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것-소설가 김연수

대담: 신종호 편집장 사진: 김점기 기자  | 2005-12-01

 

약력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등을 펴냈다. 제34회 동인문학상,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북새통: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제13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유령작가’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김연수: 소설은 개인들의 사소한 역사를 다룹니다. 그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죽은 보통의 사람들이죠. 작가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유령작가라고 붙였습니다. 이 소설집에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들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내가 쓰는 이야기만 존재하게 될 때 가능합니다. 모든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유령작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품만 남고 작가는 사라지는 그런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북새통: 독자들은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경험이나 생각들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는데, 작가가 사라진다면…….

김연수: 경험이 고갈된 지점에서 비로소 소설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때부터는 개인적으로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 합니다. 소설 쓸 때의 저와 그냥 생활할 때의 저는 서로 다른 인간형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상 같은 경우 그는 장남이면서 전통에 얽매인 생활인으로서의 김해경과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로서의 이상으로 살았습니다. 독자들이나 평론가, 문학가들은 생활인 김해경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작가로서의 이상이죠. 이상은 생활인으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문학사적으로 아주 행복한 결과물을 얻었죠. 작가가 없어진다고 말한 것은 일상의 경험에 국한된 제가 소설에서 사라진다는 것이지 작가 그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 것은 아닙니다.

북새통: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이라는 작품을 보면 변학도를 부정적인 인물이 아닌 굉장히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재해석해내는 이유가 있다면?

김연수: 저는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쓸 때 역사책에 기록된 거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수많은 실수들, 후회들, 혹은 개인들의 사소한 욕망이나 우리가 놓친 면들에 관심을 둡니다. 저는 『춘향전』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했죠. 신임 사또가 부임하면 초하루와 15일은 반드시 기생 점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생 점고에 빠진 춘향을 옥에 가두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춘향은 관비이기 때문에 수청을 드는 게 의무입니다. 변학도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는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될까, 라는 생각 하에 그 이야기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그 시절로 돌아가서 재현하자면 이러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결과가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입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에 그리 중요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북새통: 「뿌넝숴」라는 작품에 역사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각인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좀더 설명을 해 주시지요.

김연수: 개인들의 수기를 보면 한국 근대사가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수기를 보면 개인의 삶과 역사가 일치합니다. 그런 수기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개인의 삶이 같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개인의 삶을 뭔가 잘못된 삶이라 여기는데 저는 절대 잘못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진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소설가니까 감정의 차원에서 제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저질렀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진실이나 의의보다는 그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몸으로 느끼고 발산하는 감정들이 더 진실하다는 것이죠. 책에 씌어 있는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겪은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뿌넝숴」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북새통: 그렇다면 진실이 가지고 있는 엄격성은 사라지고, 더 깊게 가다 보면 모든 것에 진실은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요?

김연수: 그게 제가 많이 듣게 되는 비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소설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몰라요. 제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부분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최대한 짐작해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아주 나쁜 인간일 수 있고, 아주 좋은 인간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심리랄까 그 사람이 심중에 진짜 품고 있었던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거든요. 지금은 그게 저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비판을 많이 듣습니다. 진실에 대한 물음과 답은 소설가인 제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책들이 대신 해 주고 있습니다.

북새통: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게 과연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는데, 그 물음에 대해 본인은 답은?

김연수: 저는 궁극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봅니다. 이해가 되는 삶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알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면 98퍼센트까지는 알 수 있어요. 마지막 2퍼센트는 알려고 들면 들수록 결국에는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걸 알게 되면 삶은 재미가 없죠. 신비함이 사라지니까. 알 수는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죠. 소설의 매력은 그 2퍼센트에 있죠.

북새통: 나머지 2퍼센트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이 소설의 재미를 준다는 것인가요?

김연수: 추측을 할 때 자기가 누군지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추측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어디선가에서 그와 같은 추측을 선택했다는 것이거든요. 추측이 다 달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독자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다 명확하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원해요. 소설은 그렇게 쉽게 읽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것이 소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제 인생을 돌이켜보는, 소설을 다 읽게 되면 결국에는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진짜 소설을 읽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북새통: 소설가라는 개념하고 이야기꾼이라는 개념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꾼과 소설가가 차이가 난다면?

김연수: 저는 분명히 다르다고 봅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듣다 보면 재미가 있어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를 괴롭힙니다. 저는 지루한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영화보다도 재미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정말 잘 읽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문학적, 소설적 독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당신들의 삶이 그렇게 매일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지요. 물론 독자들 대부분은 삶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는 것을 읽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세계를 그대로 여과해 보고 싶은 것이고, 여러분들도 그 세계를 경험하고 싶으면 어느 정도 그 지루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가와 이야기꾼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곤혹스럽고 괴롭고, 당장은 읽고 싶지 않은데,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 지나면 어떤 쾌감 같은 것을 줍니다. 묘한 쾌감인데,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독서가로서 어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새통: 『빠이, 이상』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힘들게 읽었지만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도 있고,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상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던져 주고 싶었는지?

김연수: ‘빠이’라는 게 이상의 『날개』를 보면 아홉 번인가 나와요. 제목을 지을 때, 그 ‘빠이’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빠이, 이상』이라고 단순하게 제목을 짓기는 했는데, 그때는 소설을 계속 쓰느냐 마느냐의 고민을 할 때였어요. 일단은 무엇인가 완성을 하는 게 중요했지요. 이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도전을 해서 지면 안 쓰면 그만이고, 제대로 된다면 앞으로 계속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쓴 소설입니다.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게 94년부터인데 그 전에 읽었던 소설들은 전부 리얼리즘 소설들이었거든요. 역사와 진실에 대한 획일적 물음을 던지는 소설들이었죠. 시대도 늘 혼란했고. 그래서 ‘진실은 과연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본 것이 『빠이, 이상』입니다.

북새통: 문학적인 영향관계는?

