 적절한 보컬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싶은데... 정인, BMK, 김범수 같은 걸출한 보컬리스트들의 피쳐링으로 이 앨범은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 『재, 계발』이라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며 자신들만의 색깔을 완성시킨 것이다. [편지]

 

 

 

39. 이장희 『그건 너 』 ,성음, 1973

 

70년대의 우리가요는 그야말로 황금기중에 황금기였다. 물론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삶이나 사랑을 음악에 담아내려는 노력과 시도들은 청년문화 라는 하나의 긍정적인 사회현상까지도 만들어 냈다. 이장희 라는 사람은 그 70년대 청년문화의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발군의 실력과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앨범은 그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 포크 라는 음악 장르 속에 깊이 녹아 든 음반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71년 「겨울이야기」 로 데뷔 했을 때부터 그는 특유의 감수성을 자랑하며 듣기에 전혀 거북하지 않은 사랑노래를   불렀지만 이 앨범이 유난히 더 돋보이는 이유는 이 앨범부터 사랑만으로는 채워지기 힘든 직설적인 감정들을 노래 속 에 담기 시작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  앨범 에 수록된 「그건 너」 와 역시 70년대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 「별들의 고향」에 삽입되었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이 두곡 은 실제 연인에게 바치는 곡이었다고 하니 직설적이지만 따스한 알짜배기 감성이 넘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라고도 볼수 있겠다. 이렇듯 약간은 껄렁하고 터프 하지만 따뜻한 감성이 제대로 살아 날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골든포크』 음반을 통해 알려졌고 이 앨범에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렸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말할수 있다. 그는 이 앨범을   과거에 활동했던   프로그레시브 (progressive) 그룹 동방의 빛 팀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특히 피아노처럼 정확하게 들리는 배수연의 베이스를 듣고 있노라면 친구와 소근소근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듯한 정겨움이 느껴진다 지금까지도 이 정서는 계속 진행중이다. [폴린]

 

 

 

40. 한대수 2집 『고무신』, 신세계/힛트, 1975

 

한국대중음악에서 한대수의 존재는 각별하다. 남의 곡을 받아 부르는 ‘가수’를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 부르는 ‘아티스트’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1968년 드라마센터에서 가진 한대수의 데뷔 공연은 그래서 역사적인 사건이다. 비록 그것이 그리니치빌리지의 모던 포크에게서 유래한 것일지라도 한국음악사에서의 위상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역사는 개인의 감수성이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진 사건 때문이다. 철조망에 고무신 두 짝이 포박되어 있는 이 앨범의 커버 아트는 70년대라는 시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직관이 한대수 음악의 특징이다. 70년대 발표한 두 장의 앨범 중에서 데뷔 앨범이 아닌 이 앨범을 명반으로 선정한 이유는 전적으로 「고무신」과 「여치의 죽음」 두 곡 때문이다. 「여치의 죽음」은 음악만이 표출할 수 있는 다면적 의사표현방식을 증명한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스피커 좌우를 오가며 정신을 고양(혹은 이완)시키는 낯선 음계, 톱날 소리, 유복성이 연주하는 아프리카적 즉흥성 은 한국대중음악의 가장 뛰어난 혁신이다. 이 낯선 소리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대한 개인의 반항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간 내면의 어두운 곳을 파헤치는 곡이라는 해석도 가치 있다. 「여치의 죽음」의 파격이 당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반영이라면, 「고무신」을 바라보는 음악적 입장은 조금 더 복잡하다.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는 한대수의 퍼포먼스는 말과 노래의 경계를 허물어 듣는 이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 질박한 토속성이 내포되어 있는 로큰롤이라고 할까?  명태와 아버지, 고무신과 만수무강같은 낱말들이 뼈 속 깊이 한국인인 한대수를 드러내지만 록적인 편곡과 악기들의 자율성은 지극히 영미 포크의 것이다. 이런 경계적 역설은 한대수 음악의 핵심이며 어느 관습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로서 한대수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전자인형]

 

 

 

41. 나윤선 『So I am…』, Bis Music/EMI, 2004


이 앨범은 2004년 프랑스와 한국에 동시에 발매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차트 5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다음해 참가한 앙티베스-주앙-뺑 페스티벌(Antibes Juan-les-Pins Festival) 콩쿨에서 나윤선 퀸텟은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유럽의 모든 장르 음악 중에서 1위를 뽑고 각 장르별 1위중에서 그랑프리를 가리는 유럽 최고 권위의 시상식이었다. 나윤선의 음악은 현대 재즈가 지향하는 탈장르적 성격을 가장 모범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보컬 재즈의 천편일률을 거부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들려줌으로서 보컬 재즈의 영영을 무한히 확장시켰다고 평가받는다. 퀸텟의 멤버들은 한국과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프랑스 재즈 학교 CIM 동료들이다. 이런 다국적 감성이 장르의 경계를 허무려는 재즈의 속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실제로 이 앨범을 재즈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은 앨범 전반에 녹아 있는 즉흥성 때문이다. 그만큼 파격적이다. 나윤선은 무엇보다 소리의 뉘앙스에 집중한다. 침묵에서 속삭임을 이끌어내고 미니멀한 악기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을 취하며, 감정을 끌어 올려 폭발시키거나 생경한 이미지로 소리들을 직조해내기도 한다. 세 번째 앨범 『Down By Love』까지는 익숙하게 들어왔던 곡들을 리메이크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사운드를 소개하는 수준이었다. 네 번째 앨범 『So I Am …』에 이르러 비로소 나윤선은 자신만의 사운드를 확고히 한다. 모두 퀸텟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주의 긴장감도 가장 뛰어난 앨범이다. 여전히 척박한 한국 재즈계에서 나윤선의 글로벌한 성공은 일종의 평지돌출이다. 퀸텟의 멤버들이 다국적 감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면도 있다. 하지만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나윤선의 목소리는 한국에 본격적인 재즈 붐을 촉발시켰고, 아울러 재즈라는 음악의 무한한 창조력을 무참히 각인시켜주었다. [전자인형]

 

 

 

42. 시나위 8집 『Sinawe 8』, 도레미 미디어, 2001

 

시나위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전면적인 헤비메탈 음반을 발매한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하던 시절부터 신대철의 기타 연주는 헤비메탈 키드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뛰어난 것이었으며, 이 밴드를 거친 수많은 뮤지션들이 한국 대중음악판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손성훈, 김바다, 달파란, 서태지, 김영진, 김민기, 오경환, 신동현 등 이름만으로도 무게가 느껴지는 멤버들이 시나위의 이름 아래 활동 했었다. 시나위는 뛰어난 밴드임에 틀림없으나 결과물은 언제나 통시적 관점에서 볼 때, 즉 시대적 흐름 속의 명작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신대철의 음악적 취향은 블루스에 기반한 하드록/헤비메탈이었며, 그런 점에서 5집 『수레바퀴 밑에서』(1995)이후의 음악들이야 말로 뿌리로의 회귀이며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카리스마 넘치던 김바다가 탈퇴한 이후, 불안해보이던 시나위가 내놓은 8집은 세간의 우려를 뒤집는 회심의 걸작이었다. 두툼한 기타 연주와 완벽한 댓구를 이루는 드럼 연주(신동현) 위로, 멜로디적 감수성과 거친 샤우트를 모두 소화해내는 새로운 보컬리스트 김용이 맘껏 활보하고 있다. 무엇보다 화려한 수식이나 군더더기는 모두 사라지고 풍성한 톤 감각 아래 핵심만 짚어내는 연주를 내세운 편곡은 공시적으로 보나 통시적으로 보나 한국 하드록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 앨범을 끝으로 신대철-신동현-김경원 트리오 시대 역시 막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시나위라는 밴드가 내놓은 음반 중, 곡쓰기에서 멤버들의 호흡까지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이 음반에 함께 들어있는 5집 이후의 베스트 영어 재녹음 버전 역시 시나위의 팬이라면 반가운 선물. [헤비죠]

 

 

 

43. Toy 『A night in Seoul』, 삼성뮤직, 1999

 

3집의 성공과 이문세(조조할인), 윤종신(환생), 이승환(애원)의 프로듀서로서 그가 이룬 대중적인 업적은 유희열이라는 뮤지션을 어느 순간 기대받는 위치로 격상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작가의 책임감과 대중뮤지션으로서의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복잡한 상황들은 결국 토이를 보다 세련된 프로젝트로 변모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희열이라는 뮤지션이 가진 위상은 묘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는 유재하 가요제와 하나뮤직을 거친 언더그라운드의 총아였지만 결국 015B의 대중적 방법론을 따랐고, 작풍에서는 언더그라운드의 감수성과 대중가요의 맛깔스러움을 반반씩 공유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라디오  DJ에서의 부드러운 취향은 흡사 80년대 별밤지기 이문세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바로 그런 면에서 그의 음악 만들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히트곡이 없어서는 곤란하고, 그렇다고 노골적인 대중적 접근은 독이 된다. 주 청취타겟인 소녀취향을 버릴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그것만으로 머무를 수는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의 네 번째 앨범은, 이러한 딜레마를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킨, 그야말로 센스넘치는 한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유희열은 그간 자신이 지켜온 독특한 세련미-매우 도시적이지만 결코 따뜻함을 잃지 않는 감성-를 극대화 시켰는데, 『A night in seoul』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서울의 밤이 가진 도회적이면서 건조한 서정을 세련된 팝튠으로 풀어낸 감각은 주목할 만 했다. 「길에서 만나다」등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시도, 보다 현대적으로 마무리한 사운드 톤이라든지, 「거짓말 같은 시간」,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에서 들리는 서정은 유희열의 장점을 느끼게 한다. 당시 그의 음악에는 평범한 뮤지션들이 가진 클리쉐가 거의 없었고, 키취라는 비판을 들어도 억울하지 않을 장르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와 소화능력을 느끼게 했다. 프로젝트 '토이'가 들려줄 수 있는 절정의 사운드이자 90년대 한국팝의 잊지못할 수작이다. [투째지]

 

 

 

44. 마그마 1집 『MAGMA』, 힛트레코드, 1981


한국 록음악의 시초를 떠올리면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많은 아티스트들이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마그마가 한국 록음악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디쯤인지에 대해 질문해보자. 「누구?’라는 반문을 하는 청자들이 부지기수일 게다. 그들의 최대 히트 넘버 「해야」를 떠올린다면 음악에 매우 관심이 많은 (혹은 많았던) 청자들일 터. 록과 팝이 4곡씩 고루 포진된 본작의 어디에서도 198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이들의 음악을 결코 적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알 수 없어」, 「잊혀진 사랑」, 「해야」에서 보여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더해진 조하문의 가공할 폭발력은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그날」에서는 흥겨운 싱얼롱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구나, 섬세함이 가득한 팝발라드 「기다리는 마음」까지. 하이톤에서의 불안정한 듯이 들리는 조하문의 보컬은 의외로 어떠한 장르를 갖다 대어도 잘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덧붙여 연주곡 「탈출」에서의 연주는 이 밴드의 정체성이 조하문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본작의 가장 백미는 시종일관 음울하고 처절한 샤우팅으로 일관하는 「아름다운 곳」이리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정도의 힘을 가진 한국의 하드록넘버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오버에서는 트로트고고, 언더에서는 포크가 여전히 득세하던 시절, 동시대에 존재한 어떤 음악들보다도 록이 가지는 미학의 일반론에 충실한 이 데뷔음반은 한국에서 등장한 ‘가장 충격적인 데뷔음반’이라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에게 한국의 ‘아무개’라는 진부한 수식어로 성찬하는 것은 당대의 거인들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일 뿐이다. [마이너]

 

 

 

45. 윤상 2집 『Part Ⅱ』, 지구레코드, 1993


때로 그의 지나칠 정도로 ‘정형화’된 음악을 두고 정체나 진부와 같은 단어로 평가절하해온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 모든 비판들을 전부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는 그 빛을 조금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를 흔히 전자 음악의 효시라고 부르고는 하는데 이는 그의 음악세계의 깊이를 제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일 것이다. 그는 베이스 연주자였지만 그룹음악의 매너리즘과 밴드체제의 한계를 미디(Midi)로 대표되는 컴퓨터 음악으로서 돌파하고자 한 대표적인 뮤지션이었고, 기계음과 리듬 프로그래밍 그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각 음원의 소리(Sonic)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Atmosphere)에 보다 많은 노력을 할애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도 하향의 마이너 코드 체인지 속에 담긴 그만의 독특한 작풍은 실로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보컬과 맞물려 ‘윤상표’ 음악의 확립에 결정적인 팩터로 자리잡는다. 93년(!)에 발표된 그의 세번째 앨범은 앞으로 진행될 윤상 음악의 대략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스타일을 선보였던 수작이다. 이 앨범은 비록 「가려진 시간 사이로」 등으로 규정되어버린 그의 전작들과는 그 경계를 달리함으로써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지만 이후 약 10년이상 등장하게 되는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지극히 이른 시기에 하나의 완결된 스타일과 양식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Papermode라 불리던 프로젝트 팀의 구성원들-손무현, 김범수(bk!와 Astro bits로 알려진 또 한명의 천재 뮤지션), 김학인등-이 들려주는 뛰어난 어레인지와 함께 앨범의 사운드적 실험성과 완성도는 지극히 훌륭했다.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ambient)를 이용할 줄 알고, 교묘히 고려되고 섬세하게 재단되어 배치된 전자음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쉽게 흘려 들어버려서는 찾아낼 수 없는 매우 ‘내밀한’ 경지이다. [투째지]

 

 

 

46. DJ Soulscape 『180g Beats』, Master Plan, 2000


힙합이란 용어가 대한민국에 유입되고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음악적으로 작은 씬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이름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그곳에서 서로 최고임을 확신했다. 결과물이 따라주지 못한채 끊임없이 지속된 말뿐인 이기주의가 낳은 공허함이 깊어져만 갈때 발언권을 갖지 못했던 한 프로듀서가 조용히 작품을 진행해나갔고 마침내 그것이 발표되었을때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으로부터 최초의 동의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바로 DJ Soulscape이었고 그를 증명한건 [180g Beats]였다. 이미 발표된 그해부터 최초의 클래식이란 소리를 들었던 [180g Beats]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동일하다. 이전까지 비트에 있어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던 MC들은 DJ Soulscape가 나와주었음에 처음으로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리란 기대감을 품게 되었고 작업하고 싶은 뮤지션으로 손꼽히게 되었음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만큼 [180g Beats]에서의 DJ Soulscape는 인상적이었고 힙합 앨범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던 기념비적인 앨범이었다. 프로듀서가 주체가 되어 참여 MC의 선택과 함께 구상했던바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지켜본 사람들로부터 감독은 훌륭한데 배우들의 역량이 부족한게 아니냐며 수근거리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서구의 힙합만을 들어오며 우리의 힙합을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움을 선사하는 등 당시의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역전시켜버렸던 [180g Beats]를 힙합이란 틀을 넘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명반 반열에 올림은 시기상조도 무엇도 아니다. [아놀드]

 

 

 

47. 조동진 『5집』, 킹레코드, 1996


조동진이 ‘느림의 미학’ 또는 ‘관조’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건 순전히 그의 천성 때문이다. ‘천재’와 ‘천성’은 한 끝 차이지만 눈을 사로잡는 속도감 때문에 천재가 조금 더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그는 오직 천성과 약간의 시간(대략 30년!!)만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뮤지션이다. 그의 음악은 그저 한없이 밋밋하여 열정적인 애착을 갖기엔 어려운 면이 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매번 들을 때마다 신선한 기운이 그대로 보존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 96년에 발표한, 공교롭게도 10년 넘게 계속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있는 5집은 이러한 신통력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세상과 마주한 그의 환멸과 애정, 허무와 낭만, 체념과 사랑, 이 모든 심상들이 그의 전 작품을 통틀어 음악적으로 가장 극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두루두루 새겨진 앨범이다. 아마 디지털 사운드로 아트록 특유의 음산한 엠비언스를 뿜어내는 「새벽안개」와 흥겹고 친숙한 포크록으로 치장한 「우린 헤어져 멀리 있어도」의 공존이 어색하지 않은 건, 사운드를 주도적으로 디자인한 동생 조동익이 형의 목소리가 품은 가능성과 뚝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언제나 하나다. 조동진 자신의 기타 아르페지오가 흐르는 가운데 제목과 똑같은 구절을 심심하게 반복하는 「눈부신 세상」을 들어보건대, 간결하면서도 깊고 넓은 그의 철학은 매 작품마다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장필순의 서늘한 보이스와 호흡을 맞춘 「넌 어디서 와」, 그리고 끝도 없이 그윽한 「멀고 먼 섬」과 「바람 부는 날이면」까지 생각해보면 본 작품의 가치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의 최근작은 언제나 그의 최고작이다. [호떡바보]

 

 

 

