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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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본인세회회에서는 귀환 대기 중에 있거나 북에서 탈출한 일본인을 위해 이재민 병원과 이동의료국을 운영했다. 의료는 대개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이 담당했는데, 다나카 마사시도 그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대표적인 귀환 창구였던 하카타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하카타항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구 애국부인휴양소에 후쓰카이치 보양소가 설치되자 이들은 의료진의 주축으로서 부녀자들을 들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담당한 치료란 다름 아닌 패전 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강제 낙태 시술을 한 것이었다.-50-51쪽

10월 들어 일본인 부윤과 부의회 의원이 파면되고 조선인 신임 시장과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11월 새 의회가 상정한 첫 안건이 지금의 신흥초등학교, 송도중학교, 답동로 일대에 자리 잡은 율목리 일본인 묘지의 이전 문제였다. 1902년에 조성된 이 일본인 공동묘지를 두고 신임 시장과 의원들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 이 묘지의 유골들은 편조사(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동쪽) 일대의 방공호에 모아서 그대로 매몰해 버렸다고 전한다.-87-88쪽

경성제국대학 이과교원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는 패전 소식을 듣고 가족이 살고 있는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모두들 열심히 일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같은 마을의 조선인 집에서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이 일 저일 하면서 육체노동이 몸에 익어갈 무렵, 주말에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 물을 데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은 좀처럼 추스를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곧바로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 아이조차 "야! 일본 도깨비, 설렁설렁 놀지 말고 물이나 푸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 (중략)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고무장화를 손에 쥔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래에 계속)-138-139쪽

(위에서 계속)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모토 씨가 예전부터 데리고 일하던 '오야마'라는 조선인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아줌마 주변을 어슬렁대며 치근대던 거였다. 그는 "요즘 힘들지?" 하면서 아이에게 건네줄 것이 있다며 꾀어내 아줌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만일 아줌마의 남편이 어디론가 끌려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138-139쪽

패전과 더불어 일본인 공직자와 회사원들은 직장에서 추방되었고 청장년기의 남성은 외지로 압송되어 가족과 헤어졌다. 자영업자도 일본인의 경제활동 금지 조처에 따라 더 이상 점포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160쪽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난 이소가야는 1928년 함경남도 나남의 한 보병연대에 보충병으로 입대하면서 조선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30년 제대 후 조선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함흥 공장 지역을 무대로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 운동에 투신했다.(중략)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감옥 생활을 했다.
1945년 10월 초 그는 해방 후 함경도 검찰부장이 된 감방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주인규로부터 함흥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 임시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 '패전 국민'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일본인 문제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262-264쪽

나는 건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내 혼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에는 10구 정도의 시체가 거적에 쌓인 채 포개져 있었고 부근에는 아직 거적도 두르지 않은 시체 2,3구 정도가 나뒹굴고 있었다.
(중략) 그는 북한 정치세력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를 수행하느라 일본인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없다고 보았다. 또한 일부 불미스러운 폭행과 강탈이 있었지만 그것은 당 중앙의 방침이 아니며, 정치적 훈련의 미숙에서 비롯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북한 인민위원회의 주요 보직에 오른 과거 조선인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소련 점령군과 교섭을 거듭해 1946년 봄부터 일본인들의 조직적인 남하 이동을 암묵적으로 승인받았다.-262-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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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4-01-19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명으로 점철된 역겨운 책이지만, 그래도 행간을 통해 그 시공간에서 얼마나 야만적이고 끔직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많다. 약한 자는 철저히 잔인하게 짓밟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최근 비슷한 주제의 책으로 허준의 단편소설 <잔등>을 읽었는데, 민족을 절대선으로 신성시하는 국가권력이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기 이전에 나온 그 글은 보다 자유롭게 종전 이후의 현실을 그려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