김연수: 제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들은 줄리언 반스, A. S. 바이어트 등과 같은 영국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설 장르를 최대한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쓰겠다는 것이 아니고 소설 테크닉을 다 넣되 그 테크닉이 좀더 복잡하게 읽히는 방법을 취했죠. 한참 때는 미국 작가들을 좋아했는데, 그 사람들은 최종적인 소설의 마지막 단계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들과 달리 영국 작가들은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저에게 굉장히 고무적이었죠.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망을 심어 주었고요.

북새통: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김연수: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없고, 사건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91년도 5월 분신정국 때, 그때 일들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거 같아요. 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진실과 거짓이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종이 한 장 차이의 일이더라고요. 진실 여부를 떠나 그 사건 이후 엄청난 공허감과 우울함이 왔습니다. 그 우울증과 조증을 감당하기 위해서 생각을 바꿨죠. 그래서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진실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을 해 보니 그게 저의 세계관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직도 안 바뀌었나요?) 네,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세계인 것 같은데요. (허무주의적인 건가요?) 허무주의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래도 뭔가를 찾아야 되잖아요? 뭔가가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찾고 구하게 되는 게 개인적인 진실이었던 거죠. 공적인 진실이 아니라 사적인 진실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새통: 희망 같은 것은 어디서 찾으시는지요?

김연수: 소통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질 때 희망을 가지겠지요. 소통이 안 될 때는 절망적이고요. 저는 어떤 시스템이든 믿지 않습니다. 시스템은 강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강제는 우리를 충분히 패배하게 만듭니다. 결국 개인은 패배하고 시스템만 승리하게 되죠. 그래서 시스템과는 소통을 안합니다. 패배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어쨌든 끝까지 가 보자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패배하는 인간들끼리는 제대로 소통이 되니까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머리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몸으로 이해하는 거죠.

북새통: 이번 소설집에는 우연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삶을 우연의 연속으로 본다는 것은 삶이 비논리적이라는 의미인가요?

김연수: 말하자면 그렇죠. 인간의 개인적인 삶은 역사와는 달리 계속 바뀌고, 변절하고, 어제의 마음이 내일 달라지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인과관계가 삶을 지배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논리적으로 얼토당토않게 여기까지 와서 소설을 쓰고 있거든요. 인생 과정에 인과적 진실은 없다는 것이죠. 우연의 삶이 겹치고 겹쳐 필연이 되는 거죠.

북새통: 우리 삶이 우연이라고 하는 것에 크게 지배된다면 ‘인간의 의지란 소용이 없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김연수: 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한 번밖에 올 수 없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이죠. 의지는 분명 있지요. 순간에 모든 걸 투여할 때, 그게 인간의 의지라고 봅니다. 그 의지가 인과관계에 접어들면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패배는 인과관계에서 나온 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사람에게 패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북새통: 운명을 믿나요?

김연수: 전혀 안 믿습니다. 운명도 인과관계의 서사거든요.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죽든, 패륜아로 몰리든 그 사람의 내면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라는 것이죠. 그 내면이 운명이라고 봅니다.

북새통: 삶의 궁극적인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연수: 왔다가 한 번 가고 나면 다시 안 온다는 것이 저는 삶의 매력이라고 봅니다. 돌이킬 수 없음. 이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매력적이죠. ‘지금’이라는 게 있다는 게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가서 인생을 고칠 수 있다면 삶은 아주 재미없고 지루하겠죠.

북새통: 그동안 쓰신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김연수: 지금 발표는 안했고, 내년 봄에 책으로 낼 텐데, 『밤은 노래한다』는 장편소설입니다. 1930년대 만주의 공산유격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인데,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청년들이 살아서 천국을 원했는데 결국 지옥을 보고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애착이 가느냐 하면 소설이니 재미있기 때문이죠.(웃음)

북새통: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기억에 남는 소설은?

김연수: 『설국』입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모든 게 달라집니다. 지금에서야 『설국』이 무슨 내용인지 좀 알 것 같아요. 또 모르죠. 4∼50이 되면 또 다른 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소설은 ‘노인들의 장르’인 것 같아요. 매번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오랫동안 살아 보지 않고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들이 숨어 있죠. 그래서 좋은 소설, 고전소설을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10대, 20대에는 문장밖에는 안 보이거든요. 문장을 보다가 나중에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게 소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마지막에 불이 났을 때 은하수를 보면서 ‘두렵도록 요염’하기 때문에 빠져든다고 했는데,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두렵도록 요염한 게 무엇인지, 겁을 내면서도 왜 빠져드는지를.

북새통: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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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20주년 맞은 <전영혁의 음악세계> 디스크자키 전영혁

전영혁은 과묵한 DJ다. 인사말조차 변주에 인색하다. 한결같이 “<전영혁의 음악세계>입니다”로 새벽 2시를 열고, “디스크자키 전영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로 3시를 고한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그가 날마다 반복하는 오프닝과 끝인사는 성경의 “태초에…”와 “아멘”처럼 들릴 지경이다. 그럼 그 사이는? 오직 강 같은 음악의 은총이 넘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살가운 말 한마디 모르는 디스크자키 전영혁의 이름은, 그의 청취자였거나 청취자인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전영혁과 얽힌 기억을 질문받은 사람들의 눈은 순해지고 뺨에는 홍조가 오른다. 음악 때문에 불면의 청춘을 보낸 30대, 40대라면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프로스트식으로 말해 그들에게 DJ 전영혁은 “자작나무를 탔던 한때”의 표상이다. 어쩌면 그들의 서랍 구석에 잠들어 있는 낡은 테이프에는 서툰 녹음 솜씨 탓에 카멜이나 클라투의 음악 끝자락에 묻어난 청년 전영혁의 음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회고조의 말투는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도 새벽마다 노를 저어 20주년(2006년 4월29일)이라는 푯대에 다가가고 있는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현재를 한낱 후일담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냉정한 체하는 디스크자키(전영혁은 가벼운 느낌의 DJ보다 디스크자키라는 또박또박한 호칭을 선호한다)가 20년간 해온 일은 그러니까, 결국 대화였다. 그에겐 말이 아니라 선곡이 곧 청취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엄숙한 비평 행위였다. 전영혁은 지난 연말 손수 돈과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 ‘<전영혁의 음악세계> 20주년 기념음반’ 1천장을 찍었다. 4장의 CD를 담은 재킷 안쪽에 쓴 글 끝에 전영혁은 ‘새벽의 등대지기’라고 서명했다. 적당한 비유였다. 등대지기와 한번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 바다를 항해한 이들은 등대의 추억을 공유한다.

