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구판절판


그런데, society의 의미는 어떤가? 1933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society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 동료인 사람들과의 결합, 특히 벗끼리의 친밀함이 담긴 결합, 동료끼리의 모임
2) 같은 종류의 것끼리의 결합, 모임, 교제에서의 생활 태도, 또는 생활 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이나 상호 이익, 방위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 방식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 사전의 번역어는 모두 다 1)의 뜻에 상당히 가깝고 2)의 뜻은 거의 취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응하는 비슷한 현실 및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후자처럼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의 경우에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 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표현할 말도 없었다.
당시 쿠니(國)라든가 한(藩)과 같은 말은 있었다. 그러나 society는 2)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 관계이다.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그렇다. '쿠니'나 '한'에서는 사람들은 신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 계속)-17쪽

(위에서 계속)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이 2)의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를 일본어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이다. -18쪽

그런데 society의 번역어로서 어째서 '사회'만이 남은 것일까? 일단은 예로부터 써온 일본어인 '교제'나 '세상' 등은 society와는 의미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이 공통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는 거의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나 다름없다. '사회'라는 말은 오래된 한어이긴 한데, 일본에서의 용례는 지극히 드물었다. 번역어 '사회'는 '사'와 '회'에서 새삼스레 조합되어 나온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에는 원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는 society와 그 뜻이 어긋나는 부분도 거의 없지만, 그러나 공통 부분도 또한 거의 없다.
이 무렵 만들어진 번역어에는 한자 두 자로 이루어진 신조어가 많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기본적인 용어에 많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의미의 말에 대해서 이 쪽의 전래돼오는 말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뜻이 결핍된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에 계속)-33-34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34쪽

'네모난 문자(인용자주 -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하겠다는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번역의 대원칙인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할 때 완성되는 번역문은 어색하지 않은 진짜 일본어문이 된다. 그런데 이 때 번역되는 원서가 일본인에게 낯선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고 있다면, 같은 일본어를 사용한다 해도 종래 사용되지 않았던 방식의 서술을 하게 된다. 즉 번역자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말의 조립을 궁리하여 문맥상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일본어'의 의미도 변질된다. '사람'은 '하늘' 앞에 있는 독립된 혼자의 존재가 되고, '교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의 다수의 사람들과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 이외의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은 어째서 이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걸까? 왜 네모난 문자만 사용했을까? (아래에 계속)-46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매우 뿌리 깊은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상대(上代) 이래 천수백 년 동안 중국 등 선진 문화를 한자라는 언어를 통해 받아들여왔다고 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은 일관되게 번역 도입국이었다. 번역되어야 할 선진 문명의 말에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일본어'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그러하다. '자연스러운 일본어' 속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완전히 '흠잡을 데 없는 역자(譯字)는 사실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나는 의미를 '네모난 문자' 자체에 맡기는 것이다. '인민 각개'도 '일신의 몸가짐'도 결국 그러한 예이다. (아래에 계속)
-46-47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모난 문자'의 의미가 원어의 individual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말을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individual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새로운 문자의 건너편에 individual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약속이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자가 멋대로 한 약속이므로, 다수의 독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워 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 측에서도 또한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계속)-47쪽

(위에서 계속)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일본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말의 뜻을 바꾸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방법이었다. 다루는 말이 하나하나 현실의 무게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네모난 말의 조립이 갖고 있는 '카세트 효과'를 빌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개인'이란 문자가 포함된 말을 아주 이른 시기부터 individual 또는 그것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던 것은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society에 대해 초기에는 '교제'라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사회'라는 한자 조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들 '네모난 문자'와 함께 '카세트 효과'의 연역 논리도 등장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고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선각자가 일본어에 의한 독창적인 사고를 한계까지 추구하다가 결국은 현실과의 격투 끝에 좌절한 것이다.-47-51쪽

