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것-소설가 김연수

대담: 신종호 편집장 사진: 김점기 기자  | 2005-12-01

 

약력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등을 펴냈다. 제34회 동인문학상,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북새통: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제13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유령작가’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김연수: 소설은 개인들의 사소한 역사를 다룹니다. 그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죽은 보통의 사람들이죠. 작가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유령작가라고 붙였습니다. 이 소설집에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들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내가 쓰는 이야기만 존재하게 될 때 가능합니다. 모든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유령작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품만 남고 작가는 사라지는 그런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북새통: 독자들은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경험이나 생각들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는데, 작가가 사라진다면…….

김연수: 경험이 고갈된 지점에서 비로소 소설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때부터는 개인적으로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 합니다. 소설 쓸 때의 저와 그냥 생활할 때의 저는 서로 다른 인간형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상 같은 경우 그는 장남이면서 전통에 얽매인 생활인으로서의 김해경과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로서의 이상으로 살았습니다. 독자들이나 평론가, 문학가들은 생활인 김해경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작가로서의 이상이죠. 이상은 생활인으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문학사적으로 아주 행복한 결과물을 얻었죠. 작가가 없어진다고 말한 것은 일상의 경험에 국한된 제가 소설에서 사라진다는 것이지 작가 그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 것은 아닙니다.

북새통: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이라는 작품을 보면 변학도를 부정적인 인물이 아닌 굉장히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재해석해내는 이유가 있다면?

김연수: 저는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쓸 때 역사책에 기록된 거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수많은 실수들, 후회들, 혹은 개인들의 사소한 욕망이나 우리가 놓친 면들에 관심을 둡니다. 저는 『춘향전』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했죠. 신임 사또가 부임하면 초하루와 15일은 반드시 기생 점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생 점고에 빠진 춘향을 옥에 가두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춘향은 관비이기 때문에 수청을 드는 게 의무입니다. 변학도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는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될까, 라는 생각 하에 그 이야기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그 시절로 돌아가서 재현하자면 이러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결과가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입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에 그리 중요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북새통: 「뿌넝숴」라는 작품에 역사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각인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좀더 설명을 해 주시지요.

김연수: 개인들의 수기를 보면 한국 근대사가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수기를 보면 개인의 삶과 역사가 일치합니다. 그런 수기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개인의 삶이 같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개인의 삶을 뭔가 잘못된 삶이라 여기는데 저는 절대 잘못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진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소설가니까 감정의 차원에서 제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저질렀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진실이나 의의보다는 그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몸으로 느끼고 발산하는 감정들이 더 진실하다는 것이죠. 책에 씌어 있는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겪은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뿌넝숴」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북새통: 그렇다면 진실이 가지고 있는 엄격성은 사라지고, 더 깊게 가다 보면 모든 것에 진실은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요?

김연수: 그게 제가 많이 듣게 되는 비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소설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몰라요. 제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부분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최대한 짐작해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아주 나쁜 인간일 수 있고, 아주 좋은 인간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심리랄까 그 사람이 심중에 진짜 품고 있었던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거든요. 지금은 그게 저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비판을 많이 듣습니다. 진실에 대한 물음과 답은 소설가인 제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책들이 대신 해 주고 있습니다.

북새통: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게 과연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라는 물음을 던졌는데, 그 물음에 대해 본인은 답은?

김연수: 저는 궁극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봅니다. 이해가 되는 삶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알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면 98퍼센트까지는 알 수 있어요. 마지막 2퍼센트는 알려고 들면 들수록 결국에는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걸 알게 되면 삶은 재미가 없죠. 신비함이 사라지니까. 알 수는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죠. 소설의 매력은 그 2퍼센트에 있죠.

북새통: 나머지 2퍼센트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이 소설의 재미를 준다는 것인가요?

김연수: 추측을 할 때 자기가 누군지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추측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어디선가에서 그와 같은 추측을 선택했다는 것이거든요. 추측이 다 달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독자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다 명확하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원해요. 소설은 그렇게 쉽게 읽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것이 소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제 인생을 돌이켜보는, 소설을 다 읽게 되면 결국에는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진짜 소설을 읽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북새통: 소설가라는 개념하고 이야기꾼이라는 개념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꾼과 소설가가 차이가 난다면?

김연수: 저는 분명히 다르다고 봅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듣다 보면 재미가 있어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를 괴롭힙니다. 저는 지루한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영화보다도 재미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정말 잘 읽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문학적, 소설적 독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당신들의 삶이 그렇게 매일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지요. 물론 독자들 대부분은 삶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는 것을 읽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세계를 그대로 여과해 보고 싶은 것이고, 여러분들도 그 세계를 경험하고 싶으면 어느 정도 그 지루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가와 이야기꾼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곤혹스럽고 괴롭고, 당장은 읽고 싶지 않은데,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 지나면 어떤 쾌감 같은 것을 줍니다. 묘한 쾌감인데,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독서가로서 어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새통: 『빠이, 이상』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힘들게 읽었지만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도 있고,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상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던져 주고 싶었는지?

