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다는 컴퓨터와 노느라 본업은 내팽겨쳐두었던 8월.  너무나 읽은 게 없어서 민망하지만, 일단 여기에 기록해 두고 앞으로 반성하도록 하자. 

 

공부와 관련된 책이라고는 이것 한 권밖에 안 읽은 것 같다.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학전공자의 필독서이지만, 그냥 재미로 읽기에도 훌륭한 책인듯 함. 희랍 서사시와 비극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아서 특별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 이 책도 공부랑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려나?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 역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국가와 언어, 그리고 교육이 만나는 지점이 나의 관심사이다. 어떻게 접근해야할지는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지만. 

 

 

 

 

 

 

라블레의 <팡타그뤼엘 제3서>와 <팡카그뤼엘 제4서>. 전에 읽은 <팡타그뤼엘>을 제1서, <가르강튀아>를 제2서라고 한다고 함. 이걸로 라블레는 다 읽었다. 옛날옛날 고등학교 때 밀란 쿤데라의 수필집에서 문학의 유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4서의 양 던지는 에피소드를 예로 들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쿤데라가 반체제 지식인으로 숙청당해 육체노동을 하던 시절, 주위의 노동자들에게 라블레를 읽어주고 다같이 웃곤 했다는 이야기. 동료 중 특별히 숫기 없는 젊은이에게 파뉴르크(파뉘르쥬의 체코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이야기. 고교시절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었던 그 멋진 책, 제목이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었던가? 그립다. 다시 보고 싶어. 

 

 

 

 

 

 

동생네서 읽은 소설. 김영하의 <검은 꽃>. 김영하 작품이 최근 폴란드에서 번역 출간되어서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글을 워낙 재미있게 쓰니까. <검은 꽃>은 20세기 초 멕시코의 애네켄 농장에 팔려갔던 조선 이민자들 이야기인데,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 때문에 불편했다. 그 사회에서 기득권과 결탁해 있는 게 천주교였으니까 하층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쪽에 있었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성장환경상 역시 불편해. 박수 무당이 죽기 전에 농장주와 그 부하들 앞에서 한국어로 예언을 하는 장면에 '유카탄 반도의 캇산드라'라는 표현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동생네 집에서 읽은 다른 한 권은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추리소설<샤라쿠 살인사건>. 우키요에 연구자들 사이의 암투를 그렸는데 재미있었다. 학문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사람으로서 이런 얘기에는 역시 마음이 끌린다. 담백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이 썩 좋아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우키요에 시리즈가 더 있다고)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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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구판절판


<이온> 621-637, 이온
그리고 왕권에 대한 찬양은 근거 없는 거예요. 왕권은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지요. 암살당할까봐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무슨 만족이 있고 무슨 행복이 있겠어요? 저는 왕이 되느니 차라리 평범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삶을 살고 싶어요. 왕이란 악당들을 친구로 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자기를 죽일까봐 착한 사람들을 미워하징. 아버지께서는 황금이 그런 것을 보상해주고 부는 즐거운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욕을 먹어가며 힘들게 축재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바라는 것은 적당한 재산에 근심 없는 삶이에요. 아버지, 이곳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들어보세요. 무엇보다도 저는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여가를 즐겼고 성가신 일도 별로 없었으며 저를 길에서 떠밀어내는 무뢰한도 없었어요. 사실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 양보하고 길을 비켜준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지요. -180쪽

<포이니케 여인들>, 198-201, 가정교사
여자들이란 원래 흉보기를 좋아하죠. 조금만 꼬투리를 잡혀도 그들은 침소봉대하지요. 서로 헐뜯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樂이니까요.-233쪽

<포이니케 여인들> 390-395, 이오카스테와 폴뤼네이케스
이오카스테:
왜 불행하지? 추방된 자들에게 괴로운 점이 뭐지?
폴뤼네이케스:
가장 나쁜 점은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오카스테:
그것은 노예의 운명이로구나. 제 생각을 말할 수 없다니 말이야.
폴뤼네이케스: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을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
이오카스테:
바보들과 함께 바보짓을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
폴뤼네이케스:
이익을 위해서는 성미에 맞지 않더라도 종노릇을 해야죠.-240-241쪽

