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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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맞춤법이나 용법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을 이용한다.

용례가 풍부해서 좋기도 하고,

국가가 편찬하는 사전이니 이대로 따르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신뢰하면서 이용하고 있다.

내 돈을 들여서 종이 사전을 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이 있으니 또다른 한국어 사전은 필요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사전'이란 것을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국가가 규정해 놓은 법전같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인들이 느끼는 '사전'의 의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름을 알았다.

물론 이 글에 등장하는 학자나 편집자의 언어에 대한 인식이 보통의 일본인과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잇다는 것은 역시 사회의 문화 수준을 증명한다.

그들 사회의 문화 수준과 내가 사는 사회의 문화 수준, 그 아득한 차이에 압도되었다.

 

286-289
마쓰모토 선생은 식사 도중에도 평소처럼 사전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약간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마지메 씨. ‘옥스포드영어대사전’이나 ‘강희자전’을 예로 들 것까지도 없이, 외국에서는 자국어 사전을 국왕의 칙령으로 설립한 대학이나 시대의 권력자가 주도하여 편찬하는 일이 많습니다. 즉 편찬에 공금이 투입되는 거죠."
"자금난에 허덕이는 저희들로서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왜 공금을 사용하여 사전을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마지메는 우동 먹던 손을 잠시 멈추고 대답했다.
"자국어 사전 편찬은 국가의 위신을 걸고 해야 한다,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언어는 민족 정체성의 하나로 나라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언어의 통일과 장악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공공 기관이 주도해서 편찬한 국어사전이 전무하죠."
마쓰모토 선생은 도로로소바를 반쯤 남기고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일본에서 근대적 사전의 효시가 된 오쓰키 후미히코의 ‘언해(言海)’. 이것조차도 결국 정부에서 공금을 지급하지 않아 오쓰키가 평생에 걸쳐 개인적으로 편찬하여 사비로 출간했습니다. 현재도 국어사전은 공공단체가 아니라 출판사가 제각기 편찬하고 있죠."
밑져봐야 본전이니 조성금을 신청해 보라는 얘기일까? 마지메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부나 관공청은 문화에 대한 감도가 둔한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자금이 조금만 더 윤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선생은 테이블 위에서 양손을 깍지 꼈다.
"그러나 지금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공금이 투입되면 내용에 간섭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또 국가의 위신을 걸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권위와 지배의 도구로서 말을 이용할 우려도 있습니다. ......말이란, 말을 다루는 사전이란, 개인과 권력, 내적 자유와 공적 지배의 틈새라는 항상 위험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죠."
마지메는 지금까지 사전 편찬 작업에 무아지경으로 빠져 있어서 사전 그 자체가 갖는 정치적 영향력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마쓰모토 선생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설령 자금이 쪼들리더라도 국가가 아닌 출판사가, 일반인인 당신이나 내가, 꾸준히 사전을 만들어 온 현 상황에 긍지를 가집시다. 반평생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세월, 사전 만들기에 힘을 써 왔지만, 지금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선생님....."
"말은, 말을 낳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무연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자유로운 항해를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엮은 배. ‘대도해(大渡海)’가 그런 사전이 도도록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무리해 나갑시다."
마쓰모토 선생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거기에 깃든 열정은 파도처럼 마지메의 가슴에 몰아쳐왔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온 마지메는 선생과 선생의 가방을 반 강제로 택시에 밀어 넣었다. 식욕이 없어 보이는 선생을 전철에 태워 보낼 수 없었다. 사양하는 선생의 손에 회사에서 나온 택시비를 쥐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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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노베르트 로징 글.사진,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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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7
이누이트 족이 이글루비쿠스라고 부르는 굴 안에서 어미 곰은 지난겨울에 축적한 지방을 소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겨울잠 속에서 출산을 기다립니다. 새끼들은 11월과 12월 사이에 태어납니다. 어미 곰은 보통 한 마리나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아 전형적인 북극곰 가족을 이룹니다. 가끔은 세 마리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북극곰은 막 태어날 당시에는 다람쥐보다 더 작으며 몸무게는 1킬로그램 정도입니다. (중략) 6주 정도가 지나면 눈을 완전히 뜨고 10주가 되면 무게가 11킬로그램에 이르고 몸의 균형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굴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

