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 씨의 <디 워>를 비난한 글이 일으킨 문제로  전국민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나는 이송희일 감독 개인 홈페이지의 단골이었다. 하루에도 많으면 서너 개씩 글이 올려지던 그의 게시판은 사실 일기장 같은 장소였다. 가족들 사진도 있고, 옆집 부부 싸움 얘기도 있고, 술 먹고 속 쓰리다는 투덜거림도 있고, 정치가 욕도 있는 그런 곳. 나는 그의 글을 좋아했다. <예스24>에 쓰는 고정 칼럼 <견문발검>보다도 정리되지 않은 자유게시판을 더 좋아했다. 그곳의 글들은 짧고 도발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때로 너무 어려운 것까지 포함해서 인간적이었다. 눈팅족 뺀 방문자는 수십 명 내외에 불과하던 그 사이트가 갑자기 "접속 폭주로 추가 접속 노드가 없습니다."란 말만 남기고 붕괴되어 버렸을 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이송희일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폭파된 개인 홈페이지에 이어 이번에는 지난해 가을에 개봉한 독립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공식블로그가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 영화 <후회하지 않아>의 프로듀서였던 김조광수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이송희일의 글을 읽었다. 표현은 거칠지만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런 공격을 받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심형래 감독이 한 충무로가 그를 왕따시킨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는 요지의 글을 쓰자 이번에는 김조광수 씨 블로그가 폭탄을 맞았다. 사건 후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던 이송 씨와 달리 그러지 말라고 몇 번 더 글을 쓴 김조 씨는 점점 더 거세어지는 욕메일과 괴전화에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공격은 두 사람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도 확대되었다. "왜 불쌍한 독립영화 감독을 마녀사냥하냐?"라는 글을 쓴 블로거 심샛별 씨에게는 1000개가 넘는 덧글이 돌아왔다.  가족들 사진을 찾아냈다, 아들을 납치해서 혼내주겠다는  끔찍한 악플도 있었다. 이송 씨 글이 나오기 전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던 영화기자 허지웅 씨의 블로그의 <디 워 광풍>이라는 글에 달린 덧글 수는 현재 2000개를 앞두고 있다.

 

 

반대쪽에서는 심형래 감독에 대한 열광이 인터넷 세상을 뒤덮었다. 이송희일과 김조광수의 성 정체성을 저열하게 까발리는 악플러들이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보고 왔는데 왜 남 잘 되는 걸 못 보냐는 '선량한 시민'들이 있었고, 오오, 이 폭발하는 민중의 힘을 보라~ 하고 그들을 찬양하는 <서프라이즈> 사이트의 인터넷 논객들이 있었다. 노빠-황빠-심빠의 연관성이 의심을 받는 가운데, 이 논객 중 하나인 김동렬 씨가 <디 워, 전쟁이 시작되었다. 충무로를 타격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충무로와는 상관 없는 독립영화 감독을 '충무로의 막내로서 선배들을 위해 전투의 선두에 섰다.'고 본 기본적 오류에서 출발한 이 글은 민중의 힘으로 무능한 권력자들을 축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저 제목, 어딘지 익숙하다.

 


 

 

 

 

 

 

1966년 5월 25일, 북경 대학의 젊은 강사 섭원재가 대학 구내에 붙인 대자보의 제목이 <사령부를 포격하라> 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의 실무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대중 혁명을 선동한 그녀의 뒤에는 은퇴한 최고권력자 모택동이 있었다. 대자보는 대성공이었다. 중국 전역에 "장이 섰고", 군중은 구태의연한 정치가들, 교육자들, 문화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했다. 피와 죽음,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10년 동란",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다. 

사태 초기부터 이 영화에 대한 광적 열광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사람인 허지웅 기자가 "평론가 혐오 시대"라고 명명한 이 <디 워> 사태에서도 우리는 폭력적 파시즘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1)반(反)지성주의, (2)집단적 폭력성, (3)(실체 없는) 민족주의, (4)적 만들기, (5)자본가와 지도층의 기묘한 동거, (6)과대 포장과 선동, (7)지도자의 절대선, (8)신념에 대한 확신"이라고 이를 정리한 erte라는 네티즌의 블로그 글은 역시 포털 게시판에 끌려나와 인민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송희일, 김조광수가 너무 맥없이 쓰러진 데 대해 허탈해 하던 군중들이 그 둘은 깃털이다 그 뒤에 있는 몸통을 찾아야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가운데, 거대 음모세력 MBC가 정체를 드러내었다. 화제의 <100분 토론> 방송.

