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추가 2천원 마일리지를 채우고자, 장바구니를 5만원에 맞추어 꾸역꾸역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5만원에 가까울수록 희열은 커진다. 5만2십원! 이런거! 추가 2천원 마일리지는 5천점 이상 모아야 적립금으로 환전하여, 다음 구매시 쓸 수 있으므로, 어서 빨리 나머지 모지라는 마일리지를 모으기 위한 떡밥밖에 안 되는 것을.. 그때도 알고, 지금도 알지만, 여전히 낚이는 나는 헛똑똑이 구매자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책 사는 주기는 짧아졌고, 주문권수는 두세권을 넘지 않는다. 역시 (주기가 짧아졌다는 점에서) 미련한 소비자인건 변함없지만, ( 일주일동안 책을 세번 사고, 5만원을 넘긴다면, 왜 한번에 5만원어치 사고, 2천원 추가마일리지를 받지 않는단 말인가.) 정말 사고 싶고, 정말 당장 읽고 싶고, 정말 갖고 싶은 (이쯤되면, 그냥 다 사자는거죠?) 책들을 사게 된다는 점에서 더 낫다. ...나은가? 그냥, 돈이 없어서, 적립금 쌓이는대로 보태서 지르다보니, 이렇게 된것일지도.
무튼, 돈이 있건 없건, 사야할 책이 있건 없건, 5만원을 채우건 안 채우건간에 마지막 순간에 보관함에서 빠지는 책들이 있다.
꼭 빠지는 놈들이 빠진다.
첫째는 '오늘 18시 이후에 배송됩니다' 라는 '인터넷서점당일배송신세계' 캐치프레이즈에 위반되는 책들. 둘째는 바로 '책값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어가는 책들이다. 첫번째 경우도 하염없이 보관함과 장바구니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나의 책방으로 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지만, 두번째의 경우는 좀 더 절실하다. 이 절실한게, 이 세상에서 나만 상관하는거라서 더 절실하고, 미련하다.
예전, 내가 사는 책값의 마지노선은 4만5천원이었다.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 .. 정가 5만5천원의 책이다.
이건 정말 럭셔리한 책이고, 움베르토 에코이고, 좋아하는 주제인, 그림이 잔뜩인 꼭꼭꼭 사고 싶은 책이다. <미의 역사> 이후, 3년여만에 <추의 역사>가 나왔다.
<미의 역사>를 산 건 이미 꽤 오래전이라(2005) 당시에 내가 어떤 종류의 책값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책값에 대한 심리적 마지노선이 구축되기 시작한건 그로부터 3년후 <추의 역사>가 나오면서부터이다.
당시에도, 나의 책값은 한 서점에서만 3개월 7자리 금액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로 대책 없었지만, 그래도 한 권에 5만원이 넘는 책을 살 수는 없어!라는 어이없는, 그러나 어이없다고할 수만은 없는 나름의 근거 쥐뿔도 없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근거 쥐뿔도 없는' 5만원 마지노선때문에, 책을 뚫어져라 보고, 째리보고, 마구 사랑했다, 마구 체념했다를 반복하며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나를 보고, 불쌍히 여기신 친구님께서 이 책과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은 날>을 사주셨다.
하하 ^^ 뛸듯이 기뻤던 나.
책값이 많이 오르고, 사고 싶은 더 비싼 책도 많이 나오는 요즘 나의 책값 심리적 마지노선은 조금 달라졌다.
더... 내려갔다.
현재는 1만7천원! 정도가 나의 책값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근데, 이 마지노선은 사실, 마지노선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게,
5만원짜리 책은 퍽퍽 사도, 책을 5만원어치는 퍽퍽사도, 1만7천원 왔다갔다 하는 책을 사는건 몹시 고민이 된다는거다.


근래 나에게로 온 5만원 넘는 책들이다.
무척 만족스럽고, 오래오래 두고 보고, 레퍼런스로도 간직하고,
책도 예쁘고, 볼거리도 많은 책이라 별 고민도 후회도 없는 책들
이 책도 좀 더 리즈너블한 가격이었으면, 샀을테고. (아마존 가격이 30불인데, 10만원 넘는 번역본이라니,
일단 국내에선 살리가 없다.
아, 여기서 책값 심리적 마지노선은 외서와는 상관없다. 달러나 파운드나 유로나 엔이 붙으면, 나의 책값심리적마지노선은 하늘나라로...
이런 비싼 책들은 척척 결제하는 반면,
'1만7천원' 정도의 책값으로 보관함과 장바구니 사이를 매일같이 조깅하고 있는 책들


















<로마제국쇠망사>같은 일단 사기 시작한 고전이 아닌 이상, 위의 책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깅신세다.
위의 1만7천원 마지노선에 걸려 있던 책들 중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와 같은 경우는 신간 나오자마자
보관함에 들어가 내내 조깅하다가, 3년만인 2008년에야 구매하면서 무한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중간에 내가 책을 안 샀나? 덜 샀나? ..그럴리가.
아마, 위와 같은 1만7천원이라는 애매한 마지노선을 가지게 된 것은 위의 책들이 믿을만한 사람들에 의해 검증되고, 나 또한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실물로 어느 정도 검증을 거친 책이라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야겠다', '사야지' , '사고 싶다' 는 마음은 잔뜩이지만, 일단 책이란 끝까지 찬찬히 읽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고,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별로일 수도 있는 손톱끝만한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원짜리 책은 실패해도 괜찮은 가격이다. 4-5만원 넘어가는 책이라면, 비쥬얼에 신경쓴 책인만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거면 글이 개판이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아도 실패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지금 내게 1만7천원정도의 책을 사서 오래오래 읽었을때, 그 책이 아주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이라는 물음표는
장바구니에서 결제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보관함으로 돌아가게 하는 심리적마지노문장부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