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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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신입생 때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읽었다. 생물학 관련 교양 과목들의 필독 도서여서 내 또래의 이과 대학생들 대부분이 읽었을 것 같다. "생명의 이해"라는 꽤 재미있었던 3학점 짜리 수업에서, 이 책과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를 가지고 레포트를 써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24년 만에 다시 읽은 <이기적 유전자>는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스무 살 때는 그냥 열심히 공부하면서 읽었던 책인데, 마흔넷에 다시 보니 대박 재미있다!!!. 그 동안 나의 인생,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설명들을 나의 삶에 대입시켜서 생각해 보는 것이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하고 관찰해 온 많은 인간 행동과 사회 현상들이 도킨즈의 이론을 통해 심플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되고 해석된다. 이 책에서의 도킨즈는 머리가 좋고 유머러스하며, 냉철하지만 망설임 없이 싸움에 임한다. 책 전체에 매력이 철철 넘친다.이제 중년이 된 20여 년 전의 대학생 독자가 혹시 이 책을 다시 읽을까 생각하며 나의 리뷰를 보고 계신다면, 꼭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지금 바닷속을 유유히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replicators)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먼 옛날에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지어 살면서, 복잡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 P75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 카드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고 단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따름이다. 물론 유전자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 P100

사자는 영양을 잡아먹고 싶어 하나 영양은 전혀 생각이 다르다. 보통 이것을 자원에 대한 경쟁이라고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때의 자원은 고기다. 사자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의 먹이로서 그 고기를 ‘원한다’. 영양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를 위해 일하는 근육이나 기관으로서 그 고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고기의 두 가지 용도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 P179

대개의 경우 (영역 동물의: 인용자 주) 암컷은 영역이 없는 수컷과는 짝짓기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짝지은 수컷이 다른 수컷에게 패해 그 영역의 주인이 바뀌면 암컷이 재빠르게 그 승자에게 들러붙는 일도 종종 있다. 성실하게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도 암컷이 수컷 그 자체와 결속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컷이 소유하는 영역과 결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30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그 시스템을 착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기적 개체에게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 이상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다수의 아이를 낳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 P237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가 어른이 될 평균 확률이 동갑내기 손자가 어른이 될 확률의 1/2보다 낮아지는 연령에 도달할 때, 자기 아이보다 오히려 손자 쪽으로 투자하게 하는 유전자가 유리하게 되어 번창할 것이다. 이 유전자는 손자 네 명당 한 명의 비율로 전해지는 반면, 그것과 경쟁 관계에 있는 유전자는 자식 두 명당 한 명에게 옮겨지지만, 손자의 기대 수명이 이 관계를 역전시키기 때문에 ‘손자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널리 퍼지게 된다. 자기 아이를 계속 낳는 여성은 손자에게 충분히 투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기에 이른 여성이 번식 능력을 상실하도록 작용하는 유전자가 점점 증가했을 것이다.
- P255

(물고기의-인용자)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난자를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난자는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 한 덩어리가 되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있다. 반면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준비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릴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난자를 방출할 가치가 없으므로 산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난자를 방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를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사라짐으로써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 수컷을 트리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의 자식 돌보기가 왜 물속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깔끔하게 설명한다.
- P304

현재까지 핸디캡 원리를 타당한 모델로 만들려는 수리유전학자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는 핸디캡 원리가 타당성 없기 때문이거나, 도전한 수리유전학자들이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메이너드 스미스도 포함된다. 내 생각으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 P311

바이러스는 도망친 ‘반역’ 유전자에서 진화한 것으로, 이제는 정자와 난자라고 하는 일반적 운송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생물의 몸에서 몸으로 직접 공중을 여행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 자신을 바이러스의 집합체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일부는 상리 공생적 협력 관계를 맺고 정자와 난자에 실려 몸에서 몸으로 이동한다. 이들이 관례적인 ‘유전자’다.
- P346

인간의 비대한 대뇌와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성향이 더 교활하게 사기를 치거나 남의 사기를 좀 더 잘 간파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돈은 지연된 호혜적 이타주의의 공식적인 징표다.
- P356

밈 풀(meme pool) 속에서의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가짜 약과 같이 상상을 통해 그 효력을 갖는다. 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제한다.
- P365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거나 같은 신을 믿고 있거나 같은 신을 믿더라도 다른 의식을 행한다면 맹신은 그 사실만으로도 그가 죽어야 한다고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화형을 시키거나,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거나, 베이루트의 노상에서 사살한다거나, 벨파스트의 술집에서 폭탄을 날린다거나, 그 무엇이든 정당화시킬 수 있다. 맹신의 밈은 특유의 잔인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번식해 간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 P373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잇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 가지다.
- P375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 P378

