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5 열린책들 세계문학 262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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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행복한 24년간을 몸소 느끼며 체험한 이 사람들은(인용자주: 볼로소프 군단) 이미 1941년의 시점에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유사 이래 이 지구상에, 자칭 <소비에뜨>라는 볼셰비끼보다 더 흉측하고 피투성이의, 게다가 간교하고 유연한 체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학살된 사람의 수에 있어서, 장기간에 걸친 이데올로기를 깊이 심는 데 있어서, 그 구상의 깊이에 있어서, 철저한 획일화와 전체주의화에 있어서 지구상의 어느 체제도 그것과 비견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당시 이미 지구 제국을 떨게 했던 미숙한 히틀러 체제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그들이 무기를 든 날, 설마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억압하려고 했겠는가? (아래에 계속) - P46

(위에서 계속)
볼셰비즘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며, 다시금 잔혹한 지배를 강화시키며, 그리하여 다시 한번 볼셰비즘이 그들을 무참히 짓밟게 하려 그저 투쟁을 시작해야 했을까? (오늘날까지도 세계 어디서도 아직 시작하지 앟았던 싸움을?) 아니, 예전에 볼셰비즘 자신이 사용했던 수법을 당연히 사용했다. -마침 1차 대전으로 약해진 러시아의 몸에 파고들었듯이, 2차 대전에서도 덤벼들어야 했다.
- P46

여기서 감히 말하지만, 만일 이 전쟁에서 우리 국민이 멀리서나마 총을 치켜들고 스딸린 정부를 위협하거나, <인민의 어버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붓지 않았더라면, 우리 국민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망이 없는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 P51

나는 형기의 중간 시기를 죄수들에게 좋은 식사와 음료를 제공해 주는 따뜻하고 깨끗한 황금의 섬에서 지냈다. 그 대가로 나는 극히 적은 일을 하면 되었다. 하루에 12시간 책상에 앉아서 당국의 의향에 따르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느닷없이 편안한 생활에 취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미 옥중 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 (중략) 옥중 생활은 나에게 그을 쓰는 능력을 개발시켜 주었고, 나는 그 욕구에 일체의 시간을 썼으며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에 게을러졌다. 여기서 지급되는 버터나 사탕보다 두 발로 똑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몇 사람은 <두 발로 선> 다음에 <특수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 P59

나는 수용소에 들어가 처음에는 일반 작업에서 벗어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투옥되고 6년째가 되어서 에끼바스뚜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번에는 거꾸로, 수용소에 대한 속단이나 술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런 것들은 더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운 좋게 특권수가 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잡역부로 떨어져 처참한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교양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여기 도형 수용소에서 기술을 배워 전문직을 가지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들(나와 올레끄 이바노프)은 보로뉴끄의 작업반에서 기능인, 즉 석공이 되었다. 나중에는 운명의 장난에 의하여, 나는 주물공이 되었다.
- P152

처음에는 자신이 없고 불안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걸까? 나도 할 수 있을까? 육체노동에 어울리지 않고 머리가 큰 우리는, 모두 같은 작업을 하고 있어도 남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
- P152

그리고 찌꺼기를 깨끗이 제거하고 머리가 맑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내가 이미 2년 전부터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서사시는 매우 유익해서, 나의 육체에 어떤 이상이 있어도 그것을 잊게 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자동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고함을 질러, 의기소침하여 대열 속에서 걷고 있을 때도, 나는 끓어오르는 시와 형상의 압력을 느끼며, 마치 대열의 상공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빨리 <작업 현장>에 도착하여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그 시를 종이에 쓰고 싶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에 나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 P153

우리는 이미 스똘리삔 차량에 있었을 때 모스끄바의 까잔역의 확성기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았다. 전쟁 첫날 오전 중에 남한 측의 강력한 방위선을 돌파하고 10킬로미터나 적진 깊숙이 침입하면서도, 북한 측은 남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물리를 모르고 전투 경험이 없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첫날에 진격한 쪽이 먼저 습격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한국 전쟁은 우리를 흥분시켰다. 소동을 좋아하는 우리는 폭풍이 불기를 바랐다! 폭풍이 불어야 했다. 폭풍이 없다면, 만일 폭풍이 없다면, 우리는 천천히 죽어 가야 했다.
- P61

무엇보다 중계 형무소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였다. 거기서는 스딸린의 진격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 이미 국제 연합군이 소집되었다. 우리는 한국을 스페인으로, 3차 대전의 시작으로 보았다. (아마 스딸린은 이 전쟁을 예행연습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이 국제 연합군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얼마나 멋있는 깃발 아래 모였던가! 이 기치 아래에서야말로 누구나 결집할 수 있지 않겠는가!
- P74

옴쓰끄의 무더운 밤, 찌는 듯한 더위에 땀투성이 살덩이가 되어 호송차에 억지로 실렸을 때 우리는 호송차에서 교도관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 악당들아, 이제 봐라! 이제 트루먼 대통령이 너희들을 혼낼 테니까! 너희들 머리 위에 원자 폭탄을 터뜨릴 거야!" 그리하여 교도관들도 겁에 질려 침묵했다. 그들에게 우리의 공세는 차츰 두드러지고 우리 자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정의를 갈망하여 사형 집행인들과 함께 폭탄을 맞아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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