'근대'라는 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몇 번인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다. 그 최초의 유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1910년 전후 메이지가 끝나갈 무렵으로, 특히 문예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였다. 문학사를 보면 이 즈음 혹은 그에 이어지는 한 시기에 '근대'라는 이름을 내건 논문이 만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유행을 계기로 '근대'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고, 드디어 사전에도 기왕의 modern의 번역어였던 '근세'와 나란히 기술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음 번의 유행은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무렵이었다. 태평양 전쟁 ㅇ중인 1942년이다. 앞의 유행에서는 '근대'는 플러스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근대'는 '초극'되어야만 할, 부정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다. 앞서 게재한 나카무라 미츠오의 발언에는 그러한 시류에 대항하여 고의로 반대의 가치를 강조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 계속)-70쪽

(위에서 계속)
나아가 다음 유행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앞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 시대의 '근대'는 일종의 긍정적 가치의 상징 자체였다. '근대 문학', '근대 시민 사회의 통과'론 등등의 무렵이다. 그 다음에는 결국 그 반동으로서 '근대주의' 비판이 온다. <중략>
말의 의미가 이 정도로 다의적인 것은 본래 그 말에는 의미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결핍돼 있기에 유행하고 남용되고, 그리고 유행하고 남용되기 때문에 다의적인 말이 된다.
이 '근대' 유행의 시대를 거쳐서, 드디어 역사학자들이 좋다 싫다라는 가치 부여 없이 이 말을 사용하면서 시대 구분 용어로서의 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결국 '근대'라는 말은 처음에는 현실의 의미 없이 단지 형태만으로 존재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획득해갔던 것이다. 이것은 번역어의 의미 형성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0-72쪽

미시마 유키오가 '미'를 말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미'에 대해서 말할 때와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할 때이다. 그는 보통 평론풍의 짧은 글에서는 '미'에 대해서 말하며, 소설 작품 속에서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이 중 우선 전자부터 보자.
미시마 유키오가 '미'에 대해서 말할 때는 거의 늘 경멸조의 부정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중략)그런데, 이 <킨카쿠지> 안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중략) '미'가 킨카쿠지와도 별개인 양 '나'에 대립하여 존재하면서 '나'의 앞에 나타나 '나'의 위에 군림하며 '나'를 이끌려고 한다. '미'는 여기서는 늘 저 멀리 있고, '나'는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만 하는 입장이다. 그 정체 그 자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것은 평론 등에서 '미'에 대해 말할 때 마치 별볼일 없는 것처럼 경멸조로 언급하던 '미'와는 딴판이다. (아래에 계속)
-86-88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미'를 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히 의식적인 조작이다. 독자는 소설의 무대 위에 나타나는 '미'를 매우 중요한 무서운 그 어떤 존재라고 느끼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평론 등에서 경멸조로 '미'를 언급할 때는 마치 소설의 무대 뒤로 돌아가서 미의 딴 모습을 보여주는 척한다. 독자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이 '미'라는 말의 트릭이 가능했던 것은 '미'라는 번역어가 일본어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자 편한 대로 그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조작할 수 있었던 데 있다. -88-89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면 아서 예로 든 문장 조금 뒷부분에서는 이 je suis라는 것을 mon être라고 바꿔 말하고, 거기서부터 또 Être parfait (완전한 être, 즉 신)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suis의 명사형 être 쪽이 사고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또 이 être는 명사이면서 1인칭 단수형인 suis의 원형동사이기도 하다. 명사 중심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때로 동사 표현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즉 명사 표현과 동사 표현 사이를 쉽게 왕복할 수 있다. (중략)
번역용 일본어인 '존재한다'는 동사이네, '존재'는 명사이다. 양자는 언뜻 보아 근원이 같은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명사 '존재' 쪽이 먼저 있고 동사형은 여기에 하다(する)를 붙인 '하다' 동사이다. 명사 중심의 구성이란 점에서는 서구어보다도 철저하다. 서구 학술 용어의 번역에 딱 좋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은 일본어 원래의 구조라기보다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계속)-122-123쪽

