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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살아가는 이야기] 가난과 빈곤 지금 우리는 확실히 가난은 없고 빈곤만이 남아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가난이 빈곤이고 빈곤이 가난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가난은 가난이고 빈곤은 빈곤인 것만 같다. 가난은 그래도 어느 정도 ‘숨쉴 구멍’이라도 있지만, 빈곤은 도대체 그 어떤 대책도 없는, 가난은 가난해도 어딘가 따스한 기운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빈곤은 그야말로 삭막 자체인 것 같은. 내 기억 속의 60년대와 70년대는 가난했다. 가난했지만 나름대로 따스했다. 그것이 단순히 내 유년시절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 그때, 가난한 우리집 주위에는 우리집처럼 가난한 이웃들이 서로 인심 나누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외롭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은 예전에 가난했던 사람들보다 확실히 외롭다. 예전에 가난했던 사람들은 너와 내가 가난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끼리 의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가 가난하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가난을 밑천 삼아 서로 의지하고 생계를 도모하고 살 수가 없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이 나라 개발과 발전의 역사란 바로 가난한 사람들 흩어놓기의 역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난한 사람들이 납작한 지붕 아래 좁은 골목 끼고 문 열어 놓고 살아도 좋았던 달동네들 파괴하기다. 하늘이 가까운 동네에서 꼼지락꼼지락 삶의 둥지를 틀던 사람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그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우리 모두 가난했던 곳에서 각자가 가난한 곳으로 흩어져 갔을 뿐이다. 뭐든지 많이 모여 있으면 눈에 띄게 마련이다. 가난도 뭉쳐 있으면 또렷해 보이리라. 가난 밀집지역을 흩어 놓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 각각 어디론가로 각자의 가난을 짊어지고 울며불며 사라져 갔다. 그래서 가난은 일시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난이 근본적으로 없어졌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정을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밑천인 가난이라는 쪽박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쪽박조차도 없는 그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인가. 예전에 시골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식량을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우리는 거지라고 하지 않고 동냥아치라고 했다. 우리가 동냥아치를 동냥아치라고 불렀을 때 동냥아치는 나름대로 동냥아치로서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동냥아치의 자존심은 그가 내미는 쪽박에 한집에서 동냥할 수 있는 정량 이상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동냥을 해서 먹고 살지만, 그가 정해놓은 쪽박을 넘는 동냥을 주는 것은 동냥아치의 자존심을 뭉개는 것이었다. 동시에 동냥아치의 쪽박을 채워주지 않는 것은 동냥을 주는 사람, 바로 집주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내게로 동냥을 구하러 온 사람, 박으로 켠 하얀 종구랭이 쪽박 하나 채워주지 못할 만큼, 그 정도도 나누지 못할 만큼 내가 옹졸한 사람인가, 스스로 자책할 문제였다. 오늘, 한때는 하늘 가까운 데서 살았던 적이 있었을, 그런 동네 뭉개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도 삼양동, 미아동, 난곡의 좁은 골목에 사과괘짝 화분에 파, 시금치에 덤으로 채송화 꽃도 피울 수 있었을 한 사람을 본다. 그냥 그 동네 살게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했어도 그는 그가 다른 동네 살았으면 누리지 못할 수도 있는, 삼양동, 미아동, 난곡사람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과괘짝에 심은 파, 시금치, 채송화의 행복, 부자들은 누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니까, 하늘 가까운 산동네 사람이니까 누릴 수 있는 행복 말이다. 그러나 산동네라는 쪽박은 깨졌다. 가난해서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의 근거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산산이 부서졌다. 돈 많은 사람들이 정원에 값비싼 수목 심어놓고 행복해 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사과괘짝에 파, 시금치, 채송화 심어놓고 행복해 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을진대, 보호받는 것은 부자의 행복이다. 가난한 이의 행복은 보호받지 못한다. 보호받지 못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주장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 자존심 뭉개는 법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 편이 아니다. 어쩌면 사과괘짝에 채송화 봉숭화 꽃 피워 올리는 것으로도 최소한의 행복감을, 인간적 자존감을 누리며 살수도 있었을 한 사람이 지금 공원 벤취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가 누워 있는 벤취를 보라. 나는 여기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로쳐진 쇠팔걸이를 피해 뒤틀린 그의 허리께에 그것만은 부자에게나 빈자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쪼일, 해가 쏟아지고 있다. 옹졸을 넘어, 치졸을 넘어 가난한 사람 쫒아내기의 방법이 이제 ‘공원벤치에 쇠팔걸이 박기’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인가, 나는 그저 참담할 뿐이다. 동냥아치에게 정량이상을 주는 것은 동냥아치를 무시하는 거였다. 그러나 동냥아치의 쪽박을 채워주지 못하는 건 바로 채워주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저 뙤약볕 아래 고단한 몸 누인 그의 허리를 비틀리게 하는, ‘나’는 누구인가. 저 쇠팔걸이는 바로 가난한 저들을 부정하기만 하면 가난이 없어지리라고 믿는 모든 ‘나’들의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양심들이 아니겠는가. 노숙인의 의료구호비를 예고도 없이 끊어버리고 급기야 공원벤치에 노숙인이 눕지 못하도록 쇠팔걸이를 박는 야박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사회란 쪽박을 채워주지 않는 옹졸함을 넘어 쪽박을 깨는 폭력까지를 서슴치 않는 사회임에 분명하다. 나는 우리 사회 노숙인이 처한 현실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노숙인에게 공원벤치 하나도 내어주지 못하는 그렇게 옹졸한 사회인가. 우리 사회가 시청 앞 잔디광장 조성하는 데는 50억이 넘는 돈을 쓰면서 노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파도 병원에도 못가고 결국은 고단한 몸 누일 공원 의자 하나까지 박탈하는 치졸한 사회인가. 우리 사회의 옹졸성, 치졸성을 우리 사회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전사회적 자존심을 회복하지 않는 한,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할 수조차도 없이 삭막한 빈곤의 늪을 오래도록 헤메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선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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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0-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언제나 이런 글 쓸까 몰라요