그때가 되면 낮이 점점 길어지고 따뜻해져 어미 곰은 밖으로 기어 나와 기지개를 켭니다. 어미 곰의 털은 굴속에서 수개월을 지난 터라 흙이 많이 묻어 있고 얼음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혼자 몇 번 밖에 나갔다 온 후에 어미 곰은 별로 따라나서고 싶지 않은 새끼들을 유인하여, 곰의 일생 중에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절을 보낼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새끼 곰들이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지만 곧 눈 위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끼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서 점점 강하게 자라며 신체 조정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는 새끼들의 굴 근처에서만 놉니다. 위험에 처하거나 갑자기 날씨가 나빠질 경우에는 재빨리 굴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겨울 환경에 순응하는 것은 북극에서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입니다. 새끼들 역시 겨울 환경에 빨리 적응하면 할수록 생존할 가능성도 더 높아집니다.

한번은 깊이 파인 토굴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 판 눈으로 된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 토굴의 입구에는 곰 가족의 입김 때문에 발생하는 서리가 보였습니다. 모리스는 3개월이 지난 후에 어미 곰이 기존의 오래된 굴에 싫증이 나서 깨끗하고 밝은 주거 공간을 찾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어미 곰은 주변 경관이 잘 보이는 남향의 긴 적설 언덕을 발견하고 그 한가운데에 새로운 글을 파기 시작했을 겁니다. 어미의 긴 발톱 자국이 굴 주변에 여기저기 찍혀 있고 쌍둥이 새끼 곰의 작은 발자국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1-2주 후에 어미와 새끼 곰은 허드슨 만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누이트 족은 그 여정을 ‘아틱톡(ah-tik-tok, 바다로 가는 여행자들)’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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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 -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만프레드 슈피처 지음, 김세나 옮김 / 북로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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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가 쓴 디지털 미디어와 뇌의 퇴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섬뜩한 책.

임상 사례의 나열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 다섯 개.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써 두고 간다.

 

무엇인가를 외우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뇌 안에 있는 신경 세포들사이의 연결망(시냅스)을 발달시키고,

특히 해마 부분의 신경 세포 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치매를 예방한다.

치매에 걸리면 뇌세포가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학습을 통해 단련된 뇌는 훨씬 천천히 파괴되어 우리가 더 오래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한다.

특히 뇌가 형성되는 시기인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에

디지털 미디어에 빠져 기억을 등한시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디지털 미디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습을 방해한다.

특히 어린이의 언어 발달을 심각하게 저해하여 이후의 효율적인 학습을 어렵게 하고,

디지털 미디어로 인한 수면 부족은 학습과 일상 생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뇌가 지속적인 '주의력 결핍' 상태에 적응하게 만든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대면 상황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운다.

온라인 상의 만남은 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SNS에 빠져 사는 10대 청소년들은 고립감과 우울증에 빠지는 일이 많다.

폭력적인 컨텐츠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디지털 미디어는 뇌 속의 중독 센터를 활성화시켜, 우리가 점점 거기에 의존하게 만든다.