(위에서 계속)
그럼, 전래되어온 일본어 ある나 いる는 어떤가? 이미 서술한 ある뿐 아니라いる도 명사화하기 어렵다. (중략)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구 철학의 번역을 '존재'와 같은 한자 두 자의 표현을 중심으로 해온 데에는 실로 지당한 까닭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ㅊ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123쪽

역사학자 츠다 소키치(1873~1961)는 (중략) '자유'라는 말이 사용된 오래된 예를 들고 있다. <후한서>에 붉은 눈썹의 도적들이 자신들이 옹립한 천자를 어린애 취급하여 "百事自由'로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의 예로는 <도연초>에 죠신소즈라는 중에 대해서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버릇이 있으며, 만사 자유로이 하고 다른 사람을 따른 ㄴ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유'라는 말에는 '제멋대로'라는 식의 용례가 많다. '자유'라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례도 있는데 특히 선승(禪僧)의 경우에는 '자유 해탈' 등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170-171쪽

그렇다면 여러 가지 번역어 중 '자유'가 승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쿠후 말기~메이지 초기에 '자유'와 경쟁하던 '자주', '자체', '불기', '관홍' 등은 적어도 나쁜 뜻의 어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보다도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점은 한자, 한문 서적에 통달한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태생의, 이질적인 뜻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성이 그냥 남아 있는 것, 즉 어딘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다든가, 어감이 어딘가 어긋난다든가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낫다. (중략)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일본어라는 하나의 언어 구조가 저절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어란 전래의 모국어로부터 보자면 구별된 말이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별의 표시를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177-178쪽

he나 she 등이 서구 문장에서 하는 역할은, 첫째 행위의 주체인 주어를 명확하게 해주는 구문상의 기능이다. 가로 문자의 글에서는 he나 she 등은 얼마든지 반복된다. 표시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 필요 이전의 형식상의 요청이다. 즉 ㅈ서구인들은 3인칭대명사 등 인칭대명사가 많은 글에 친근감을 느낀다. 그 배후에는 늘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책임자를 개체로서 포착하여 분명하게 해두고자 하는 사고 구조가 있다.
일본어로 쓴 글에 주어가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주어가 '생략'된다고 하는 견해는 본래 주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서구 문장을 모델로 삼은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어는 문맥상 알 수 있으면 특별히 필요할 때 이외에는 표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본어에 더 잘 맞는 생각이다. (아래에 계속)-192쪽

(위에서 계속)
또 하나, 일본어에는 주어를 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일본어 고유의 '자발(自發)의 조동사'가 사용될 경우가 그렇다. 내가 이 책과 같은 글을 쓰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면 말한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만,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왠지 책임이 경감되는 듯하여 약간 자신이 없을 때는 그만 이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생각된다'라는 표현을 쓰면 생각하는 주체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다'가 아니라 '되다'라는 동사를 즐겨 쓴다. 회의석상에서 보고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저항이 있지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난히 통과된다고 한다. 채소 가게 아저씨가 "싸졌습니다"라고 말할 때, "싸졌다"는 행위에는 당사자인 채소 가게 아저씨뿐 아니라 동업자도 손님도 얼마간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그 내용은 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ㅏ 다른 논자도 독자도 얼마간 그 생각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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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1-09-2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어를 잘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했다. 별 생각 없이 쓰던 단어들에 담겨 있는 고민의 깊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유감이다.
아울러, 요전에 <형이상학>을 읽으며, 역자의 고유어에 대한 집착이 크게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자 번역어가 가진 고민의 무게를 반일 민족주의 구호 따위로 그리 쉽게 내버리는 데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는 지적, 고유어로 철학할 때에 철학이 일상의 의미를 포섭할 수 있다는 말이 <형이상학>의 역자의 의도를 짐작하게 해 주기도 한다.
 