<포이니케 여인들>, 531-540행, 이오카스테
내 아들아, 어째서 너는 신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야심'을 쫓는 게냐? 그러지 마라. 그 여신은 불의해. 그 여신은 번성하던 수많은 가정과 도시에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망쳐놓는단다. 너는 그 여신에 미쳐 있어. 내 아들아, 친구를 친구와 도시를 도시와 동맹군을 동맹군과 묶어주는 '평등'을 존중하는 편이 더 나을 게야. 평등한 것만이 인간들에게 합법성의 원천인 반면 '더 많은 것'에게는 '더 적은 것'이 언제나 적으로 다가가게 되어, 불화의 날이 시작되기 때문이지.-246쪽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446-453, 아가멤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유리한 점도 있어. 그런 사람은 마음대로 울 수 있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으니까.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행해도 탈출구가 없어. 우리는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대중을 섬기는 종들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부끄럽지만 반대로 더없이 큰 곤경에 빠진 딱한 처지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도 부끄러워.-396-397쪽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919-937, 아킬레우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나는 마음속에 분기가 치밀어오르오. 하지만 나는 불행할 때는 슬픔을 성공할 때는 기쁨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소이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일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다는 이성에 근거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오. 너무 지혜롭지 않은 것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건전한 판단력을 갖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지요.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한 케이론의 집에서 자란 덕분에 솔직한 생활 태도를 배우게 되었소. 그래서 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이 잘 인도하면 복종할 것이나 잘못 인도하면 복종하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서나 트로이아에서나 나는 내가 자유인임을 보여주며 있는 힘을 다해 창으로 분전할 것이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한 만큼 나는 젊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대에게 아낌없이 동정을 베풀 것이오. 그대의 따님은 내 신부라고 불렸던 만큼 결코 아버지에게 살해되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부군이 나를 이용하여 음모를 꾸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오.-415-416쪽

<박코스의 여신도들> 267-271, 테이레시아스
지혜로운 사람이 올바른 주장을 펼치려 한다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못되오. 그대도 슬기로운 사람처럼 혀는 잘 굴리지만 그대의 말에는 슬기가 들어 있지 않소. 그 능력이 대담성에 달려 있는 달변가는 결국 자신이 나쁜 시민임을 보여주기 마련이오. 그에게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오.-461-462쪽

<박코스의 여신도들> 1150-1152, 사자
절제와 신들에 대한 경외심이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재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내 생각에는 또 가장 지혜로운 것이오.-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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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9-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elene, Iphigeneia he en Taurois, Ion, Phoinissai, Orestes, Iphigeneia he en Aulidi, Bakchai, Kyklos, Rhesos의 9편 수록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구판절판


<메데이아> 230-237행, 메데이아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 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놓으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38쪽

<메데이아> 1078행, 메데이아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71쪽

<메데이아> 1097-1115행, 메데이아
자식을 한 번도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식을 낳아본 사람조다 더 행복하다는 거예요. 자식 없는 사람은 자식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지 슬픔이 될지 알 바 아니니,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아가지요. 하지만 집 안에 자식의 달콤한 무리가 있는 사람은 평생 동안 근심에 시달리는 것을 나는 보아요. 첫째, 어떻게 해야 자식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다음은 어떻게 해야 자식들에게 생계 수단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하고. 게다가 이렇게 애써도 자식들이 나쁜 사람이 될지 착한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해요.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는 가혹한 고통을 말하겠어요. 그들이 재산을 넉넉하게 모으고,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유능한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신께서 그러기를 원하시면 죽음이 자식들을 저승으로 채어 가버리지요. 하거늘 신들께서 인간들에게 다른 고통들에다 자식들로 인한 이 가장 쓰라린 고통을 덧붙이는 것이 인간들에게 대체 무슨 덕이 되겠어요?-72-73쪽

<메데이아> 1224-1230, 사자
필멸의 존재들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오늘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 거리낌 없이 말하겠소. 스스로 현인이요 사색가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重罰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이오.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오. 富가 흘러들어가는 사람도 남들보다 행운아라고는 할 수 있으나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77쪽

<헤카베> 306-308행. 오뒷세우스
대부분의 국가들이 위기에 처하는 것은 사실 고귀하고 용감한 사람이 더 못한 자들보다 더 많은 보답을 받지 못하는 데 있기 때문이오.-221쪽

<안드로마케> 693-702행. 펠레우스
아아, 얼마나 잘못된 관습이 헬라스를 지배하고 있는가! 군대가 적군을 이겨 전승기념비를 세우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수고한 자들의 업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장군이 명성을 차지하도록 하니 말이오. 장군은 수천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창을 휘두르고 한 사람 이상으로 한 일도 없건만 더 큰 명성을 차지하지요.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보다 더 잘난 체 거드름을 피우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오. 자신감과 함께 의지만 갖고 있다면 백성들이야말로 그들보다 천 배는 더 지혜로울 것이오.-292-293쪽