크리스마스에 영국과 독일 부대가 중간 지대에서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고 같이 술을 마신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live and let live‘라는 불가침 협정이 모든 전선에서 1914년부터 적어도 2년간 착실히 지켜졌다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에게는 이 사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 P416

TFT(tit for tat)류의 전략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자가 배신에 의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보복의 위협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보복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것은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양 진영에서의 일급 사격수들은 적군 병사들이 아니라 적군 병사들 가까이에 있는 무생물의 표적을 향해 놀랄 만한 사격 솜씨를 과시한다. 이 기교는 서부 활극 영화에도 나온다. (촛불을 쏘아 끄듯이). 왜 최초의 두 원자 폭탄이 (그 개발을 담당했던 일류 물리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촛불 사격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고 두 도시를 파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 P418

여태까지 병목형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분된 단위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하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에는 각각 ‘제도팜으로의 회귀’, ‘주기의 규칙성’, ‘세포의 획일성’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 P478

옌Yan Wong은 옥수퍼드대학 뉴 칼리지 소속 내 학부생 제자였는데, 그가 나한테 배운 것보다 내가 그한테 배운 것이 훨씬 많다. 옌은 대학원 시절에는 애런 그라펜Alan Grafen의 제자였는데, 앨런도 학부생 때는 내 제자였고 학부를 졸업하고도 내 제자가 되었으며 지금은 내 지적 스승이 되었다. 그리 옌은 내 학생이기도 하고 내 손주 학생 -앞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는 근연도에 대한 멋진 밈적 비유- 이기도 하다. 물론 문화가 유전되는 방향은 이런 간단한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말이다.
- P495

개인적으로 나는 오히려 컴퓨터 프로그램이 (체스의-인용자) 세계 선수권을 석권할 것을 기대한다. 인간성humanity은 겸손humility의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 P514

철학 교육을 지나치게 받은 일부의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 학문적 도구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모양이다. ‘고도의 문학적, 학문적 취미를 가졌으나 자신의 분석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교육을 받아 온 많은 사람들’이 ‘허황된 철학 이야기’에 매력을 갖는다는 메더워의 말이 생각나다.
- P515

형제가 공유하고 있는 1/2은 모든 개체가 공유하는 90퍼센트( 그 수치가 어떻든 간에)를 빼고 난 나머지 유전자의 1/2을 말한다는 것이다.
- P531

로즈, 카민, 르원틴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에서 ‘환원주의’라는 두려움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최고의 환원주의자는 ‘결정론자’일 것이며, 더 적합하게는 ‘유전자 결정론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믿기 어렵겠지만),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견지와, 그 영향력이 다른 요인에 의해 무효가 되거나 전혀 반대 양상이 나타나거나 하는 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견지를 동시에 갖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 모든 행동 양상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반드시 행사한다. (아래에 계속) - P596

(위에서 계속)
로즈 등도 다른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적 욕구가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했다고 믿을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가 다른 무엇에라도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적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별문제 없이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원적 아닌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대한 반역’을 내가 옹호하는 것도 이원적이 아니다.
- P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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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50주년 기념판)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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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출간된 책이고, 내가 읽은 번역판은 1999년에 나온 것이라, 옛 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체는 예스러워도 내용은 2020년의 현재에도 전혀 문제없이 잘 들어맞는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극성스러운 이 원숭이 집단이 나무에서 내려와 무리지어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일 년 내내 지속되는 발정기로 결속력을 강화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다른 동물들을 길들이며 폭발적인 속도로 개체수를 늘려온 과정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이 원숭이들이 이야기를 꾸며내고 과학과 문명을 건설해가는 속편 격의 책이 하라리의 <사피엔스>라고 생각한다.

