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진성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11월
절판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29쪽

일반적으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가르침의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이 경험보다 더 학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가르칠 수 있지만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34쪽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철학을 했다면, 그들은 분명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 앎을 추구했다. 이는 벌어진 일을 통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안락과 오락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거의 다 갖추어졌을 때, 그러한 앎을 찾아 나섰다. 이렇듯 우리는 분명히 어떤 다른 쓸모 때문에 지혜를 찾지 않는다. 마치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르듯이, 이런 앎만이 모든 앎들 가운데 또한 '자유롭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것만이 제 자신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39쪽

일반적으로 지혜는 보이는 것들의 원인을 찾지만 우리는 이 점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의 실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종류의 실체들(이데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이것들이 보이는 것들의 실체인지에 대해선 빈말을 한다. "나눠 가짐"은 앞서 말했듯이 아무 것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89쪽

일반적으로 '있음'의 여러 가지 뜻을 구분하지 않은 채 있는 것들의 요소들을 찾아낼 수는 없다. 특히 사물들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요소들을 탐구할 경우에 말이다. 정말이지 '입힘'이나 '입음' 또는 '곧음'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으며 알아낼 수 있다면 오로지 실체들의 경우에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들 모두의 요소들을 찾는 것이나,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91쪽

진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점에서는 어렵지만, 어떤 점에서는 쉽다. 이는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진리를 딱 맞게 얻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진리를 얻지 못하지는 않아서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 참인 것을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또는 조금 밖에 진리에 이바지하지 못하지만 모두 한데 모이면 꽤나 많은 양이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진리가 '누가 도대체 큰 문을 못 맞추랴'란 속담의 큰 문과 같은 것이라면 진리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가질 수 있지만 부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97쪽

우리는 먼저 나눔의 방식에 따라 얻어지는 정의들에 관하여 연구해야 한다. 정의 속에는 이른바 '맨 처음의 무리(類)'와 '차이성(種差)들'이라 불리는 것들 말고는 어떤 것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예를 들어 '두 발 달린 동물'에서 '동물'은 무리이며 '두 발 달림'은 차이성이다.-332쪽

우리는 실체들의 원인들, 원리들, 요소들을 찾고 있다고 앞서 얘기했다. 어떤 실체들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실체들에 대해선 특정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자연적인 실체들은, 예를 들어, 불, 흙, 물, 공기 따위의 단순한 물질들, 또 식물과 그 부분들, 그리고 동물과 그 부분들,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우주와 그 부분들은 다들 실체로 인정하였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꼴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이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와 '바탕이 되는 것'이 또한 실체라는 결론에 이른 논의들도 있었다. 더 나아가, 무리가 여러 가지 꼴들보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많이 실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보편자와 무리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은 같은 이유로 실체인 듯하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353쪽

(앞에서 계속)그리고, 본질은 실체이고 정의는 이 본질에 대한 규정이므로 우리는 정의와 '제 본성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다루었다. 정의는 규정이고 이 규정은 부분들을 가지므로 우리는 또한 이 '부분'에 관항 어떤 것들이 실체의 부분들이고, 어떤 것들이 그런 것들이 아닌지 그리고 실체의 부분들이 아울러 정의의 부분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더 나아가, '보편적인 것'도 무리의 실체가 아니다. 이데아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감각되는 실체들뿐만 아니라 이것들도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354쪽

어떤 것들은 그것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임으로써, 또 어떤 것들은 그것이나 다른 반대되는 것들을 얻거나 잃음으로써 '반대된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모순되는 것들, 결여, 반대성들, 그리고 관계 맺은 것들이 맞놓인 것들이고, 이 중 모순되는 것들이 으뜸가는 맞놓임이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은 중간 것을 허용하지만 모순되는 것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분명히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427쪽

일반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들이 언제나 변하고 결코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리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오히려,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으며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진리를 사냥해야 한다. 천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때는 이렇게 보이다가 다른 때는 그것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항상 같은 것이며 어떠한 변화도 공유하지 않는다.-465쪽

세 종류의 '이론에 관련된 학문'들이, 즉 자연학, 수학, 신학이 있다. 이론학의 무리가 가장 나은 것이며, 이 가운데서도 마지막에서 언급된 것이 가장 낫다. 왜냐 하면 신학은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귀한 것을 다루며, 또 각 학문은 자신에 고유한 인식 대상에 따라 더 낫다고 또는 더 못하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470쪽

우리의 연구는 실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실체의 원리 및 원인이다. 왜나하면 우주를 일종의 전체로 볼 때, 실체가 그 중 으뜸가는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를 잇따라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실체가 으뜸가는 것이며, 그 다음에 질이고, 그 다음에 양이다. -495쪽