48. 신윤철 3집『명태』, 삼성뮤직, 1994


신윤철은 기타리스트로 이해하기에 너무도 다재다능한 음악인이다. 작, 편곡은 물론이고, 음반 전체를 조율하는 프로듀서일 뿐 아니라 감각있는 프로그래머로서의 능력 역시 빛난다. 이러한 그의 장점이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순도 높게 증명되는 음반이 바로 3집인『명태』다. 이 음반에는 블루스, 모던록, 하드록, 일렉트로니카, 발라드가 골고루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전혀 이질감 없이 하나의 결로 읽히는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후의 신윤철의 행보는 모두 이 음반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송홍섭의 송 스튜디오에 모이던 수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송 스튜디오의 음악적 정체성도 함께 드러내는 작품이라 볼 수도 있다. 「명태」의 읊조리는 블루스는「나의 길을 갈 뿐이야」로 확대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에서 폭발하지만, 각 곡 사이로 발라드가 배치되어 일방적인 기승전결을 피하고 있다. 대신 강약강약의 구성으로 청자와 뮤지션이 함께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치밀하고 대담한 곡배치를 선보인다. 블루스에 바탕을 둔 끈적하면서도 매끄럽게 빠지는 톤과 화려함보다 음 하나하나의 내실을 추구하는 진득한 기타 연주 역시 귀 기울이게 만드는 포인트이다. 송 스튜디오를 드나들던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의 가사에서 말 하는 것처럼 “음악 속에서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음반 전체에 넘실댄다. 이러한 음악적 자신감은 신윤철이 참여한 모든 프로젝트를 통털어 가장 직선적인 편곡과 연주로 드러난다. 삼성뮤직(나이세스)이 사업을 접으면서 절판된 상태이기 때문에 희귀 앨범이 되었지만 1990년대 한국 록음악을 논함에 있어 절대 비켜나갈 수 없는 명작이다. [헤비죠]

 

 

 

49. 낯선 사람들 1집 『낯선 사람들』, 하나뮤직, 1993


'낯선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은 이 팀, 그리고 고찬용이라는 걸출한 뮤지션, 그리고 이 앨범에 담긴 음악의 모든 것을 너무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는듯 하다. 그들은 결코 익숙하지 않은 않는, 아니 익숙해질 수 없는 장르와 스타일, 창작방식으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딛었고, 그 시점에서 그들은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위치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것인지 모른다.  리더 고찬용은 매우 진취적인 뮤지션이며 뻔한 방식을 답습하거나 쉬운 통로를 뚫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 90년대의 음악감독들과는 현저히 다른 방법론을 취하고 있었다. 비록 이 한장의 결과물만을 놓고 그의 능력이나 혹은 낯선 사람들이라는 팀이 가지는 무게감을 웅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 한번의 시도가 내 뿜은 신선한 창작의 기운에 대한 변명이라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앨범은 결국 다음의 세가지 단어로 요약이 된다. // 1. 고찬용 : 이 점에 대해서라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최근에 발표된 10년만의 솔로앨범에서도 확인되듯이 그의 독특한 음악적 재기와 진지한 접근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요동치고 있다. 2. 이소라 : 낯선 사람들이, 그리고 고찬용이 발굴하고 김현철이 완성한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여성 보컬리스트중 하나. 마치 그녀의 솔로 앨범을 방불케 하듯 이 앨범의 모든 사운드는 그녀의 목소리 안에서 수렴되고 있다. 3. 맨하탄 트랜스퍼 : 진부한 지적이지만 사실이다. 이 팀은 결국 한국의 맨하탄 트랜스퍼를 의도했고, 또 그 의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악곡의 창의성, 편곡의 유니크함, 그리고 화성과 합창의 대범함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 수작이다. 정말 유일한 문제라면, 본작은 이 라인업의 유일한 작업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저 이름처럼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대중들에게 낯선 음악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 그 뿐이다. [투째지]

 

 

 

50. 김수철 1집 『못다핀 꽃 한송이』, 신세계, 1983


좀 유치한 표현이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김수철의 이미지는 에너자이저 그 자체였다. 그가 있었던 그룹 「작은거인」은 이름만 그랬을 뿐 거인이라는 단어가 유치하게 들릴 만큼 진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신이 나가 버린듯한 기타, 정돈된 듯 하지만 현란한 오르간 사운드. 그의 음악은 작은거인 이라기 보다는 신들린 거인 쪽에 더 가까웠다. 이뿐이 아니다. 김수철은 솔로로 전향하고 1년뒤 「고래사냥」에 출연 그 해 신인상을 받아서 영화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열받게 만든 전력이 있다. 이규형 감독은 87년도에 쓴 인터뷰집 「이규형이 만난 남과 여」 라는 책에서 김수철에 대해 ‘음악을 잘하는 것만도 질투나 죽겠는데 어느 순간 자기 영역을 넘어와 자존심을 뭉게놓았다’ 라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재능이 얼마나 폭 넓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넘치는 에너지와 다양한 재능으로 무장한 그가 83년에 처음 발표한 솔로 앨범은 그룹시절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하드락 을 지향했던 예전과는 달리 마치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차분하고 관조적인 발라드 포크를 선보인다. 앨범에서 두 곡을 제외하고는 「작은거인」 시절 발표했던 곡들을 다시 포크로 편곡해 들려 주고 있고 특히 「별리」 같은 곡의 경우에는 포크 버전과 약 10여분이 넘는 간 버전 이렇게 두곡이 실려있는데 긴 버전의 경우 타악기와 보코더, 신디사이저가 서로가 술래잡기를 벌이는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김수철의 첫 솔로 앨범은 그룹생활을 끝내고 그가 어떤 장르의 음악을 어떻게 방향을 잡아서 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모색이 들어가있는 앨범이다. 자신이 잘했던 장르의 음악이 아니라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음악의 색깔을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과 미래를 만나게 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우니까. [폴린]

 

 

 

51. 모하비 - 『Machine Kid』, 노스탈지아, 2003

 

모하비는 1998년의 『테크노전자음악잡동사니』와 2000년의 『MO BEATS ALBUM』에 이어, 국내 일렉트로니카 계열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2003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세 번째 정규음반을 발표한 뮤지션이 되었다. 원음에 대한 환상보다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당연한’ 왜곡을 사랑한다는 모하비. 첫 곡 「Hi-Fi for the animels」부터 잡음의 연속인데, 유럽의 멋스러운 테크노를 생각했던 리스너를 당혹시킬만한 것들이다. 춤을 추기 적당한 것도 아니고, 몽환적으로 몰입하기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잡음이 만들어내는 비트의 연속인 것이다. 여기서 모하비가 추구하는 음악의 정체성이 들어나는 것이 아닐까. 어이지는 타이틀곡 「Machine kid」도 지극히 단순한 힙힙비트에 반복적인 멜로디를 담고 있다. 「Bisector switch」, 「Utput」, 「A dead fly」등의 곡에서도 여과 없이 노출되는 노이즈들은 이 앨범에서 모하비가 들려주고자 하는 테크노 음악에 대한 정의를 느낄 수 있다. 바로 기계가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소리가 바로 그것인데, 앨범에서 가장 예술적인 ‘소리’를 담고 있는 「Loop that stratocaster」에서도 이 부분이 감지된다. 거장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를 샘플링하고 있다. 가장 인간적인 그 연주들을 아주 기계적으로 풀어내고 있음에도, 모하비 자신의 인간적인 고민을 느낄 수 있다. 모하비는 스스로의 음악을 ‘감상용’이라고 규정한다. 모하비가 들려주는 기계의, 가장 인간적인 소리를 느껴보자. [쏭구]

 

 

 

52. 허클베리핀 『18일의 수요일』, 강아지문화예술, 1998

 

세기말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추억이다. 장밋빛 미래가 환상처럼 세상을 지배하고는 있으나, 정작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 그게 세기말과 젊음이 교차하던 시절의 어두운 기억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리고, 허클베리핀의 데뷔앨범은 그 어두움의 극단적 위치에서 내게 손짓을 한다. 한국 ‘인디’신이 봇물처럼 터졌던 1998년,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하면 바로 본작을 떠올릴 수 있다. 본작은 여타의 다른 아티스트에 대한 박제된 기억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이는 한국에서 생산해낼 수 있는 그런지(Grunge) 정서 바로 그 자체이다. 이기용의 가사는 대단히 음울하면서도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감성을 겹겹이 쌓아두고 있으며, 이 에너지를 오롯이 이어받아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남상아의 폭발적인 소리는 은유와 상징으로 감추어둔 정서를 역설적으로 강력히 설파하는 하모니를 이룬다. 시일이 지난 후 이기용이 자신들을 평가하면서 언급한 ‘감정의 분수’라는 단어는 특히나 본작의 감수성에 맞닿는다. ‘보도블럭’에서의 조용한 곱씹음, ‘첫번째 곡’에서의 혼돈스러운 감정. ‘불을 지르는 아이’의 절규는 분수를 넘어선 폭포수 그 자체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좀 더 다른 시선을 지닌 본작은 10년이 지나더라도 한국 대중음악신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감을 가질 것이다. [마이너]

 

 

 

53. 동물원 [2집], 서울음반, 1989

 

단언하건데, 동물원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의 욕망이 우리를 그물처럼 옥죄던 9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삭막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친구에게 들려주는 소소한 일기장 같은 노랫말, 결국 서랍장 안으로 밀어 넣었지만 신열을 앓던 시절이 생생하게 잡힐 것 같은 지난 꿈을 담은 동물원의 노래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분명 지금보다 조금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동물원의 이러한 시대적 효용은 ‘투쟁적 혁명 세대’라 불리는 386 세대에게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보편에 대한 이야기가 연예인이 아닌 보통사람의 목소리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음악적으로 포크의 마지막 계승자라는 타이틀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에 녹아 있는 배경들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김광석과 박기영이 노찾사와 민중가요라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면, 김창기는 「사랑의 썰물」을 만들었던 주류 작곡가였으며, 유준열은 아마추어 언더그라운드를 증명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을 처음 기획한 김창완은 한국 록의 평지돌출로 평가되는 산울림의 좌장이었다. 이런 다양한 음악적 배경과 진실한 노래를 견지해 내려는 초심이 동물원을 세련된 대중음악의 각축장 90년대를 지나 오래도록 꾸준한 팀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에 변하지 않는 초석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시작이 여기 있다. 데뷔앨범 역시 「거리에서」, 「변해가네」, 「말하지 못한 내 사랑」같은 명곡들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지만 연주와 노래에서 아마추어의 거친 질감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데 반해, 이 음반에 이르면 아마추어의 순수한 열정은 그대로 남겨둔 채로 프로페셔널한 세련을 더해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또 다른 진경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이런 독특한 출사표는 서정과 열정을 오가는 두 번째 트랙 「동물원」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김창기의 「혜화동」은 그 감성 그대로 동물원의 정체성이 되었으며, 유준열이 작곡한 「새장 속의 친구」의 재지한 분위기는 팀에 활기를 불어 넣는 제2의 심장이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김광석의 맑은 샤우트로 앨범을 마감하는 「흐른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에 있다……. 다시 들어도 아름다운 음반이다. [전자인형]

 

 

 

54. 김정호 1집, 『이름모를 소녀』, 서울음반, 1974

 

1985년은 실로 귀한 사람 한 명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한 해가 되어버렸다. 김정호의 음악을 포크라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딱히 어느 장르와 스타일로 설명될 수 없는 실로 오묘한 맛을 풍겨 냈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한국적 포크’, 또는 ‘한(恨)의 포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50-60년대 고전가요의 멜로디를 상당부분 답습하고 있고, 거의 독보적이라 해야 마땅할 ‘끊어질 듯 애절하게 부르짖는’ 그의 음색은 차라리 국악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실제로 그는 짧은 그의 마지막 생의 자락에서 국악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의 의지를 밝힌 바 있었다). 그의 음악을 지배하는 정서는 희망과 도전보다는 슬픔과 애잔함, 고뇌였으며, 멜로디를 감싸는 바스라질 듯 연약한 서정이 예의 그 떠도는 우울을 발산해 내었다.(하얗고 힘없는 얼굴과 애수어린 표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과장 섞인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현재 대중음악계의 가장 유력한 장르로 자리잡은 ‘발라드’의 실마리를 김정호가 제시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의 음악은 훌륭했지만 소위 말하는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었고 이는 어떤 면에서 아주 '한국적인' 어프로치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당대의 포크나 스탠더드 팝, 그리고 록의 스타일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74년에 내놓은 그의 데뷔 앨범은 사실상 그의 최고작이자 이제껏 이야기 해 온 그의 모든 매력과 음악적 문법이 담긴 완결판으로 불러 마땅하다. 「이름 모를 소녀」, 「보고싶은 마음」, 「외길」, 「저별과 달을」, 「밤은 가고」 등 그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올릴 수많은 명곡들이 담겨 있다. 포크, 스탠더드 팝, 심지어는 컨츄리의 편곡 방식까지 적용하고 있으나 그 창법과 멜로디는 신기할만큼 개성적이며 또 매우 ‘한국적’이다. [투째지]

 

 

 

55. 윤종신 5집 『愚』, 대영에이브이, 1996

 

『愚』도 전작 『共存』과 마찬가지로 복고의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다수의 노래와 리듬이 강조된 소수의 업템포 노래, 그리고 부클릿에 실린 수더분한 윤종신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점이라면 설레임으로 시작해 이별의 회한으로 끝을 맺는 한 편의 러브 스토리가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는 것과, 윤종신이 스토리와 개별 곡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위해 유희열이라는 뮤지션과 집중적으로 협업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다른 점 때문에 유희열은 90년대 최상의 발라드 작곡가로 거듭났고 윤종신은 90년대 최상의 발라드 작사가이자 영민한 앨범 프로듀서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러한 영민한 전략의 결과물이 바로 이별 후의 심경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담아낸 「아침」 「일년」 「오늘」 3부작이다. 이 세 곡은 짧은 소절의 훅 하나만 바라보고 나머지 악곡 전체를 대충 들러리세우는 통속적인 ‘사랑타령’의 愚를 범하지 않는다. 전성식, 정원영, 이병우가 연주한 어쿠스틱 악기의 복고적인 질감은 과거를 지향하는 이별의 슬픔과 정확히 일치하며, 하프와 현악 세션의 고풍스러움은 이별을 앓는 자의 아련한 정서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유행가의 과장된 언사와는 거리가 먼, 실연 이후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윤종신의 가사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환생」과 「여자 친구」의 유치한 멜로디가 대중을 포섭하기 위한 손쉬운 상술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의 진심 어린 내면으로 다가오는 것도 대부분 솔직 담백한 가사 덕분이다. 한마디로 말해 『愚』는 ‘괜찮은 발라드 앨범’이라는 뻔한 정의를 넘어서는 작품이다. 이것은 사랑과 이별을 겪어나가는 청춘남녀 모두의 신실한 사운드트랙이다. [호떡바보]

 

 

 

56. 해바라기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 지구레코드, 1977

 

해바라기란 처음부터 느슨한 노래 공동체를 지칭했다. 김의철, 이광조, 이주호, 한영애, 이정선, 김영미 등이 이 공동체를 거쳤다. 이 앨범이 녹음된 시기의 해바라기는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 네 명이다. 누구는 초창기 멤버로 어떤 이는 지인의 소개로, 또 다른 이는 음악적 욕심으로 모인 해바라기가 추구했던 것은 명료한 화음의 어울림이었고 보다 근본적인 노래의 즐거움이었다. 이 앨범이 발표된 1977년이 1975년 저 악명 높은 대마초 사건 이후 2년이 흐른 시기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젊음은 노래의 특권을 강제로 박탈당하고 맘대로 우울할 수조차 없는 성인문화의 매너리즘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이런 시기에 해바라기의 데뷔앨범이 맡은 역할은 포크의 자연주의적 감성을 육성의 아름다움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었다. 음악감독을 맡은 이정선은 남자 둘 여자 둘의 각기 다른 색깔의 보컬들을 치밀한 화음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구름, 들꽃, 돌, 연인」의 건강한 전원성, 「내 마음」과 「하늘 가득히」에서 들려주는 절창의 화음은 분명 70년대 한국 포크 음악을 몇 단계 진화시킨 예술적 성취이다. 여성 멤버인 김영미와 한영애가 각각 선두에 서고 다른 멤버들의 화음은 뒤편에서 덤덤히 서정을 돕는 「하늘」과 「내 마음 깊은 곳에」 역시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한국대중음악의 즐거움이다. 통기타 하나와 목소리 하나로 일면 평면적이었던 한국 포크는 이 앨범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받았으며, 당대의 매너리즘을 통과할 일종의 구원이었고, 80년대라는 프로페셔널한 아마추어리즘에게 바통을 건네는 튼튼한 다리였다. [전자인형]

 

 

 

57. 넥스트(N.Ex.T) 2집 『The return of the NEXT pt.1: Being』, 대영AV, 1994

 

1992년에 발매된 『Home』은 여전히 신해철의 과거 스타일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이한 선택이기도 하였다. 물론, 당대의 다른 뮤지션들과는 차별화된 스타일이긴 하나, 불과 2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이처럼 충격적인 변신으로 청자들에게 다가오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며, 그만큼 본작은 기존의 한국 헤비메틀신을 직접적으로 강타한 문제적 작품이 된다. ‘록밴드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리라’던 신해철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으나, 동시대에 활동하던 한국 헤비메틀 밴드들이 외면받던 주요 요인이던 조악한 수준의 녹음과 유치한 가사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본작이 갖는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The Destruction of the shell에서의 긴장감 넘치는 1분여의 키보드 솔로는 ‘키보디스트 신해철’의 역량이 총집결해 있는 부분이며, 뒤따르는 정통 헤비메틀 리프와 절묘하게 어울려 들어가는 (당시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분노에 찬 신해철의 보컬, 10여분의 러닝 타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꽉찬 구성은 과거 한국 대중음악에서 결코 구현해 내지 못한 대단히 이례적인 넘버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통 스래쉬메틀 「이중인격자」, 작품에 숨어있는 또 다른 대곡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일렉트로니카 넘버 「Life Manufacturing」 등 앨범을 구성하는 모든 곡들이 단 하나도 허투루 들어넘길 수 없는 킬러 싱글로 즐비하다. 이처럼 앨범 전 곡에서 넘실거리는 신해철의 장악력은 후속작에서 나타나는 그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나며, 작품 전체에서 발현되는 카리스마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이너]