stonehead 2005-10-0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겸손이 지나치면 교만이 된다지요.ㅋㅋㅋ

진주 2005-11-0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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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불공정 게임과 치수 맞추기

 

 


바둑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살이는 굉장한 불공정 게임이다. 세상살이에 접바둑은 없다. 살아가는 기술이 1급이건 18급이건 프로건,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지닌 하버드 박사든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빈털터리 시골 청년이든 다같이 맞바둑을 두어야 한다.

 

바둑용어로 말하면 '세상은 총 호선(互先)'이다. 바둑은 경기를 제외하고는 치수에 따라 상수가 하수를 접어준다. 내기바둑을 두었는데 만약 한쪽이 치수를 속여 부당이득을 크게 취했을 때는 법정에서 사기죄로 처벌받는다. 그러나 세상살이에선 치수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머니게임에서 9단의 실력을 갖춘 외국의 금융회사가 IMF 사태를 맞아 비몽사몽이 된 한국 땅에서 하수(?)들을 상대로 돈을 죄 쓸어가도 사기죄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최강자들에게 '세계화'는 참으로 근사한 변화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둑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살이는 약자가 강자를 거꾸로 접어줘야 하는 아주 특별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서민은 국회의원을,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국내 기업은 외국 기업을 접어준다.

 
 
바둑엔 '세력'과 '실리'라는, 서로 갈등하는 양대 축이 있다. 비유하자면 세력은 학벌이나 신용.가문 등 나중에 힘을 쓰게 되는 것이고 실리는 눈앞의 현찰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세력과 실리를 잔뜩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마이너스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강자들은 법과 제도, 인맥의 도움을 받아 전력이 더욱 증대되고 상대적으로 약자는 더욱 약해진다. 전력의 차이는 한없이 벌어진다. 바둑이라면 9점 깔아도 상대가 안 된다. 물론 이런 양 극단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TV 드라마에서는 종종 맞대결을 펼친다. 약자가 때로는 대 역전승을 거두며 신데렐라의 환상을 이어간다.

 

현실에서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그건 토끼가 사자를 이길 수 없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바둑이든 세상살이든 사자를 피하고 토끼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영리한 방법은 없다. 혹자는 운(運)을 얘기하지만 동네 바둑꾼이 조훈현 9단과 호선으로 바둑을 둔다면 대운이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바둑은 치수가 너무 맞지 않으면 아무 재미가 없다. 석 점 이상의 차이가 나면 그야말로 부처님 손바닥이요, 어린애 손목 비틀기가 된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이 된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죽어라고 뛰어봐야 평생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재미는 고사하고 하수의 처지가 너무 처량하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용 한번 쓸 필요 없이 쉽게 이기는 것도 자랑은커녕 너무 뻔뻔스러운 감이 있다.