실체는 세 가지다. 그 중에 감각되는 실체가 있다. 그리고 이 실체 중 어떤 것은 (즉 해, 달, 별 등의 천체들은) 영원하며, 어떤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실체는 온갖 동식물들처럼 사람들이 다들 실체로 인정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각되는 실체의 요소들을 이것들이 하나이든 여럿이든 우리는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한 종류의 실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이'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꼴(이데아)과 수학적인 대상들을 한 가지로 놓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가운데 수학적인 대상만을 놓는다. 앞의 두 가지 실체는 자연학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움직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종류의 실체는 이것과 앞의 두 실체에 공통된 원리가 없다면 다른 어떤 학문의 대상이다.-496쪽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아름다움이나 좋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중략) 아름다움의 최고 형태는 질서, 균형, 일정함인데, 이런 것들을 바로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가장 많이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많은 사물들의 원인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분명히 수학 계열의 학문들은 또한 어떤 점에서 그런 종류의 원인을, 즉 '아름다움'이란 뜻의 원인을 다룬다.-546쪽

이들은 이데아들을 '보편적인 것'들로 놓으며, 동시에 그것들을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로, 그리고 '개별적인 것'들로 만든다. 이럴 수 없음은 이미 다룬 바 있다. <실체들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특징을 한 가지 것에다 결합시키는 까닭은 실체들이 감각 대상들과 같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각 세계의 개별적인 것들은 흐르는 상태에 있어서, 그것들은 어느 것도 멈춰 있지 않지만, 보편적인 것은 그것들과 따로 있으며 그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정의들을 통해 부추겼다. 그러나 그 자신은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따로 떼어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옳았다. -585쪽

사물은 그것이 늘 있어왔다 하더라도 언젠가 생겨난 것이라면, 자신을 이루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잠재/가능 상태로 (어떤 것인) 것에서 나와 그것이 되는 바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ㄹ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생겨날 수도 생겨나 있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ㄹ 수 없는 것'은 발휘/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래에 계속)-598쪽

(위에서 계속) 이렇다면 수나 '밑감을 갖는 다른 어떤 것'은 그것이 아무리 늘 있어 왔다고 할지라도 있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여러 해 동안 있는 것'이 '하루밖에 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다면, 끝없이 긴 시간 동안 있어 온 것도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영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자리의 논의에서 다뤘던 바대로, '있지 않음을 허용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것이, 즉 '어떤 실체도 그것이 (신처럼 오로지) 발휘/실현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영원할 수 없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맞다면, 그리고 요소들은 실체의 밑감이라면, 어떤 영원한 실체도 '자신 안에 들어 있으면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598쪽

이 모든 점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이치에 맞는 점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여기서 마치 시모니데스의 '긴 말'을 보는 듯하다. 정말이지 긴 말은 노예들이 그렇듯 건전한 것을 전혀 말하지 못할 때 나온다.-609쪽

이런 (이치에 어긋난) 점들이 (이데아론에) 따르며, 또 아직 더 많은 점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수들의 생성과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체계적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수학적인 대상들은 감각 대상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고, 또 그것들은 원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6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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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8-2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다~!!
8월 2일에 시작해서 8월 24일까지.
음음 솔직히 어려웠다. 원문에서 빼는 것은 {}, 주석자가 삽입하는 것은 ()로 쓰는 것은 관례에 따른 것인 듯 한데, 같은 뜻의 단어들도 ()에 넣어서 혼란스러웠다. 원문에 대한 집착은 그런대로 납득이 갔지만, 고유어에 대한 집착은 공감하기 어렵다. 고유어를 쓴다고 글이 쉬워지는 건 절대로 아닌데 말이지.
책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는 건 뒷표지의 역자의 말인 듯 해서 마지막으로 여기에 적어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학문으로서 최초로 정립한 철학자였다. 그는 오늘날 철학의 분과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저술 <형이상학>에서 이론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정점에 이른 자신의 사상을 보여준다. <형이상학>에서 그가 묻는 근본 물음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 있음의 의미를 파헤치면서 그는 '있는 것'들의 으뜸 가는 원인(또는 원리)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탐구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도 실체가 양, 질, 관계 등의 다른 모든 범주들의 원인으로, 실체들 중에서도 으뜸 실체인 꼴(형상)이 다른 모든 실체들의 원인으로, 으뜸 실체 중에서도 영원불변의 신이, 천구들을 움직이는 이성(nous)들과 더불어 있는 것들 모두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드러난다. 신은 모든 존재와 변화의 시작점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으로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