 

 

 

58. 더블유(W) 『Where the story ends』, 플럭서스, 2005

 

2001년 코나(Kona)의 배영준이 인디 레이블 문라이즈(moonrise)에서 일렉트로니카 유닛 웨어 더 스토리 엔즈로 부활한 사건은 갑작스런 반가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2005년 신생 레이블 플럭서스(fluxus)에서 팀명을 더블유로 약칭하고 보컬 김상훈을 정식 멤버로 맞아들여 발표한 본 앨범은 사정이 달랐다. ‘노래’라는 형식을 온전히 가져가면서 그 주변을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촘촘히 두른 곡들이 댄스가요와 전자음악의 울타리를 각각 넘어 일렉트로닉 팝의 지점에 훌륭히 안착했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타이틀곡「Shocking pink rose」를 포함한 앨범의 초반부는 한국 일렉트로닉 팝 최상의 결과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더블유는 하우스의 빠른 템포, 훵키한 기타와 그루브 넘치는 베이스, 은은하면서도 중독적인 훅을 지닌 보컬, 이 세 가지 요소를 화학적으로 융합시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또한 더블유는「거문고 자리」에서 세련된 디스코 사운드와 토속적인 가사를,「경계인」에서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메시지를 예쁘장한 여성 백 보컬과 잔잔한 기타 아르페지오와 아무렇지 않게 섞음으로써 내일의 센스를 지금 여기에 재현하는 어얼리 어답터가 되었다. “경직된 진실 유연한 위선” “짙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날 선 정역학의 법칙” “뛰는 너의 심장은 강철 아가미” 이런 조각난 시어(詩語)들은 또 얼마나 그럴듯한지! 더블유의 본 앨범은 지나치게 보편화된 주류의 타성과 보편화 되기 어려운 언더의 감성을 동시에 뛰어넘으려는 플럭서스의 이념, 그 이념의 첫 번째 구체화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호떡바보]

 

 

 

59. 부활 2집 『Remember』, 서울음반, 1987

 

1980년대 중반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헤비메탈의 폭풍 속에서 유독 굳건하게 서 있는 앨범이다. 당대의 수많은 밴드들이 서구적인 사운드를 전범으로 삼아 강력하고 파괴적인 스타일을 지향했던 반면, 이들은 보다 멜로디어스하면서도 서정적인 방법론을 취했다. 단순히 듣기 좋은 멜로디를 삽입해 넣는다는 기계적인 특징이 아니라 기타의 솔로를 만들어 내는 데에서부터 시작해 송라이팅의 아이디어, 노래와 연주를 잇는 편곡의 양태 등, 거친 질감의 사운드 속에서도 솟아오르는 부활만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기타리스트이자 송라이터인 김태원의 색깔이기도 했다. 1986년 데뷔 앨범이 직선적 헤비메탈과 부활 특유의 서정이 혼재된 양상이었다면, 두 번째 앨범인 『Remember』는 김태원이 주도권을 쥐고 완성해 낸, 부활의 개성이 처음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지배하고 있는 앨범이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곡이 「회상Ⅱ」이다. 육중한 드러밍으로 포문을 연 뒤 김태원의 펜타토닉 프레이즈로 곡을 이끌어 나가는 데, 요소요소 변주를 통해 구성에 변화를 주고 있음에도 기타가 주도하는 서정적인 악상은 8분 30초 동안 탄탄하게 중심을 잡고 전진해 간다. 「천국에서」 역시 자기표현에 대한 자신감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연주력이 듣는 이를 압도한다. 이러한 ‘거대한 서정’에 이승철의 여린 목소리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서 거친 남성성이 거세되어 있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진 목소리이지만 부활과의 조합은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것이다. 모든 트랙에서 이승철과 김태원의 이중주가 빛을 발한다. [전자인형]

 

 

 

60. 정원영 1집 『가버린 날들』, 하나뮤직, 1993

 

대중들은 끊임없이 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세련미를 음악가들에게 강요하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요의 역사는 그 요구가 종종 매우 모순적이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실제로 한국적인 정서에서 훌쩍 떨어져 새로운 사운드와 정서를 모색하려고 했던 뮤지션들에게 대중들은 예외 없는 차가운 시선을 던졌는데, 이를테면 정원영, 고찬용, 그리고 이한철과 같은 뮤지션이 그 명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원영이 그의 주전공인 건반으로 재즈를 수학하고 돌아와서 피아노 음반이 아닌 가요음반을 내놓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연주 음반이 가지는 시장의 한계를 감안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쪽이 설득력 있는 설명일 테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그게 그리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정확히 컨템포러리 재즈 라인을 연주하고, 또 멜로디를 부르고 있다. 심지어는 펑크(funk)(「강 건너 거리」)나 보사노바(「파라다이스」), 에쓰닉한 어프로치(「그대 이야기」)까지도 눈에 띈다. 「가버린 날들」을 예외적인 곡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당대의 다른 가요를 살펴볼 때 이 곡에서의 코드 체인지 역시 결코 가요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 앨범은 가요 뮤지션이 시도해 본 재즈적 접근이 아니라 재즈 뮤지션이 가요라는 장르에 던지는 헌사인 셈이다. 키보드 연주에는 여지없이 매우 정통적인 임프로바이징이 따라붙고, 어렵지 않은 멜로디 뒤에 숨어 있는 화성은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다(「흐린날, 텅빈 하늘」). 유학파였던 정원영은 물론이거니와, 이 모든 것을 전혀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당대 하나음악/동아기획 소속의 뮤지션들, 이를테면 전태관, 송홍섭, 조동익, 낯선 사람들의 묵직한 존재감은 그 시절의 음악들이 단순히 ‘그리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투째지]

 

 

 

61. 양희은 2집 『고운노래 모음 2집』, 유니버샬(KLS-40), 1972

 

몇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줄기에 통기타를 든 인물이 걸터앉아 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으며 게다가 맨발인 채인 이 앨범 커버는 양희은이라는 목소리가 상징하는 70년대 포크 음악의 명료한 자연주의, 과장하지 않는 단출함, 현실과 이격하고 픈, 혹은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픈 젊음의 갈망을 대변하고 있다. 1971년 9월 「아침이슬」이 수록된 데뷔앨범(『고운노래 모음 1집』)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양희은은 본인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1972년에 발표된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김민기의 데뷔 앨범과 연장선상에 있다. 김민기와 강근식의 어쿠스틱 연주는 물론이고 정성조 쿼텟이 맡은 유려한 편곡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플롯과 피아노, 가벼운 스트링 섹션을 활용한 정성조의 관여는 통기타를 기초로 한 포크의 아마추어리즘을 깨지 않으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세련미를 더해준다. 70년대 이후 김희갑, 김의철, 이병우, 하덕규 등의 작곡가와 함께 한 노래들도 양희은의 대표곡으로 손색이 없지만 대부분 김민기의 곡을 부른 이 앨범을 양희은의 대표작으로 선정함에 있어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작은 연못」, 「백구」등 김민기의 영롱한 우화들은 양희은의 목소리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대를 대변하는 생명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이 앨범의 실질적 가치는 양희은이 가진 목소리의 아우라에 있다. 맑고 청아한 노래와 한없이 높은 데서 임하는 영롱한 바이브레이션은 유신시대라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보상으로도 읽어도, 낭만적 순수성을 쫒는 포크 세대의 꿈으로 읽어도, 이지적 분위기로 차별화하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으로 읽어도 모두 합당하다. [전자인형]

 

 

 

62. 언니네 이발관 2집 『후일담』, 신나라뮤직, 1999

 

우리는 지극히 첫번째스러웠던 앨범들을 기억한다. 그것은 정확하게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아니라 뮤지션의 순수한 창작력에 따른 놀라움을 지니고 있었던 첫번째 앨범들을 의미한다. 이후 어떤식으로든 변질될 수 밖에 없는 순결함을 담아낸 그 앨범들은 결코 재현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음악적인 영역을 벗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1997)도 그와 동일 선상으로 분류할만한 첫번째 앨범이다. 물론 밴드명에서부터 태도에 이르기까지 당시 매체가 관심을 보였던 홍대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문화가 지니고 있던 가벼움과 독특함으로 치장된 저열함의 대표주자로 불릴만한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언니네이발관은 악기를 처음 배우자마자 바로 작업한듯한 첫번째 앨범에서조차 차별되는 송라이팅을 선보인바 있었고 주목해야할 점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들 그 첫번째 앨범의 의미를 뛰어넘는 음악적 성취를 이루어낸 두번째 앨범 『후일담』을 발표함으로써 그러한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롭게 체제를 재편하고 연주력이 기본적으로 받쳐주는 맴버들이 아니면 불가능할 뮤지션으로서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역력한 『후일담』은 「어제 만난 슈팅스타」와 같은 빛나는 싱글 트랙을 완성함과 동시에 앨범의 구성과 수록곡들의 배치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해 감상함에 있어 전혀 무리를 주지 않는다. 즉 『후일담』은 기록적인 근거에 의해 감탄을 강요할뿐 다시 꺼내듣기 힘든 류의 문자상의 명반이 아닌 아무때나 꺼내 들어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음악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여기에 음악적 성취가 합쳐짐으로써 비로소 명반의 대열에 합류됐다 하겠다. [아놀드]

 

 

 

63. 조규찬 8집『Guitology』, EMI, 2005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인기, 또는 상당수의 팬과 대중들의 관심이 그의 초기작들에 쏠려 있는 엄연한 사실을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규찬을 거론할 때 단연코 첫손가락에 꼽는 앨범들도 사실은 그것들이라는 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명작의 의미와 가치는 늘 변할 수도 있고 특히나 현재진행형인 뮤지션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성기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대중적인 환호도 예전만은 분명히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필터에 거를 이유는 없다. 그의 여덟번째 앨범에는 그러한 편견들을 뒤로 하고 음악인 조규찬의 오랜 내공과 뛰어난 작품 생산 능력이 곳곳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제자리 찾기에 조금은 방황한 듯, 부담스런 보이스 컬러와 이리저리 무리수를 두는 그의 모습이 담겼던 5집이후의 음반들을 명반이라 부르기는 힘든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멋진 곡을 쓰고, 소름이 돋을만큼 감동적인 목소리를 선사하는 조규찬만이 다시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그의 개성인가. 또 얼마나 고대하던 아티스트쉽이란 말인가. 『Guitology』라는 제목에 한치의 부끄럼이 없다. 그야말로 컨템포러리한 모던 록과 고전적인 리듬 앤 블루스, 최신 팝을 넘나들며 기타와 보컬의 현란한 인터플레이를 들려주는 그의 감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날이 살아 있다. 섬세하고 미니멀한 보컬의 느낌을 잘 살려낸 「잠이 늘었어」, 가녀린 떨림의 공명이 감동을 극대화시키는 「Don’t」,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다채로운 보컬의 매력을 담뿍 담아낸 올디스풍의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에서 확인되는 그의 뚜렷한 목표의식과 존재감은 흔히 그의 전성기라 ‘생각되어졌던’ 90년대 중반의 그 어떤 앨범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음악의 해석이라는 면에만 한정 짓는다면 그의 '최근작'은 그의 '최고작'일지모른다. [투째지]

 

 

 

64. 장사익 『하늘 가는 길』, 예원레코드사, 1995

 

잊어보자. 잊고 들어보자. 노래를 하기 전에 장사익이 걸었던 길은 굳이 잊고 그의 노래를 들어보자. 그가 40대가 되기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것도, 태평소라는 악기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하였던 것도, 서태지의 콘서트에서 태평소 피쳐링을 하였던 것도, 독일의 재즈 밴드 ‘살타첼로(Saltacello)’와의 협연도 모두 잊어보자. 그리고 그의 데뷔 음반 『하늘 가는 길』을 들어보자. 「빛과 그림자」, 「열아홉순정」, 「님은 먼곳에」 등처럼 한국 대중음악의 굵직한 히트곡들이 많이 포함되어있다. 장사익의 세대를 산 사람에게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곡이다. 어쩌면 특별할 것이 없는 선곡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사익의 노래는 특별하다. 이렇듯 누구나 다 아는 노래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恨)’이라는 한 마디에 가둬둔다면 더 억울할 한국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다. 앨범의 마지막 곡 「봄비」를 듣고 그 정서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이가 있을까. 왜색 짙은 신파조의 소리도 아니요, 지나치게 국악적이지도 않다. 퓨전 국악 운운할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맛이 한국이로구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애써 그가 걸었던 국악 명인으로서의 행보는 잊어도 그는 가장 한국적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것이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혹은 스스로 쓴 시에 붙이는 그의 가락은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장사익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찔레꽃」, 「섬」, 「하늘 가는 길」등, 그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한 모든 트랙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곡들이다. [쏭구]

 

 

 

65. 애드 훠 『The Add4' First Album』, LKL, 1964

 

이 앨범은 키보이스, 코끼리 브러더즈와 함께 한국 록음악의 시작을 알린 애드 훠의 역사적인 데뷔 앨범이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비틀즈(The Beatles)의 열풍이 거세게 불 때였고 이미 한국에서도 미8군 무대를 통해 악기를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록 그룹이 탄생되어 단련되고 있었다. 아직 록음악이 미8군 무대에 국한하고 있을 때부터 신중현은 이 분야의 최고 기타리스트였다. 애드 훠는 미8군 무대에서 일반무대로 록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신중현이 만든 그룹이었다. 서정길(보컬, 리듬기타)과 권순근(드럼), 한영현(베이스) 모두 미8군 무대 출신이었다. 이 앨범이 역사적인 이유는 한국 록음악의 시작이라는 태생적인 면보다 외국 곡들을 카피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당시 한국 록음악 풍토와는 달리 100% 자작곡을 담고 있다는 내용적인 측면 때문이다. 연주는 물론 작사, 작곡과 편곡까지 밴드 내에서 담당했다는 점이 이 앨범을 한국 대중음악의 기념비로 만든다.음악적 스타일은 철저히 벤처스(The Ventures)의 서프 록과 비틀즈의 스키플 사운드를 따르고 있다. 스타일의 유사성을 비판하기 전에 척박한 한국대중음악사의 이른 시기, 당대 세계적인 음악 조류를 완벽하게 체현해 내고 있다는 점에 놀라움이 앞선다. 더군다나 마이크 하나를 놓고 라이브로 연주해 낸 음원들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들에게 ‘오래된’이라는 수사 보다는 ‘뛰어난’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더군다나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 「바닷가」등의 트랙들에서 이미 신중현 고유의 한국화 된 록음악 작법을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 「소야 어서 가자」, 「고향길」처럼 토속적인 뉘앙스가 캄보 밴드의 연주로 불려 졌다는 사실도 이 음반이 가진 미덕이다. [전자인형]

 

 

 

66. 안치환 4집 『너를 사랑한 이유』, 킹레코드 ,1995

 

아직도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 하나로 안치환을 싫어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주절거리는 탁성에 그의 치열한 고뇌가 담긴 「수풀을 헤치며」, 삶에 대한 기운찬 긍정을 가장 진솔한 언어로 토로하는 「당당하게」가 같은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안치환은 새롭게 거듭난 자기 노래에 자신이 있었으며, 그 자신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조동익을 음악감독으로 맞이했다. 「수풀을 헤치며」의 바스락거리는 기타와 「당당하게」의 압도적인 후반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안치환이 가사를 쓴 「고향집에서」가 김남주의 「물따라 나도 가면서」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에 더해 텁텁한 80년대식 사랑을 포근한 리듬으로 감싸 안는 「평행선」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본 앨범은 90년대의 중심에 우뚝 선 록의 모범이자 포크의 모범이 된다. 대한민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발원한 음악 중 이처럼 시대와 적극적으로 교감하며 폭넓은 시선을 견지한 음악이 있었던가! 「겨울나무」의 풍성한 사운드는 괜한 겉멋이 아니라 안치환의 본심과 그것을 읽어낸 조동익의 해석이 완벽하게 반응하여 일구어낸 시너지 효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시너지 효과는 그의 다음 신보가 발매될 때마다 매번 반감된다. 무엇보다 진짜 불행인 것은 그가 당시에 내뱉은 고뇌의 언어들이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끔찍하도록 유효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자신의 안위를 즐기는가” “살고싶소 당당하게 살고싶소” “우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자신이 없었네 세상에 서있는 나” [호떡바보]

 

 

 

67. 이병우 기타독집1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 航海』(서울음반, 1991/재발매 뮤직도르프, 2001)

 