 

 



 

 

<100분 토론>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진중권이다. "결말을 위해 주인공이 하는 일이 없다.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서 해결해 준다. 그럴 거면 왜 도망다니는지 알 수 없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 없으면 연애라도 해야 하는데 연애도 안 한다. 둘이서 키스하는데, 왜 하는지 모르니까 쟤들이 촬영하다 감독 몰래 사귀었나 싶다.", "마지막에 둘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이 슬퍼서 울어야 되는데, 관객은 안 슬프니까 용이 대신 울고 지나간다.", "아무리 일류 배우 갖다 둬도 이런 대본으로는  연기를 할 수가 없다. 연기 할 게 없으니까 연기가 이상 한 거다.",  "뭐라고 말을 못하게 한다. 비판하려면 직접 만들라고들 한다. 유치하게. 계란이 곯았는지 안 곯았는지 알기 위해서 직접 치킨이 돼서 알을 낳아봐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충무로를 옹호한다는데) 충무로하고 내 관계는 1주일에 한 번 거기서 지하철 갈아 타는 관계다.",  "미국에서도 <무릎팍도사> 할 거냐?", "영화와 축구를 착각하지 마라. '디워 만세 심형래 만세'나 '자랑스러웠다'가 상대편 패널들이  쓴 글의 제목인데, '만세'나 '자랑스러웠다'는 미학적 술어가 아니다." 등의 자극적인 발언 외에도 그는 팬들이 그토록 원하던 '영화에 대한 깊이 있고 냉철한 분석'을 딱 부러지게 들려줬다.

 

 

"(1) 애국주의 (2) 민족주의 (3) 시장주의 (4) 인생극장" 코드가 감독이 인터뷰에서 하는 이야기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가도 이 네 가지다. 이렇게 지적하면 아니라고들 하지만, 관객들의 글에 나타나 있는 얘기 역시 헐리우드 진출이 자랑스럽고 아리랑에 감동했고 미국에 뒤지지 않는 CG기술을 봤고, 심형래 감독의 열정이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열광하는 이 네 가지는 영화의 기본을 망쳐 놓고 있다.  즉, "(1)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애국주의를 위해 조선 남녀가 아무 이유 없이 LA에 환생했다. (2)민족주의를 위해 아무 상관 없는 LA에서 아리랑이 울려퍼진다. (3)화려한 CG를 과시하기 위해 여자 하나 잡는데 대군이 출동하고, 조선의 구식 군대와 환상적인 신무기가 맞붙고, 용은 이유 없이 자기 정체를 숨기고 변신한다. (4)마지막에 뜨는 "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웃기는 사람입니다."하는 자막은 세계 영화 사상 코미디다. 빼야 한다."는 이야기. 거기에 미학자 답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인용하며 극예술의 기초 중 기초인 '플롯' 개념을 설명한 후 "이 영화에는 플롯이 없다." "비평하기에 민망한 영화다"라고 단언한다.

 

 

 

 

 

 

 

 

 

 

 

방송 종료 후 포털의 검색어 1위는 당연히 "진중권"이 되었다. 방송 중 계속해서 발칙한 조롱을 쏟아 내던 그 스스로가 이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모습은 적어도 나에게는 힘없는 독립영화 감독이나 테러하지말고 붙으려면 나하고 붙자며 앞으로 나선 정의의 용사로 보인다.

"네티즌들이 이송희일 감독 조리돌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지가 돌았다. 몰려다니면서 행패 부리다가 허탈해진 거, 황우석 사건 때에 이미 한번 겪어보지 않았던가? 포유류라면 신체 속에 최소한 실수를 통한 학습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지. 타인에게 피해를 줘가며 왜 그런 못된 짓을 자꾸 반복하는지."

라고 말하는 그.

토론 후 폭주하는 비난이 기분나쁘지 않냐는 말에

"내가 기분 나쁠 게 뭐 있나. 자기들이 제풀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데. 제대로 된 논리를 가진 단 한 사람이 무섭지, 논리 없는 수십만의 감정 덩어리는 나한테 아무 인상도 못 준다. 감정 덩어리가 아무리 뜨겁게 달아올라도, 그런 거 갖고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다."

라고 대답하는 그.

그가 너무 멋있고 고마워서, 나는 도서관에서 두 번이나 빌려다 읽으면서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미학 오디세이>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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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흠 2007-08-2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학오디세이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러서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진중권 씨의 다분한 스타기질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논쟁을 불러일으켜 그 중심에 서고자 하는 심리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디워에 스토리가 없다느니 그런 말에는 확실히 수긍하고 있습니다...

