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의 아이들 - 재난이 휩쓸고 갈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모리 겐 지음, 이선미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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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담담하고 사실적인 서술이라 읽고 난 후의 감동이 오래 간다.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가끔 다시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아이들이 정말로 아이들 다웠다. 아픔을 이기고 또 살아갈 힘을 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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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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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본인세회회에서는 귀환 대기 중에 있거나 북에서 탈출한 일본인을 위해 이재민 병원과 이동의료국을 운영했다. 의료는 대개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이 담당했는데, 다나카 마사시도 그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대표적인 귀환 창구였던 하카타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하카타항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구 애국부인휴양소에 후쓰카이치 보양소가 설치되자 이들은 의료진의 주축으로서 부녀자들을 들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담당한 치료란 다름 아닌 패전 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강제 낙태 시술을 한 것이었다.-50-51쪽

10월 들어 일본인 부윤과 부의회 의원이 파면되고 조선인 신임 시장과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11월 새 의회가 상정한 첫 안건이 지금의 신흥초등학교, 송도중학교, 답동로 일대에 자리 잡은 율목리 일본인 묘지의 이전 문제였다. 1902년에 조성된 이 일본인 공동묘지를 두고 신임 시장과 의원들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 이 묘지의 유골들은 편조사(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동쪽) 일대의 방공호에 모아서 그대로 매몰해 버렸다고 전한다.-87-88쪽

경성제국대학 이과교원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는 패전 소식을 듣고 가족이 살고 있는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모두들 열심히 일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같은 마을의 조선인 집에서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이 일 저일 하면서 육체노동이 몸에 익어갈 무렵, 주말에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 물을 데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은 좀처럼 추스를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곧바로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 아이조차 "야! 일본 도깨비, 설렁설렁 놀지 말고 물이나 푸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 (중략)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고무장화를 손에 쥔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래에 계속)-138-139쪽

(위에서 계속)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모토 씨가 예전부터 데리고 일하던 '오야마'라는 조선인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아줌마 주변을 어슬렁대며 치근대던 거였다. 그는 "요즘 힘들지?" 하면서 아이에게 건네줄 것이 있다며 꾀어내 아줌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만일 아줌마의 남편이 어디론가 끌려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138-139쪽

패전과 더불어 일본인 공직자와 회사원들은 직장에서 추방되었고 청장년기의 남성은 외지로 압송되어 가족과 헤어졌다. 자영업자도 일본인의 경제활동 금지 조처에 따라 더 이상 점포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160쪽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난 이소가야는 1928년 함경남도 나남의 한 보병연대에 보충병으로 입대하면서 조선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30년 제대 후 조선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함흥 공장 지역을 무대로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 운동에 투신했다.(중략)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감옥 생활을 했다.
1945년 10월 초 그는 해방 후 함경도 검찰부장이 된 감방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주인규로부터 함흥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 임시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 '패전 국민'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일본인 문제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262-264쪽

나는 건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내 혼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에는 10구 정도의 시체가 거적에 쌓인 채 포개져 있었고 부근에는 아직 거적도 두르지 않은 시체 2,3구 정도가 나뒹굴고 있었다.
(중략) 그는 북한 정치세력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를 수행하느라 일본인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없다고 보았다. 또한 일부 불미스러운 폭행과 강탈이 있었지만 그것은 당 중앙의 방침이 아니며, 정치적 훈련의 미숙에서 비롯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북한 인민위원회의 주요 보직에 오른 과거 조선인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소련 점령군과 교섭을 거듭해 1946년 봄부터 일본인들의 조직적인 남하 이동을 암묵적으로 승인받았다.-262-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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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4-01-19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명으로 점철된 역겨운 책이지만, 그래도 행간을 통해 그 시공간에서 얼마나 야만적이고 끔직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많다. 약한 자는 철저히 잔인하게 짓밟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최근 비슷한 주제의 책으로 허준의 단편소설 <잔등>을 읽었는데, 민족을 절대선으로 신성시하는 국가권력이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기 이전에 나온 그 글은 보다 자유롭게 종전 이후의 현실을 그려보이고 있었다.
 
조선의 못난 개항 -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
문소영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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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미화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결국 잘못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언론에서 보도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어쩐지 의심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 열불나지만 한편으론 속이 시원한 진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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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문소영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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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말에 장인들이 스스로 터득했든지 아니면 중국의 혼란기에 월주요의 장인들이 흩어져 고려로 들어와 자기기술을 전수했든지 간에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중략)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민족은 전세계적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고 하니, 10세기 안팎의 고려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한 나라였다고 자부해도 된다.-39-42쪽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중국에서 청화백자의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 왕실은 직접 백자 생산을 지시했다. (중략) 청화백자의 몸통인 백자 만들기에 성공하자 15세기 중반, 세조 때부터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제작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즉, 조선의 백자는 원래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닮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단지 하얗게 빛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순백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코발트를 수입해 청화자기를 생산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선 왕실은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 정도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략)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화자기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세조와 예종 때를 지난 뒤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이나 새 등 도안을 채색한 채색도자기로 진화했다. 일본식 채색도자기의 도약이었다. 18세기에는 채색도자기의 원조인 중국조차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모방해야 할 정도로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 (중략) 백의민족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조선의 백자는 이런 세계적인 도자기 시장의 흐름에서 완전히 비켜난 결과에 불과하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의 사치금지법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도 채색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일본에서도 1787년에 사치생활 금지법이 발효되었다. (중략) 중국도 명나라 등에서 종종 사치금지법을 내리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유교의 세례를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조선처럼 모두 사치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치금지법이 조선에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졌던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막부나 중국의 황실에서 백성들의 사치를 금지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다 사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치풍조를 막으려고 해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수준이 향상되는 등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으로 한 발짝 진보한 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사치금지법 등이 일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위축시킬지라도, 봄날 새싹이 돋아나오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51-58쪽