전영혁은 김민기, 양희은과 같은 1952년생 용띠다. <월간팝송> 편집장을 거쳐 1986년 KBS 제2FM <25시의 데이트>로 디스크자키 일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간판은 <1시의 데이트> <FM 25시> <전영혁의 음악세계>로 바뀌었고, 중도에 시간대 문제로 SBS FM으로 터를 잠시 옮기기도 했지만 전파가 외면한 좋은 음악을 알린다는 원칙엔 미동도 없었다. 공영방송의 관점에서 보나 FM의 본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나, 귀중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에는 방송국 안 누구도 이의가 없으나, 나서서 더 많은 귀가 깨어 있는 시간대로 옮기려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현재다. 마니아를 육성한 마니아 전영혁은 근본적으로 수집가가 아니라 나누는 사람이다. 인터뷰가 결정되자 동료 문석 기자는 <월간팝송> 애독자 시절 잡지에 소개된 데이비드 샌본의 초기 음악이 궁금하다는 엽서를 보냈더니, 전영혁이 공테이프에 샌본의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줬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내가 ‘음악적 자선’이라는 표현을 쓰자 디스크자키는 ‘음악적 YMCA’라는 농담으로 받았다.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생활은 그의 몸에도 흔적을 새겼다. 타고난 예민한 청각과 밤새워 음악을 듣는 습관은 그를 만성적인 불면증 환자로 만들었고 그 불면은 알려진 대로 청취자에게로 감염됐다. 약속 시각 2시간 전, 앞당겨 만나면 일찍 끝낼 수 있지 않겠냐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나는 그가 녹음 중인 KBS 스튜디오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조심스러웠던 마음은 음악 한곡이 끝나기도 전에 녹아버렸다. 전영혁은 천진하고 뜨거웠다. 동시에 내가 아는 누구보다 ‘순수하게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앞당겨진 약속을 가리켜)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싫어하시나 봅니다.
=그건 아닌데 제가 갈 때가 되어서 그런가 봐요. 요즘 유서도 썼어요. 내용은 별것 없고 땅이 부족하면 화장을 하라는 정도. 장기이식은 제 몸이 약해 도움이 안 될 것 같고요. 20년 방송을 했으니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건강도 안 좋아졌고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쫓기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싶은 거죠.

-역시 CD로 일일이 음악을 트시네요. 요즘은 파일로 내보내는 시스템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요?
=아, 그건 바쁜 연예인 DJ들이 쓰는 거죠. 그 사람들은 또 TV에 나가 게임도 하고 그래야 하니까. 나는 아무리 바빠도 절대 파일로 안 해요. 청취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음악 사이에 멘트만 집어넣고 가버리면 그건 도둑이죠.

-한곡씩 트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는군요. CD도 방송국 자료가 아니라, 개인 소장 음반이죠?
=방송국 라이브러리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안 잘린 거죠. (웃음) 음반 구입 예산은 자료실에 책정돼 있는데, 거기에는 제 프로그램에 소용될 만한 음반은 한장도 없어요. 제가 좋아서 자청한 일이라고 여겨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도 모르죠. 별로 슬프게 생각지는 않아요. 원래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모든 것이 슬픈 나라잖아요.

-방송을 하면서 그런 슬픔에 익숙해졌습니까?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학교에서 배운 거랑 달랐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거죠.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깨닫고, 그냥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디까지 왔나 줄곧 헤아리면서 방송하진 않으셨겠지만 언제부터 20주년이라는 지점을 의식하셨나요?
=15주년부터요. 10주년 되던 해 내가 할 일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했고, 15주년 이후로는 안락사 준비를 생각했어요. (웃음) 제가 <나무를 심은 사람>과 <스노우맨>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전영혁의 음악세계>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으면 했어요. 애청자 중에서 한 사람이 제 후계자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진정한 FM으로 돌아가려면 돈이 아니라 음악에 미친 사람들이 해야죠. 그런데 우리 애청자는 음악은 많이 알지만 인지도가 없어 방송국에서 과연 캐스팅을 해줄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몇곡이나 전파에 실어 보냈는지 세어보신 적이 혹시 있나요?
=(담담히) 오늘이 1월5일이니까 6181회네요. 곱하기 평균 10곡 하면 대략 맞을 거예요.

-영화 잡지에서 일하다보니, 어쩌다 거금의 액수를 접하면 “그 돈이면 영화 몇편 찍겠다, 몇편 보겠다”고 무의식적으로 계산을 합니다. 선생님은 시간과 돈을 음반과 음악으로 측정하시겠죠?
=음반 구입비는 한달에 300만원 정도예요. 버는 대로 다 쓰는 거죠. 방송해서 번 돈은 다 음반을 사고 개인 생활비는 원고료로 충당했어요. 1986년부터 1996년까지 5대 메이저 음반사의 해설지를 제가 거의 다 썼거든요. 신문, 잡지의 칼럼도 썼고요. 음반 한장당 10만원쯤 받고 한달에 50장 정도를 썼어요. 그러다 11년째부터 건강에 무리가 와서 원고를 안 썼죠.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한테는 꿈의 라이프 스타일로 들리겠는데요.
=부럽긴 하겠지만, 요즘 애들은 그렇게 못 살 것 같아요. 누가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연봉 액수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세대니까요. 예컨대 박찬호 선수는 LA다저스에 있었으면 엄청난 기록도 세우고 자동으로 더 많은 돈도 받았을 텐데 스콧 보라스라는 매니저를 만나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봐요. 진짜 프로는 연봉이 1천만원이라도 잘 던져 최고의 투수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제가 한국 최고의 DJ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마 제가 돈은 가장 적게 받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불만도 없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제 잘못이 아니거든요. 저는 제 잘못이 아닌 것은 신경쓰지 않아요. 전 좋은 음악을 소개하고 적은 청취자들에게나마 최고로 인정받으면 성공하는 거예요. 젊은이들에게는 돈은 1억원이면 그것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이 채워지면 그 다음부터는 벌지 말고 하고픈 일에 쓰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인생을 적재적소에 쓰도록 신경쓰는 게 중요해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목표를 정했어요. 비틀스가 그때 나왔거든요.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왔지만 그땐 제가 아직 목표를 정하지 않았죠.