마녀의 한 다스 ㅣ 지식여행자 1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3월
구판절판


'애국주의는 깡패들의 마지막 방패'라는 말을 쓴 18세기 영국의 문호이자 영어사전 편찬자 새뮤얼 존슨 박사에 대해, 앰브로스 비어스 Ambrose Bierce는 <악마의 사전 The Devil's Dictionary>에서 "아니, 애국주의는 깡패들의 마지막이 아니라 첫 방패지."라고 반론하면서, "야심가라면 누구든 불붙이고 싶은 물건이요, 한 번 불 붙으면 훨훨 타오를 쓰레기"라고 재정의한다. 또한 애국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가에게는 바보처럼 속임당하고 정복자에게는 손쉽게 이용당하는 인간." (뒤에 계속)-233쪽

(앞에서 계속)
원래 인간은 생명체 고유의 자기 보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기 가족, 자기 민족처럼 자기와 관련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태어나 자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목청 높여 주장하고 선동하는 것은 마치 성욕을 부추기는 것처럼 경솔하고 요상스러운 행위라는 뜻이 아닐까.
관념 조작에 가장 빈번하게 동원되는 것이 바로 이 '나라'며 '민족'이라는 '불 지피기 쉽고 타오르기 쉬운' 도구다. 이보다 좀 더 체계적인 수단으로는 배타적인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다. 이 또한 일종의 '이민족'을 만들기 위한 장치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하는 마법이라고나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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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9-13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와 <프라하의 소녀 시대>를 읽었다. 고상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줌마로 보이고, 행복하게 살다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고종석의 에세이랑 비슷한 느낌? 아줌마가 쓴 고양이 이야기도 읽어 보고 싶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진성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11월
절판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29쪽

일반적으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가르침의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이 경험보다 더 학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가르칠 수 있지만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34쪽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철학을 했다면, 그들은 분명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 앎을 추구했다. 이는 벌어진 일을 통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안락과 오락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거의 다 갖추어졌을 때, 그러한 앎을 찾아 나섰다. 이렇듯 우리는 분명히 어떤 다른 쓸모 때문에 지혜를 찾지 않는다. 마치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르듯이, 이런 앎만이 모든 앎들 가운데 또한 '자유롭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것만이 제 자신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39쪽

일반적으로 지혜는 보이는 것들의 원인을 찾지만 우리는 이 점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의 실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종류의 실체들(이데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이것들이 보이는 것들의 실체인지에 대해선 빈말을 한다. "나눠 가짐"은 앞서 말했듯이 아무 것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89쪽

일반적으로 '있음'의 여러 가지 뜻을 구분하지 않은 채 있는 것들의 요소들을 찾아낼 수는 없다. 특히 사물들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요소들을 탐구할 경우에 말이다. 정말이지 '입힘'이나 '입음' 또는 '곧음'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으며 알아낼 수 있다면 오로지 실체들의 경우에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들 모두의 요소들을 찾는 것이나,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91쪽

진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점에서는 어렵지만, 어떤 점에서는 쉽다. 이는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진리를 딱 맞게 얻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진리를 얻지 못하지는 않아서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 참인 것을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또는 조금 밖에 진리에 이바지하지 못하지만 모두 한데 모이면 꽤나 많은 양이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진리가 '누가 도대체 큰 문을 못 맞추랴'란 속담의 큰 문과 같은 것이라면 진리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가질 수 있지만 부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97쪽

우리는 먼저 나눔의 방식에 따라 얻어지는 정의들에 관하여 연구해야 한다. 정의 속에는 이른바 '맨 처음의 무리(類)'와 '차이성(種差)들'이라 불리는 것들 말고는 어떤 것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예를 들어 '두 발 달린 동물'에서 '동물'은 무리이며 '두 발 달림'은 차이성이다.-332쪽

우리는 실체들의 원인들, 원리들, 요소들을 찾고 있다고 앞서 얘기했다. 어떤 실체들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실체들에 대해선 특정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자연적인 실체들은, 예를 들어, 불, 흙, 물, 공기 따위의 단순한 물질들, 또 식물과 그 부분들, 그리고 동물과 그 부분들,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우주와 그 부분들은 다들 실체로 인정하였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꼴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이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와 '바탕이 되는 것'이 또한 실체라는 결론에 이른 논의들도 있었다. 더 나아가, 무리가 여러 가지 꼴들보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많이 실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보편자와 무리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은 같은 이유로 실체인 듯하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353쪽

