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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그 자리에 -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9년 4월
평점 :
올 여름엔 ‘영국 신사’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몇 차례 했다. 조지 오웰의 책을 전부 읽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윌리엄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을 읽었고,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회를 보고 왔고, 이번에는 올리버 색스다. 번역서가 굉장히 많이 나와 있는 유명한 사람 같은데,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서 기쁘다.
1부는 어린 시절 이야기, 2부는 신경과 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더한 뇌 이야기, 3부는 죽음으로 다가가는 노년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엄청나게 기발한 내용은 아니지만 시종일관 지적이고 교양이 넘쳐서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지나간 시대의 미덕을 잘 간직하고 있는 80대의 지적인 노인과 여유롭게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정말 좋았다.
처자식 이야기가 없어서 게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유럽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없애는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 점령에 따른 법 체계의 정비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을 비롯해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지 않은 나라들은 20세기에도 동성애를 가혹하게 처벌했다는데, 그런 분위기가 호크니와 색스의 미국 이주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인 미국을 동경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도 그런 맥락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올해의 독서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기에, 영국의 신사 교육은 매우 훌륭하다. 그 전통 있는 지적 토양에서 자라난 사립학교의 도련님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의 연구로 인류에 공헌해 왔다니, 건강하면서도 낭만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다.
내가 사우스켄싱턴에서 맨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언제나 과학박물관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가 제일 처음 방문했던 박물관으로, 내게는 고향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어린 시절, 어머니는 간혹 나와 형들을 그곳에 데려가곤 했다. (중략)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구식 탄광램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너희 외할아버지가 저걸 발명하셨단다." 고개를 숙여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 란다우 램프Landau lamp는 1869년 마르쿠스 란다우에 의해 발명되어, 험프리 데이비 램프를 대체했다." 그 후로 나는 그 안내판을 읽을 때마다 이상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그 박물관과 (1837년에 태어나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난) 외할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유대관계를 느꼈다. - P20
자연법칙의 위엄성과 불변성,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은 사우스켄싱턴 과학박물관의 주기율표 앞에 선 열 살짜리 소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 느낌은 평생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으며, 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 P22
환각은 그 내용이 계시적이든 평범하든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며, 인간의 의식과 경험의 통상적 범위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 생활에서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개인에게 커다란 의미를 제공할 수 있음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환각이 여하한 형이상학적 존재나 장소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환각을 창조하는 뇌의 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 P120
만약 우리가 운 좋게 건강한 노년에 도달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열정과 생산성을 유지해주는 것은 ‘삶의 경이로움’일 것이다. - P215
형 마이클은 열다섯 살 때 급성 정신병에 걸려, 도처에서 ‘메시지’를 보며 자기 생각이 읽히거나 방송되고 있다고 느꼈다. 또한 형은 발작적으로 킥킥거리며, 자신이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1940년대에는 환각제가 드물었으므로, 내 부모님(두 분 다 의사였다)은 마이클이 정신병을 초래하는 질병, 이를테면 갑상샘 질환이나 뇌종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마이클은 조현병에 걸린 것으로 밝혀졌다. - P234
독서란 매우 복잡한 과제로, 수많은 뇌 영역을 호출한다. 그러나 독서는 언어와 다르다. 즉, 언어는 인간의 뇌에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지만, 독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독서는 인간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는 비교적 최근(아마도 5000년 전)에 진화했으며, 뇌의 시각피질 중 미세한 부분에 의존한다. 우리가 오늘날 시각단어형태영역visual word form area(VWFA)이라고 부른 이 부분은, 좌뇌 뒤쪽 근처에 있는 피질영역의 일부다. (중략) 사람들은 독서와 관련하여 제각기 독특한 신경회로neural pathway를 형성하며, 개인의 독서 행위는 기억과 경험만이 아니라 감각양식sensory modality과도 제각기 독특하게 결합한다. - P315
그러나 이제 (기적을 용납하지 않는) 인생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여 (구역질이 너무 심해, 액체나 젤리형 고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음식물을 삼키기 어렵다), 나는 게필테 피시gefilte fish의 진가를 재발견하고 있다. 비록 한 번에 100그램 이상을 섭취할 수 없지만, 깨어 있는 동안 한 시간에 한 번씩 게필테 피시 1회분을 섭취하면 꼭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받을 수 있다. (중략) 나는 네 살 적에 먹어본 게필테 피시의 맛을 기억하고 있지만, 내 입맛은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통 유태인 가정에서는 유아의 이유식으로 종종 영양분이 풍부한 게필테 피시의 젤리를 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필테 피시는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82년 전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주었듯이, 조만간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갈 테니 말이다. - P343
나는 좋은 글쓰기, 미술, 음악을 높이 평가하지만, 품위, 상식, 선견지명, 불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같은 인간의 미덕을 바탕으로 수렁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라고 생각한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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