팻 메쓰니(Pat Metheny)의 기타 세계를 테크닉이 아닌 상상력의 무한 확장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병우의 기타 세계는 감수성의 무한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날”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하던 감성을 표현하는 연주는 그의 첫 솔로 음반부터 만개한 상태였다. 이 음반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세션을 통해 세련되게 가꿔진 스타일, 팻 메쓰니의 음악적 상상력과 테크닉, 그리고 어떤날을 통해 검증된 감수성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연주를 통해 연주자가 상정한 음악적 그림을 상상하게 만드는 회화적 감각은 이병우가 훗날 영화음악가로 성장할 것임을 암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음악이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작업 속에서 드러나는 통속적이지 않으면서도 선이 분명한 멜로디 감각은 이병우라는 아티스트를 독보적인 음악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이 음반에는 이러한 이병우의 음악적 특성이 짙게 배어있다. 전 곡이 일렉트릭, 어쿠스틱, 클래식 기타와 기타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연주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기타 앨범(그래서 스스로 ‘기타독집’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이라 할 수 있는데, 녹음의 질감도 이러한 기타의 특성을 살리는 데 치중되어 있다. 순수한 기타 소리만을 담기위해 들인 공은 언제 들어도 상당히 만족스런 수준의 녹음 퀄리티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음반은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성으로서의 감동을 전해준다. 연주 뿐 아니라 녹음에 있어서 순수한 소리에 대한 집착은 훗날 이 음반에서 이병우가 내세운(당시에는 1인 프로덕션이었던) Musikdorf 프로덕션을 통해 발매되는 음반들을 규준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헤비죠]

 

 

 

68. 푸른하늘 3집『푸른하늘 Ⅲ』, 동아기획, 1990

 

「눈물 나는 날에는」으로 팝 발라드의 절대 강자 된 푸른하늘은 10대 소녀 팬들을 동아기획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피아노를 기반으로 하여 차근차근 진행되는 이들의 발라드는 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랑을 네게」에서 드러나듯 호락호락하지 않은 멜로디와 여리게 떨리는 유영석의 목소리, 그리고 젊음의 고민을 담은 순백의 단어들에 당대의 10대와 20대 모두 매료되었다. 뭐니뭐니해도 푸른하늘의 매력은 수준 높은 팝튠을 들려주고자 하는 장인정신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특유의 노래 공동체 유산을 동아기획으로부터 동시에 물려받았다는 점이었다. 파격적인 곡 구성에 기타와 베이스의 훵키함이 돋보이는 「이 밤이 지나도록」과 장필순, 박학기, 오태호가 참여한 감성 충만한 화합의 노래 「우리 모두 여기에」가 앨범의 맨 앞에 자리잡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한편, 복잡한 조바꿈 속에서 뮤지컬 넘버의 내음을 풍기는 「푸른하늘」과 시시콜콜한 가사를 잔뜩 늘어놓은 「그녀의 전화벨2」은 동아기획 막내둥이만이 보유한 재치였다. “우리가 알고 싶어한 모든걸 느낄 수 있는 푸른 바람이 되는 날”을 궁금해하고,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면서도 “장미빛 입술로 떨어지는 고운 눈물”을 볼 줄 알았던 유영석과 송경호 두 사내는 어떤날과 시인과 촌장의 뒤를 이어 독특한 남성 2인조의 계보를 훌륭히 지켜내었다. 공일오비 역시 노래 공동체였고 김현철은 순수의 시대에 머물러 있던 시절에, 8곡 만으로도 자신의 실력과 감수성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던 90년 전후 시절에, 푸른하늘은 세련된 팝의 옷으로 갈아입은 80년대 키드로서 자신의 지분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호떡바보]

 

 

 

69. 이정선 7집 『30대』, 한국음반, 1985

 

이정선이란 아티스트가 가지는 위치는 언제나 톡특한 것이었다. 70년대 싱어롱이 가능한 편안한 포크 팝이 대세였을 때에도 그의 음악은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개성 넘치는 코드 진행과 깊고 화려한 화음, 기술적으로 뛰어난 기타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일면 아마추어리즘이 특징이었던 대중음악 문화에 프로 뮤지션, 혹은 테크니션으로서 존재감을 빛냈으며, 음악감독으로서 편곡과 사운드 디자인에까지 심혈을 기울이면서 예술적 완성도를 지켜내기도 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정선은 블루스에 더욱 천착하게 되는데 바로 이 앨범에서 그 절정의 실력을 담아내기에 이른다. 첫 곡인 「우연히」는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로서 각인된 이정선의 자신감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완결함이 녹아 있는 명곡이다. 「건널 수 없는 강」의 심화된 블루스 색채와 이 곡 간주에서 들려주는 어쿠스틱 솔로 또한 이정선 음악의 백미로 기록되어야 한다. 본격적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활용한 블루스 록 넘버 「바닷가에 선들」은 오랫동안 한국 블루스 록의 전형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울지 않는 소녀」의 과감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편곡은 음악감독으로서 이정선의 재능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이정선의 일곱 번째 앨범 『30대』는 블루스라는 장르적 관점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상식이지만 당대 팝음악의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상기한 트랙들은 블루스의 전통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에서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토착화된 작품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정선이라는 음악인이 가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뛰어남이다. 모방이 불가능한 고유한 예술성과 그것을 세련되고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연주력을 두루 겸비한 훌륭한 앨범이다. [전자인형]

 

 

 

70. 김동률 3집 『歸鄕』, 대영에이브이, 2001

 

단언하건대, 90년대 이후의 그 어떤 뮤지션도 김동률만큼의 대중적 성공과 음악적 완성도와, 그리고 대중의 신뢰를 동시에 획득하지 못했다. 이 진지하고, 실력 있고, 또 성실한 뮤지션에게 ‘대중가요’라는 통속적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김동률의 음악은 그 위력적인 빛을 더한다. 그는 알아듣기 쉬운 어프로치를 구사하며, 우회적이기 보다는 직선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선율은 마음의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와 울려내는 힘이 있으며 목소리에는 듣는 이를 안심시키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장난스럽고 유치한 것과는 거리를 두지만 어렵거나 난해한 방법론을 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측면이다. 사실상 그의 작곡 스타일을 규정지어버린 전람회 시절 이후, 김동률은 뮤지컬이나 영화음악, 그리고 월드 뮤직 등의 요소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정체(停滯)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의 부침(浮沈)을 거쳐 이제 세 번째 솔로 앨범인 『귀향』에서 그 정점의 멋을 풍겨낸다. 앨범을 여는 두 곡, 「사랑한다는 말」과 히트곡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에서 전람회 시절에 기초를 닦은 클래시컬한 작곡방식에 더한 성숙미,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게 되며 「하소연」, 「망각」에서는 그의 관심이 멜로디 그 자체가 아니라 전체적인 소리가 전해주는 조화와 감동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감히 그의 음악 여정을 통틀어 최고의 노래 중 하나라고 말하고픈 「귀향」은, 그가 슬로우 템포의 곡을 만들 때 그것은 단순히 몇 사람을 울리기 위해 존재하는 발라드가 아니라 한 시절, 한 세대의 추억과 상실감, 그리고 희망과 애수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임을 너무도 벅차 오른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투째지]

 

 

 

71. 김목경 3집 『Living with the Blues』,삼성뮤직, 1998

 

1980년대 영국서 음악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김목경은 1990년 영국서 녹음한『Old Fashioned Man』을 통해 데뷔했다. 두 번째 음반『Blues』(1995)까지 그는 대중성과 정통적인 블루스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음반인 본작에 이르러 자신이 하고 싶던 바로 그 일렉트릭 블루스를 맘껏 펼쳐놓는 쪽으로 과감히 방향을 선회했다. 자신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적잖은 시간 호흡을 맞춰온 밴드와 녹음한 앨범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주가 빛난다. 「내일 속의 어제」는 진솔한 삶의 태도가 블루스, 컨트리, 트로트가 절묘하게 섞인 곡조 사이로 펼쳐지는 김목경식 블루스의 진수이고,「여의도 우먼」과 「언덕 위의 여자」는 한글 가사로 부른 정통 블루스곡이다. 영어 가사의 「Guitar Man」과 「Fix Your Love on Me」는 시카고 블루스맨의 음악이라고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로 진한 모던 블루스 기타 연주와 감각을 들려준다. 연주곡 「외로운 방랑자」는 슬로우 록 취향의 블루스 곡으로 한국서 가장 소외된 장르 중 하나인 블루스만을 바라보고 연주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와 느낌을 기타라는 악기를 통해서 감동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순수하게 벤딩을 통해 만들어내는 깊은 울림에서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고독, 태도, 삶이 청자에게 전달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앨범 제목 그대로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순도 높은 블루스 음반이다. [헤비죠]

 

 

 

72. 장필순 5집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하나뮤직, 1997

 

겉으로는 큰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자기자신을 그야말로 꾸준히 움직이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장필순이 그런 아티스트들 중 한명일 것이다. 영화 ‘굿모닝 대통령’ 사운드 트랙을 위해 뭉쳤던 프로젝트 그룹「오장박」(오석준, 장필순,박정운)  에서부터 대중들과의 교감을 시작했던 그녀는 90년대 초반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줄곧 포크 라는 장르를 통해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칼 같은 감정을 조용하게 노래에 담았다. 97년도에 발표한 5집앨범 은 전작들에 비해 조금은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다. 물론 음악적인 뼈대가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내성적인 스타일로 일관했던 과거와는 달리 비트가 강조된 발랄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것 같았던 보컬도 이젠 좀 용기를 얻은 사람처럼 조금은 힘있게 들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뭔가 밝아진 것처럼 보이는 이 앨범의 내면은 전혀 밝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좀더 시니컬하다. 이런 분위기는 앨범이 발표되었던 97년의 사회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인디밴드 의 약진이 시작되고 있었고 잘 모르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 하기에는 세상이 쉽게 굴러가 주지 않을 거라는걸 사람들은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래서 되든 안되든 속에 있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들을 「스파이더맨」, 「TV 돼지 벌레」, 「사랑해봐도」같은 노래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런 변화는 과거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포크의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폴린]

 

 

 

73.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 반도음향, 1992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을 바꿔놓은 뮤지션인 서태지의, 그러니까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앨범이다. 발라드와 트로트 일색이었던 한국 대중음악에 ‘댄스’를 포방하며 ‘랩’을 전방에 내세운, 그래서 순위 프로그램에서 17주 동안 1위를 차지한 「난 알아요」가 있는 음반. 그런 까닭에 80년대의 반작용으로, 개인을 주목하기 시작한 시대정신이 선택한 앨범이라는 거대한 평가까지도 어색하지 않은 음반인 것이다. 정작 이 음반의 사회적, 시대적 의미에 밀려 음악적으로 그다지 평가 받지 못한 앨범이 아닌가 한다. 이 음반에 대한 적절한 음악적 평가라는 것이 최초의 히트한 ‘랩’ 음악 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타이틀곡인 「난 알아요」는 ‘랩’이라는 음악적 요소와 함께 헤비메탈에 쓰일 법한 디스토션이 가득 찬 기타연주와 ‘뽕끼’라고 불릴만한 멜로디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와 「이 밤이 깊어가지만」 등의 트랙에서는 ‘랩’과는 또 다른 지점의 흑인음악인 Soul, R&B 등의 장르가 확연히 드러난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대중음악을 잠식한 R&B와는 전혀 다른 맛이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컨템포러리한 흑인음악임을 부정할 수 없다. 데뷔 음반 이후 꾸준하게 록음악에 대한 정체성을 들어내는 서태지임을 상기한다면 다소 괴리가 느껴지는 지점도 있지만, 어찌하였든 92년의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서태지는 이 음반을 발판으로 90년대를 통틀어 한국 대중음악에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중의 한 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쏭구]

 

 

 

74. 시인과 촌장 2집 『푸른 돛』, 동아기획, 1986

 

아무리 시간의 흐름과 새로운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요구하더라도 변하지 않을 가치를 대상으로 하면서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그를 대신할 결과가 진보도 뭣도 아닌 한순간의 얕음을 담아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명반이라 불리워지는 가치에 대한 동의는 그렇게 시간적 간극을 뚫고 탄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과촌장의 [푸른돛]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쉽게 변할 성질이 아니다. 이미 명반의 반열에 올려진 작품이고 그 이유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직 신앙에 완전히 몸을 의지하지 않은 하덕규의 상상력은 함춘호를 만남으로써 보다 자유롭게 표출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동시대의 어떤날과도 달랐고 들국화와도 다른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녹음 방식에서부터 노래 만들기, 가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았던 구석이 없었던 이 결과물을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놀랍다. 갈구의 대상을 동물과 꽃 등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변하는 감정의 불안전함을 이처럼 하나의 앨범에 온전하게 담아낸 예는 다시 찾기 힘들만큼 독보적이다. 냉소적임과 따뜻함으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시도되어진 각종 음악적 실험과 극적인 곡 구성으로 대표되는 곡들 외에도 <진달래>의 가슴시림과 한편의 동화인 <얼음무지개>에서 들려주었던 근본적인 송라이팅의 우수함은 들춰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때의 하덕규는 절실함의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듯하며 그렇기에 표현함에 있어 폭을 보다 넓게 가져갈 수 있었을것이다. 이후 하덕규가 그 원천을 신앙으로 잡음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음악만 놓고 본다면 다시는 이때와 같은 광범위한 여지를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소중함과 동시에 애뜻하게 남는다. [아놀드]

 

 

 

75. 박정현 4집『Op.4』, T-Entertainment, 2002

 

박정현의 전작들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세상에 기억할만한 유려함으로 만들어준 동지와 선배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윤종신, 노영심, MGR, 이규호 등등. 우리가 박정현의 『Op.4』를 특징적인 앨범으로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정석원'의 존재감에 기인한다 하겠다. 앞서 말한 이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감수성의 소유자이자 한국대중음악계의 장르 탐식가 명단 중 분명 상단을 차지할 정석원이라는 이름, 이미 '이가희'의 앨범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그이라 더욱 대중들의 시선은 모아졌다. 그 시선은 사실상 우려감이기도 했으며 앨범의 주인공인 박정현의 존재감이 흐릿하게 지워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조바심이기도 했다. 오케스트레이션과 김세황의 기타까지도 대동한 공습형 파워발라드 「Plastic Flower(상사병)」로 청자들을 얼하게 만든 이들은 「꿈에」로 - 마치 이승환이 『HUMAN』의 「천일동안」에서 그랬듯 - 발라드라는 음악장치가 감정을 고양케하는 어떤 극단의 전형을 보여준다.  「Plastic Flower(상사병)」가 우려의 영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친다면, 「꿈에」는 역시나 걸출한 보컬의 소유자가 음악(또는 음반)의 주인됨을 보여주는 감동의 순간을 확인케 한다. 가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석원의 역량은 주청자인 '여성'의 감수성을 빼어나게 훔치는 수준이며, 노래의 측면에서 보자면 박정현은 발라드 뿐만 아니라 비트 있는 넘버들은 물론 모던락 '여성 보컬'의 어떤 경향을 표방하는 다채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뒷선의 지원병이 되었지만 윤종신의 조력(「이별하러 가는 길」)도 여전하며, 이런 라인업은 황성제까지 가세한 『On&On』(05)에서도 재현된다. [렉스]

 

 

 

76. 롤러코스터 2집 『日常茶飯事』, T-Entertainment, 2000

 

세기말, 각자 가요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조원선과 이상순, 지누는 하나의 팀으로 탄생했고, 비교적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뤘다. 『日常茶飯事』를 듣고 있노라면 딱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해 일요일 오후까지 내가 느끼는 일상을 45분짜리 CD 1장에 압축해 놓았음을 느낀다. 펑키한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힘겹고 우울한 시작... 그리고 점점 비트나 멜로디, 보컬의 목소리는 밝아지며 「일상다반사」에 이르러선 이보다 더 여유롭고 평화로울 수 없다. 지누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빠르고 느리고 신나고 차분하게 듣는 이에게 애시드팝의 매력을 조목조목 가르쳐주고 있다. 이상순이 연주하는 기타는 깔끔하고 세련된 맛을 내주며 조원선의 보컬은 때론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 너무도 담담하고 건조하게, 때론 너무 훵키(Funky)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곡에 스며들며 곡이 가진 그루브를 제대로 살려주고 있다. 홈레코딩으로 작업한 음반이라곤 믿겨지지 않을 만큼 녹음상태도 썩 괜찮고, 데뷔엘범부터 고수해오던 DIY제작으로 밴드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확실히 국내에선 보기드문 유니크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믹싱을 하며 해금이나 테크노리듬을 샘플링하는 센스도 돋보이고,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연주곡들 역시 듣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훌륭한 장치로써 역할을 다하고 있다. 듣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중독성 강한 훅과, 자연스레 공감하게 되는 진솔함이 잔뜩 묻어나는 가사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소포모어징크스를 멋지게 극복해내며 롤러코스터의 마니아층을 단단히 다져놓음과 동시에 보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알리게 하였고,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놓치지 않은 채 가요계의 멋진 대안이 되어주었다. [아미고]

 

 

 

77. 조용필 14집『CHO YONG PIL 14』, 서울음반, 1992

 