mizuaki 2007-08-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흠 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스타기질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사건 이후 진중권 씨 글들을 찾아다니며 읽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 보니 멍청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걸 참지 않고 따박따박 따지고 드니까 싸움이 되는 것 같아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서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점순이 2007-09-1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학 책을 뒤지다가 님의 댓글을 보고 들렀습니다~ 마지막에 "..그래서 미학오딧세이를 주문했다."는 대목을 보고 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중권 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보이는군요~ 괜찮은 입문서 알고 계시면 추천 바랍니다~^^

mizuaki 2007-09-1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순이 님, 덧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얼마 전까지 진중권 씨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미학 오디세이>는 좋아했답니다. 공부 잘하는 애는 잘 하는 애대로 못하는 애는 못하는 애대로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수업 같은 책이지요. 즐겁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보스코노 2007-09-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갖던 이슈였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디워는 참 실망적이었는데.. CG는 대단했지만 워낙 연출이 별로라 그것마저 묻힌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심형래씨가 디워를 만든 덕분에 그저 이름만 알고 있던 진중권씨를 다시 알게 되어서 심감독에게 참 고마움을 느낍니다^^; 진중권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견고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어 인터뷰 영상을 볼때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죠;ㅋ 정말 능력자입니다.ㅋ 실제 아는 사람이라면 좀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지만요 ㅋ 대중의 포커스를 자신에게 향하게 할 줄 아는 능력도 맘에 들구요ㅎ 저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면서 mizuaki님처럼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이런 책은 당연히 사야한다는 사명감이 불쑥 일어나 전질 구입할 생각입니다^^ㅋ
이제 곧 추석인데 가족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mizuaki 2007-09-2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스코노 님, 덧글 감사합니다. ^^
인터넷 인민재판 시대의 도래를 보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블로거들이 사태를 냉정하게 보고 분석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적이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진중권의 재발견'에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에 저도 대공감입니다. 날카롭게 잘 벼려놓은 지성과 발랄한 유머에 균형 있는 윤리 감각을 더한 아주 보기 드문 인물이에요. (잘난 척과 싸가지 없음, 자기 멋대로와 배려의 부족 같은 것도 이 사람한테는 매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ㅋ) 문제의 그 영화는 미국에서 쫄딱 망한 모양입니다만, 앞으로도 또 다른 황우석 또 다른 심형래는 계속 나오겠죠. 그것들에 대항해 어떻게 싸워야할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십시오. ^^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기다렸던 해리 포터 7학년을 받아든 순간, 어, 하고 놀랐던 것은 이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글이 희랍 비극 <코에포로이 -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의 인용이었기 때문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번역한 글의 경우에는 라임을 맞춘답시고 이상한 짓을 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롤링의 인용문보다는 아래에 있는 천병희 선생의 한국어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아 이 집안에 뿌리 내린 저주여.
재앙이 내리치는 피묻은 채찍의 곡조도 없는 노래 소리여.
슬프도다, 참을 수 없는 불행이여.
슬프도다, 가실 줄 모르는 고통이여.
고통을 멎게 할 약은 집안에 있노라.
바깥의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만이 피의 불화를 내쫓을 수 있음이라.
지하의 신들께 이 노래를 바치나이다.
지하에 계신 축복받은 자들이여.
두 남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이 승리하도록 도움을 보내 주소서."   
                                           - 아이스퀼로스,<코에포로이> 466-478행

이  인용문을 해리 포터의 모험과 연관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덤블도어의 죽음 이후 마법 세계를 뒤덮은 끔찍한 불행을 해리 포터를 위시한 어린 마법사들이 해결한다는 암시겠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외에도 몇 가지 유사점이 더 보이는데, 첫 행의 "이 집안에 뿌리 내린 저주"는 이그나투스 페버렐로부터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데쓸리 할로우"와 통한다. 이런 식의 과거와의 연결은 이 작품 안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그린델발트-볼드모트로 이어지는 다크 위저드 계보가 그러하고, (알버스,애버포스,아리아나) - (제임스,세베루스,릴리) - (해리,론,허마이오니) - (제임스,A세베루스,릴리)로 변주되는 '죽음에 맞선 3형제'이미지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인용문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진짜 이유는<코에포로이>가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부정"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희랍 비극은 3부작으로 구성되지만, 현재 3편이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이 작품 <오레스테이아>3부작 밖에 없다. 1부 <아가멤논>은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 집에 돌아온 희랍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이고, 2부 <코에포로이>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누나 엘렉트라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정부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이며, 3부 <에우메니데스>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의미인데, 사실은 복수의 여신들을 가리킨다.) 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나 어머니의 살해자가 된 오레스테스의 고통스러운 방랑 이야기이다.