<탄원하는 여인들> 238-245행, 테세우스
시민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오. 그중 부자들은 아무 쓸모 없고, 재산을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지요. 그리고 생필품이 부족한 빈민들이 이는데, 그들은 위험한 존재들이오. 그들은 시기심이 너무 많아 가진 자들에게 가시 독친 독설을 퍼부어대고 사악한 선동가들의 혀에 쉬이 농락당하기 때문이오. 세 부류 가운데 도시를 지키고 어떤 것이든 도시가 정한 규범을 수호하는 것은 중산층뿐이오.-378쪽

<탄원하는 여인들> 399-441행, 전령과 테세우스
전령: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인용자주-tyranos,참주)요? 대체 누구에게 크레온의 전언을 전해야 하지요? 일곱 성문 앞에서 에테오클레스가 아우 폴뤼네이케스의 손에 죽은 뒤로 지금은 크레온이 테바이를 통치하고 있으니까요.
테세우스:
이방인이여, 자네는 첫머리부터 틀린 말을 하는군. 여기서 독재자를 찾다니 말일세. 도시는 어느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우니 말일세. 매년 번갈아가며 백성들이 관직이 취임한다네. 우리는 부자라고 해서 특권을 주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도 똑같은 권리를 누린다네.
전령:
그렇게 나오신다면 내가 오히려 더 유리해질 텐데요. 왜냐하면 나를 보낸 도시에서는 군중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 의해 통치권이 행사되며, 허튼 소리로 우롱하며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도시를 때로는 이리로 때로는 저리로 끌고 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런 자는 당장은 달콤하고 인기가 있겠지만 나중에는 해코지를 하게 되는데, 그 때는 다시 남들을 모함하여 제 허물을 감추고 訴追를 피해 가지요. (아래에 계속)-385-386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제대로 연설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백성들이 어떻게 도시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지식이란 단기간이 아니라 오랜 경험(시간-인용자주)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설사 가나나한 농부가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에 쫓기다 보면 정치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지요.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못난 자가 존경을 독차지하고 웅변으로 백성들을 좌지우지한다면 그것은 상류층(더 나은 사람들-인용자주)에게는 疫病과 같은 일이지요.
테세우스:
전령이 재치도 있고, 게다가 달변이로구먼. 자네가 먼저 이 문제를 제기했으니 내 답변도 들어보게나. 논쟁은 자네가 시작했네그려. 도시에 독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무엇보다도 그런 도시에서는 공공의 법이 없고, 한 사람이 법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위해 통치를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닐세. 하지만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아래에 계속)-385-386쪽

(위에서 계속)"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公論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민회에서 사용하는 공식 어구-인용자주)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385-386쪽

<탄원하는 여인들> 478-493행, 테바이의 전령
인간들에게 희망만큼 고약한 것은 없어요. 희망은 수많은 도시들을 미치게 하여 전쟁으로 내몰았으니까요.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백성들이 투표로 정할 경우, 아무도 자신이 죽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모두들 불운은 다른 사람들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투표할 때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떠올린다면, 헬라스가 전쟁의 광기로 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우리 모두 전쟁과 평화라는 두 가지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 평화가 전쟁보다 얼마나 더 유익한지 알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평화는 무사 여신들에게 더없이 소중하지만 복수의 악령에게는 적대적이지요. 평화는 또 착한 아이들을 좋아하고부를 사랑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사악하게도 전쟁을 선택해 약자를 핍박하고 인간이 인간을, 도시가 도시를 노예로 삼고 있어요.-388-389쪽

<탄원하는 여인들> 909-917, 아드라스토스
테세우스여, 그대는 이제 내 말을 들었으니, 이들이 성탑들 앞에서 과감히 죽으려 한 것에 놀라지 마시오. 좋은 교육은 명예심을 낳고 용기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까요. 용기도 배울 수 있는 것이오. 마치 어린아이가 그때까지 알지 못하던 것들을 말하고 듣는 법을 배우듯 말이오. 그리고 일단 배운 것은 늙을 때까지 간직되오. 그러니 그대들은 자식들을 잘 교육하시오.-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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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9-0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deia, Hippolytos, Alkestis, Hekabe, Andromache, Herakleidai, Hiketides, Herakles, Troiades, Elektra의 열 편 수록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구판절판