조용필의 14번째 앨범은 전작 『The dreams』의 음악적 열정을 차분히 마무리하는 덤덤한 에필로그로서, 당연히 『The dreams』와 한 쌍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비록 「장미꽃 불을 켜요」와 같은 모험은 없지만, 그가 7집에서 완벽히 틀을 잡은 ‘가요록 사운드’는 본 앨범의 「흔적의 의미」와 「Jungle city」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부활한다. 물론 그는 「슬픈 베아트리체」와 「이별의 인사」를 통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뮤지션이란 사실도 드러낸다. 두 곡의 환상적인 현악 편곡은 그가 고전음악의 작법을 치밀히 연구한 결과물이다. 특히 「이별의 인사」는 트로트와 국악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는 보컬과 고급스런 현악 세션을 접붙여놓은, 더할 나위 없는 아이디어 작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 곡의 발라드 「추억에도 없는 이별」과 「슬픈 오늘도, 기쁜 내일도」가 가진 숨은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평이하게 작곡한 것 같지만 왠지 모를 유치함과 소박함과 낭만이 서린, 도시에 사는 중년 뮤지션의 풋풋한 정서가 일품이다. 두 곡의 버스verse 부분이 들려주는 훅에서 노장의 ‘소박한 관록’을 감지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이렇듯 은근한 실험과 단단한 록 사운드와 푸근한 발라드가 덤덤히 공존하는 모양새가 진짜 조용필이다. 온갖 찬사에 둘러싸인 작품들을 앞에 두고 있기에, 그곳에서 한발 물러서있는 작품이기에, 그 가운데에 볼록하게 솟아있는 「고독한 runner」는 더욱 신실한 제스처로 다가온다. 앨범 전체를 자신만의 음악으로 채우기로는 본 작품이 마지막이었던 조용필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폭풍 속에서 홀로 조용히 달리고 있었다. [호떡바보]

 

 

 

78. 한영애 2집『바라본다』, 동아기획, 1988

 

7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한영애가 쏟아내는 음악적 성취와 태도는 매우 모범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는데, 그것은 포크(해바라기), 블루스(신촌블루스), 국악과의 크로스 오버등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반쯤은 쉰듯한 허스키 보이스가 시도할 수 있는 음악의 가짓수를 제한할 것이다라고 생각되어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보컬 스타일을 버리거나 크게 바꾸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목소리들은 음악과 매우 잘 어울렸고, 또 대중들과의 교감에서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그녀는 다른 길로 새는 법이 없었으며, 누구보다도 꾸준히 음악, 또는 음악관련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료와 선후배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을만 했다. 물론 후대의 평론가들은 그녀를 어떻게 기록할지 알 수 없으나, 감히 나는 여기에서 70년대 이후 가장 존재감 있는 여성 뮤지션으로서 그녀의 이름을 올리고자 한다. 한영애라는 솔로 아티스트의 지위획득에는 다른 많은 활동이 그 영향을 끼쳤겠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가장 강력했던 한장을 꼽으라면 바로 그녀의 두번째 앨범일 것이다. 「코뿔소」「누구없소」등이 담긴 이 앨범을 두고 동아기획의 김영사장은 ‘치마를 두른 가수의 음반중 가장 성공한 음반’이라며 그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의 기준에서 이 앨범의 성공의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앨범은 매우 스트레잇한 블루스 록을 한국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으며, 아주 심각한 부분에서조차 감각과 재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그녀는 슬로우 넘버에서도 특유의 그루브를 잃지 않았고, 음과 공백의 위치를 상투적으로 처리하지 않는 등 보컬적인 면에서도 독창적 어프로치를 획득하고 있었다. [투째지]

 

 

 

79. 바세린 1집『The Portrait Of Your Funeral』, GMC, 2002

 

비장함과 아름다움, 바세린의 정규 1집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을 설명할 수 있는 두 단어라 하겠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대한민국 '좁디좁은' 헤비니스씬은 참으로 기적같은 데뷔반을 배출하곤 했는데 『Endless Supply Of Pain』의 크래쉬가 그랬고, 『Noizegarden』의 노이즈가든이 그랬듯 바세린의 본작 역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모든걸 보여주자'라는 절박함과 치열한 가투의 사운드가 담겨져 있다. 어쿠스틱한 분위기의 서정적인 연주가 앨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두번째 트랙 「Crane」의 파장공세로 본격적인 바세린의 인자를 발산하는데, 길어도 4분을 채 넘지 않는 유수의 트랙들은 선명한 멜로디 감각과 영화상의 보이스 트랙을 인용하는 등의 장치로 개개의 드라마를 형성하고 있다. 이 드라마들은 제각각 노도하는 분노(「Good Life」, 「Missing Link」, 「Pure」, 「Boredom In The Pressure」 등)를 앞세우기도 하고, 서정적 인트로로 열다 이윽고 바닥의 감성을 노출「(Pierce A Knife In My Heart With Your Hands」, 「In This Madness」등)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향은 전작 EP 『Bloodthirsty』의 강화형이자 이어지는 2집 『Blood of Immortality』(04)의 완숙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어떤 곡이든간에 기억할만한 아름다움을 아로 새기는 작법은 바세린만의 주효한 강점이다. 각 파트의 선명함을 보여주는 출중한 사운드 마스터링과 메틀팬과 코어팬들은 물론 목마른 음악팬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한 밴드의 성실함은 21세기초 기억할만한 헤비니스계의 명반을 만들어냈다. [렉스]

 

 

 

80. 빛과소금 2집, 『내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동아기획, 1990

 

객관적인 측면에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가 한국 대중음악의 창작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바로 빛과 소금 같은 팀들이 그것을 확신시키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 이루어진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도약은, 조금 애매하게 표현하자면 ‘세련미’의 획득이었다. 풀어서 이야기해보자. 그 이전시기의 음악들도 보컬, 연주, 가사 등 대중가요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에서 그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의 가요는 팝이나 재즈처럼 세련된 음악으로 인식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편곡, 화성의 다양함, 스튜디오 녹음의 기교 등에 있어서 영/미 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들국화나 어떤날, 그리고 빛과 소금 같은 팀이 등장하면서 그러한 간극이 상당 부분 좁아지게 된다. ‘위대한 탄생’,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연주와 작곡에 대한 노하우를 획득했던 장기호, 박성식과 한경훈으로 이루어진 빛과 소금은 아마도 당대에 가장 세련된 어프로치를 구사하는 팀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철, 봄여름가을겨울 등은 흔히 이제는 ‘동아기획’ 사운드라 불리는, 재즈와 팝의 형식미 위에 한국적인 감수성을 공존시키는, 가요계 역사를 통틀어서도 극히 독창적인 사운드 미학을 확립시켰다. 「TV Talent(샴푸의 요정 Ⅱ)」나 「모터 사이클」에서의 연주를 들어보자. 아쉽게도 이제는 그 대가 끊긴, 한국식 퓨전재즈의 효시이며 그러한 세련된 연주와 화성의 접합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던 신선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의 구현이었다. 이제는 클래식이 되어버린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리고 「귀한 건 쉽게 얻어지지 않아」와 같은 곡들에서 느껴지듯, 그 이전의 대중가요의 조금은 투박하고 ‘뽕스러운’ 멜로디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났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매우 친근하고 아름답다. [투째지]

 

 

 

81. 유앤미블루 2집 『Cry.... Our Wanna Be Nation!』, LG미디어, 1996

 

방준석과 이승열. 이 다재다능한 두 사람의 의기투합체 유앤미블루. 분명 두사람이 추구하는 음악세계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시너지효과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지울수 없는 너」로 대표되는 감성적이고 연약한 방준석의 음악과 「그대 영혼에」로 말할 수 있을 선과 스케일이 굵직굵직한 이승열의 음악은 얼핏 느끼기에 어울리기 힘들 것 같지만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장점을 잘 살려주는 것이 이 밴드의 미덕이다. 우정을 기반으로 한 유앤미블루의 조화는 수줍고, 우울하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한 정서를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잘 표현해 내고 있음이다. 혹자는 이승열이 맡은 기타부분에 있어선 U2의 멤버인 에지(The Edge)의 플레이와 비슷하다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 U2에 비견될만한 음악을 만들어 낸 누군가가 있었던가? 분명 이승열의 플레이는 에지의 플레이와 동일선상에 놓고 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려했으며, 보컬의 감수성 역시 보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레벨을 보여주었다. 비록 음악 외적인 성과에 있어서는 그리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후에 팀이 해체를 하고 각자의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음악의 실험성이나 전달하려는 메시지, 그리고 뮤지션의 마인드 모두 더 진보적이고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 그들의 등장은 한국음악사에 진정한 얼터널티브음악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였으며, 『Cry.... Our Wanna Be Nation!』은 그 쏘아올린 축포가 정상에서 불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미고]

 

 

 

82. 이승철 4집 『The secret of color』, 지구레코드, 1994

 

주어진 음악적 재능과는 별개로 가장 굴곡진 시기를 보내던 이승철은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를 한다. 이승철 자신이 밝힌 대로 ‘소리에 대한 획을 긋고자’한 이 작품은 발매 즉시 평단의 격찬으로 인정을 받았다. 훌륭한 세션에 의한 연주 및 코러스, 후반 작업이 일체화된 본작은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 단지 이 작품에는 킬러 싱글이 없었을 뿐이다. - 이승철이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 하나로 엮어져 ‘작품’으로서의 앨범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록 보컬리스트로 출중한 역량을 발휘하던 그가 의외로 정원영과 함께 한 퓨전 재즈곡 「겨울그림」이나, 김홍순과 함께 한 블랙뮤직 스타일의 「착각」, 「흑백논리」에서도 정말 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과거에도 「발레리나 걸」등과 같은 댄서블한 곡이나, 박광현과 함께 했던 「잠도 오지 않는 밤에」 등에서도 이미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기에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승철과 서로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본작을 관통하는 하모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이승철’에서 음악감독으로서의 ‘이승철’의 능력이 만개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참, 이전의 이승철을 느끼고자 한다면, 「웃는 듯 울어버린 나」와 「소나기」를 들어보시길 권한다. 경력 20년이 넘은 뮤지션이 여전히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기억한다면 거기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때, 한 뮤지션이 진정으로 추구하던 소리에 대한 열정의 모든 것을 후회없이 내지른 것이므로. [마이너]

 

 

 

83. 키보이스 1집『그녀의 입술은 달콤해』, 신세기 레코드, 1964

 

한국 록 최초의 음반은 '신중현'의 록그룹 애드 훠(Add 4)의 『빗속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비틀즈’를 표방하며 애드 훠와 함께 그룹사운드의 대표주자로 활동했던 키보이스의 『그녀의 입술은 달콤해』가 그 이전이다. 1964년 7월 4일 발매된 것. 애드 훠의 『빗속의 여인』이 1964년 12월쯤 발매되었으니 발매시기로만 본다면 한국 최고(古)의 록 음반인 셈이다. 매년 여름이면 들을 수 있는 ‘국민가요’라 할 만큼 유명한 곡 「해변으로 가요」의 주인공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비틀즈와 비치보이스의 곡들을 부르며 활동해왔고 앨범 수록곡들도 번안곡들이 주를 이루며 밴드의 구성자체도 비틀즈와 비슷한 카피 혹은 이미테이션 밴드로 그 존재 가치를 깎아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데뷔음반은 최고(古)의 록 음반이라는 점에서 분명 존재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본다. 우습게도 타이틀인 「그녀의 입술은 달콤해」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가요로 지정되어 널리 알려지지 못했지만 최초로 전자오르간을 도입한 「정든 배는 떠난다」나 I wanna hold your hand를 번안한 「그녀 손목 잡고 싶네」같은 곡이 수록된 그들의 데뷔앨범 발매는 분명 이미자가 동백아가씨로 가요계를 평정했던 그 시절 한국 음악계에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으며 그렇기에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라도 재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편지]

 

 

 

84. 김두수 3집 [Kim Doo Soo], 현대음향, 1991

 

사진만이 시간을 정지시키는 예술이 아니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예술이지만 좋은 음악은 때때로 그 자신의 한계인 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두 가지 방법이 있겠다. 하나는 빛의 속도로 달려 시간개념을 소실시키듯 멜로디로, 기타의 리프로, 다변화하는 그루브로, 또는 다른 어떤 무엇으로 음악 감상에 물리적 역학을 부여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정신적인 것이 있겠다. 최면이나 마법을 부리듯이 초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김두수는 두 번째 방법으로 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을 가진 음악가이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1991년 발표된 세 번째 앨범이다. 이 앨범은 우리가 포크, 혹은 아트록이라고 말할 때 연상 되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닌 김두수의 음악으로서 고결한 완결성을 보여준다. 「청보리밭의 비밀」과 「보헤미안」은 고결함의 진경이다. 복잡한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구도자를 따라가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폭발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노래 속에 포함된 감수성과 표현이 지나치게 세밀해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다. 포크의 작법에 비교적 충실한 「강변마을 사람들」이나 토속적인 멜로디의 「나무그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이 앨범을 진중히 청취했을 때 시간이 멈춘 듯 초현실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품과 예술이라는 이중적인 대중음악의 속성 중에서 예술 쪽으로 부등호를 크게 열게 하는 앨범이다. 한국대중음악사상 이렇게 탐미적인 앨범은 몇 장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앨범이다. [전자인형]

 

 

 

85. 이소라 6집『눈썹달』, T-Entertainment, 2004

 

자신의 앨범에 음표 하나 새기지 않고도 음악적 비전만으로도 세계관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다. 이소라의 『눈썹달』이 그런 경우다. 개인적 경험을 가사로 수놓고 음악 친구(이한철, 김민규, 스토리의 이승환, 강현민, 정지찬, 정재형, 신대철)들을 초대하고 자신의 음반에 프로듀서로서 감독직을 맡는다. 그녀를 둘러싼 가장 많은 수사였던 '재즈적 창법'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슬픔과 분노에 관하여』(98)에서 벗어던진지 오래였다. 98년작에서 보컬과 장르 장벽을 진작에 넘어선 이소라의 선택은 각 노래마다 곁들인 비애와 아픔의 정서를 다른 색채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끝간데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우울보다는 슬픔을 관조의 경지로 이끈 대표작 「바람이 분다」가 보여준 대중적 성취 외에도, 이미 다른 행성에 다다른 몽환의 경지 (「듄」,「쓸쓸」)가 앨범 표제와 어우러져 색다른 대지의 감각을 보여준다. 슬픈 감정의 바닥에 존재하는 허밍의 소름끼침 「세이렌」, 옆자리 친구에게 전하는 술잔 사이의 대화 같은 - 또는 밤전화 같은 - 「시시콜콜한 이야기」, 텁텁한 담배 연기 속의 자욱함 같은 「fortuneteller」등 이 모든 것들은 '특정 감정'을 지닌 2.30대 여성들에게 폭넓은 공감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그것이 전작의 제목처럼 'Diary' 속의 속내든 지구 저편 외행성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의 힘'이든간에 이소라가 이 앨범에서 보여준 뮤지션으로서의 성취도는 그녀 디스코그래피 최상의 것이 된다. 이는 뒤에 거론할 박정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보컬리스트'가 앨범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감동적 순간의 확인이며, 한국대중음악계의 은둔형 여성 실력파의 신작을 기대하게 하는 확고한 근거가 된다. [렉스]

 

 

 

86. 노래를찾는사람들 2집『노래를 찾는 사람들 2』, YBM, 1989

 

간혹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옹골참에 누구 하나 형식의 잣대를 들이대기 힘든 경우가 있다.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음반을 대할 때가 그렇다. 고운 손바닥 안에 결심한 듯 묵직한 것을 움켜쥐었던 대학신입생의 자취방에서부터 제도 내에서의 직장인, 지식인, 그리고 입소문을 들은 호기심 가득한 숱한 이들의 구매목록이었던 전설의 음반. '파일 공유' 시대가 무색하게도 닳고 닳은 복제테이프로 생명을 이어간 '어떤 시대'의 유효한 증거품이다. 이름값이 담고 있는 편견(?)에 비추어 본다면 다소 뜻밖에도 어떤 선동성이나 운동성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시대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무하는 기능이 더욱 강한 본작은, 소박함이 숭고함에 닿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기적을 보여준다. 대체로 가사는 강직함과 온건함을 강조하는 남성적 어조와 모든 것을 껴안는 대자적 자연의 여성적 어조가 배합되어 있으며, 잘 알려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같이 장엄함의 경지에 닿은 곡부터 「마른잎 다시 살아나」, 「잠들지 않는 남도」와 같이 처연한 정서를 보여주는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무엇이든 간에 현장의 이들이 고민했던 대목이 '서정성'과 '대중적 설득력'이었음은 쉬이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시대상이 만들어낸 각박한 처지의 아마추어리즘이 이룬 가장 극적인 경지로써 노찾사는 지금도 간혹 인구에 화자되고 있다. 때로는 젊은 가수들의 리메이크 선곡으로, 때로는 다시금 곱씹는 '그때 당시의' 안치환과 권진원의 존재감으로... 혹자는 본작을 두고 '신화화'를 우려하기는 하지만 앨범 내용이 담고 있는 진솔함과 침착하게 누그러진 가투의 에너지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렉스]

 

 

 

87. 푸른새벽 『Bluedawn』, Cavare Sound, 2003

 

푸른새벽은 The The의 Dawn과 Demian의 Sorrow에 의해 결성된 그룹으로 Dawn은 이미 The The에 소속되어 세번째 정규 앨범 [Main In The Street](2001)를 발표한 뮤지션이었다. 그러나 The The는 어디까지나 김영준의 송라이팅에 의해 주도되었던 그룹이었고 마침 곡을 쓰기 시작하였던 Dawn은 푸른새벽 활동을 병행하며 메이저에서 활동함에 따라 생기는 제약적인 부분과 회의감들을 The The와는 별개의 창구를 통해 표현하게 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Bluedawn]에 그러한 과정이 소년소녀적인 감성에 녹아들었던건 필연이었고 결과물은 같은 해에 발표되었던 The The의 [The The Band](2003)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박혀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는 [Bluedawn]이 테크닉적인 완성도로써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비슷한 이유로 상처 받아온 사람들과 감성적으로 소통하는데 성공했고 상징성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하고 10대에서 20대가 되고 그속에 머무르면서 느끼게 되는 생각이나 감정들이 여리게 스며든 노래로 하여금 위로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기술적인 부분과 앨범의 프로듀싱을 YJRoom이란 이름으로 참여한 The The의 김영준으로부터 받으며 마치 아직 독립하지 못한 아이와도 같았던 이때의 음악은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르고 그래서 소중한 의미로 남겨져있는건지도 모른다. 그뒤 아이들은 독립하여 보다 원래 의도했던 장르에 보다 경도된 음악을 선보이나 이때만큼의 소통을 이루진 못한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아련함으로 남는것이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것처럼. [아놀드]

 

 

 

88. 현미 『히트 시리즈(보고 싶은 얼굴)』, 오아시스, 196?