조선은 17세기에 회회청(코발트)을 구할 경제적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 청화백자 생산을 중단하고 철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를 들락거리는 네덜란드와 중국인 상인들을 통해 코발트를 구해 청화백자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에 수출했다. 일본은 유럽에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짝퉁’ 청화백자의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그 수요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도자기의 유럽 시장을 창출해냈다.(중략)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청화백자가 유행이던 시기에 경제적 이유로 철화백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짝퉁 청화백자를 주문받아 유럽에 수출했던 일본은 이후 완전히 다른 국부의 축적과정을 형성해나갔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65-66쪽

신라시대 촌락문서에 기록된 442명의 주민 가운데 노비는 25명뿐으로 5.7%이다. 그때부터 700년쯤 흐른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말에 이르면 노비의 수는 전체인구의 30%를 넘게 된다. (중략) 17세기 초반 경상도 산음현의 호적을 분석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양반은 23%, 양인은 60%, 천민은 18%였다. 즉 담세자가 60% 수준이었다. 왕실의 친인척과 관리들이 살았던 한성의 경우 신분별 인구비율은 양반 16%, 양인 30%, 노비 53%였다. 노비의 비율이 53%나 되는 것은 한성은 관리와 양반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지역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노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노비가 20-30%에 이르는 인구구성 때문에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도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0%를 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수준으로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가 서구에서 바라보는 원시-고대-중세로 일률적으로 구성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가 없이 고대 노예제 시대에서 근대로 건너뛰기를 한 것이다. -146-147쪽

노비문제를 두고 조선 왕실과 양반은 대립했다. 조선의 왕실은 양인층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노비를 양인으로 확보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양인이 담세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양반은 양인을 노비로 만들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통해 그들의 자식까지도 노비로 만들고자 애썼다. 조선시대에 양인은 양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릴 요량으로 양천교혼을 일삼았다. 양반에게 노비는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탓이다. 양인을 확보하려던 조선의 왕실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에 번번히 양반들의 범법행위를 눈감아줘야 했다. 조선 왕실은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지만,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양천교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울산호적을 보면 양반의 노비 중 솔거노비의 94%가 양인 여자와 결혼했다.
-148-149쪽

일본 사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경상도 대구 지방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은 1858년이 되면 70.3%로 160여년 만에 수직 상승한다. 같은 시기 양인의 인구비율은 53.7%에서 절반 수준인 28.2%로 뚝 떨어진다. 담세자들이 20%대로 줄어든 것이다. 노비 등 천민은 37.1%에서 1.5%로 비중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후기 해방노비가 급증한 덕분이다. 드라마 ‘추노’처럼 도망 노비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0쪽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령을 내렸고, 1894년에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서야 비인간적인 세습 노비가 사라진 상황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민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적으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 18세기 초 옹정제가 해방시킨 것이다.
(아래에 계속)-151쪽

(위에서 계속)
옹정제는 1723-1731년에 걸쳐 중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고 차별받았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잇따라 선포했다. 결혼식이나 상가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산시 지방의 노래하는 사람들, 저장 지역의 천민들, 안후이 지역의 세습적 하인들, 장쑤 지역의 세습적 걸인들, 동남 해안지역 뱃사공, 굴채취와 진주조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장성과 푸젠 성 경계지방에서 삼과 대마와 쪽물 재료들을 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내 노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옹정제는 이들 천민 집단에도 염치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결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뜻있는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분해방의 기회를 주고, 천업을 그만 둔 자손에 대해 과거응시 자격도 부여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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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10-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난 조선>이라는 제목은 다분히 필자의 비분강개가 반영된 것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가난한 조선>이 적당할 것 같다. 우리들이 가진 낭만적 이미지와 달리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연구한 조선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과, 그 가난의 원인이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데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때때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비분강개와 애국심이 쓴웃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서술된, 한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교과목별로 정리한 직업 백과사전
무라카미 류 지음, 하마노 유카 그림, 김남미 옮김 / 에듀멘토르 / 2013년 2월
품절


옛날부터 시를 쓰는 것으로 생활하는 것은 거의 무리였지만 요즘은 특히 더 어렵다. 기본적으로 시는 상징적인 것이다. 단어의 단순한 조합으로 보편적인 것을 상징한다. 한 국가가 근대화되는 과정에는 전쟁, 내란, 공황 등 반드시 격동기가 있고 민족과 사회에 공통된 슬픔과 기쁨, 어떤 특정한 감정이 생겨난다. 뛰어난 시인은 몇 줄의 시구로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표현한다. 격동기에서 완숙기로 접어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슬픔과 기쁨을 잃게 된다. 요즘에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국민 모두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없지만, 그것은 작곡가와 작사가와 가수들이 태만해서가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공통된 슬픔과 기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를 요구하는 때는 사회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5-136쪽

소설가로 데뷔하고 나서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마다 언제나 위화감과 경계심을 느꼈다. (중략) 나는 나 자신의 성격과 본래의 내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의 거실에 전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19380년대의 끝 무렵부터 3년 반 정도 토크 프로그램의 사회를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중략)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아무리 연기를 한다고 해도 출연자의 본래 모습이 나오게 마련이다. 즉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알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할말이 없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원칙에 위배된다. 텔레비전에서 침묵은 시청자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것이므로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시청자를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중략) 텔레비전은 강력한 미디어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며, 무시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대단한 정보 전달력을 의식하면서 위화감과 경계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텔레비전을 대하는 기본 자세이다.-182-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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