비틀스 듣고 중1 때 인생의 목표를 정했어요

-확실히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인생에 가속도가 붙죠. 그렇다면 최초로 산 음반도 비틀스였나요?
=비틀스의 첫 음반이 제가 처음 산 음반이죠. 수련장, 전과 산다고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사러 갔어요. 비틀스 음악을 듣고 학교 선생님들이 왜 고전음악만 들으라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요. 클래식 아닌 음악도 클래식만큼, 아니 더 좋은 곡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죠.

-그 말씀은 클래식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는 의미겠네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가족 모두 음악을 좋아했어요. 제 첫 오디오는 아버지의 축음기였어요. 아버지는 클래식, 형은 재즈를 좋아했죠.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소개해 히트한 쳇 베이커도 큰형이 제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흉내내던 뮤지션이에요. 음악하면 굶는다고 하던 때라 큰형은 다른 전공으로 고려대에 들어가 연고전 때 브라스밴드로 응원을 했죠. 저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덕에 형이나 누나들과 달리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죠. 형과 누나가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제게 음반을 사다주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음악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내 음악’으로 적극 발견한 음악은 비틀스가 처음인 셈인가요.
=묘하게도 비틀스는 제 학창 시절과 내내 같이했어요. 비틀스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데뷔해 고2 때 해산했죠. <러브 스토리>에 보면 음대생인 제니퍼가 “난 바흐, 모차르트, 그리고 비틀스를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작가 에릭 시걸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용감한 일이었지만 지금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 중 비틀스를 연주 안 한 오케스트라가 어디 있어요? 클래식은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보통 한 뮤지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음악이 다른 음악의 문을 열어주는데요.
=비틀스가 해산했을 때 죽고 싶었어요. 대안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절망했을 때 다행히 나를 구원해준 것이 킹 크림슨이었어요. <Epitaph>가 든 데뷔 음반이 딱 그때 나와 바통을 받은 거예요. 록의 역사가 참 극적이었죠! 저도 웃기는 사람인 것이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3J-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처럼 27살에 죽을 줄 알았죠. 군대 다녀와 백수 생활을 할 무렵인데, 27살의 12월31일 밤 잠도 안 자고 죽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별일없이 28살의 새해가 와서 굉장히 좌절했고, 이후로는 정상인의 생활을 했죠. (웃음) 그때까지는 미친 듯 음악만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미친 듯한 생활이 역설적으로 후일 제 자산이 됐죠.

-결정적으로 음악이 구원이나 위안이 된 기억도 있습니까?
=비틀스의 <화이트> 음반이 그랬어요. 지금도 고전음악을 포함한 모든 장르를 통틀어 <화이트>가 최고의 음반이라고 생각해요. 그 음반은 컨셉 자체가 천재적이었어요. 하얀 재킷에 ‘더 비틀스’라고 엠보싱으로 찍어 점자처럼 만져야 알 수 있고요. (동작이 커지고 목소리가 들뜬다.) 게이트폴드식으로 펼치면 네 멤버의 흑백 사진과 곡명이 들어 있고, 비틀스의 사생활에 대한 사진 콜라주와 가사로 이루어진 벽에 붙일 수 있는 종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음반 한장을 안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요. 또 그때 음악을 그만하기로 결심한 마지막 음반이라서인지 네 사람의 개인기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천재들의 집대성인 동시에 이후에 등장할 후배들- 킹 크림슨의 프로그레시브, 레볼루션 9 같은 전위음악, 헬터 스켈터 같은 헤비메탈 음악까지 제시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음악 정보를 어떻게 구하는지도 선생님에 관한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일 텐데요.
=음악적 정보. 그게 제일 힘들었죠. 실은 정보를 구하느라 진을 빼서 제가 몸이 약해진 것 같아요. (좌중 웃음) 클래식은 음대도 있고 교수도 있으니 맘만 먹으면 되지만, 팝은 학교도 선생님도 없으니 힘들었어요.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다 명동에서 나왔다고들 해요. 무슨 말이냐면, 예전 명동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음반, 잡지가 유통되는 가게가 수십곳 있었어요. 외국을 나가지 않으면 그 길뿐이었죠. 매일 수업이 끝나면 명동으로 출근을 했어요. 다른 데는 용돈을 쓸 여유도 없었고 쓰고 싶지도 않았어요.

첫 직장은 태창영화사 수입부였죠

-홍익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셨고, 영화사가 첫 직장이셨죠?
=고전음악만 다루는 음대에는 애초 뜻이 없었어요. 언제든 배우고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간이 많이 남고 음악을 많이 들으면서 공부는 안 해도 되는 과를 찾다가 운이 좋아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했어요. 저는 한때 음악, 미술, 문학이 제 생활에서 뗄 수 없는 같은 장르라고 생각했어요.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데미안>을 비롯한 헤세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어려서 작고 약한 사람도 성장해 세상에 나가서는 다른 위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영화도 너무 좋아해서 시험날은 3편씩 영화를 보는 날이었어요. 첫 직장도 영화를 실컷 보고 싶어 들어간 태창영화사 수입부였죠. 제가 입사할 무렵 홍세미를 캐스팅해 70mm 춘향 영화를 찍은 곳이고 김종원 영화평론가, 이호철 작가가 제 상사였어요.