 

 

 

 

 

 

300-301
잠자는 중에는 새로운 기억 콘텐츠들이 기존의 지식에 통합된다. 이를 위해 새로운 기억 콘텐츠들은 일단 깊은 수면 상태에서 해마의 전달을 통해 대뇌피질에서 활동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REM 수면 상태에서 오래된 기억 콘텐츠, 감정들과 결합되어 새로 분석된다. 즉 위리의 뇌는 매우 격렬하고도 깊이 사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하루 전날 끙끙대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접어버리고 말았던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수면 중에 얻어내곤 하는 것이다.
수면이 기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상당히 진행돼 왔으며, 동물실험과 임상실험을 통해 학문적으로 입증되었다. 많이 학습하는 사람은 더 많은 잠이 필요하다. 학습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건 잘못이다. 이럴 경우 뇌는 낮에 학습한 내용에 대해 밤에 다시 한 번 요점을 반복 정리해서 고착시키는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모든 부모와 교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저녁마다 서핑을 하고, 게임을 하고, SNS로 연락을 취하느라 얼마나 피곤한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친 학생들은 수업에 덜 관심을 보인다.

310-311
뇌의 깊은 곳에는 행복감을 담당하는 신경세포들이 모여 있다. 이 세포들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긍정적인 일이 발생할 경우에 활성화되는데, 이때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도파민은 활성 이후 전두엽에서 이른바 내인성 오피오이드(또는 엔도르핀)를 분비하는데, 이것이 주관적으로 유쾌하다고 체험되는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알려졌듯이, 실질적으로 모든 중독물질(코카인, 암페타민, 모르핀, 헤로인, 그리고 알코올 또는 니코틴)이 이 센터를 활성화시키고, 때문에 수많은 연구자가 이를 중독센터라고 부른다.(중략) 이미 10년 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중독센터는 중독물질뿐만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서도, 가령 컴퓨터게임을 통해서도 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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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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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두 번쯤 빌려보고 이번에 구입. 가끔 이런 게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구질구질하지 않고 깨끗한 결말이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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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
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김정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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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냥저냥 재미나게 술술 읽히는 책.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읽기에 즐거웠다. 저자의 국가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그에 따른 입장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좀 웃었다.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책에 대해서 "나는 킹 제임스 성경, 뉴턴의 '프린키피아', 로크의 '정부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링컨과 처칠의 연설문 등이 있다. 나의 코란으로 단 한 권을 고르라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가 될 것이다." 란다. 이 못 말릴 영국인(사실은 스코틀랜드 출신). -_-

74
Conceptio culpa. Nasci pena. Labor vita. Necesse mori.

143-145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친구에게 이렇게 써보낸 적이 있다. "영국에서 유행하는 악습은 매춘과 음주고, 투르크에서는 남색과 흡연이라네. 우리는 여자와 술을 더 좋아하고 그들은 담배와 남색 상대를 더 좋아하는 셈이지."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된 전제주의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젊어서 오스만 궁전에서 살았더라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상당히 예민하고 지적이면서 동성애 성향이 있던 그는 성마르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밑에서 금욕적이고, 때로는 가학적이기까지 한 교육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담배 내각’의 상스러운 술친구들과 긴장을 푼 반면 그의 아들(프리드리히 2세)은 역사, 음악, 철학에서 위안을 찾았다. 엄격한 아버지의 눈에 그는 ‘남자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말도 못 타고 총도 쏠 줄 모르며, 지저분한 데다 머리도 자르지 않고 사내가 바보같이 머리나 마는 여성스러운 소년’이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혔을 때,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아들을 퀴스트린 성에 가두고 아들의 탈출 계획을 도운 친구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가 참수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친구의 시신과 잘려나간 머리는 왕세자 방에서 내다보이는 곳 바닥에 놓아두었다. 그는 퀴스트린에서 2년이나 갇혀 지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군대를 향한 아버지의 열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골츠 연대의 대장으로서 군사적 기술들을 연마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운 프로이센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하고 주앙유럽을 가로질러 세력을 확장해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통치 기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8만 병력을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인 19만 5000명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의 통치 기간이 끝날 무렵인 1786년에 프로이센은 백성 29명당 1명의 군사 규모로, 상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되어 있었다. 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와 달리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군대를 전쟁터에 전략적으로 배치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1740년 왕으로 즉위한 몇 달 만에 그는 오스트리아부터 슐레지엔에 이르는 부유한 지방을 손에 넣어 유럽 대륙을 충격에 빠뜨렸다.