 

세상살이는 어차피 불공정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불공정 게임에도 불문율이랄까 치수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재미로 적어본다.

 

▶기본적으로 맞수와의 대결을 원칙으로 한다

▶두 수 위의 강자와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

▶한 수 위의 강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명예롭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 식의 승리는 가문의 치욕으로 여긴다

 

네 번째가 룰의 핵심이다. 불공정 게임의 어두운 산물이라 할 학원의 '일진'들에게 맨 먼저 이 대목을 말해주고 싶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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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은사(隱士)’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숨어서 산다는 뜻으로 무슨 죄를 지어 숨어사는 것이 아니고 속세(俗世)를 떠나 산간에서 자연과 청담(淸談)을 즐기며 사는 고고한 인물을 일컫는다.


속세(俗世)란 어떤 세상인가. 출세와 명예와 부(富)를 추구하고 부귀영화를 얻고자 경쟁하고 싸우는 곳이다. 청담(淸談)은 무엇인가. 속세의 얘기는 금물이며 노장(老莊)사상과 같은 비현실적인 맑은 얘기다. 그래서 속세의 사람은 그들을 존경했다.


은사(隱士)는 중국의 전설시대 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미 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는 사회·국가적으로 하등의 해놓은 일 없이 단지 속세를 떠났다는 것 만으로 민중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하다며 허유(許由)를 필두로 12人의 은사를 거명하며 어디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매도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은사의 의미에는 앞과 뒤, 즉 표리(表裏)가 있었다. ‘소은(小隱)은 산야(山野)에 숨고, 대은(大隱)은 조시(朝市)에 숨는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은사를 풍자한 항간의 말이다. 매월 봉급받는 ‘은사’도 있었는데 한산한 관청에 숨어서 사는 관원을 빚대어 ‘중은(中隱)이라 했다.


한초(漢初)에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각리(角里), 하황공(夏黃公) 4人의 유명한 은사가 산간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때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이 4명의 은사를 초빙해 조정의 요직을 맡기려 했으나 거절했다. 응하지 않았던 것은 고조가 거만불손했기 때문이다.


얼마후 태자(太子) 문제로 고민하게 됐는데 정실(正室)인 여후(呂后)가 낳은 아들 영(盈)을 내정하고 있었는데 고조가 총애하는 측실(側室)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봉해 줄것을 측실의 척희(戚姬)가 애원하는 바람에 고조도 마음이 솔깃했다. 이를 알게 된 장량(張良)이 꾀를 내 4人의 은사를 하산시켜 영(盈)의 자문관으로 취임했는데 그러자 고조가 영을 태자로 확정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이어 서진(西晋)시대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는 7人의 은사(隱士)가 있었다. 혜강(蹊康), 원적(阮籍),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원함(阮咸), 향수(向秀)가 죽림칠현의 은사이다.


약 5년간 계속된 이들의 은거(隱居) 생활중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차례차례로 높은 관직(官職)에 초빙돼 출세의 기회를 얻었고 그 중에서 산도(山濤)는 재상(宰相)까지 출세했으니 그들의 속셈이 의심스럽다.


당(唐)의 노장용(盧裝用)이라는 선비는 조정에서 산간에 사는 은사를 초빙해 고봉(高俸)으로 대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도인 장안(長安)가까운 남산에 입산해 은사생활 중 조정의 사신(使臣)이 초빙하니 그는 은사생활에 미련이 있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의 속셈을 아는 사신은 ‘남산은 출세의 지름길’이라 꼬집었다 한다. 

 

출처] http://www.sbnews.co.kr/kfsbnews/opinion/view_news.asp?org_date=2004041309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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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오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나오는 이 유명한 성경구절은 사실 잘못 번역된 것이다. 번역자가 아랍어의 원어 'gamta(밧줄)'를 'gamla(낙타)'와 혼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가 되어야 옳았을 것이다.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낙타에 비한다면 훨씬 가능성이 클 것이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었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신데렐라는 궁중 무도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리구두 한 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가 따르고 있는 앵글로 색슨계의 버전에서 만큼은 유리구두로 되어 있으나 독일의 형제작가인 그림형제의 동화에서는 황금구두가 등장한다.)