 

1960년대는 본격적인 대중음악 시스템이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SP에서 LP로 음반 매체가 이동하였고 무엇보다 상업민방이 속속 개국하면서 방송의 역할이 대중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서구화를 근대화의 롤 모델로 삼던 당시, 미8군에서 서구 대중음악을 연마하던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문화계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때 손석우를 비롯해서 이봉조, 김인배 등 새로운 세대의 작곡가들과 최희준,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 스탠더드 팝 가수들이 등장했다. 패티 페이지(Patti Page)나 냇 킹 콜(Nat King Cole)류의 편안한 팝음악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음악은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이봉조와 현미의 음악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백인적인 스탠더드 팝의 울타리 안에서 블루스와 소울의 영향력을 짙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안개」에서 들려주는 풍성한 허스키 보이스나 「보고 싶은 얼굴」의 끈끈한 블루스의 느낌은 당대 스탠더드 팝 뮤지션들 중에서도 구별되는 독특한 음악적 스펙트럼으로 자리 잡고 있다. 히트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오아시스(일련번호 OL 12438)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이봉조 악단의 짙은 블루스적 색채와 절정기 현미가 들려주는 성량 큰 소울 보컬이 잘 어우러진 음반이다. 이미 커다란 히트곡이었던 「밤안개」와 박춘석의 편곡으로 김치캣이 불러 히트했던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집 성격은 아니지만 이봉조와 현미의 60년대 절정기 호흡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이후 이봉조는 스타 작곡가로 많은 가수들을 발굴하고 많은 히트곡도 가지게 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음반들 중에서)이 음반에서의 작업이 가장 진한 블루스 필을 내보이고 있다. [전자인형]

 

 

 

89. 패닉 2집 『밑』, 신촌뮤직, 1996

 

패닉의「달팽이」는 라디오헤드(Radiohead)의「Creep」과 공통점이 있다. 시장논리에 의해 사장될 뻔 했던 그룹을 구해낸 노래라는 점이 그렇고, 각각 그들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노래임에도 그들의 음악성을 대표할 수 없는 노래라는 것이 그렇다. 이 곡을 통해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뤘지만,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애당초 이적의 솔로엘범으로 기획되던 패닉의 1집에서 김진표의 존재감은 이적이 노래를 부를 때 옆에서 색소폰을 부르며 가오를 잡아야 할 만큼 너무도 미미한 것이었으니... 비로소 팀 작업에 의해 이뤄진 이 엘범의 작업은 진정한 데뷔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로 그루브를 만드는 독특한 방식의 인트로「냄새」로 포문을 여는 『밑』은 그 저돌적인 정서의 표출과 함께 실험적인 사운드로 전개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고한다. 현악과 꽹과리, 피아노의 앙상블이 돋보이는「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와 삐삐밴드의 이윤정이 질러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인상적인「불면증」에서 그 음악적 실험을 절정에 이른다. 김진표가 만든 「벌레」와 「Mama」에서는 갱스터랩(Gangster Rap)이나 랩메탈(Rap Metal)의 기운마저 감도는 어둡고 거친 분위기에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랩 역시 인상적이다. 「혀」에선 직접적이진 않지만 그간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잡설들을 싸잡아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다. 데뷔엘범으로 인해 뿌리내린 고정관념에 의해 2집은 파격으로 느껴졌고, ‘반사회적그룹’이라는 낙인까지 받아야 했지만, 그들의 날카로운 사회를 향한 외침, 그리고 끊임없는 실험은 이후에도 이어져 패닉으로써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각자 따로 활동을 하면서도 계속되어 패닉과 이적, 김진표 모두를 굴지의 뮤지션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미고]

 

 

 

90. 어어부 프로젝트사운드 『개, 럭키스타』, 펌프/디지탈미디어, 1998

 

EP 『손익분기점』에서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아이러니를 선보였던 어어부 프로젝트밴드. 원일이 세션으로 물러나면서 장영규와 저자(백현진)의 듀오가 된 어어부 프로젝트사운드는 18곡이라는 엄청난 물량공세로 한국 대중음악 사상 유례가 없는 기괴하고도 음침한 실험적 음반을 만들었다. 송도순의 아기사탄 같은 내레이션이 잔뜩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개」에서 “제발이지 당신은 이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울부짖음이 등장하는 순간, 누구든 이 앨범의 마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후에 비싼 실수」의 음울하기 짝이 없는 반주와 한 마리 괴물을 연상시키는 저자의 섬뜩한 보컬 앞에서 모두 압도당하고 만다. “나는… 일말의 양심을 도려내고 있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강타한 다음부터 이 음반은 더 이상 아방가르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저자가 뿌려놓은 초현실적이고 정신분열적인 가사 속에서 “농담 섞인 음식 보건위생법에 저촉” “나는 기억하지 않기로 하였다”와 같은 구절을 따라가다가 “인스턴트 꿈: 복지, 건강, 희망” 이라는 결말 앞에서면 마침내 우리는 울적해진다. 아이러니와 부조리로 점철된 우리네 삶에 대한 통찰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국악과 양악을 총망라하는 각종 타악기, 이인(방준석)의 기타와 원일의 피리, 모던록과 댄스의 뒤섞임, 일상생활의 각종 소음, 이 모든 것들이 어어부에겐 통찰에 필요한 소스들이다. 인용된 한대수와 트위스트 킴에서 알 수 있듯, 이 앨범은 대한민국의 반골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송홍섭, 강산에, 달파란, 김형태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건 이 앨범이 삐삐밴드로부터 출발한 ‘작전 펑크’의 완성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호떡바보]

 

 

 

91. H2O 『오늘 나는』, 로얄레코드, 1993

 

1990년대 초는 록의 어법과 태도 등이 모든 면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던 시기다. 그리고 그것은 대세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동시대에 문화적 충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부터 맞이했던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환점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까. 아니다. 우리에게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록의 모던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H2O로부터였고 1980년대에 시작때부터 타밴드와는 뭔가 다른 독특한 이미지를 풍겼던 그들은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보컬리스트 김준원을 제외한 나머지 연주 파트에서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단행했고 그렇게 재탄생된 음악은 이 땅에 존재하던 록 음악과는 그 출신 성분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헤비메틀부터 모던록, 펑크, 일렉트로니카까지 당대의 음악을 하나의 앨범에 일관적으로 담아내었고 결과물의 함량이 시도의 가치를 무색하지 않게 만들었던 유일무이한 뮤지션인 강기영의 송라이팅을 바탕으로 새로운 체제의 H2O는 리듬이 두각을 나타내는 음악을 선보였는데 『오늘 나는』으로 접어들면 맴버 각자의 송라이팅과 연주, 앨범의 녹음 상태까지 모든 것이 최상인 상태로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멋진 보이스, 묵직한 베이스, 간결한 기타, 군더더기 없는 드럼을 하나의 놓침 없이 잡아낸 세밀한 녹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며 완벽한 창작력이 갖춰진 록 밴드의 살아있는 연주를 담아낸 증거물로 내놓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철저하게 완성도에 입각한 명반의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면 이 앨범부터 들어두길 권한다. [아놀드]

 

 

 

92. 솔리드 2집『꿈』, Music Design, 1995

 

첫 트랙 「꿈」이 시작되면 귀를 쫑긋 세우며 놀라게 된다. 성가대의 음악에 가까운 아카펠라로 진행되며 소울풀한 보컬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이지 않은 Made In Korea R&B음반의 서막을 연다. 한국의 R&B 시대를 열어재낀 본작의 시작은 이토록 웅장하다.  팀의 리더이자 거의 모든 곡을 작사작곡하고 프로듀스까지 해낸 정재윤의 다재다능함, 포켓볼 8번공이 박혀있는 지팡이를 유행시킨 이준의 카리스마 넘치는 저음랩, 그리고 한국인의 성대로도 이렇게 소울풀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낸 김조한. 이 세명은 모두 재미교포 출신이라 자연스레 많이 듣고 접했던 미국의 음악스타일에 가까워 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흑인음악을 흉내내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인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한국 R&B음악의 효시로 불리는「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메가히트곡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록된 모든 슬로우 넘버를 들고 있노라면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이 부럽지 않다. 멜로디와 하모니는 출중하고 노래는 환상적이다. 하지만 결코 한국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기름지지 않다. 그리고 앨범의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하우스댄스나 힙합댄스에서도 솔리드의 센스는 빛을 발한다. 본토에서 배운 영어와 그루브를 앞세운 그들의 노래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시작은 ‘동양인도 흑인의 그루브와 목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전의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론 화합의 길로 연결된 바람직한 앨범이라 하겠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흑인음악에 대한 콤플렉스를 뛰어넘은 작품이 되었지만, 후배들에겐 솔리드라는 또 다른 벽을 만들어 버리기도 한 작품이다. [아미고]

 

 

 

93. 윤수일밴드 『2집』, YBM, 1982

 

1970년대 초반 밴드 골든그레입스를 통해 활동을 시작한 윤수일은 밴드들에게 철퇴가 내리던 197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솔로 가수로 변신, 안치행 작곡의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1981년, 그는 다시 밴드를 결성하고 4장의 음반을 윤수일밴드의 이름으로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윤수일이 작곡한 음악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이던 뉴웨이브의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이러한 스타일을 스스로 ‘시티뮤직’이라 명명했다. 윤수일밴드의 음악은 헤비메탈/하드록의 색깔로 도배된 것도 아니었고, 흔히 뽕짝록이라 불리는 트로트고고에 리듬만 강화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관점에서도 뉴웨이브라 할 수 있는 윤수일밴드의 음악은 당대의 히트곡 정도로 치부하기에 너무도 개성과 완성도가 높은 곡들이다. 문제는 앨범에 담긴 모든 곡이 동일한 완성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는 고질적인 한국 대중음악의 숙제이기도 하다. 오히려 윤수일밴드는 모든 곡을 스스로 만들고 연주하는 가운데 대중성과 완성도를 모두 놓치지 않는 빼어난 싱글을 계속 내놓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재평가할 필요를 느낀다.「아파트」,「제 2의 고향」,「떠나지마」,「아름다워」,「환상의 섬」등의 멜로디 감각과 편곡은 시대를 초월해 유효하다.「환상의 섬」과 같은 완벽한 트랙은 없지만「제 2의 고향」(1집에 이어 재수록)과 윤수일 최고의 히트곡「아파트」가 수록된 윤수일밴드『2집』은 트랜드였던 디스코를 차용하면서도 드라이브감이 살아있는 노련한 록이 잘 버무려진 윤수일밴드의 감각적인 노래 만들기가 제대로 구현된 양질의 음반이다. [헤비죠]

 

 

 

94. 미선이『Drifting』, 라디오뮤직, 1998

 

어떤날의 모던록 버전? 분명 조윤석이 써 내려간 멜로디는 쉽고 어린 아이들 같고 아름다우며 목소리 또한 조동익만큼이나 여리다. 심지어 「진달래 타이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마저 넘어서는, 한반도가 겪었던 20세기의 파노라마를 한데 응축해 놓은 듯한 본토 감성의 절정을 들려준다. 하지만 미선이는 어떤날처럼 마음껏 가슴 시리지 못한다.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조윤석의 목소리는 어딘가 불안하고 그 불안함 뒤에는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왜소한 기타 노이즈들이 있다. 「진달래 타이머」의 어설픈 트레몰로가 있으며 왼손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발가벗겨진 「시간」의 어쿠스틱 기타가 있다. 이런 장애 요소들이 단정하고 풋풋한 김정현의 드럼과 섞이면서 미선이 고유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토록 예쁜 선율 속에서, 그토록 예쁜 부클릿 속에서 “개 같은 세상”을 이야기하고 “악인에게 저주를” 내리다니! 어쩌면 이 역설은 순간의 충동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피아노 발라드 「Drifting」과 특색 없는 얼터너티브 「섬」도 본 앨범의 어엿한 일원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에겐 “정의로운 분노”도, “나를 싫어하세요?”란 투정도 모두 같은 다이어리의 다른 페이지일지 모른다. 어쨌든 조윤석은 「시간」이란 노래에서 어느 것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는 감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풍부한 여백을 통해 증명해 보였고, 그대로 루시드 폴(Lucid fall)로 나아갔다. 물론 그 가능성이 제대로 실현된 사례는 같은 『Drifting』에 실린 다른 노래들이다. 「Sam」, 「송시」, 「진달래 타이머」의 정말 미선이란 아이의 슬픔 같은 노래. [호떡바보]

 

 

 

95. 노이즈 2집『Noise2』, 라인음향, 1994

 

90년대 수많은 댄스그룹들 중 하나. 노이즈. 이들을 단순한 댄스그룹으로만 볼 수 없는 건 천성일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노이즈의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 한 그의 음악적 감각은 다른 댄스그룹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큰 이유였다. 그들의 음악은 당시 댄스음악 = 빠른 템포라는 편견을 깨버리는데 한 몫을 했다. 비교적 느린 템포의 음악에 춤을 곁들인다는 건 당시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 물론 이전에도 이런 음악들이 종종 선보이긴 했었지만 '주'가 아닌 '부'였을 뿐이었고 노이즈는 이런 스타일의 댄스음악을 주무기로 다른 댄스그룹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에게 원한 건」의 연장선이자 업그레이드판인 「내가 널 닮아갈 때」는 제대로 된 노이즈를 대표하는 곡이 아닐까 싶다. 어찌보면 느끼한 하지만 다른 댄스음악들과는 차별화되는 부드러움과 고급스러움. 그것이 노이즈의 매력이었다. 댄스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발라드 곡이 상당수 수록된 이 앨범은 단순히 댄스그룹 노이즈가 아니라 천성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팝그룹 '노이즈'의 가장 '노이즈'다운 앨범이었다고 본다. 안타깝게도 '소포모어 징크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지만 그 시도와 결과물은 지금 들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깔끔하다. 이후 그들은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였던 김창환의 영향으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잃어갔지만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준 마지막 앨범이며 노이즈의 앨범 중에서도 가장 잘 만들어진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편지]

 

 

 

96. 아시아나 『Out On The Street』, 서라벌 레코드사, 1990 / 재발매: 레드케슬, 2002

 

1980년대 한국 헤비메탈을 갈무리하는 의미를 지닌 음반이다. 임재범, 김도균, 김영진, 유상원으로 구성된 라인업은 가히 시대를 초월한 한국 헤비메탈 최고의 멤버들이라 할 만하다. 영국 매트릭스(Matrix)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에는 화제가 되기도 했던 본작에는, 소위  ‘본바닥’ 느낌이 물씬 풍기는「Breaking Out」,「Struggle」,「Out On The Street」과 같이 격렬하고 빠른 헤비메탈이 포진되어 있다. 이러한 곡들의 리프에서 느껴지는 김도균의 후끈한 얼터네이트 피킹은 한국 헤비메탈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강렬한 순간이며, 빈틈없는 김영진의 베이스 연주나 파워 넘치는 유상원의 드러밍도 일품이다. 임재범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서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는데, 쇳소리 두성과 비음을 적절히 섞어 만들어 낸 고음은 당대 외국의 어떤 보컬리스트와 견줘도 손색없는 빼어난 실력을 선보인다. 흥미롭게도 음반 후반부에 배치된 두 곡(「Asiana」, 「Dancing All Alone」은 향후 아시아나의 두 축(김도균, 임재범)의 나아갈 길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국악과 록을 접목하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던 김도균은 그룹송인 「Asiana」를 통해 한국적 가락의 록적인 실천을 상당 수준 완성한 모습을 보여준다.「Dancing All Alone」에선 임재범의 허스키한 보컬과 세련된 슬로우 팝-록 스타일의 곡이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들려주는데, 1991년 솔로 앨범을 통해 좀 더 팝적인 색채를 더한 모습으로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난다. 믹싱과 마스터링 등 프로덕션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순도 높은 헤비메탈 음반 중 하나다. [헤비죠]

 

 

 