'인민의 적'이라든가 '전쟁상인의 자본주의자들'가 같은, 기술 수준이 낮은 발전 도상에 있는 많은 문화에서 정치 고발에 쓰이는 진부한 상투구는 고도로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야비한 인상을 주겠지만, 이것들은 구술문화의 특징적인 사고 과정에서 생겨난 정형구화된 본질적 요소의 잔존이다. 소련 문화에서 비록 그러한 것은 줄어들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구술문화가 잔존해 있다. 이것을 보여 주는 많은 증후의 하나는 소련에는 언제나 '10월 26일의 영광스런 혁명'과 같은 말씨를 고집스럽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적어도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한 경우를 보았었다.) 이 형용구적인 정형구는 의무적으로 고정화되어 있다. 이것은 '현명한 네스토르'라든가 '지모가 풍부한 오디세우스'와 같은 호머의 형용구적인 정형구가 역시 일반적으로 고정화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은 또 20세기 초엽 미국에서조차도 아직 구술문화의 영향을 지니고 있었던 일부 고립지대에서 '영광스런 7월 4일'이라는 말투가 역시 일반적으로 고정화되었었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63-64쪽

속담이나 수수께끼는 지식을 쌓기 위해서 사용하는 게 아니고 언어로 상대방과 지적인 대결을 하기 위해서이다. 즉 속담이나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그 이상으로 더욱 딱 들어맞거나 혹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다른 속담이나 수수께끼를 내 놓으라고 하는 도전인 것이다.(Abrahams 1968:1972).-71쪽

지식의 사용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행위에 대한 상찬에서도 구술문화는 논쟁적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스스로 노정한다.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열광적인 서술이 종종 구전설화의 특징이 된다. 예컨대, <일리아스>의 제8서와 제10서는 그 뚜렷한 폭력의 측면에서 적어도 오늘날 가장 센세이셔널한 TV나 영화 프로에 필적될 만하며,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의 세세한 묘사에 이르러서는 훨씬 그것들을 능가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은 말로 구술될 때가 시각적으로 제시될 때보다 혐오를 덜 느끼게 한다.-72쪽

두번째 예는 구술 이야기를 축어적인 방식으로 고정하기 위한 제약으로서 음악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는가를 보여 준다. Eric Rutledge 는 일본에서 행한 집중적인 현장조사를 토대로, 아직은 현존하고 있으나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일본의 전통적인 구술 이야기인 <헤이케 모노가타리(The Tale of the Heike)>에 관해서 보고하였다. (Rutledge 1981). 그 이야기는 음악에 맞춰서 노래로 불리워지나, 그 중에서는 적지만 악기의 반주가 없는 '흰 소리(white voice)'로 된 부분이나 악기 연주만으로 이루어진 간주곡도 있다. 그 애야기와 음악반주는 도제들에 의해서 기억된다. 도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구두로 가르쳐 주는 스승과 함께 곡을 읊기 시작한다. 스승들(이미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은 도제를 훈련시키는데, 수년에 걸쳐서 엄격한 수업을 통해서 도제들이 노래를 축어적으로 암송할 수 있도록 힘쓴다. 그리고 그것이 용케도 성공한다. 하기야 스승 자신이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암송의 방식을 바꿔 버리는 수도 있다. 이야기 중에는 잘못을 일으키기 쉬운 부분이 있다. (아래에 계속)-101쪽

(위에서 계속) 어느 점에서는 음악은 텍스트를 완벽하게 고정해 주는 것이지만, 다른 점에서는 음악은 필사본을 베낄 때 일어나는 잘못과 마찬가지의 잘못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사 결말'에 의한 잘못이다. 즉 구술하는 공연자는, 같은 구절이 문말에 몇 번이고 사용되고 있을 때, 앞의 구절에서 뒤의 구절로 뛰어 버리고 그 사이의 부분을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그런 일이 생긴다. 어떻든 간에 여기서도 역시 일종의 세련된 축어적인 재현을, 즉 완전하게 불변하는 재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주목할 만한 재현을 볼 수 있다.-101쪽

구술문화의 특유한 기억형성에 관해서는 특히 의례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한층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중략) 의례의 언어는 '일상어에는 없는 영속성을 갖는다'라는 점에서 일상어에 비해서 쓰기에 가깝다고, 체이프는 특히 Semeca의 언어를 논하면서 제시하였다. (Chafe 1982). 또 그는 '구술로 행하는 동일한 의례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데, 확실히 축어적으로 똑같이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행해지더라도 일정한 내용, 문체, 정형구적인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언급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ㅓ의 의심할 여지 없이 구술문화에 있어 구술적인 암송의 압도적인 다수가, 상기의 연속성이 지니는 융통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점은 의례적인 암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쓰기를 이미 알고 그것에 의지하고 있지만 아직 소박하게 구술성과도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 즉 아직 구술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문화에서도, 의례상의 발화가 전형적으로 축어적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래에 계속)-102-103쪽