왕자가 줍게되는 이 구두는 그후 못된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억지로 신어보려 하지만 맞지가 않고 신데렐라의 조그만 발에만 딱 맞는다. 그렇게 해서 왕자와 신데렐라는 온갖 장애를 넘어 마침내 서로를 다시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유리구두는 번역상의 실수로 나온 것이다. 이 동화의 최초 프랑스어판에서 신데렐라는 '털가죽(vair)'으로 된 슬리퍼를 신고 있었을 뿐인데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잘못 이해하여 '유리(verre)'로 둔갑한 것이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배데스다 호숫가에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누가복음 5장 24절)고 한 예수의 말은 오역된 것으로 짐작되며 "일어나 네 지팡이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가 옳은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지팡이를 뜻하는 'matte'가 침상이라는 뜻의 'mitta'라는 말과 혼동된 것이다.


- 출처 - 상식의 오류사전 2


 

 

아무리 영어가 출중하다 해도 조지훈의 시 ‘승무’를 영역하기란 어렵다는 어느 영문학자의 말을 듣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는 참으로 어렵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영문도 모르고 배웠지, 만약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웠어야 할 입장을 생각한다면 아찔하다.

 

그 많은 어미 변화를 어떻게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미 변화 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 천변만화하는 형용사는 또 어쩔 것인가? 우리나라 속담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우리 언어의 형용사 변화는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헌에는 오역(誤譯)이 많다. 오역은 그 번역자 의 외국어 실력이 낮을 경우와 번역자의 성실성이 부족할 경우에 일어난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후자가 더 비난받을 짓이다.

 

그런데 이 오역을 자청해서 두 배로 부풀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것 이 바로 중역(重譯)의 문제이다. 언제가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일본어로 옮겼다가 영어를 거쳐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강심장의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병자호란 때 절의(節義)를 지킨 김상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둔갑한 적이 있었다.

 

긍정문(충신)이 부정문(역적)으로 오역되어 일어난 불상사였다.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어찌 오류가 없을까마는 이것이 중역의 경지에 들어서면 그 오류는 배가되고 원래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역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는 하나도 보태고 뺄 것이 없으며, 그런 자는 재앙을 받을 것’(요한계시록 22: 18-19)이라고 말한 성서에도 오역은 있다.

 

예컨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오복음 19: 23-24)는 구절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밧줄로 바늘귀를 끼는 것보다 어렵다’의 오역이다. 히브리성경 원전에서 낙타와 밧줄의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에 생긴 오역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후자가 상징적이고 순리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요한복음 1: 1)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섭리(Logos)가 있었느니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창궐한 것은 조선조 고종년간이었다. 이 병이 들어오자 당시 습속대로 중국의 이름과 꼭 같이 ‘虎列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이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호열자가 아니라 호열랄이다.

그런데 剌(이그러질 랄)이 刺(칼로 찌를 자)와 한 획이 다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병명이 보편화되자 ‘랄’과 ‘자’를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호열랄을 호열자로 오독(誤讀)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누가 아는 체하며 ‘호열랄’이라고 했다가는 그 사람만 웃 음거리가 될 것이다. ‘호열랄’이 콜레라에 가깝지 호열자는 엉뚱한 발음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실록에는 분명히 ‘랄(剌)’로 기록되어 있다.(고종실록 을미 6월 16일자)

 

천고마비(天高馬肥)라면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니 책이 라도 한 자 읽으라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역이 또 가당치도 않다. 이 말은 본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었으니 반드시 오랑캐들도 지금쯤은 우리를 쳐들어 올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즉 국방에 더욱 마음을 쓰자(匈奴到秋高馬肥 變必起矣 宜豫爲備)’는 뜻이었다. 오랑캐들의 침입이 말이 살찌는 가을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이없이 책 좀 읽자고 뒤바뀌었는데 중국의 식자들 앞에서 아는 체하느라고 우리 식으로 천고마비의 계절 운운 하니 저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옷깃을 뿌리치고 돌아선다’고 할 때 ‘袂別’이라고 쓰고 몌별이라 고 읽는다. 그런데 그 몌자가 쓰기도 어렵고 발음도 고약해 이제는 모두들 결별이라고 읽고 아예 글자까지 ‘訣別’이라고 고쳐 쓰고 있다.

