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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ㅣ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박경리의 작품이라면 사람들은 의례 '토지'를 떠올리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김 약국의 딸들"이다. 엄마가 자살을 해서 큰어머니의 눈에 가시로 큰집에 얹혀 지내다가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자 집안의 대를 잇게 되는 아버지 김성수. 그리고 그가 낳은 다섯 명의 딸들, 교활하고 재물에만 욕심이 있는 첫째 용숙, 똑똑하고 많이 배워서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둘째 용빈, 제일 예쁜 셋째 용란, 못생겼지만 순한 넷째 용옥, 그리고 어린 막내 용혜. 이들 딸들은 그 시대가 처절하고 암울했던 만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다.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어 영아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문란한 생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용란은 사랑하던 사람이 집안의 하인이라는 것이 들통나서 아편쟁이에게 억지로 시집을 가게 되고 결국엔 남편의 손에 어머니와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채 미치고 만다. 용란을 마음에 두고 있던 지석원은 할 수 없이 데릴사위가 되기 위해 못생긴 용옥과 결혼을 하지만 마음이 없어서 그녀를 본체만체하고, 용옥이 죽자 용빈 대신 용란을 맡는다. 남편의 계속되는 냉대에 마음붙이지 못한 용옥은 기독교에 빠진다. 그러나 시아버지와 시동생과 함께 살던 용옥은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신을 희롱하려는 시아버지를 피해 배를 타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배 사고로 딸과 함께 죽고 그녀의 손에는 십자가가 쥐어져 있다. 배의 침몰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별탈 없어 보이던 용빈은 약혼을 했던 부잣집과 파혼을 하고 김 약국 집은 결국 망하고 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 작품은 여인들의 삶과 한 집안의 몰락을 그리며 그 시대를 나타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침몰하는 배처럼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세상을 알건 모르건 아무 상관없다. 마치 해가 떴다 지는 것이 어떤 이유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그건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서양속담을 연상시킨다. 새날이 밝는다면 새로운 정신을 가진 새 사람으로부터, 낡은 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이 작품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 아버지 김성수는 구박받고 자랐지만 결국 자신이 집안을 물려받았고, 용숙은 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용빈은 배움이 많았으니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고, 용란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눴으니 그가 미친 것은 그것의 대가다. 용옥은 가장 소극적이어서 불쌍하지만 그녀 또한 자신이 원하던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야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녀들은 모두 바라는 것을 얻었고, 자신의 바람대로 살았다.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업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들의 삶이 업보에 의해 이지러지고 비틀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가정과, 사회와, 그 시대에 의해 억압을 받고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김성수의 어머니가 비상을 먹고 자결하고,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연정을 살해한데서 끝이 났다. 봉건적인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은 과도기적 시대를 살았다. 그 시대를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개척해 갔다. 그 시대를 산 사람이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고 모던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거나 어찌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까. 시대가 불행을 뿌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김 약국의 딸들이 그 시대와는 다르게 억압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까. 책을 읽으면서 나타냈던 그런 분노와 울분을 또 다른 곳을 보며 터트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에서 변해야 하는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 그 사람의 생각,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가 함께 누구나 행복을 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도록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관습과 도덕에 의해 무장하고 남을 단죄하려드는 사람들의 가슴속 서슬 퍼런 비수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그런 날을 꿈꾼다.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