인구가 오늘날처럼 무서운 속도로 계속 늘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공격행위가 극적으로 늘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실험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인구가 지나치게 과밀한 상태는 사회적 긴장과 정신적 압박을 추래함으로써, 우리를 굶어죽게 하기 전에 우리의 공동체 조직부터 먼저 무너뜨릴 것이다. 과밀상태는 지적 통제력이 강화되는 것을 직접 방해하고,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준다.
- P191

요컨대,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피임이나 낙태를 널리 보급하는 방법이다. 낙태는 너무 과격한 수단이어서 감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형성하면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이룬 셈이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우리가 억제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똑같은 유형을 가진 공격행위이다. 따라서 피임이 더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피임에 반대하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파벌은 자신들이 전쟁을 조장하는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 P192

종교는 결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학적인 의미에서, 종교 활동은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지배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오랫동안 복종의 몸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중략) 이런 존재에 대한 복종적인 반응으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애원하는 몸짓으로 두 손을 깍지끼거나, 무릎을 꿇거나, 땅에 입을 맞추거나, 완전히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경우도 있고, 울부짖거나 노래하는 발성행위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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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속삭임 - 합본개정판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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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는 책을 참 재미있게 쓴다.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쓰지?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달인이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읽었다.
즐거움을 주려는 책이고 교훈이 목적은 아니지만, 가끔 오래 기억나는 얘기들도 있는데,
주인공의 선배가 했던 인간관계의 스프링 네트 얘기는 잊기 전에 적어두고 싶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네트워크를 만들며 산다고 생각해? (중략) 정보 따위는 어차피 9할이 쓰레기고 나머지도 독이 든 거야.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말이야, 정보망 같은 게 아니라 트램펄린 네트야.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무너질 테니까. 그럴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충격을 분담시켜서 네트 전체가 흡수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알겠어?"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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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조커 3 - 완결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5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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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반 전에 처음 읽고,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이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어서 깜짝 놀랐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라딘 들어와서 별점 보고 또 놀람. 한국의 미스테리 독자층의 취향이랑은 잘 안 맞나?;; 정식으로 리뷰 쓸까 귀찮은데 그만둘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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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홍신사상신서 30
E. H. 카 지음 / 홍신문화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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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책인데 이제서야 읽었다. 술술 잘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다. 외교관과 저널리스트로 일선에서 활약했던 저자의 경력이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말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반으로 가면서 1970년대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낡은 유럽  대신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다른 지역들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인 시각이 한국 독자들을 으쓱하게 해 줬겠지. 그러나, 이 책이 많이 읽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인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은 당시의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학교에서 내가 배웠고 언론과 대중이 퍼뜨리는 역사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칼 포퍼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 나타나서 재미있었다. 포퍼의 조심스러운 태도보다 카의 낙관론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포퍼를 처음 읽은 고등학교 때부터도 그랬고, 나이를 먹고 거짓말쟁이 선동가들에게 질린 후인 지금은 더욱 더 그렇다. 

이 자리에서 내가 목적하는 바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 즉 첫째로, 역사가가 연구하는 입장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그 역사가의 연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는 것, 둘째로, 이러한 입장은 그 자체가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 P52

누구든 역사를 쓰거나 읽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 아닌 과거에 대해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말은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연구과정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P63

역사가가 참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 P84

역사가가 역사에 나타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략) 개인적 도덕이 무의미하다든가, 도덕의 역사가 역사상의 합법적인 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의 책에 나타나는 여러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샛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역사가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 P98

현대사에 있어서의 난점은, 사람들이 아직도 모든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던 시기를 기억하고, 그런 선택이 기정사실에 의해서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하는 역사가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깨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감정적이고 비역사적인 반응이다.
- P129

역사적 사건의 절정이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가는 집단이나 국민 사이에서는 역사에 있어서의 기회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이 우세하게 마련이다. 시험성적 따위는 제비뽑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열등생들 사이에 늘 인기가 있게 마련이다.
- P133

인간은 선배들의 경험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자연에 있어서의 진화와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 역사의 전제이다.
- P157

오늘날에는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액튼의 자신감에 동조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에 비해서 보다 영속적이고, 또 완전성과 객관성이 더 많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서 접근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 P165

"영불해협에 폭풍우가 일면, 대륙은 고립된다."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섬나라 근성을 드러낸 김빠진 낡은 농담이 오늘날 기분 나쁠 만큼 절박한 여운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바깥 세계에서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영어 사용권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다른 나라나 대륙이 그 황당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 문명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느니 없느니 하고 평이한 일상 영어로 떠들어 대는 동안, 우리는 마치 이해할 능력도 성의도 없어서 세계의 현실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 P204

우리의 대정치가들과 대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때, 급진적이고 원대한 사상을 경계하고, 무엇이넉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멀리해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신중하라는 경고 이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4백 년 동안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세계가 급속히, 또한 근본적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는 이 시기에, 이것은 너무 심한 몰이해로 여겨진다. (중략) 나는 격동하는 세계, 전통 때문에 갈등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오래 된 말을 빌려서 답할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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