 

요즈음 한국인의 왕래가 빈번한 중국의 경제특구인 ‘xinshu’도 ‘심천’이 아니라 ‘심수’가 맞다. 그런데 그곳에 가는 한국인들이 모두 ‘심천’이라고 오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이제 한국인들과 얘기할 깨는 아예 ‘심천’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영어가 보편화된 시대에도 영어의 오역도 흔히 있다. 1957년 10월에 소련은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 그해에 소련의 대권을 잡아 수상이 된 흐르시초프는 기고만장했다.

 

그는 ‘스푸트니크가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났으므로 이제 지구가 전보 다 더 가벼워졌다’고 익살을 부렸다. 이 말이 외신(外信)을 타고 영문으로 “Now, the earth became lighter than before”라고 텔렉스로 들어왔다. 그때 국내의 ○○통신의 외신부장은 위의 문장을 ‘별(인공위성)이 떴으므로 이제 지구는 전보다 더 밝아졌다’고 번역하여 각 신문사에 송고했다. 하지만 ‘light’는 빛이 아니라 가벼움이란 뜻이었다.

 

일전에 세계 펜(PEN) 클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천하의 시객(詩客)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술이 들어가자 비위 좋은 한 한국 시인이 한국어로 즉석 시를 낭송했다. 그런데 이 자리가 국제적인 모임인 만큼 누군가 이 시를 영어로 동시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한국의 시인 중에서 영어라면 한 가닥 하는 분이 앞에 나섰다.

 

보통 연설이나 회화가 아니라 시를 동시 통역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싯귀 중에는 ‘꽃잎이 하늘하늘 나르고…’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하늘하늘’에서 막혔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Blossoms fly from sky to sky’라고 번역해 알 만한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오역사에서 가장 애교에 넘치는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국사학에서 씻을 수 없는 오역은 ‘高麗’,‘高句麗’를 고려와 고구려로 오독한 것이다. 이는 ‘고리’와 ‘고구리’로 읽어야 옳다.

 

조선 시대까지도 ‘麗’를 ‘리’로 읽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와 ‘려’로 읽기 시작한 것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려’로 읽고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이 미심쩍은 독자들께서는 큰 옥편에서 ‘麗’ 자를 찾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시 번역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번역을 하면서 진실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오역의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 번역(重譯)의 부도덕성과 비성실성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편견 없이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번역도 창작과 같은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지적(知的) 풍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역(誤譯)의 역사 -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 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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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0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톤해드님 ㅠ.ㅠ 우리집 유리구두는 어찌하나요 .ㅠ.ㅠ

stonehead 2005-10-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제보니 만두님이 신텔라 였군요.^^

방명록 댓글을 읽던 중
만두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되었는데...

만두님...무조건 막무가내로 화이팅입니다.^^



물만두 2005-10-0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막무가내로 화이팅하겠습니다^^
 

바보와 추녀야말로 서울대에 가라!!!!" from 드래곤사쿠라   2005/09/12 10:50 추천 0    스크랩 6

"바보와 추녀야말로 서울대에 가라..."

는 이야기를 누군가 공공연히 한다면 돌무덤에 파묻히기 십상일 것이다.

학벌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등등 욕먹고 죽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사리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은 또 어떤가?

 

"사회에는 룰이 있다

그 위에서 살아야만 해

렇지만 말이야 그 룰이라는 것은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이 만든다

그건 다시 말해 어떤 의미인지

그 룰이란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거야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도록 잘 숨겨놓지

그렇지만 룰에 복종하는 놈들 중에 현명한 놈들은 그 룰을 잘 이용한다

예를들어 세금 연금 보험 의료제도 급여시스템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이 일부러 알기 어렵게 해서

변변히 조사하지도 못하는 머리 나쁜 놈들한테 많이 뺏으려는 구조로 만들어놓았다

다시말해 너희들처럼 머리 쓰지않고 귀찮다고만 지껄이는 녀석들은

평생 속아서 돈을 뜯기기만 한다

현명한 놈들은 속지않고 이득을 얻고 이긴다

바보는 속고 손해를 보고 계속 진다

이게 지금 세상의 구조다

그러니까 너희들 속고 싶지 않다면 손해보고 지고 싶지 않다면 너희들 공부해!