-당시 직접 수입한 영화 중에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세요?
=<닥터 지바고>요. 흥행 보너스도 많이 받았죠. 우선 음악이 무척 좋았고 제랄딘 채플린과 줄리 크리스티 두 여성의 캐릭터가 너무 좋았어요. 당시 제가 수입하려던 영화 중에 레드 제플린의 <The Song Remains The Same>도 있었는데, 군사정권 때라 장발, 퇴폐라고 부결됐죠.

-요즘도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자주 영화를 보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제가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을 무척 좋아해요. 지지난해 부산영화제, 그리고 씨네큐브 앙코르 상영에서 전작을 두번씩 다 봤어요. 특히 최근작 <울부짖는 초원>은 감독의 모든 능력이 응집된 작품 같았어요. 영화를 보면서 음악 정보도 많이 얻어요. 엘레니 카라인드루 음악도 앙겔로풀로스 영화를 보고 소개했고, 왕가위의 <에로스> 음악도 영화보다 먼저 소개했어요. 어렵게 구한 <룩앳미> 음반에 나오는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제 고등학교 합창단 시험곡이었죠. 반음계가 많아 음치 골라내는 데는 최고거든요.

-좋은 음악이라고 판단할 때와 좋은 영화라고 느낄 때 같은 심미안이 작용하나요?
=비슷해요. 컴포지션, 콘트라스트, 하모니, 앙상블 등 문학과 음악, 미술은 용어도 똑같다고 봐요. 그리고 그 세 가지가 합쳐질 때 영화가 되고요. 영화도 문학도 음악도 사심없이 미쳐서 만든 것이 역사에 남아요. 앙겔로풀로스 영화도 혹시 나처럼 가슴 저미며 보는 사람이 없나 뒤돌아보면 반은 자요. (웃음) 그러니까 볼 사람만 보라고 만드는 거죠.

-영화사에서 <월간팝송> 편집장으로 이직하셨습니다. 시작은 지인의 제안이었나요?
=51 대 49 정도로 음악을 영화보다 좋아했는데 운명이 다가온 거죠. 영화사 근무 3년 만에 당시 유일한 음악잡지였던 <월간팝송> 편집장이자 동아방송 DJ였던 나형욱씨가 이민 가면서 저를 추천해 서른살에 편집장이 됐어요. 태창영화사 김태수 사장은 흥행 영화를 잘 고르는 저를 내보내기 싫어 엽총으로 위협까지 했었죠. (웃음)

-당시 <월간팝송>이라는 잡지를 이끌어간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추억하십니까?
=일단 지금보다 음악 듣는 사람이 많았어요. 라이선스는 주로 힙합과 댄스만 나오는 요즘보다 좋은 시절이었어요. 게다가 <월간팝송>은 독점지였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샀죠. 라디오에서 듣는 음악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리는 걸 잡지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고, 실제로 마니아를 양산했어요.

-방금 말씀하신 대원칙은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존재 이유와도 다르지 않군요. 뵙기 전에, 선생님이 해설한 옛 LP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잉베이 맘스틴의 <라이징 포스> 뒷면에는 음악을 발견하고 바로 이튿날 방송에 소개했다고 써 있더군요.
=일본의 전문지 <BURN>에서는 어떤 무식한 사람이 <라이징 포스>에 0점을 줬더군요. 얼 클루 부류만 듣다가 그런 파격적인 기타를 들어서 그런 거죠. 그 음반을 듣고 바로크 음악을 듣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바로크 메탈’이란 말도 제가 만들어 붙였죠. 성음에서는 자기네 소속 뮤지션인지도 모르고 판도 갖고 있지 않아서 제가 판을 빌려주고 해설을 써서 라이선스가 나왔어요. 메틀리카나 팻 메시니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그런 뮤지션들이 우리 프로를 통해 인기를 얻고 방한해서 게스트로 출연할 때 보람이 컸죠.

음악은 생명도 구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월간팝송>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월간팝송>은 모든 FM 프로그램이 자문을 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운명처럼 존 레넌이 80년 12월에 죽었어요. 이상하게도 제 인생엔 그렇게 일이 맞물려요. 당시 <박원웅과 함께>에 존 레넌 추모방송 요청을 받았고, 그 길로 방송 데뷔를 했어요. 그러니까 비틀스는 저의 구원자죠. 제가 그들을 그토록 좋아한 만큼 제게 돌려준 것 같아요.

-감정이 격하셨을 텐데, 첫 방송이 기억나십니까?
=원고없이 질문하는 대로 존 레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 하루에 30분씩 고정 코너를 맡았어요. 그러다가 동시간대 라이벌 프로그램 <황인용의 영팝스>의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박원웅씨쪽에서 안 된다더군요. 전 구속하는 사람이 싫어서 박원웅씨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황인용씨 프로로 옮겼는데 그때 소개한 주다스 프리스트, 헬로윈, 잉베이 맘스틴, 조지 윈스턴 등이 모두 대박을 터뜨렸어요. 청취율도 <박원웅과 함께>를 눌러 그 공로로 <25시의 데이트>를 맡은 거죠.

-가끔 음악 관련 기사를 보면 신인 밴드들이 선생님 프로그램을 요람으로 언급합니다. ‘오메가3’ 같은 밴드는 본인들의 음악을 아예 “<전영혁의 음악세계>풍”이라고 묘사했더군요.
=음악인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듣고 공부했다는 사실이 보람있어요. 고교 때부터 가장 열렬했던 애청자가 신해철인데, 지금 제 프로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하고 있죠. 방송에서 “전영혁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됐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서울대 갈 수 있는 머리인데 만날 밤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듣느라고 서강대 갔다”고 했대요. 음악인은 아니지만 국민 약골 이윤석, 그 친구도 우리 애청자였어요. 연대 간 애들은 다 우리 프로 듣다 서울대 못 간 거고, 서울대 간 애들은 제 프로 안 들은 거죠. (웃음) 김세황, 이현석 같은 기타리스트들도 고교 때 엽서를 보냈고, 블랙홀은 <새벽의 DJ>라는 노래를 제게 헌정했어요.