(위에서 계속) "나를 기념하기 위해 이를 행하라"고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말했다.(루가복음 22:19) 기독교도가 성체예배를 예배식의 중심적 행위로 행하는 것은 이 예수의 지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이 지시에 충실하기 위해 예수의 말씀대로 되풀이하는 이 긴요한 말(즉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이다'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어느 대목과 비교하더라도 엄밀히 같지는 않다. 초기 기독교회는 이미 텍스트화된 의식에서조차 텍스트 이전의 구술적 형태로 기억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전심전력을 자해서 기억하도록 엄명하였던 바로 그 점에 있어서조차도 구술적 형태로 기억했던 것이다.-102-103쪽

일차적인 구술문화의 성격구조는,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보통으로 보이는 성격구조에 비하면, 어느 정도 한층 더 공유적이고 외면적이며 덜 내성적이다. 구술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연결시킨다. 읽고 쓰는 것은 마음(psyche)을 자신에게 되던지는 고독한 활동이다. 교사가 학급 전체에게 말을 걸 때에는 학급을 하나의 통합된 단체로서 느끼며, 학급 학생 전체도 자기네들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교과서를 꺼내서 그 일부를 읽도록 교사가 명하면, 학생 개개인은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학급의 통일은 사라지고 만다.-109쪽

고대 셈인에 의해서 발명되고 고대 희랍인에 의해 완성된 표음 알파벳(phonetic alphabet)은 소리를 시각적인 모습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모든 쓰기체계 중에서 월등히 뛰어난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알파벳이 모둔 주요한 쓰기체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 아름답게 도안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자만큼 정교하게 할 수는 없다. 알파벳은 민주주의적인 스크립트로 누구나가 간단히 배울 수 있다. 한자 쓰기는 그 밖의 많은 쓰기체계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적이다. 즉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의 여유로움을 필요로 한다. 알파벳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은 한국에서 제시되었다. 한국의 책이나 신문에는 알파벳[한글 자모:옮긴이]으로 철자화된 단어와 몇 백 개의 갖가지 한자가 혼합되어 쓰인다. 그러나 모든 공공적인 표기는 알파벳으로만 씌어지고, 알파벳은 국민학교 저학년에서 완전히 습득되므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한 표기를 읽을 수 있다. 다만 한국의 대부분의 문헌을 읽기 위해서는 알파벳 이외에 1800개의 '한자'가 최소한 필요하며 그것들을 전부 터득하는 데는 중학교 수료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142-143쪽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체의 대부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학문적인 수사학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현저한 예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여성 작가의 문체이다. 16세기 이래 단행본의 저자로서 많은 여성이 등장했으나 그러한 여성 가운데 학문적인 수사학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세 이래로 여자 교육은 종종 상당한 힘을 들여서 행해졌고, 그 결과로 유능한 가사 경영자를 낳았다. 가사라 하더라도 때로는 50명에서 80명의 식구를 뒷바라지하는 상당한 큰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자 교육은 라틴어로 수사학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학과를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적인 시설을 통해서 행해지지는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소수이지만 여성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그녀들이 입학한 곳은 주요 교육기관인 라틴어 학교가 아니라 새로 생긴 일상어 학교(vernacular schools)였다. 이러한 일상어 학교는 장사나 가사에 유용한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음에 반하여, 라틴어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학교는 성직자, 법률가, 의사, 외교관 그밖에 관리를 겨냥하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아래에 계속)-17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확실히 여성 작가들도 그들이 읽은 저작에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저작들은 라틴어에 입각한, 그리고 학문적이고도 수사적인 전통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 자신은 보통 다른 목소리로, 즉 연설적인 목소리에서 훨씬 떨어진 목소리로 스스로를 표현했으며, 이것이 소설의 발생에 크게 연결되었던 것이다.-171쪽