97. 김광민 3집『보내지 못한 편지』, 난장, 1999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국 뮤지션의 연주 음반을 사려고 지갑을 열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음반이라면 좋아하는 외국 뮤지션의 명반들을 뒤로 미루고라도 먼저 구입해서 뜯어보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김광민의 세 번째 앨범 『보내지 못한 편지 』말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은 오랫동안 여러모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버클리 재즈 유학파 1세대, 담백하면서 재치 있는 입담의 진행자, 좋은 인상의 실용음악과 교수님. 실력에 아울러 운도 좋은, 말하자면 타고난 성공형 뮤지션인것만 같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음악적 성취는 상대적으로 가려져왔다. 누구의 책임일 것이 없고 그렇기에 반드시 억울해만 할 일은 아니지만 음악만을 차분히 듣고 이야기하고픈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재즈의 어프로치를 완벽히 구사한 상태에서 그 위에 뉴에이지, 영화음악, 클래식 등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엮어내는 그의 스타일은 한두 마디로 결정짓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에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 한가지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보편 타당함’이다. 실력자들이 범하기 쉬운 과장된 테크닉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나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터치와 작곡법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고, 또 대중들이 결코 싫어하지 않을만한 평범하면서도 감수성 짙은 멜로디를 써내는 이런 능력은 결코 흔치 않은 것이다. 세 번째 앨범에 이르러 그는 한국인들이 가진,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세련된 서정의 감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시작했고, 예의 그 연주는 차분하고 안정적이다. 「설레임」, 「어느 날 오후」,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보내지 못한 편지」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이런 음악, 그리고 뮤지션을 가질 수 있어서. [투째지]

 

 

 

98. 전인권/허성욱『1979-1987 추억 들국화』, 동아기획, 1987

 

이 앨범은 들국화 시절, 뛰어난 보컬리스트이자 좋은 곡도 가끔 쓰던 존재였던 전인권을 완성된 싱어송라이팅 아티스트로 보여주기 시작한 음반이다. 앨범 제목 그대로 허성욱과 전인권이 들국화가 해체된 후 다시 만난 결과물이면서 최성원(베이스)과 주찬권(드럼)마저 참가하여 (전인권 중심의) 들국화 3집으로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다. 다양한 분위기의 곡이 들어있지만「시작곡」이 마지막 곡「사노라면」의 테마를 가져오는 것과 같이 음반 전체가 유기적인 흐름이 느껴지도록 곡이 배치되어있다. 하나하나 곡들의 완성도와 함께 완결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던 전인권과 허성욱의 욕심이 느껴진다. 「북소리」의 간결함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은 전인권 특유의 뜨거운 분위기가 가득한 번안곡「사랑한 후에」로 배가되고, 허성욱의 아름다운 건반 연주를 한껏 즐길 수 있는 「머리에 꽃을」에서 아름답게 승화된다. 「어떤…」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들국화에서 맛보기 힘들었던 전인권식 서정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마지막의 꺼질 듯한 외침은 백미로 남는다. 최구희의 록의 정서 가득한 리드기타 연주는 전인권의 거친 보컬과 서로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짧지만 거친 서정 속에 불꽃같은 감성을 던져 넣는다. 「사노라면」은 오래 전부터 구전되던 곡이지만 전인권의 날이 선 목소리와 허성욱의 포근한 피아노와 코러스를 만나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이 곡을 지금까지 젊음의 찬가로 남을 수 있게 해 준 전인권, 허성욱의 다시 만날 수 없는 짙은 감수성은 1990년대 인디 음악에게 정신적 지원군과도 같은 존재로 작용한다. [헤비죠]

 

 

 

99. 해바라기 2집 『그날 이후』, 한국음반, 1985

 

80년대 후반 이후 가장 ‘유명한’ 포크 듀오였다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음악이 큰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음악만큼 모든 이들에게 폭넓게 사랑 받은 ‘가요’는 전무후무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등과 함께 전설적인 포크그룹 ‘해바라기’의 원년멤버였던 이주호는 80년대 중반, 유익종과 함께 제2의 해바라기를 결성한다. 이름을 빌어오긴 했지만 그는 이전에 들려주었던 정통의 포크의 색을 버리고 그 자리에 소프트 팝의 문법을 적용시켰다. 물론 이것은 그의 넘쳐나던 멜로디 감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성(美聲) 유익종의 절묘한 화음과 백킹은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했고, 이주호만의 호소력 있는 음색이 어울린 음악들은 소리소문 없이 대학가 최고의 인기가요로 떠올랐다. 이들의 음악은 실로 그 청취타겟이 불분명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 「어서 말을 해」, 「사랑의 시」, 그리고 해바라기의 최고 명곡이라 불러 아깝지 않을 「행복을 주는 사람」등, 이 앨범의 거의 모든 곡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모으는 동시에 주부애창가요 목록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오르내리는 곡이 되었던 것이다. 80년대 후반, 신촌 대학가 주변에서 졸업식 마다 애잔하게 울려 퍼지던 「그날 이후(졸업)」와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쳐 멘 자켓의 옷차림에서 분명 이들은 스스로 대학가 출신의 포크 뮤지션임을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즈음에서 이들의 음악은 매우 대중적이며 전방위적인(?) 대중가요로서 완전히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후, SG Wannabe의 리메이크로 익숙해져 버린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가요 톱10’에 오르고, 6집 앨범의 수록 곡 「사랑으로」가 한국 가요 역사상 가장 널리 불리는 애창곡이 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투째지]

 

 

 

100. 새바람이 오는 그늘 『새바람이 오는 그늘』, 아세아레코드, 1990

 

다들 말하듯이 9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다. 언더와 오버의 장벽이 모호했던 그 시절에는 90년대식 정서가 있었다. 그 정서라는 것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표현은 ‘실험’일 것이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파격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답습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 대중적인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시기였다. 유재하가요제를 통해 이름을 알린 조규찬과 기타리스트 이준, 베이시스트 김정렬의 조합인 ‘새바람이 오는 그늘’은 지극히 대중적인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를 기본으로 재즈적인 편곡을 더하는 실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소풍가는 날」의 인트로에서 들리는 조규찬의 스캣처럼 생경하면서도 거부감이 없이 감상할 수준의 것들이었다. 건반의 최태완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 전태관이라는 지원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멤버들의 작곡이라고 하겠다. 모든 멤버들이 고르게 작곡과 작사를 분담하고 있으며, 모든 곡이 ‘새바람이 오는 그늘’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나 이준과 김정렬의 작곡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음악적 기본기가 탄탄한, ‘새바람이 오는 그늘’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김정렬이 작곡한 「좋은 날」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곡이 되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끝나버린 이들의 음악이기에 대중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겨주었고, 그만큼 아름답고 순정한 음악을 들려준 ‘새바람이 오는 그늘’은 「에필로그」의 가사처럼 마음 편하게 잊히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음악이다. [쏭구]

출처카페 > 음악취향 Y / 투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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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by 음악취향Y,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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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합창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귀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5-6절



Ⅱ. 합창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그러니 참으라. 형제들아,

주의 강림까지.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장 7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다.

그러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과 25절



여호와의 속량(贖良)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즐거움을 받들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사야 35장 10절




Ⅲ. 바리톤 독창과 합창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보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나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노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4-7절

허나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라.

잠언 3장 1절


Ⅳ. 합창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집에 기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편 1-2절, 4절



Ⅴ. 소프라노 독창과 합창


<소프라노 독창>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6장 22절


<합창>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이사야 66장 13절

<소프라노>

내가 잠시 수고한 걸

너희가 보았으나

나는 큰 휴식을 얻었노라.

집회서 51장 35절

<합창>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Ⅵ. 바리톤 독창과 합창


<합창>

이 땅에 영원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우리가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바리톤과 합창>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忽然)히

다 변화하리니



<합창>

나팔 소리가 남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 살고 우리도 변하리라.



<바리톤>

기록된 말씀에 응하리라



<합창>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54-55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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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 trip[에이요 트립]
원래 뜻과는 별 상관 없이 "yo" 또는 "check it out"과 같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
한 감탄사.

ass out[에쓰 아웃]
파산과 같이 돈이 하나도 없는 상태.

Alize[알리제]
과일쥬스와 코냑을 섞어 만든 술의 한 종류.

ace[에이스]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

afro[아프로]
흑인들 특유의 커다랗고 둥근 머리모양. 옛 Ice l Cube나 Jackson - Five같은 가수들
이 이런 머리모양을 가졌었다.

a.k.a.[에이케이에이]
Also Known As의 약어로서 말그대로 "~로도 알려져 있는" 의 의미이다. 많은 래퍼들이
본명 이외에도 수개의 별명들을 가지고 있는데, Redman aka Funk Doc등이 그것이다.

A&R[에이앤알]
"Artist & Repetoir"의 약어로서 레이블에 소속되어 총체적 음반기획이나 아티스트 발
굴의역할을 맡는다.

buckwild[벅와일드]
미친 듯이 정신없이. 절제가 안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의 행동을 가리킨다.

boo[부]
사귀는 여자나 좋아하는 여자를 부를 때 쓰이는 말

bomb[밤]
형용사로 쓰일 때 매우 좋다는 뜻. "dope"과 비슷한 의미. 동사로 쓰이면 그래피티를
그리다는 의미로 쓰인다.

bitch[비취]
여성을 비하하여 부르는 표현으로 특히 힙합에서 "nigga"라는 말과 같이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단체를 비롯한 많은 단체들에서는 이런 표현
자체에 크게 반대하고 있다. Snoop Dogg와 웨스트코스트 쪽에서 "biiaaach[비아아취]"
같이 길? 늘여 발음해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Bentley[벤틀리]
영국의 유명한 고급 자동차 브랜드. 원래는 스포츠카로 시작했으나 Rolls Royce와의
합병 이후 "조용한 스포츠카"라고 불리며 스포츠카 사양의 고급승용차 모델로 알려졌
다.


benjamins[벤자민스]
돈을 가리키는 속어인데, 특히 미화100불 짜리에는 벤자민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그렇
게 불린다.

bananas[바나나스]
"crazy" "ridiculous"와 같이 믿지 못할 정도로 웃기고 괴팍하다는 의미. "that's ban
anas!"

baller[볼러]
주로 웨스트코스트에서 쓰는 표현으로 "player"와 같이 원래는 스케일이 큰 허슬러를
가르켰으나 요즘은 힙합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일컫는 표현
이다.

butter[버터]
마치 버터와 같이 부드럽게 매끄러운, 모두에게 사랑받는

buddah[부다]
대마초(마리화나)를 가리키는 속어


bout it[바웃잇]
꾸미지 않은 진짜, 힙합의 본질에 충실한

blunt[블런트]
대마초(마리화나)를 가리키는 속어

bloods[블러드]
L.A.지역의 대표적인 갱단 중 하나. 다른 한 집단은 Crips. 빨간색 을 갱단의 색깔로
쓴다.

bite[바이트]
다른 아티스트의 비트, 가사, 춤등 독특한 아이디어를 베끼는 행 위. 힙합에서 가장
질타받는 행위로 꼽힌다.

biscuit[비스킷]
총을 가리키는 속어


BG[비쥐]
Baby Gangster의 준말로 아직 사람을 쏴본 적이 없는 갱스타를 가리킨다. 반대말은 OG

Benz[벤츠]
흔히 Mercedes로 불리는 유명한 차종. Benzi라고도 쓰인다

beef[비프]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싸움, 원한, 의견충돌로 인한 불편한 관계.

beamer[비머]
고급승용차인 BMW차를 일컷는 속어

B-Side[비사이드]
B-Side는 원래 레코드판에서 나온 말이다. 싱글들을 레코드판으로 발매할 때, 보통 구
입을 유도하기 위하여 뒷면에(뒷면을 앞면 A-side의 반대로 b-side라고 부른다) 미발
표곡이나 리믹스곡들을 담곤 한다. B-side곡이라고 할 때, 보통 미발표곡, 또는 리믹
스곡들을 ?리키는 경우가 많다.

Boogie Down[부기다운]
힙합의 발생지인 뉴욕의 Bronx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Boogie Down Bronx라고 말
을 하며, KRS-One의 그룹 Boogie Down Production을 가리키기도 한다.

Breakdance[브레이크댄스]
Kool DJ Herc가 breakbeat를 틀어주는 동안 추는 춤이라는 의미에서 breakdance라는
명칭을 얻었다.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을 b-boy/b-girl이라고도 부른다.

B-boy/B-girl[비보이/비걸]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B-Boy에서 "B"는 breakbeat의 b를 뜻한다.
원래는 Kool DJ Herc가 브레이크비트를 틀어주는 동안 춤을 추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B-boy는 남자, B-girl은 여자 브레이크댄서를 가리킨다.

Breakbeat[브레이크비트]
음악에 있어서 드럼비트만 반복되거나 반주만 나오는 특정부분을 가르킨다. Kool DJ H
erc는 파티에서 이 브레이크비트 부분만을 반복해서 틀어주곤 하였다.

Beatbox[비트박스]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고 있겠지만 입을 통해 갖가지 드럼비트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
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Human Beatbox" Doug E. Fresh와 Roots의 멤버 "Godfather of
Noise" Rahzel등이 있다.

Battle[배틀]
힙합에 있어 배틀, 즉 결투란 MC에게 있어서는 서로 freestyle로 랩을 통해 실력을 겨
루는 것을 의미하고, DJ에게는 디제이대회에서 믹싱과 스크레칭으로 대결하는 것, 또
tagger, 즉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누가 더 멋있는작품을 제한된 시간안에 완성하는지
를 겨루? 것, b-boy들의 경우는 흔히 showdown이라고도 불리는 형식으로 서로의 춤실
력을 겨루는 것을 의미한다. 힙합은 이러한 여러 요소들에 있어 경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chill[취일]
"just chill"에서 쓰이듯이 진정하고 쉬라는 의미.

chicken head[치킨헤드]
직역하면 "닭대가리"로 말그대로 바보같은 사람(특히 여자를 가리킬 때)을 지칭할 때
쓰인다.

cheese[치즈]
돈을 뜻하는 속어.

chedda[체다]
체다치즈에서 따온 말로써 butter와 비슷하게 매우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cat[캣]
여자를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이나, "alley cat" "fat cat"등과 같이 그냥 사람을 가
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

compilation[컴필레이션]
편집/모음형식의 앨범을 가르킨다. 한 아티스트의 정규앨범이 아니라 앨범컨셉에 맞게
여러 곡을 모아 만드는 앨범의 형식.

crips[크립]
L.A.지역의 대표적 갱단 중 하나. 다른 한 집단은 l bloods. - 파란색을 갱단의 색깔
로 사용한다.

crib[크립]
집을 뜻하는 속어. l dead presidents - 돈을 의미하는 속어. 지폐에 죽은 대통령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데드프레지던츠] 점에서 착안되었다.

clique[클릭]
clik이라고 쓰이기도 하며 clan이나 crew와 같이 친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가리킨
다. Boot Camp Clique같은 그룹명도 있다.

chronic[크롸닉]
마리화나(대마초) 중에서도 매우 강한 종류의 것을 가리키며, Dr. Dre의 유명한 앨범
제목이기도 하다.

C.R.E.A.M.[크림]
그냥 cream이라고도 쓰며, 돈을 의미하는 속어. 우탱클랜의 곡 "C.R.E.A.M.(Cash Rule
s Everything Around Me)"에서 유래했다

Chinky-eyed[칭키아이드]
원래 chink라는 말은 중국인을 비하하여 표현하는 속어이지만, 이 단어는 대마초등의
마약을 흡입한 후 환각상태에서 가늘게 떠진 눈의 모양을 가리킨다.

Cutting[커팅]
원래는 DJ의 기술 중 하나로 말 그대로 비트를 "자르고 쪼개서" 특정 부분을 반복시키
는 기술을 말하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DJ들이 활용하는 기술 전부를 일컫는 경우가 많
다.

Compton[컴튼]
미국 캘리포니아 Los Angeles의 구역(borough)이름으로 갱스터랩의 진원지.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앨범이 있다.


drop science/drop knowledge[드랍 사이언스/드랍 놀리지]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행위, 주로 랩을 통하여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을 말한다.

drive-by[드라이브바이]
"drive-by shooting"의 준말로서 특히 웨스트코스트 갱스터들의 차를 타고 가면서 희
생자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말한다.

dopeman[도웁맨]
마약을 파는 사람.

dog[도그]
사람을 부를 때 쓰이는 말로, 특히 친한 관계의 동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발음대
로 "dawg"또는 "dogg"로도 쓰인다.

dead presidents[데드 프레지던츠]
돈을 가리키는 말로써 미국 지폐에는 과거 대통령들의 얼굴이 주로 그려져 있는 점에
착안했다.

dap[댑]
존경을 뜻하는 단어로 "props"와 비슷한 의미.

down with[다운위쓰]
"down with 누구"의 형태로 쓰이며, 누구와 친하다, 누구와 함께 집단을 이룬다, 누구
와 한패라는 의미를 지닌다.

down low[다운로우]
비밀의, 은밀히 행해지는

dough[도우]
돈을 뜻하는 속어. doe라고도 쓰인다.

dope[도웁]
마약을 뜻하는 용어이나, 형용사로서 "좋은, 훌륭한, 중독적인"의 의미가 있다.

dick[딕]
흔히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속어

def[데프]
정말좋은, 훌륭한, 최고의 .DefJam이라는 유명한 힙합 레코드 레이블이 있다.

