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속에 담긴 일련의 상징들은 삶의 에피소드, 무대 장치, 오락 따위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남은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 P25
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게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 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空의 매혹 L‘Attrait du Vide> - P34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지워 준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40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과 이기주의자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행동인은 고양이를 좋아할 시간이 없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51
그토록 대단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아 동네에 원수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한 이 짐승을 그냥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략) 그 집 남자는 고양이라면 원수같이 여긴다고 했다. 그는 개들을 흥분시켜 가지고 고양이를 못살게 만들면서 잔인한 쾌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안될 일이었다. 물루를 남에게 맡기고 간다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동네 안에 그를 미워하는 적이 있다면 결국 그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를 희생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저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고작인 형편이었다. 수의사인 쎄르벨 씨가 한 마리에 12프랑씩을 받고 개나 고양이를 죽여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출발 전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마음을 정했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58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다. 터무니 없는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러시아 사람들이 笞刑과 시베리아 수용소에 의하여 얻어낸 안이한 효과를 구하지 않고 비밀과 가난 속에 은신할 때 우리는 모멸에 의하여 靈感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어떤 여행자가 쓴 케르겔렌 群島의 묘사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이 묘사는 내가 다가가고 있는 명상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케르겔렌 군도는 선박이 다니는 일체의 항로 밖에 위치하고 있어서...... 약 삼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잇고 그 해안에는 흔히 안개가 끼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곳에 접근하는 선박들은 극도로 경계한다....... 그 고장의 내부는 완전히 황폐하고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케르겔렌 群島 Les Iles Kerguelen> - P75
나는 획득했다고 그날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1924년 성탄절이었다.) 나는 획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잃고, 또 헛되이 다시 만회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시간에, 내가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획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단숨에 획득했다. (중략)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海草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티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행운의 섬들 Les Iles Fortunees> - P85
"당신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남들과 교제하고 싶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해요. 다만 당신은 신경이 예민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웅크리기만 하는 거예요. 나도 당신 같았어요. 그 때문에 나는 죽게 된 거예요. 나는 나만을 위해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남들을 위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復活의 섬 L‘ile de Paques> - P93
나는 파크 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열었다. 그 섬은 해골과 뼈들이 널려 있는 거대한 棺과 다를 바 없다. 그 섬이 기막힌 것은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백 개나 되는 거대한 彫像들 때문이다. 그 어느 사멸한 종족이 무엇을 위하여 그것들을 만들어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청난 우상들이 섬 가장자리에 가물가물한 높이로 세워져서 여행자들을 그토록이나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정은 돌연 정신나간 듯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눈에 보여요, 그것들이 눈에 보여요." 하고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어떤 우물의 번들거리는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그 우물 위로는 오직 그 야만의 우상들만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復活의 섬 L‘ile de Paques> - P100
어떤 문명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정신의 소유자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그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아 주는 일뿐이다. <상상의 印度 L‘Inde Imaginaire> - P107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 밖에! 그럼 무엇을?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가냘프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호해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씨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 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보로메의 섬들 Les Iles Borromees>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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