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중략) 6세기의 문헌 ‘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 (중략) 칼에는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지라 남자만 배타적으로 사용했다는 그릇된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도 차고 다녔다. - P81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 - P91
자기만의 칼을 가지는 풍습은 기독교, 라틴어 알파벳, 법치(法治)와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의 기틀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되었다. 부엌 도구에 대한 이런저런 믿음은 문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많은데, 문화적 가치란 영구불변하지 않는다. 칼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는 17세기부터 격변했다. 최초의 변화는 당시 새로 탄생한 포크와 나란히 칼을 식탁에 미리 차려두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자 칼은 이전까지 간직했던 마법을 박탈당했다. 사람들은 칼을 개인적으로 주문 제작하는 대신 똑같은 칼들을 상자째 사고팔았고,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와는 무관하게 미리 식탁에 차려두었다. 두 번째 변화는 식사용 칼이 무뎌진 것이었다. 칼이 자르는 힘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칼의 존재 의의는 자르는 데에 있다. 자르지 못하는 칼을 일부러 만든다는 것은 고상한 격식, 달리 말해서 수동적 공격성을 갖춘 문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즘도 우리는 그 변화의 영향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 - P94
역사에 남은 최초의 진정한 포크는 11세기 베네치아의 총독과 결혼한 비잔틴 제국의 공주가 썼다는 두 갈래 황금 포크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녀가 신이 주신 두 손을 놔두고 그렇게 생경한 도구를 선호한 것은 ‘지나친 고상함’이라고 힐난했다. 철없는 공주와 우스운 포크 이야기는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종교계에서 회자되었다. 공주가 포크로 먹은 응보로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이야기가 윤색되기도 했다. - P239
그런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마카로니와 베르미첼리가 벌써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수처럼 긴 파스타를 푼테루올로(송곳)라는 긴 나무 꼬챙이로 먹었다. 그러나 꼬챙이 하나로 미끄러운 파스타 가닥을 감기에 좋다면 두 개는 더 좋을 것이고, 세 개는 훨신 더 좋을 것이다. (중략) 포크가 국수를 먹기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탈리아인은 다른 요리에도 포크를 쓰기 시작했다. - P241
1608년 이전 언젠가 이탈리아를 유람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행가 토머스 코리에이트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풍습을 목격했다. 고기를 써는 동안 "작은 포크"로 붙잡는 풍습이었다. 코리에이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은 "사람들의 손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손으로 음식을 만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중략) 코리에에이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0년 무렵에는 온 유럽에 포크가 전파되었다. - P241
냉장고에 신선 식품을 잔뜩 쌓아두는 것은 - 채소 보관실에는 양상추를, 우유는 몇 리터씩, 마요네즈는 몇 병씩, 로스트치킨을 통째, 냉장육이나 크림이 든 디저트를 몇 킬로그램씩 -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일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본질적으로 풍요에 대한 꿈이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부엌의 새 구심점으로서 화덕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옛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가에 모였지마나 요즘 사람들은 싸늘한 냉장고를 중심에 두고 일상을 조직한다. 냉장고에 관한 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이 되기를 갈망한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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