155-156
오늘날 포츠담은 여름에는 먼지 자욱하고 겨울에는 황량한 베를린의 또다른 초라한 교외에 불과하다. 구동독의 전형적인 특징인 흉측한 건물들로 지저분해진 풍경은 마치 거기에 ‘사회주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포츠담 주민들은 대부분 군이었다. 또 포츠담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모두 군사적 목적이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영화 박물관은 원래 오랑주리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이후 기병대의 마구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시의 중심부를 걷다 보면 군 고아원, 연병장, 옛 승마 학교를 지나게 된다. 린덴 거리와 샤를로텐 거리가 만나는 곳에 군대 장식품으로 가득한 곳은 예전에 감시소였다. 당시에는 일반 주택도 꼭대기를 군인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한 층 더 지었다.
포츠담은 프로이센의 축소판 또는 캐리커처라 할 만한 곳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부관 게로르크 하인리히 폰 베렌호르스트(Gerg Heinrich von Berenhorst)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거느린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거느린 군대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의 군대는 단순히 왕권의 수단이 아니라 프로이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였다. 지주들은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신체 건강한 소작농들은 사병으로서 외국 용병들을 대신했다. 프로이센이 곧 거대한 군대였고, 군대가 곧 프로이센이었다. 프리드리히 정권 말기에는 프로이센 인구 3퍼센트 이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2배가 넘는 비율이었다.

296-300
1904년 8월 11일, 바터베르크 고원 근처에서 벌어진 하마카리 전투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헤레로족은 커다란 야영지에 모여 있었고 얼마 전 한 차례 독일군을 쫓아낸 터라 일종의 평화 협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타는 그들을 포위하고 맥심 총으로 대량 사격을 퍼부었다.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쓸어버렸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토로타의 의도대로 오마헤케 사막으로 도망쳤다. 장군의 말을 빌리면 ‘최후를 맞으러’ 간 것이었다. 사막 가장자리의 샘들은 독일군의 살벌한 감시를 받았다. 남서아프리카 참모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물이 없는 오마헤케 사막은 독일군의 총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지어 주었다. 바로 헤레로족의 박멸이었다." (중략)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헤레로족은 정착민으로 구성된 "정화 정찰대(schuztruppen)’의 손에 붙잡혔다. 그들의 모토는 ‘모두 없어질 때까지 몰아내고, 매달고, 쏘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 주로 여자와 아이들은 다섯 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나중에 나마족도 이 수용소에 들어왔다. 반독일 폭동에 가담하는 실수도 모자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독일군의 말만 믿고 무기를 내려놓는 더 큰 실수를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수용소는 영국군이 보어 전쟁 당시 남아프리카에 세운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게릴라전이 한창이었고 그런 수용소의 목적은 보어군 보급 전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사망률이 그리도 높았던 것은 위생 상태가 심각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다스리던 남서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은 이미 끝났고, 그런 수용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뤼데리츠 근처의 상어 섬이었다. (중략) 반란 전 헤레로족은 8만 명에 이르렀으나 그 후에는 겨우 1만 5000명만 남았다. 나마족은 2만 명이 있었으나 1911년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마족 죄수는 겨우 열 명당 한 명꼴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갔다. (중략)
하지만 섬뜩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혹시 남서아프리카가 미래의 훨씬 더 큰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시험장은 아니었을까? 콘래드가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이야기했듯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개화하는 대신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을 야만인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닐까? 진정한 핵심은 어디인가? 아프리카인가? 아니면 아프리카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럽 문명이 수출한 것 중 가장 치명적인 사이비 인종 과학 실험실로 취급한 유럽인들인가? 아프리카인들을 향한 잔인한 행위는 나중에 끔찍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것이었다. 인종 이론은 식민지라는 변방에만 국한되기에는 너무나도 사악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면서 그것은 유럽으로 돌아왔다. 서양 문명은 곧 가장 위험한 적을 만나게 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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