인쇄는 말의사적인 소유라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다. 1차적인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시에 대한 소유권의 감각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은 드물며, 보통은 누구나가 꺼내서 말하는 전승이나 정형구나 이야기의 주제가 공유되기 때문에, 그러한 감각은 약해지고 만다. 그러나 쓰기와 더불어 표절에 대한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략) 인쇄가 시작되자, 그 초기부터 이미 최초의 출판자 이외의 사람이 그 인쇄본을 다시 찍는 것을 금하는 '특허'가 종종 설립되게 되었다.(중략)
활동적인 인간끼리의 교제 속에서 말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소리의 세계로부터, 인쇄는 말을 떼어내어, 그것을 시각적인 평면으로 한정적으로 귀속시켰고, 지식의 관리를 위해서 시각적인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쇄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 의식과 무의식적인 자원을 갈수록 점점 사물과 같은 것, 비인격적인 것,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촉발했다. 인쇄는,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갈수록 그 소유물이 타성적인 심적 공간 속에 보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촉구했다.-198-199쪽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특징들
1) 종속적이라기보다는 첨가적이다
2)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이다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토적이다
5)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6) 논쟁적인 어조가 강하다
7) 객관적 거리 유지보다는 감정이입적 혹은 참여적이다
8) 항상성이 있다
9)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의존적이다-6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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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8-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메로스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인기 있는 책에는 인기의 이유가 있는 거야.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미우라 노부타카.가스야 게이스케 엮음, 이연숙.고영진.조태린 옮김 / 돌베개 / 2005년 6월
절판


이연숙 <'국어'와 언어적 공공성> 중에서
'국어=일본 국민의 모어' 라는 등식은 오늘날에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일본 사회에서 통용된다. 마치 '일본인'은 모두 '국어=일본어'가 모어임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이런 사고의 틀은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하지 않는'의 오역? -인용자) 정주 외국인이나 학교 교육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당하는 외국인의 존재를 은폐한다.'국어'라는 개념 자체가 일본 사회에서 多言語主義를 불가능하게 하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후의 인용은 모두 이연숙의 같은 논문.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國語를 모두'고쿠고'라고 표기했으나, 한국에서 사용되는 '국어' 개념과 나란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인용자가 '국어'로 고쳤음.)-464쪽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는 <'고향'이라는 이야기>에서 근대 일본의 국민 형성 과정에서 '고향'의 이미지가 해온 역할을 분석한다. '고향'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제가 아니고, 어느 특정 시점과 특정 이야기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는 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지만, 중요한 것은 "'고향'의 역할에 선행하여 nation의 역할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 안에는 몇 개의 '고향'이 겹쳐져 '국민'이 만들어지지만,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국민'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국민'이 정 ㅣ 제도 이전의 '자연'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은 허구가 성립된다.
나리타에 따르면, '고향'을 말함으로써 '국민'의 이미지를 만드는 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애향심'과 '애국심'이 '審級性으로 논의된다'. 이렇게 해서 '가정-고향-국가'라는 계열이 각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같은 논리로 묶인다. (아래에 계속)-467쪽

(위에서 계속) 둘째, '고향'과 국가라는 차원이 다른 대상을 연결하기 위해 비유법이 사용된다. 특히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비유인 '시네구도키'(제유)가 큰 역할을 한다. 셋째, "국가와 '고향'을 공공성과 연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자발적인 행위조차도 "공공성을 개입시켜 '고향', 국가로 거둬들이는" 회로가 만들어진다.
근대 일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국어'가 '인위'가 아닌 '자연'의 영역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것은 '국어'가 결코 법적 규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과 관련이 깊다. 마치 대일본제국에서는 '일본어=국어'가 유일한 합법적인 언어인 것처럼, 일본은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서도 언어법 다운 언어법을 한 번도 제정한 적이 없다.-467쪽

중요한 것은 일본 사회에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어가 아닌 언어를 모어로 하는 어린이들의 '언어권'을 지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의 모어 교육은 일본어 교육을 보완하는 역할로 보아서도 안되고, 장래의 귀국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는 일본 사회 안에서 비일본어가 가능한 한 넓은 범위에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장기 체제자가 늘어남에 따라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하지 않는? -인용자) 외국인 논동자는 해마다 늘어갈 것이다. 그때 일본은 일본어가 모어인(모어가 아닌? - 인용자) 외국인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더불어 일본 사회 안에서 비일본어를 사용하고도 살아갈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이는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정주 외국인과 선주민의 권리로서 인정해야 한다.-475-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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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8-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의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어 놓고 이같은 주장이 한국의 대학에 재직하는 외국인 교수에 의해 주장되었을 때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상상해 본다. 한국에서도 국어의 신성성에 도전하는 노력들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