나는 <오레스테이아>3부작의 이러한 내용이 해리 포터의 어머니  릴리 에반스 포터의 부정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한다. 즉 릴리 포터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인 불륜은 아니었다. 스물 한 살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는 제임스와 해리에게 충실했으며, 이제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다크 위저드에 대한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한 평생 그녀에게 충실했던 그 남자의 팬인 나에게는, 이러한 상상이 큰 위로가 된다. 그래, 세베루스, 그건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 같은 게 아니었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이제는, 그 고통스러웠던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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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 2008-02-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인용문도 잘 보고 가요~

mizuaki 2008-02-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님, 이 외진 곳까지 잘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받은 덧글이라 무척 기뻐요. 고맙습니다. ^^
 

예전에 읽은 소설 중에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꽤 길게 다룬 글이 있었는데, 작가도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건 '열사의 장례식' 어쩌고 하는 문구 뿐. 그 소설을 읽고 기형도란 시인이 궁금해서 친구 방에서 시집을 빌린 게 대학교 3학년 때던가? 그 때는 무슨 시들이 이렇게 어려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오늘 찾아 읽은 <입 속의 검은 잎>은, 왠걸, 너무 좋다.

이 시에 나오는 '열사'의 이름이 이한열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다. 6월 항쟁 기념 사이트를 뒤적뒤적 읽고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로를 꽉꽉 메운 교통 체증과 최루탄의 매운 냄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대학 캠퍼스 안에 있어서 데모가 있는 날은 오전 수업만 했다. 절대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곧바로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뒤로 하고 교문을 나서며, 나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는" 대학생들을 소리 높혀 욕했다. 그 때는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엄마는 박종철의 고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며 "네가 쓸 데 없는 소릴 하고 다니면 엄마 아빠가 잡혀 가서 그렇게 고문을 당하게 된다"는 말로 어린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 위협의 효과는 꽤 오래 가서, 대학 시절에도 나는 정치 운동 비슷한 냄새만 나면 바짝 얼어서 도망 다녔다.

권력의 야만 앞에 피 흘리며 쓰러졌을 때, 박종철과 이한열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영원한 스무 살로 남아 있는 그들의 얼굴은 아무래도 아이 같기만 해서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파 온다. 미안하다. 그 때는 몰라서 미안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그 때도 겁쟁이였고 지금도 겁쟁이인 나 자신이 너희의 아름다운 젊은 얼굴 앞에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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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쯤 전부터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지난해였다. 테크놀로지의 혁명! 2000년대 최고의 발명품! 전기 모기채 되겠다.


5년 전 한강의 배후습지 영등포로 이사올 때 덥고 습한 여름은 각오했지만, 아파트 13층의 높이 정도는 가볍게 극복하고 올라오는 쬐끄만 모기떼의 무차별 공격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크기가 작아서 물린 자리가 크게 덧나지 않는 대신 잡기도 까다롭다. 소름 끼치는 애~앵 소리에 눈을 떠 잠이 덜 깬 머리로 서투르게 파리채를 휘두르다 좌절하여 다시 잠들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정지 상태의 모기를 발견해서 살충제로 반쯤 기절시켜 놓은 후 다시 필살의 파리채 휘두르기라는 복잡한 시스템으로는 도무지 공격의 효율성이 높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품! 이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다! 모기의 진로 방향에 살포시 가져다 대기만 하면 푸른 불꽃과 치지직 소리와 아련한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상황 종료 되겠다. 오늘 새벽에도 네 마리나 잡았다. 피로 배가 빵빵한 네 구의 시체를 나란히 늘어놓고 기술의 진보에 경의를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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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가라데 만화 "공수도 소공자 코히나타 미노루"가 읽고 싶어졌다. 대학 가라데 부를 다룬 평범한 학원 스포츠물인가 싶다가 어느 사이에 K1을 연상시키는 프로 격투기 세계로 옮겨가는 이 만화는 무수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이 깔끔하다는 것, 미형인 데다 쿨한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는 것, 진행 방식이 건전하면서도 산뜻하다는 것, 개그 센스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보다는 조연들이 멋지다는 것, 끈적끈적한 삼각 관계나 진부한 악당이 없다는 것 etc.

한 번 읽었던 내용임에도 푹 빠져서 저녁까지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테레비를 켰더니 <2007 K1 World Max> 중계를 하고 있다. 기분 좋은 우연. 그러지 않아도 만화 보면서 이게 궁금했었다고. 격투기 중계를 보는 것은 <PRIDE 남제 2006>에 이어 두 번째다. 전에는 그다지 재미있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만화를 본 후라 그런지 이번엔 아주 즐거웠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아빠가 권투 중계를 보고 있으면, 저런 잔인한 걸 잘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인간이란 원래 잔인하다는 것, 약한 놈을 두드려 팰 때 희열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세상엔 글러브를 끼고 룰에 따라 하는 격투 게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잔인한 일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돈과 권력이 자행하는 수많은 더러운 짓들에 비하면 링 위의 3분은 차라리 귀엽다. 그래서 요즘 나는 격투기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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