가장 손 쉽고 빠른 방법을 알려주지 서울대에 가라.

특별진학반은 대학수험을 목표로 공부하고 싶은 녀석들이라면

조건없이 들어올 수 있다

다만 목표로 하는 대학은 서울대학교 하나 뿐

이번년도 5명의 서울대 현역합격을 목표로 한다

이건 너희들의 인생의 전환점이다"

 

대통령이 잘못된 통계자료까지 들이대며 서울대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2005년 대한민국에서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킬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오싹하다.

 

그런데 이 말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TBS 방송국에서 여름시즌에 방송중인 '드래곤사쿠라'(일본식 이름은 드래곤자쿠라)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들이다. 위의 대사는 원대사에 등장하는 '동대(=동경대)'만 우리 식으로 서울대로 살짝 바꾼 것이다.

 

"너희들이 갈 대학은 서울대 뿐이다. 다른 대학은 생각도 하지 마라"

"서울대를 가는 것은 너희들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이런 대사들이 아주 뻔뻔스럽게 또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드라마가 한국의 어느 공중파 방송국에서 방송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전인교육, 학생의 인성을 운운하는 교사들은 모두 자기 월급만 챙기고 실력 닦기에는 관심없는 무능력한 교사들로 그려진다면? 실제로 드래곤사쿠라는 이런 내용의 드라마다.

 

 

모르긴해도 난리가 날 것이다. 전교조는 드라마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방송국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것이고, 청와대에서는 방송국에 압력을 넣어 드라마를 조기 종영시킬 지도 모르고, 드라마를 제작한 피디와 출연 배우들은 당분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밀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웃 일본에서 아주 인기리에 방영중이고, 또 국내의 일본드라마팬들(어둠의 경로를 통해 일드를 감상하는....)에게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같은 제목의 만화이다. 이 만화 역시 일본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모았다. 동경대 입시의 아주 효과적인 전략과 학습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심지어 서점에서는 동경대 입시수험서들과 나란히 놓여 날개 돋힌 듯 팔린다고 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 얼토당토않은(?) 드라마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편차치 36의 류잔고등학교는 동경 도내에서도 아주 소문난 '바보 학교'다. 동경대 합격자를 단 한명도 못내는 것은 물론 전교생 모두가 바보에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다. 갈수록 신입생은 줄어들고 방만한 학교 경영 탓에 도산위기에 처한다. 채권단은 이 학교를 문닫기 위해 변호사를 파견한다. 바로 이 인물이다.

 

 

한심하게 돌아가는 학교 꼴을 지켜본 사쿠라기 변호사는 학교 재건 계획을 발표한다. 바로 동경대 진학이다. 다음해에 동경대 합격자를 5명 내고 그 다음해에는 10명... 이런 식으로 학교를 명문진학고교로 탈바꿈 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본 문제아들을 긁어모아 동경대 특별진학반을 구성한다. 바로 이 친구들이다.

 

 
 
 
 

그리고 사쿠라기 변호사는 외부에서 동경대 입시 전문 명강사들을 초빙해 이 문제아들과 함께 동경대 합격 1년 벼락치기에 돌입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고 시간은 흘러흘러 동경대 입학 본고사가 닥쳐온다. 총 11화로 방영예정인 이 드라마는 이상과 같은 줄거리로 현재 10화까지 방영되었다. 동경대 입학 본고사와 그 결과는 오는 9월 16일 최종화에서 드러날 예정이다.

 

이 드라마 중간중간에는 수험과 학습에 관련된 수많은 팁들이 등장한다. 영어는 이렇게 공부하라! 수학은 어떤 시간대에 어떻게 공부하라! 국어 시험은 이렇게 풀어라! 휴일의 학습법은 이렇고, 암기과목은 이렇게 외워라!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그 수많은 입시의 비법들 앞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드라마에는 쪽집게 같은 문제 집어내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들이 소개된다.