-1990년대 초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분들에겐 대중음악을 비평의 대상으로 끌어냄으로써 예술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숨은 욕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누가 저더러 대중음악평론가라고 하면 나가라 그래요. 대중이 없는 음악이 어디 있죠? 고전음악도 대중음악이에요. 옳은 용어는 장르 구분 없이 뮤직 크리틱, 아니면 뮤직 큐레이터예요. 가요, 팝, 클래식 한 가지밖에 모르면 평론가가 아니죠. 좋은 음악은 하나고, 오직 잘 만들어진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이 있을 뿐이지요.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선곡 기준은 우선 차트와 무관한 음악, 다른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지 않는 음악인 걸로 압니다. 그런 희소가치 외에 적용되는 선곡 기준은, 오직 방금 말씀하신 ‘좋은 음악, 잘 만든 음악’뿐인가요? 진짜냐 가짜냐는 선생님의 귀로 판가름하는 것이고요?
=그렇죠. 오래 하다보니 음반을 보기만 해도 알아요. 저는 (아는 음반은 이미 소개됐다는 뜻이니) 제가 모르는 음반만 사는데, 재킷에 뮤지션의 자존심이 다 들어 있어요. 아무 정보 없이 재킷 보고 내린 판단이 거의 맞아요. 그리고 곡목을 보면 확신이 서죠. 대개 긴 곡이 좋고요. 10곡 이상 든 음반은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그래도 <전영혁의 음악세계> 나름대로 취향의 변천사가 있지 않나요?
=처음 방송을 시작한 1986년은 하드록, 록, 헤비메탈이 세상을 지배한 시대였어요. 어떤 음악이든 르네상스가 있고 사이클이 있잖아요. 80년대에는 그쪽에서 잘하는 애들이 나왔고, 90년대 들어 댄스뮤직이 득세하면서 헤비메탈이 쇠퇴해 좋은 음악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90년대부터는 ECM 사운드, 크로스오버, 클래시컬한 팝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죠.

-현재 30대 중·후반들은 선생님 프로그램의 안내로 음악을 발견하고 음반을 구입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 얻는 경로가 넓고 다양한 형태로 음악을 접하는 요즘 세대가 듣기에는 동시대의 음악이 유적도 아닌데 ‘발굴’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이해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발굴’은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기보다 들을 만한 음악을 골라주는 기능을 뜻하는 것이겠죠?
=그게 가장 중요하죠. 사실 음악평론가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감히 평론할 수 없어요. 음악은 생명도 구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제 프로를 듣던 재수생들이 자살하려다가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은데”라고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공부해서 대학 간 예들도 있어요. 제가 사람도 많이 살렸죠. (웃음) 음악의 위대함을 알기에 감히 글로 쓰기 힘들어요. 저는 평론가도 디스크자키도 뮤지션이 못 된, 2등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누구보다 뮤지션을 소중히 여겨야 하죠. 제 임무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도 한번도 방송에 소개 못 된 사람들을 속속들이 찾아서 소개하고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철저히 전달자로 남고 판단은 청취자에게 맡깁니다

-음악을 글로 평할 수 없다고 믿으셔서인지 선생님이 쓰신 해설을 보면 음악 해석이나 묘사는 거의 없고 정보로 꽉 채워진 건조한 문체입니다.
=사람들은 음악평론을 한다면서 독후감을 써요. 그 자체가 음악평론을 못 쓴다는 의미죠.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알고 싶은 건 개인의 감정이나 평론가의 취향이 아니에요. 저는 음반을 산 사람이 알고 싶어할 바이오그래피와 디스코그래피를 기본으로 넣었어요. 평론가는 되지 말고 될 수도 없다, 가이드가 되자고 마음먹었죠.

-다른 장르 예술의 비평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평론은 문제가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평론가라기보다 가이드, 큐레이터라는 말이 좋다고 봐요.

-그러니까 선생님에겐 방송을 위한 선곡이 곧 비평이겠습니다.
=음반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친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이 함량 미달이면 아무리 부탁해도 안 틀어요. 그래서 인간관계는 별로 안 좋아요. (웃음) 반면, 자라는 한국 뮤지션은 꼭 제 돈으로 사서 틀어줘요.

-문체도 문체지만 방송 스타일도 극히 건조하십니다. 신변잡기는 물론 없고 음악에 대한 감정적 찬사도 거의 없습니다. 애청자 모임(www.fm24.org)의 박신영 대표에 의하면, DJ의 감흥이 음악을 물들일까봐 염려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고 하더군요.
=음악을 틀어줄 때 선입관을 강요하면 안 돼요. 어떤 DJ들은 음악을 들려주기 전에 “명곡 중의 명곡”이라며 5분 이상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해요. 만약 음악이 그 해설에 못 미치면 그 프로그램은 권위가 없어지겠죠. 전 먼저 음악을 던지고 각자 느낀 다음 코멘트는 나중에 간단히 합니다. 시낭송도 마찬가지예요. 철저히 전달자로 남고 판단은 청취자에게 맡기자는 지론입니다.