김연수: ‘빠이’라는 게 이상의 『날개』를 보면 아홉 번인가 나와요. 제목을 지을 때, 그 ‘빠이’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빠이, 이상』이라고 단순하게 제목을 짓기는 했는데, 그때는 소설을 계속 쓰느냐 마느냐의 고민을 할 때였어요. 일단은 무엇인가 완성을 하는 게 중요했지요. 이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도전을 해서 지면 안 쓰면 그만이고, 제대로 된다면 앞으로 계속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쓴 소설입니다.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게 94년부터인데 그 전에 읽었던 소설들은 전부 리얼리즘 소설들이었거든요. 역사와 진실에 대한 획일적 물음을 던지는 소설들이었죠. 시대도 늘 혼란했고. 그래서 ‘진실은 과연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본 것이 『빠이, 이상』입니다.

북새통: 문학적인 영향관계는?

김연수: 제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들은 줄리언 반스, A. S. 바이어트 등과 같은 영국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설 장르를 최대한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쓰겠다는 것이 아니고 소설 테크닉을 다 넣되 그 테크닉이 좀더 복잡하게 읽히는 방법을 취했죠. 한참 때는 미국 작가들을 좋아했는데, 그 사람들은 최종적인 소설의 마지막 단계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들과 달리 영국 작가들은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저에게 굉장히 고무적이었죠.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망을 심어 주었고요.

북새통: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김연수: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없고, 사건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91년도 5월 분신정국 때, 그때 일들이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거 같아요. 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진실과 거짓이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종이 한 장 차이의 일이더라고요. 진실 여부를 떠나 그 사건 이후 엄청난 공허감과 우울함이 왔습니다. 그 우울증과 조증을 감당하기 위해서 생각을 바꿨죠. 그래서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진실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을 해 보니 그게 저의 세계관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직도 안 바뀌었나요?) 네,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세계인 것 같은데요. (허무주의적인 건가요?) 허무주의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래도 뭔가를 찾아야 되잖아요? 뭔가가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찾고 구하게 되는 게 개인적인 진실이었던 거죠. 공적인 진실이 아니라 사적인 진실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새통: 희망 같은 것은 어디서 찾으시는지요?

김연수: 소통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질 때 희망을 가지겠지요. 소통이 안 될 때는 절망적이고요. 저는 어떤 시스템이든 믿지 않습니다. 시스템은 강제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강제는 우리를 충분히 패배하게 만듭니다. 결국 개인은 패배하고 시스템만 승리하게 되죠. 그래서 시스템과는 소통을 안합니다. 패배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어쨌든 끝까지 가 보자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패배하는 인간들끼리는 제대로 소통이 되니까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머리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몸으로 이해하는 거죠.

북새통: 이번 소설집에는 우연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삶을 우연의 연속으로 본다는 것은 삶이 비논리적이라는 의미인가요?

김연수: 말하자면 그렇죠. 인간의 개인적인 삶은 역사와는 달리 계속 바뀌고, 변절하고, 어제의 마음이 내일 달라지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인과관계가 삶을 지배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논리적으로 얼토당토않게 여기까지 와서 소설을 쓰고 있거든요. 인생 과정에 인과적 진실은 없다는 것이죠. 우연의 삶이 겹치고 겹쳐 필연이 되는 거죠.

북새통: 우리 삶이 우연이라고 하는 것에 크게 지배된다면 ‘인간의 의지란 소용이 없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김연수: 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한 번밖에 올 수 없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이죠. 의지는 분명 있지요. 순간에 모든 걸 투여할 때, 그게 인간의 의지라고 봅니다. 그 의지가 인과관계에 접어들면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패배는 인과관계에서 나온 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사람에게 패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북새통: 운명을 믿나요?

김연수: 전혀 안 믿습니다. 운명도 인과관계의 서사거든요.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죽든, 패륜아로 몰리든 그 사람의 내면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라는 것이죠. 그 내면이 운명이라고 봅니다.

북새통: 삶의 궁극적인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연수: 왔다가 한 번 가고 나면 다시 안 온다는 것이 저는 삶의 매력이라고 봅니다. 돌이킬 수 없음. 이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매력적이죠. ‘지금’이라는 게 있다는 게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가서 인생을 고칠 수 있다면 삶은 아주 재미없고 지루하겠죠.

북새통: 그동안 쓰신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김연수: 지금 발표는 안했고, 내년 봄에 책으로 낼 텐데, 『밤은 노래한다』는 장편소설입니다. 1930년대 만주의 공산유격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인데,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청년들이 살아서 천국을 원했는데 결국 지옥을 보고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애착이 가느냐 하면 소설이니 재미있기 때문이죠.(웃음)

북새통: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기억에 남는 소설은?

김연수: 『설국』입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모든 게 달라집니다. 지금에서야 『설국』이 무슨 내용인지 좀 알 것 같아요. 또 모르죠. 4∼50이 되면 또 다른 게 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소설은 ‘노인들의 장르’인 것 같아요. 매번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오랫동안 살아 보지 않고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들이 숨어 있죠. 그래서 좋은 소설, 고전소설을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10대, 20대에는 문장밖에는 안 보이거든요. 문장을 보다가 나중에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게 소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마지막에 불이 났을 때 은하수를 보면서 ‘두렵도록 요염’하기 때문에 빠져든다고 했는데,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두렵도록 요염한 게 무엇인지, 겁을 내면서도 왜 빠져드는지를.

북새통: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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