 

게다가 심지어 "진정한 교육은 주입식이다!"라는 선언까지 등장한다. 전교조 선생님들과 한때 교육부총리를 지내셨던 이해찬 총리께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찬송으로 도배된 듯한 이 드라마는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수많은 일드팬들이 모두 학벌지상주의에 물든 탓인가?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가슴이 훈훈해지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극중에서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동경대'라는 목표가 자폐아 배형진군에게 주어진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극중에 등장하는 문제아들은 모두 나름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누구는 아버지가 거액의 고리대금 빚을 지고 도망치는 바람에 매일 야쿠자에게 시달리며, 누구는 명문고에 다니는 쌍둥이 동생과 늘 비교당하며 스스로 움츠려든다. 어머니에게 늘 '바보'소리를 듣는 누군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머니가 꾸리는 술집 장사나 도우라고 강요당하며, 또 누구는 잘나가는 기업체 대표인 아버지로부터 아예 투명인간 취급 당한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지워진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동경대'다. 그리고 고3이 될 때까지 아무 공부도 하지 않았던 그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1년간의 벼락치기에 돌입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아예 매번 시작할 때 마다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을 깐다.

 

"이 드라마는 폭주족 출신의 가난한 변호사가 편차치 36의 구제불능의 고교생들을 학력사회의 최고봉 동경대학에 현역합격시킬 때까지를 그린 기적과 감동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대단히 위험하다. 꽃미남꽃미녀들을 내세워 한줄세우기, 학력중심, 학벌중심 이데올로기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비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 하나를 더 살펴보자.

 

"지금의 너로서는 아직 모르겠지

왜냐면 너희들 꼬맹이들은 사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니 모른다기보다 어른들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거야

그 대신에 미지의 무한의 가능성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책임한 망상을 너희들에게 심어주지

그런 것에 놀아나서

개성을 살려서 남들과 다른 인생을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야

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 않아

그걸 모른채 방치된 너희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불만과 후회의 소용돌이와 현실 뿐이야"

 

2005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버젓이 공중파 TV 드라마로 방송된다면? 아...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몽골몽골 솟는다.

 

좋다. 모두 다 좋다. 나 역시 이 드라마의 이데올로기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딱 한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의 교육은 꿈을 상실했다. 아이들에게 목표와 소망, 동기를 실어주는 것에 실패했다. 한국의 학교 교육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가정 교육도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이야기해도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이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이미 학생들에게 공부하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죄악시된다. 그리고 부모들이 늘어놓는 좋은 직장, 사회에서의 성공은 아직 어리디 어린 아이들에게는 체감하기 힘든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러나 드래곤사쿠라에서 동경대 합격을 위해 내달리는 문제아들에게는 확실한 동기가 있다.

 

"야지마, 요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빚이 있지 않았냐?

거기다 집의 빚은 어쩔 거냐?

미즈노, 넌 싸구려 술집의 싸구려 마담이나 할래?

류잔高 졸업하자마자 '어머, 어서오세요~'

그러면서 단란 주점 마담이나 할 거냐고?

오가타, 이제 범인 취급 당하는 거 지겹잖아? 넌덜머리가 나지?

오쿠노.. 슈메칸高 다니는 동생한테 보란듯이 되갚아 주고 싶지 않냐?

코바야시..네 외모로 탤런트를 하자면

도쿄대라는 브랜드 없인 그야말로 꿈 같은 얘기 아니냐?"

 

누군가 드래곤사쿠라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먼저 던질 것이다. 당신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불태워 본 적이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저 하늘의 구름 위인가, 이 대지 위인가 라고......

 

이제 일본드라마 드래곤사쿠라는 대망의 최종화를 앞두고 있다.

 

 

드래곤사쿠라가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빠른 속도감으로 자못 가볍고 경쾌하게 흘러가는 드라마지만 그 내용만큼은 특히 우리 사회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이 드라마를 보시라. 일본드라마나 영화에서 소재를 빌어와 한국에서도 간혹 리메이크판이 나오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사회적인 반발은 둘째치고, 정말 정권과의 목숨을 건 혈투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사쿠라기 변호사는 폭주족 출신이며 동경대를 나오지 못했고 2차례 낙방 끝에 사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그리고 동경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대같은 브랜드...거룩히 여기는 놈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

지들이 동대에 갔다는 것만으로

인생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

눈앞의 상대가 동대를 나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비굴해지는 녀석들 모두 천박한 것들이야"

 

그렇지만 그는 동경대를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경대와 학벌지상주의가 일본 사회의 큰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 외침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바보와 추녀야말로 동대에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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