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홍신사상신서 30
E. H. 카 지음 / 홍신문화사 / 1991년 7월
평점 :
절판


  유명한 책인데 이제서야 읽었다. 술술 잘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다. 외교관과 저널리스트로 일선에서 활약했던 저자의 경력이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말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중반으로 가면서 1970년대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낡은 유럽  대신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다른 지역들에 대한 저자의 긍정적인 시각이 한국 독자들을 으쓱하게 해 줬겠지. 그러나, 이 책이 많이 읽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인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은 당시의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학교에서 내가 배웠고 언론과 대중이 퍼뜨리는 역사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칼 포퍼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 나타나서 재미있었다. 포퍼의 조심스러운 태도보다 카의 낙관론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포퍼를 처음 읽은 고등학교 때부터도 그랬고, 나이를 먹고 거짓말쟁이 선동가들에게 질린 후인 지금은 더욱 더 그렇다. 

이 자리에서 내가 목적하는 바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 즉 첫째로, 역사가가 연구하는 입장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그 역사가의 연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는 것, 둘째로, 이러한 입장은 그 자체가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 P52

누구든 역사를 쓰거나 읽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 아닌 과거에 대해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말은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연구과정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P63

역사가가 참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 P84

역사가가 역사에 나타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략) 개인적 도덕이 무의미하다든가, 도덕의 역사가 역사상의 합법적인 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의 책에 나타나는 여러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샛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역사가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 P98

현대사에 있어서의 난점은, 사람들이 아직도 모든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던 시기를 기억하고, 그런 선택이 기정사실에 의해서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하는 역사가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깨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감정적이고 비역사적인 반응이다.
- P129

역사적 사건의 절정이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가는 집단이나 국민 사이에서는 역사에 있어서의 기회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이 우세하게 마련이다. 시험성적 따위는 제비뽑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열등생들 사이에 늘 인기가 있게 마련이다.
- P133

인간은 선배들의 경험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반드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자연에 있어서의 진화와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 역사의 전제이다.
- P157

오늘날에는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액튼의 자신감에 동조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에 비해서 보다 영속적이고, 또 완전성과 객관성이 더 많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서 접근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 P165

"영불해협에 폭풍우가 일면, 대륙은 고립된다."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섬나라 근성을 드러낸 김빠진 낡은 농담이 오늘날 기분 나쁠 만큼 절박한 여운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바깥 세계에서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영어 사용권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다른 나라나 대륙이 그 황당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 문명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느니 없느니 하고 평이한 일상 영어로 떠들어 대는 동안, 우리는 마치 이해할 능력도 성의도 없어서 세계의 현실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 P204

우리의 대정치가들과 대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때, 급진적이고 원대한 사상을 경계하고, 무엇이넉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멀리해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신중하라는 경고 이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4백 년 동안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세계가 급속히, 또한 근본적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는 이 시기에, 이것은 너무 심한 몰이해로 여겨진다. (중략) 나는 격동하는 세계, 전통 때문에 갈등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오래 된 말을 빌려서 답할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움직인다."라고.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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