Diss[디스]
영어로 "disrespect"의 뜻으로 남을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 아티스트간에
서로를 헐뜯는 곡을 발표하거나 랩으로 대결하는 경우를 diss war라고 표현하기도 한
다.

earth[얼쓰]
이슬람교의 일파인 "5% Nation"의 교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흑인여성을 가리킬 때 쓰
는 표현이다. 흑인남자의 경우 "god"이라고 부른다.

ese[에세]
스페인어로 원뜻은 "저것"을 지칭하는 단어이나, 속어로 친한 사람, 특히스페인어를
쓰는 라티노 계열 친구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다.

E-Funk[이훵크]
Electro Funk의 약자로 Afrika Bambaataa가 시작한 훵크의 한 부류이다. Sly Stone등
의 훵크에 신디사이져를 이용한 전자음을 더함으로서 탄생한 e-funk는 힙합장르에서 M
iami Bass쪽으로 발전했다.

front[프런트]
대항하다. 어떤 것에 반대하여 맞서다.

fresh[프레쉬]
새롭고 멋진. 음악이 fresh하다거나 옷이 fresh하다고 하듯이 여러곳에서 쓰일 수 있
다.

flavor[플레이버]
요리의 양념 맛을 나타내는 플레이버와 같이, 어떤 경우에서 쓰이던 독특한 맛이나 특
징, 경향. 분위기, 성격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 있는 복합적인 단어. "flava"로도
쓰인다.

fam[펨]
"family"의 준말로 "clan" "clique" "crew"와 비슷하게 집단을 가리키나 가족적인 느
낌이 더 강하다.

Freestyle[프리스타일]
MC들이 발표되지 않은 가사를 즉흥적으로 랩하는 것을 가르키며, 흔히 프리스타일로
배틀이 벌어지기도 하고 MC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grill[그릴]
"얼굴"을 가리키며, "guard your grill"이라고 하면 손을 들어 얼굴을 막고 싸울 태세
를 갖추라는 뜻.

god[가드]
이슬람교의 일파인 "5% Nation"의 교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흑인남성을 가리킬 때 쓰
는 표현이다. 흑인여성의 경우 "earth"라고 부른다.

ghetto[게토]
흔히 소수민족들이 모여사는 빈민가.

gangsta lean[갱스타 린]
특히 서부쪽에서 갱스타들이 차를 탈 때 총알을 피하기 위해 시트를 뒤로 눕혀서 몸을
최대로 뒤로 젖히고 운전하는 모습.

game[게임]
흔히 "got game"의 형태로 많이 쓰이며 운동경기에서 실력이 있다는 표현에서 유래하
였다. 실력, 힘, 영향력을 의미하며, 힘있는 사람인 경우 "he got game"과 같이 표현
한다.


gatt[갯]
총을 가리키는 속어


gangsta[갱스타]
갱스타 또는 범죄자. 랩의 한종류인 갱스타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G[쥐]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보통"G"라고하면Gangster나 God를 뜻하는 속어다. 또한 Gr
and의 준말로 "1000"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Y2G=Y2K)

Graffiti[그래피티]
힙합의 4대요소 중 하나로서 스프레이 페인트(에어로졸)를 사용한 일종의 낙서문화이
다.

G-Funk[쥐훵크]
George Clinton의 P-Funk음악을 기반으로 하여 갱스터적인 가사를 입힌 힙합의 한조류
로 Dr. Dre, Warren G등이 대표적이다.

hoodlum[후드럼]
마약판매상, 강도, 차도둑 등을 포함한 범죄자들.

hoe[호]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창녀를 뜻한다.

high[하이]
"on high" 또는 "to be high" 같이 흔히 쓰이며, 마약이나 술로 인해 취한 상태를 가
리킨다.

hella[헬라]
부사로서 "매우" "very"와 같은 의미이며, 앞서 설명한 "mad"와 비슷하다. 다만 이 표
현은 웨스트코스트에서 더 많이 쓰인다.

hook[훅]
힙합이나 음악에 있어서 후렴구

hood[후드]
neighborhood의 준말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흔히 도시 의 빈민가를 뜻할 때
사용된다.

homey[호미]
homie로도 쓰이며, homeboy나 homegirl과 같이 가까운 친구를 의미한다.

homeboy/homegirl[홈보이/홈걸]
가까운 친구(남/여)

Hennessey[헤네시]
힙합에서 자주 언급되고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코냑의 한 브랜드

ism[이즘]
마리화나를 뜻하는 속어.

iced out[아이스드 아웃]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또는 치장된.

in the house[인더하우스]
"여기에 있다"라는 의미로 흔히 "누구 in the house"라고 사용된다.

ill[일]
원래의 부정적 의미와는 달리 보통 좋은, 독특한, 실력이 뛰어난 등의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ice[아이스]
다이아몬드 또는 다이아몬드를 사용한 장신구


jiggy[지기]
화려하고 멋진. "get jiggy"라고 쓰이면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는 행위를 가리킨다.

kangol[캥골]
매우 유명한 모자 상표로서 한때 LL Cool J를 비롯한 많은 래퍼들이 이 브랜드의 모자
를 즐겨 썼다.


lucci/luchini[루찌/루치니]
돈을 가리키는 속어.

low rider[로우라이더]
차를 개조하여 땅에 매우 낮게 붙어 다니게 만든 차의 종류. 이런 차들은 운전할 때
차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달고 있어 차를 위 아래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loco/loca[로코/로카]
스페인어로서 미친사람(남/여)를 가리킨다. 그러나 "loc-ed out"에 서의 "loc"은 마약
에 취한 상태를 의미한다.

LP/EP[엘피/이피]
LP는 Long Play의 약자로, 일반 "정식" 앨범을 가리킨다. 보통 가수들이 내놓는 1집 2
집하는 형식의 앨범이 LP에 해당한다. LP의 다른 뜻으로 레코드판 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EP는Extended Play의 약자로, 반정식의 앨범형식을 말한다. 미발표곡, b-side곡
이나, ?글(12")곡, 리믹스 또는 라이브버젼의 곡들을 모아서 내놓는 형식의 앨범을
가르킨다. 일반적으로 LP보다 앨범길이가 짧은게 특징이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LBC[엘비씨]
미국 서부의 Long Beach City의 약어로 이 지역에 속하는 아티스트로는 Snoop Dogg와
Domino등이 있다.


mobbing[마빙]
특히 웨스트코스트에서 갱단들이 집단으로 (주로 다른 사람과 싸우려고) 떼지어 다니
는 것을 가리킨다.

money[머니]
평소에는 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누구를 부를 때에는 친구라는 의미를 지닌다(W
hat's up, money!)

marijuana[마리화나]
대마초를 가리키는 말로서, chronic, buddha, ganja, grass, weed, hash, mary jane,
method, tical등의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mad[매드]
미쳤다는 의미이지만, 형용사로 명사를 수식할 때에는 "매우 많은양의, 상당히"의 뜻
으로 쓰인다(mad cold = 상당히 춥다)

Mixer[믹서]
DJ들이 쓰는 믹서는 보통 슬라이더식의 크로스페이더가 달린 3~4채널의 작은 믹서인
데, 이것은 말그대로 두 개 이상의 소스(source)로부터 들어오는 소리를 섞어서 하나
로 내보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DJ들은 두 개의 턴테이블을 믹서에 연결하여 자연스
럽게두 개 이
瓚?곡을 섞거나 기존 곡 위에 스크레치 소리를 덧입히기도 한다.


MF[엠에프]
우리나라에서는 옷상표 Majah Flavah의 약어로 쓰이나 대부분의 경우 motherf**ker라
는 욕의 약어로 자주 쓰이니 조심하도록.

MC[엠씨]
Master of Ceremonies, Mic Checka, Move the Crowd(Rakim)의 약어로 랩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newjack[뉴잭]
새로운. 사람을 지칭할 때는 아직 일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을 말한다.

no diggity[노 디기티]
감탄사로 "당연히", "물론"의 의미로 쓰인다.

nigga[니거]
힙합에서 너무나도 많이 쓰이지만 그만큼 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비하해서 부르던 "nigger"라는 말에서 유래했지만, 힙합에서의 "nigga"는 오
히려 자신들만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같이 힙합을 즐기는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을 나타
내는 호
で活막?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을 뿐 아
니라, 공개적으로 쓰일 경우 큰 문제를 일으키며, 특히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사람
이 이 단어를 써서 흑인을 부를 경우 큰 실례이자 욕이다.

nappy head[내피헤드]
드레드를 땋은 머리


o.p.p.[오피피]
Naughty By Nature의 곡제목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Other People's Property, Other Pe
ople's Penis, Other People's Pussy의 준말이다.

oreo[오레오]
검은색 과자 사이에 흰색 크림이 들어있는 과자명에서 유래 하였으 며, 피부는 흑인인
데, 속은백인이 또는 백인처럼 되고싶어하는 무리를 가리키는 용어다.

one love[원러브]
모두가 한가지를 함께 사랑한다는 말로(그것이 힙합이 되었건 신 이 되었건), 서로간
의 유대감을 다져주는 표현으로서, "peace"와같이 인사말로 쓰인다.

O.G.[오쥐]
B.G.의 반대말로 누군가를 쏴 본적이 있는 갱스타. Original Gangster의 준말이다.


po-po[포포]
경찰을 가리키는 말.

PJ's[피제이스]
Projects를 가리키는 말. "live in the PJ's" 같이 쓰인다.

projects[프로젝스]
미국에서 빈민층을 위해 지은 주거단지. Queensbridge나 Marcy모두 이러한 projects의
이름들이다. 많은 수의 래퍼들이 이런 projects 에서 자라 활동할때 출신 projects이
름을 내세우곤 한다.

pot[팟]
마리화나(대마초)를 가리키는 속어

posse[파씨]
clan, clique과 같이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로 이루어진 집단

played out[플레이드아웃]
유행이 지난, 오래된

phat[팻]
"fat"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나 의미는 다르다. 매우 좋은, 훌륭 한, 멋진 등의 의
미를 가지고 있다.

papes/papers[페이퍼]
돈을 가리키는 속어

P-Funk[피훵크]
George Clinton류의 훵크음악을 가르키며 P는 그가 이끌던 그룹 Parliament의 "P"이
다. 그의 음악은 힙합에 있어 가장 많이 샘플된 음악이기도 하다.

Props[프랍스]
Proper Respect의 준말로 누구에게 "props"를 준다고 하면(give props) 그에게 합당한
예의를 표한다는 의미이다.

Player-Hater[플레이어헤이터]
아무런 이유없이 특정 아티스트의 실력을 시기 질투하여 괜히 욕하고 비난하는 무리를
가리킨다. 잘나가는사람들을 시기 하는 못나가는 사람

Player[플레이어]
원래의 의미는 힙합에서 주관을 가지고 제대로 된 음악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요
즘 들어서는 힙합이란 "게임" 속에 활동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
다.

Philly[필리]
미국 Philadelphia를 가르키며 Will Smith가 이 곳 출신의 대표적 래퍼이다.


Quad City[쿠와드시티]
힙합의 한 종류인 Miami Bass[마이애미베이스]를 주로 하는 Quad City DJ's, 69 Boys
등이 사는 Orlando지역을 가르키는 단어

Queensbridge[퀸즈브리지]
Bridge라고 해서 실제 다리가 아니라 미국의 뉴욕 Queens지역에 있는 projects(도시계
획에 의한 저소득층 아파트 따위)의 이름이다. 이곳 출신으로는 Nas, Mobb Deep등이
있으며 이들은 출신지역의 명칭을 따서 스스로를 QBC라고 부르기도 한다.


roll(with)[롤]
"with"와 함께 쓰일 때 누구누구와 같이 어울린다는 의미. "roll with the voltron cr
ew"

represent[레프리잰트]
대표한다는 의미로, 힙합에서는 특히 특정 지역, 또는 특정집단을 대표(represent)하
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raw[뤄]
꾸밈없는 본질의 모습의, 가식없는 원래의


stick up[스틱업]
강도질(하다).

steel[스틸]
총을 뜻하는 속어.

sleep[슬립]
마치 잠을 자서 그런 것처럼, 어떤 큰 일이 있었는데 신경을 안써서 무시했거나 까먹
은 경우를 가리킨다. 만약 어떤 유명한 곡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
you've been sleeping!" 같이 표현하거나, 꼭 주목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don't sle
ep!"이라? 말하기도 한다.

shorty[숄티]
몸집이 작은 사람을 말하거나, "boo"와 같이 사귀거나 좋아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shook[슉]
무서워서 떠는, 겁먹은. "shook ones" "you're shook"과 같이 쓰인다.


school[스쿨]
"시대"를 뜻하는 말로써 "old school" 또는 "new school"로 힙합시대를 크게 둘로 나
누기도 한다.

steelo[스틸로]
스페인어 "stilo"에서 나온 말로서 "style[스타일]"을 뜻하는 단어

sell out[쌜아웃]
돈에 팔려 힙합의 본질을 망각한체 단지 금전적 이득을 위한 힙합 을 추구하는 경우

Scratch[스크레치]
DJ들이 레코드판을 앞뒤로 움직여서 내는 독특한 소리로서, 믹서에 달려있는 훼이더
움직임과 결합하여 수많은 종류의 소리를 낼 수 있다.


tight[타이트]
매우 기분이 좋은, 아주 훌륭한, 좋은, "dope" "cool" 등의 말과 비슷한 뜻. 사람들과
의 사이를 표현할 때에는 매우 친한 관계를 의미한다.

Tec9[테크나인]
Infratec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9mm 반자동 또는 완전자동 총의 종류.

Tanqueray[탱거레이]
영국제 진(노간주나무의 열매를 향료로 넣은 독한 술)의 상표로서 칵테일을 만들 때
잘 쓰이는데, 특히 웨스트코스트 쪽의 가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Turntable[턴테이블]
레코드판(vinyl)을 재생하는 기구로 레코드플레이어라고도 불린다. DJ들은 고성능 턴
테이블을 사용하여 음악을 믹스하고 스크레치를 하곤 한다.

Tag[태그]
Tag의 원래 의미는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의 별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tagging이라고
하면 그래피티 중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써놓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통 tagging
은 그래피티를 그린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며, tagger는 그래피티하는 사람을 말한다.


uzi[우지]
게릴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스라엘제 반자동 총.

up north trip[업놀쓰트립]
북쪽으로의 여행으로 직역되는 이 용어는 감옥에 보내진다는 뜻이다.


Versace[베르사체]
2Pac, Notorious B.I.G.등이 즐겨입었던 고급 옷 브랜드명

Vinyl[바이닐]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들을 수 있는 레코드판을 뜻한다.


wheels of steel[휠즈 어브 스틸]
턴테이블 두 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DJ들의 장비를 말하기도 한다.

wack[웩]
형편없는, 아주 낮은 수준의, 저질의, 쓰레기 같은.

word is bond[월드이즈본드]
자신의 말이 틀림없으니 믿으라는 확신을 주고 싶을 때 쓰인다.

word[월드]
word up과 비슷한 의미로, 동의를 표할 때 쓰인다.

word up[월덥]
감탄사로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에 동의하거나 옳다고 생각할 때 쓰인다.


What's Up[왓츠 업]
반드시 힙합에서만 쓰이는 용어는 아니고, 일상에서도 인사말로 쓰인다. 원래 뜻은 "
무슨일이냐?"의 의미이지만 "안녕"정도의 인사말로 흔히 쓰인다.

wax[왁스]
흔히 LP판, 즉 레코드판을 가르킨다.


y'all[여어]
"you all"를 줄인 말로 "너희들 모두"의 뜻.

yo[요]
힙합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말 중 하나로, 누구를 부를때, 또는 "you"의 준말로 쓰인
다.


40[포리]
흔히 "40"라고 하면 40ounce짜리 병에 든 술을 가리킨다. "Drink a 40"라고 하면 이런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213[투원쓰리]
California주의 Long Beach지역의 옛 지역번호. 이 지역 출신의 Snoop Dogg, Nate Dog
g, Warren G가 조직했던 그룹의 이름이기도 하다.

187[원에잇세븐]
미국 California주 경찰의 "살인"에 해당하는 코드. 각 주마다 이 코드번호는 다르지
만 워낙 널리 알려진 코드번호라서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1200[1200]
Technics사에서 나온 DJ용 턴테이블의 표준. SL1200이라는 모델명에서 나온 명칭이며,
Direct Drive형식으로 판을 돌리는 강한 힘과 내구성으로 유명하다.

911[나인원원]
한국의 119에 해당하는 미국 전화번호. 응급구조단 호출번호.


411[포원원]
한국의 114에 해당하는 미국 전화번호. "정보"의 의미로 흔히 쓰인다. "Give me 411"
하면 정보를 달라는 의미.

12"(싱글)[12인치]
12"는 레코드판에 한정하여 쓰이는 개념인데, 싱글 레코드판을 말한다. 여기서 "싱글"
이라는 것은 싱글컷된 곡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 레코드판에는 7인치 와 12인
치(인치를 "로 씁니다) 둘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2인치의 싱글판이라는 12"란 말이
요즘엔 단?히 싱글 레코드판이란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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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5-1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 사진 - 아프로 헤어

언더커버 브라더 중에서..


새들처럼 2006-05-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아주 재미있다고 들었는데... 아직 못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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