(앞에서 계속)그리고, 본질은 실체이고 정의는 이 본질에 대한 규정이므로 우리는 정의와 '제 본성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다루었다. 정의는 규정이고 이 규정은 부분들을 가지므로 우리는 또한 이 '부분'에 관항 어떤 것들이 실체의 부분들이고, 어떤 것들이 그런 것들이 아닌지 그리고 실체의 부분들이 아울러 정의의 부분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더 나아가, '보편적인 것'도 무리의 실체가 아니다. 이데아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감각되는 실체들뿐만 아니라 이것들도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354쪽

어떤 것들은 그것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임으로써, 또 어떤 것들은 그것이나 다른 반대되는 것들을 얻거나 잃음으로써 '반대된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모순되는 것들, 결여, 반대성들, 그리고 관계 맺은 것들이 맞놓인 것들이고, 이 중 모순되는 것들이 으뜸가는 맞놓임이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은 중간 것을 허용하지만 모순되는 것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분명히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427쪽

일반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들이 언제나 변하고 결코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리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오히려,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으며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진리를 사냥해야 한다. 천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때는 이렇게 보이다가 다른 때는 그것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항상 같은 것이며 어떠한 변화도 공유하지 않는다.-465쪽

세 종류의 '이론에 관련된 학문'들이, 즉 자연학, 수학, 신학이 있다. 이론학의 무리가 가장 나은 것이며, 이 가운데서도 마지막에서 언급된 것이 가장 낫다. 왜냐 하면 신학은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귀한 것을 다루며, 또 각 학문은 자신에 고유한 인식 대상에 따라 더 낫다고 또는 더 못하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470쪽

우리의 연구는 실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실체의 원리 및 원인이다. 왜나하면 우주를 일종의 전체로 볼 때, 실체가 그 중 으뜸가는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를 잇따라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실체가 으뜸가는 것이며, 그 다음에 질이고, 그 다음에 양이다. -495쪽

실체는 세 가지다. 그 중에 감각되는 실체가 있다. 그리고 이 실체 중 어떤 것은 (즉 해, 달, 별 등의 천체들은) 영원하며, 어떤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실체는 온갖 동식물들처럼 사람들이 다들 실체로 인정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각되는 실체의 요소들을 이것들이 하나이든 여럿이든 우리는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한 종류의 실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이'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꼴(이데아)과 수학적인 대상들을 한 가지로 놓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가운데 수학적인 대상만을 놓는다. 앞의 두 가지 실체는 자연학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움직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종류의 실체는 이것과 앞의 두 실체에 공통된 원리가 없다면 다른 어떤 학문의 대상이다.-496쪽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아름다움이나 좋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중략) 아름다움의 최고 형태는 질서, 균형, 일정함인데, 이런 것들을 바로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가장 많이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많은 사물들의 원인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분명히 수학 계열의 학문들은 또한 어떤 점에서 그런 종류의 원인을, 즉 '아름다움'이란 뜻의 원인을 다룬다.-546쪽

이들은 이데아들을 '보편적인 것'들로 놓으며, 동시에 그것들을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로, 그리고 '개별적인 것'들로 만든다. 이럴 수 없음은 이미 다룬 바 있다. <실체들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특징을 한 가지 것에다 결합시키는 까닭은 실체들이 감각 대상들과 같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각 세계의 개별적인 것들은 흐르는 상태에 있어서, 그것들은 어느 것도 멈춰 있지 않지만, 보편적인 것은 그것들과 따로 있으며 그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정의들을 통해 부추겼다. 그러나 그 자신은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따로 떼어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옳았다. -585쪽