-시 낭송 코너는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유일하게 비음악적인 코너입니다. 어떤 의도로 포함시키셨나요?
=예컨대 광복절에 종일 방송을 들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그 얘기만 하잖아요. 그건 싫고 무슨 멘트는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는 논픽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초대손님은 프로그램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음악평론을 하시는 송기철씨는 음악적으로는 게스트에게 얻을 도움이 없으니, 일종의 배려라고 표현하시던데요.
=예전에 프로그램이 두 시간이었을 때는 초대손님이 있었어요. 사실 그들이 소개하는 음악이 맘에 들진 않았는데 다 우리 애청자들이니까 배려하는 차원에서…. (웃음)

-애청자들이 방송 시간을 12시로 복원하려는 운동도 열심히 벌였습니다. DJ로서 12시와 2시의 차이는 어떻게 체감하세요?
=사연이 몇배나 많이 올라와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6시 배철수씨가 방송하는 6시대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했다면 최고의 인기 프로가 됐을 거라 생각해요. 모든 프로그램의 가요 일변도 현상도 얼마쯤 막았을 것이고요.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편성이 문제예요. 왜냐하면 사람들 귀는 똑같거든요. 좋은 음악은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소개한 여러 뮤지션의 음반이 왜 많이 팔렸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KBS 제2FM도 광고를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프라임 타임으로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옮겨진다면 프로그램의 본질을 해칠 압박이 오지 않을까요?
=첫째 편성을 옮겨줄 가능성도 적을뿐더러 광고가 안 들어오면 아예 폐지할 수도 있겠죠.

-<전영혁의 음악세계>처럼 인터넷의 ‘다시듣기’가 유용한 프로가 없는데, 지금은 ‘다시듣기’가 폐지됐습니다. ‘다시보기’를 하는 TV쪽 이야기도 들어보면, 요즘은 케이블 재방송, 다시보기, 불법 다운로드까지 시청 경로가 다양해져서 시청률의 의미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더군요.
=‘다시듣기’를 할 때는 네티즌 사이에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청취율 1위였어요. ‘다시듣기’가 없어져 우리 프로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어요. 저작권 단체쪽에서 프로그램당 받던 저작권료를 방송회당으로 요구했고, 이에 방송국은 응하지 않은 것이죠. 청취자들만 피해를 봤어요. 저희 애청자 평균연령이 67년생이에요. 1986년 방송을 시작할 때 고3이었던 애들이죠. 다들 기반 잡고 일하면서 음반을 구매하는 층인데, 듣기 힘든 시간대에 방송을 하니 예약 녹음을 해서 듣는 일이 많아요.

-음악산업에 대한 FM의 영향력도 상당히 약해졌죠?
=FM이 AM화가 됐으니까요. 1시간에 2곡을 트는 프로그램도 있더군요. 무슨 판을 사고 들을지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이 <전영혁의 음악세계>밖에 없으니 시장 불황을 부채질하는 비극적 상황이 왔죠.

-음반 매장이 넓어지고 음악을 구하는 경로, 감상이 가능한 공간은 다양해졌는데도 음악 듣는 환경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하기는 힘들군요.
=질적으로는 한 30년 후퇴했다고 생각해요. 70년대 초반 LP 시대에는 광화문에서 프라자호텔을 지나 명동으로 가는 지름길에 레코드 가게가 100곳이 넘었어요. 집집마다 주인의 특색이 있어서 한장씩 사면서 걷는 재미가 대단했죠. 지금은 대형매장에 가면 CD 양은 많은데 우리 프로에 소개할 것은 없어요. 저도 90%는 아마존에서 주문하거나 일본에 가서 사와요.

-LP에서 CD, 또 MP3로 음악 듣는 매체도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님이 느끼는 감각적 차이는 뭔가요?
=저는 LP를 권하고 싶어요. 유럽에서도 ‘로맨티시즘으로의 회귀’라고 LP를 다시 찍어요. CD의 장점은 잡음이 없다는 건데 저음이 나쁘고 소리가 차가운 단점이 있어요. LP는 잡음이 있지만 포근한, 인간의 정서에 가장 맞는 소리예요. MP3로 듣더라도 정말 좋아하는 음악은 나중에 LP를 사서 턴테이블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안 들렸던 소리가 들릴 거예요. 또 리모컨만 작동하면 비만의 원인도 되고 사람이 매정해져요. 제가 살이 안 쪘잖아요? (일어서서 실연을 하며) LP는 이렇게 판을 꺼내서 먼지도 닦고 끝난 다음에 집어넣는 자체가 운동이 되니 다이어트도 되면서 훈훈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LP만으로 방송하는 날도 있는데 호응이 더 커요.

-30대 후반이 청취자 평균연령이라면 10대가 주축이던 초기 청취자가 물갈이되지 않고 프로그램과 같이 나이들며 커뮤니티를 형성한 특이한 경우입니다. 1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려고 공간을 빌리는 데도 관계자 중 애청자가 있어 일이 쉬웠다고 들었습니다. 일종의 ‘음악세계’ 서브컬처가 있는 것 같아요. 핵심 애청자들을 ‘수호천사’라고 부르시죠?
=청취자 모임은 유니텔과 네이버, fm25 사이트 세곳에 있어요. 수호천사는 단순한 회원이 아니라 제가 뽑은 30명의 1967년생들이예요. 제 중매로 결혼한 커플도 있죠. ‘수호천사’가 되면 제가 집으로 불러 식사를 하고 제 라이브러리에서 갖고 싶은 음반을 50장이건 100장이건 뽑아가라고 해요.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정원을 늘려야죠.

-선곡 취향의 변화에 반발한 편협한 청취자들이 팬 사이트를 해킹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일이 있죠. “월급 받으면서 왜 그렇게 성의없이 방송하냐. 그만두고 이소라씨가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면 1967년생 애청자들이 교통정리를 해요. “이소라씨가 두분인데 어느 쪽을 말씀하시냐?”고 친절한 댓글도 달고. (폭소)

-훗날 방송을 떠난 뒤에도 음악과 무관하게 사는 일은 상상할 수 없겠죠? 수호천사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공간을 계획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인생에는 택일이 필요한데 전 일하다 죽기를 택했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방송국에서 내쫓지 않는 한 계속할 거예요. 수호천사들끼리 2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는데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공간을 자기들이 열겠다고 하더군요. 난 오기만 하면 되니 신경쓰지 말라고요.