사물은 그것이 늘 있어왔다 하더라도 언젠가 생겨난 것이라면, 자신을 이루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잠재/가능 상태로 (어떤 것인) 것에서 나와 그것이 되는 바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ㄹ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생겨날 수도 생겨나 있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ㄹ 수 없는 것'은 발휘/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래에 계속)-598쪽

(위에서 계속) 이렇다면 수나 '밑감을 갖는 다른 어떤 것'은 그것이 아무리 늘 있어 왔다고 할지라도 있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여러 해 동안 있는 것'이 '하루밖에 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다면, 끝없이 긴 시간 동안 있어 온 것도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영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자리의 논의에서 다뤘던 바대로, '있지 않음을 허용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것이, 즉 '어떤 실체도 그것이 (신처럼 오로지) 발휘/실현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영원할 수 없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맞다면, 그리고 요소들은 실체의 밑감이라면, 어떤 영원한 실체도 '자신 안에 들어 있으면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598쪽

이 모든 점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이치에 맞는 점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여기서 마치 시모니데스의 '긴 말'을 보는 듯하다. 정말이지 긴 말은 노예들이 그렇듯 건전한 것을 전혀 말하지 못할 때 나온다.-609쪽

이런 (이치에 어긋난) 점들이 (이데아론에) 따르며, 또 아직 더 많은 점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수들의 생성과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체계적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수학적인 대상들은 감각 대상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고, 또 그것들은 원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6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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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8-2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다~!!
8월 2일에 시작해서 8월 24일까지.
음음 솔직히 어려웠다. 원문에서 빼는 것은 {}, 주석자가 삽입하는 것은 ()로 쓰는 것은 관례에 따른 것인 듯 한데, 같은 뜻의 단어들도 ()에 넣어서 혼란스러웠다. 원문에 대한 집착은 그런대로 납득이 갔지만, 고유어에 대한 집착은 공감하기 어렵다. 고유어를 쓴다고 글이 쉬워지는 건 절대로 아닌데 말이지.
책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는 건 뒷표지의 역자의 말인 듯 해서 마지막으로 여기에 적어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학문으로서 최초로 정립한 철학자였다. 그는 오늘날 철학의 분과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저술 <형이상학>에서 이론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정점에 이른 자신의 사상을 보여준다. <형이상학>에서 그가 묻는 근본 물음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 있음의 의미를 파헤치면서 그는 '있는 것'들의 으뜸 가는 원인(또는 원리)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탐구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도 실체가 양, 질, 관계 등의 다른 모든 범주들의 원인으로, 실체들 중에서도 으뜸 실체인 꼴(형상)이 다른 모든 실체들의 원인으로, 으뜸 실체 중에서도 영원불변의 신이, 천구들을 움직이는 이성(nous)들과 더불어 있는 것들 모두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드러난다. 신은 모든 존재와 변화의 시작점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으로서 서 있다."
 
중세의 가을 ㅣ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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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최악. 불어식 고유명사를 방치해둔 게으름에다, 짜증나는 '하나님' 타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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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6-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번역자, 후기에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힘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고 싶다."고 써 놨다. 그게 중세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를 설명하면서 가톨릭 용어를 싸그리 무시한 데 대한 자기 나름의 변명인가 보다. '미사', '성당' 대신 '교회', '예배'를 고집하는 것도, '신'이라 쓰면 무난한 것을 굳이 한국 개신교에서밖에 안 쓰는 정체불명의 용어 '하나님'으로 바꿔놓은 것도 개신교 (맹? 광?)신자의 아집인가 싶어 실소가 나온다. (심지어 '성모송'을 '아베송'이라고 썼다.-_-)
익숙한 라틴 이름을 어색한 프랑스식 표기로 방치해 놓은 것도 눈에 거슬린다. 중세사나 중세철학과 관련한 참고 도서들을 조금이라도 찾아봤다면 '성 보나방튀르'라든가 '(교황) 마르텡 5세' 같은 어이 없는 실수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단어 선택이라든가 문장 구성이 여기저기 결함 투성이라, 좀 어려운 부분이 나올라치면 머리를 감싸쥐고 원문을 추리해 내야 한다. 엉망인 번역 때문에 좋은 책이 망가진 것이 안타깝다.
 