-아직도 선생님의 손이 닿지 않은 음악이 세상에 많다고 느끼십니까?
=물론이죠.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살고 있는 거죠. 전문가는 멈추면 안 돼요. 이만하면 많이 안다 싶어서 걸음을 멈추고 가진 걸 퍼내면서 살면 실패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전영혁의 음악세계> 청취자들도 그 점 때문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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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지음, 박은영 옮김 / 예담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때로 그가 써놓은 글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글에는 사람의 향취가 배어 있게 마련이고, 외면의 모습에서 드러나지 않는 여러 형태의 내면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글쓴이의 세계관, 곧 사물을 바라보는 눈, 문체 속에 드러나 있는 성격, 사랑관 등 많은 것들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편지 모음집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사람 됨됨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는 연주 여행을 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가족에게는 물론 연인이나 후원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마다에는 모차르트가 처해 있는 상황과 심정들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매번 그는 유머와 발랄함으로 고통과 근심을 에둘러 표현한다. 직설적이고 활달한 문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됨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당신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요. 내가 하는 말은, 당신한테 가장 좋은 게 뭘까 고심해서 내린 결론들이니까 말이오. 안녕, 여보. 내 하나뿐인 사랑! 손을 들어 공중을 휘저어봐요. 내가 당신한테로 날려보낸 2,999하고도 2분의 1개의 입맞춤이 날아다니면서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런 다음에는 이쪽으로 귀를 대봐요. 이제 당신은 내 거야. 자, 우리 함께 입을 벌렸다 다물고-한번 더-또 한번 더.”

이 편지 모음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계급 문제와 경제적 궁핍이다. 작곡가로서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자 했던 모차르트에게 걸림돌로 작용했던 가난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꾸준한 작품 활동을 위해 그는 늘 귀족들에게 억눌릴 수밖에 없었고, 경제적인 후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그가 대주교의 집을 방문한 날,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저한테는 좀 이른 듯 했지만 정오 무렵에 점심을 들었습니다…시종들이 상좌를 차지했고, 저는 가까스로 요리사 윗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식사 중에는 상스런 농담이 오고갔지만, 저한테는 아무도 농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대주교옵께서는 자기가 자애로운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미화하면서도 그들의 봉사에 대한 지불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 편지에는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차르트가 그 귀족들을 비판하는 글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편지 말미에는 “하지만 저는 몇 푼이라도 줄지 기다려볼 생각”이라고 적으며 이중적인 태도로 선회한다. 신분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글인 셈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가난에 굶주린 모차르트가 여기저기에 돈을 빌리려는 구애의 글이 자주 엿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곡 활동을 펼친 인생 역정과 당시의 음악 경향을 송두리째 뒤바꾼 그의 활동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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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이야기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쳐 있는 행복은 미쳐 있는 사람만이 안다. 나의 반평생을 지탱해준 것은 바로 이 희열과 열정이며 남은 인생도 그 희열과 열정 속에 펼쳐질 것이다. 인간에게 유보시킬 행복은 없다. 미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시작하라.”

오디오는 소리를 전달해주는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귀와 몸은 간사해서 소리를 구별하고 차별한다. 특히 음악을 들을 때가 그렇다. 공연장에 직접 가서 듣지 않는 한 기계를 통해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치직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감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디오를 통해 음악을 체험한다. 음은 오디오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귀와 몸이 소리를 차별하듯이 오디오도 소리를 구별해 들려준다. 그래서인지 좋은 음을 듣기 위해 오디오에 미친 사람들(오디오파일, 매니아)이 생겨난다. 그중에는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기계를 자주 바꿔치는 사람도 있고, 순수하게 음악을 위해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윤광준은 ‘삶의 차별성’을 위해 그 길에 나섰다고 쓰고 있다. 인간의 열정과 도전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 클래식, 재즈, 가요 등의 음악에서 오는 감동이 존재함은 물론이다.


“오디오를 한다는 것은 음, 더 나아가서 소리의 성분을 따지는 일이다. 음악만 들으면 되지 소리의 성분은 따져서 뭐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명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 책에는 오디오를 통해 귀를 즐겁게 한다는 명제 아래 열정의 편력기가 서술되어 있다. 그는 오디오의 ‘존재감’ ‘생명력’을 찾으러 나선다. 오디오가 이루어낸 많은 표정을 인간사에 비유하며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어간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물로바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음 뒤에 숨어 있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스피커 스탠드에 볶은 모래를 넣기도 하는 등 지난한 노력의 과정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고 저자는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탓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오디오를 업그레이드하는 사람보다 오디오를 끝까지 바꾸지 않는 사람이 음악 애호가일 확률이 더 높다고 말하기도 한다.

‘열정의 편력기’가 끝나면 책은 본격적인 오디오 기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 전문적인 기기 메커니즘의 나열보다는 오디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건네며 ‘오디오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디오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스피커, 앰프, 플레이어, 케이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뒤따른다. 기기의 각 파트를 세심하게 말해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오디오의 총제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저자가 선정한 10대 명기에 대해 말해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 등을 세계적인 명품들을 예로 들며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초보자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세계적 명품들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으므로 부록에 초보자들이 혼란에 빠질 만한 오디오 매칭에 대한 사례와 ‘추천할 만한 중고 오디오 리스트’를 나열해줌으로써 자신의 ‘놀이’에 대한 열정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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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달리는가 - 동물들이 가르쳐준 달리기와 진화에 관한 이야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끼북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산문집이자 과학책. '우리는 왜 달리는가'에 대한 제목에서 '우리'란 '보편적인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저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달리고, 또 달려왔다는 사실을 유려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달리기'에 대한 과학적인 맥락을 짚어낸다. 동물학자여서 그런지 다양한 동물들이 뿜어내는 '달리기 재능'이 가히 범상치 않게 등장한다.

이 책은 저자의 일대기이자 그의 울트라 마라톤 준비기이기도 하다. 그의 지난한 준비 과정을 가만히 추억에 잠기며 읽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 그리고 갖가지 동물에 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달리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는다. 100킬로미터. 너무 길지 않은가? 물론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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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04-1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참 좋죠? 번역도 좋고.

새들처럼 2006-04-1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번역이 훌륭하네요. 편집자가 잘 만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