시모츠마 이야기 - 양키 소녀와 로리타 소녀
타케모토 노바라 지음, 기린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5년 9월
품절


아마가사키(尼崎)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런 동네랍니다. 오사카(大阪)와 효고(兵庫) 현 중간에 있는 이 동네는 도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민의 대부분은 양키이거나 전에 양키였던 사람들입니다. 아마가사키 시민의 대댜수가 아마가사키에서 태어나 역시 아마가사키에서 태어나고 자란 양키 출신 부모에 의해 당연하다는 듯이 양키로 키워집니다.
시내에는 제법 많은 상가들이 있지만 대부분 빠찡코 가게와 수상한 짝퉁 의류를 취급하는 가게들뿐입니다. 음식점은 어디든 가격이 싼 편이어서 라면 한 그릇을 100엔이면 먹을 수 있는 가게가 널려 있습니다. 고깃집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 많아요)을 포함해 모든 음식점들이 가격파괴로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무척 활기찬 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에 계속)-25-26쪽

(위에서 계속)
아마가사키 사람들은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 무조건 다른 곳보다 싸게 파는 방법 이외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는 사람도 싼 거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품질이나 부가가치 등은 아마가사키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지난번에 광우병 파동이 났을 때 다른 도시의 고깃집들은 파리만 날린다는 뉴스가 나오는데도 아마가사키의 싸구려 고깃집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고기를 파는 걸 보면 혹시?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아마가사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마가사키 사람들은 TV뉴스는 아예 보지 않습니다. 신문도 스포츠 신문밖에 있지 않아요.)
상점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래위 모두 추리닝 차림입니다. 이건 아마가사키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가사키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가사키에서 자라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마가사키에서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아래에 계속)-26-27쪽

(위에서 계속)
아마가사키는 효고 현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화번호 국번을 효고의 078이 아니라 오사카의 06을 씁니다. 아마가사키 사람들은 오사카의 시외국번을 쓸 수 있어 편리하다며 뭣도 모르고 좋아하지만 저는 좀 복잡한 기분이랍니다.
오래 전부터 효고 현은 고베를 중심으로 부자들이 사는 상류층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굳혀왔습니다. 그래서 추리닝 천국 아마가사키를 효고 현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저는 추측하고 있어요. 기회를 틈타 아마가사키를 잡동사니 처리반인 오사카에 떠넘겨 버리고, 부자동네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하고 싶다는 것이 효고 현의 본심이 아닐까요? 아마도 효고현에 있어서 아마가사키는 없었던 걸로 하고 싶은,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없는 걸로 하고 싶은 지역인 거죠. 그래서 효고 현은 아마가사키의 시외국번 06을 계속 묵인하고 있는 겁니다. 오사카가 "있잖아, 아마가사키 말인데 오사카로 편입시킬까 하는데 주지 않을래?" 라고 한다면, 효고 현은 선심 쓰듯 아마가사키를 오사카에 선뜻 줘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래에 계속)-27-28쪽

(위에서 계속)
저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이런 아마가사키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입니다. 아마가사키에서는 쇼핑을 해도 살 만한 게 없어서 오사카로 나가야 했는데, 상점에서 상품을 예약하기 위해 집주소를 쓸 때마다 얼마나 창피스럽던지...... 아마가사키 시라고 쓰는 것만으로도 다들 저를 불쌍히 쳐다보는 것처럼 생각되거든요. 예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래 봤자 너는 추리닝 나라에서 온 애야" 라며 편견이 담긴 비웃음을 받는 기분이 되고 마는 겁니다.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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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6-1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효고 현 아마가사키 얘기가 재밌어서 옮겨왔다. 여기가 마츠모토 씨와 하마다 씨와 야스다 군의 고향이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