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 국경선은 어떻게 삶과 운명, 정치와 경제를 결정짓는가
존 엘리지 지음, 이영래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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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최초로 기록된 인공적인 국제 경계선을 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국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47계의 경계(border, boundary) 로 본 세계사.라는 제목부터 너무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지도와 도시, 국경의 역사를 주제로 글을 써 온 영국의 저널리스트인데, 도서 전문 웹사이트를 창간하기도 했고, 지도와 경계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도와 도시와 국경에 진심. 100회 이상 발행한 뉴스레터를 모아 총 세 권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도 아마 그 책들 중 한 권인 것 같다. 


'경계' 책에서는 border와 boundary 두 가지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뭐가 다른가 했는데, border 는 국경, boundary는 경계이고, (책 제목은 border) 더럼대학교 IBRU 국경연구센터 소장 필립 스타인버그에 따르면 "경계란 두 국가의 영토가 만나는, 두께가 전혀 없는 선"이다. 그리고, 국경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넘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선이다. 전자는 분할을 의미하고, 후자는 연결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항 내부, 즉 물리적 경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국경을 곧 넘게 됩니다."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책의 첫 문장이자 리뷰의 첫 문장인 최초의 인공적 국제 경계선, 사라진 국경은 기원전 3,100년경 사라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였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이들용 역사책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아는 내용! 거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구분은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해왔고, 이러한 경계가 실제 지리적 요소를 반영하지만, "경계선이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정체성이 경계선을 형성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사라진 경계선이라해도 그 의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감정에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던 '국경',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놀랄만큼 어설프고, 누군가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했으며(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흥미롭다.  


지난 달에 '역사주의'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인지하게 된 '유럽',그 중에서도 '영국인' '백인', '남성' 의 시점의 역사 이야기를 어느 정도 경계하게 되었는데, 저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한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다. 이 책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단순하고 직선적인 역사 소설이 아닌 것이 한계인것 처럼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 


책은 역사 파트, 유산 파트, 외부효과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역사 파트는 거의 연대기 순, 유산 파트는 현재까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국경, 외부 효과는 땅 위의 통제권을 나누는 문제와 다른 유형의 경계 (날짜와 시간대 사이의 시간적 경계, 바다나 상공의 경계, 우주의 경계) 로 이어진다. 목차에 '유산'하고 '역사'하고 바꿔 썼는데, 이거 너무 큰 오류라서 2쇄때는 꼭 시정되길 바란다. 


역사 파트는 아는 이야기들의 모르는 부분들 나와서 제일 재미있게 읽었고, '유산' 파트는 어쩐지 전쟁날 것 같은 으시시한 기분으로 읽었다. 모든 파트가 그렇긴 했지만, 외부효과는 특히나 상식을 시험 당하며 상식을 쌓으며 읽었다. 


47개의 이야기로 각각의 이야기를 끊어 읽기 좋고, 각각의 이야기에 역사와 지리와 정치, 심리 등이 꽉꽉 차 있어서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나와 지금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있지만, 요즘같은 시기에는 역사가 단순히 지난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고, 역사 속 아픈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두렵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책의 부제처럼 국경선이 어떻게 삶과 운명, 정치와 경제를 결정짓는지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다양한 역사책을 읽고 있고, 최근에 읽은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와 함께 지리와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주는 이 책은 바로 그 '지리'와 인간이 그은 '선' 때문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행한 갈등들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봤자 더 괴롭기만 하지만. 그거라도 해야지. 


* 출판사 제공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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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끝, 파랑
이폴리트 지음, 안의진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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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희망들 속의 절망 


올해의 책이다. 


작은 보트에 몸을 맡기고 목숨 걸고 망망대해로 나온 난민들을 구조하는 구조선 '오션 바이킹' 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내용도, 그 내용을 옮기는 그림과 글도 세심하다. 

번역도, 상황에 따라 변하는 우리말 폰트도 아름답고, 생생하다. 





원래도 쉽지 않은 난민 구조선의 일은 코로나로 인해 불가능과 가능의 선을 오가게 된다. 

저자인 이폴리트는 기자의 자격으로 오션 바이킹의 눈과 입이 되어 바다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는 일들을 세상에 전한다. 

복잡한 정치적 그물 끄트머리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일이 되게 만들기 위해,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난민들을 구조하기 위해 가장 예민하게 각자의 할 일들을 끊임없이 다듬고, 협력한다. 모든 준비들은 완벽해야 하고, 분과 초를 다투는 구조 순간을 대비하는 동시에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는 구조 상황에 마음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이 부분이 가장 힘들다. 그와 같은 감정의 고저를 겪으며 떠나는 사람들, 추스리고 돌아오는 사람들,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망망대해에서 그들은 희망이고, 절망이다. 군해경들로 인해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할 때도, 구조 하는 순간에 바다로 휩쓸려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을 때에도. 너무 늦어버려 구조 가방보다 바디백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난민' 꼬리표를 달고,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허름한 보트를 타고 바다 위에 떠다니며 육지를, 구조선을 기다리는 그들을 각국은 갖가지 핑계로 외면한다. 바다라는 공간이 배경이어서 세계가 '국가' 단위로 나누어져 있지만, '지구' 라는 행성의 인류라는 종이라는 것이 조금 더 실감났다.  








근래 이 책 포함 '난민', '이주 노동자' 에 대한 책들을 연속해서 읽었다. 출판사 이벤트 신청해서 받은 도서들이었는데,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의 책들을 현장에서 경험한 눈으로 알려줘서 좋았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절망들 속의 희망이 될지, 희망들 속에 절망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희망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쓸 수 없는 현실) 모든 사회 문제의 첫걸음은 아는 것(awareness) 이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알게 된 상황과 사람들의 시야를 공유해보는 것이 희망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길일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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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Beautiful
앤 나폴리타노 / The Dial Press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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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ook is a sincere homage to sisterhood of 'Little Women.' It follows the lives of four sisters and a man named William, whose life becomes deeply intertwined with theirs. William had a sister who died when he was just an infant. His parents, devastated by their loss, never recovered and emotionally abandoned William. He grew up in the shadow of his dead sister, carrying a deep emptiness. This left him struggling with severe depression and an inability to fully love others.


At university, William met Julia, and they became a couple. When William visited Julia’s home, he was struck by the warmth and closeness of her family, which included her three sisters—Sylvie, Emeline, and Cecelia. 

William and Julia eventually married and had a daughter named Alice. However, William’s depression worsened, rooted in the lack of love he experienced during his childhood. He attempted to take his own life but survived. With Julia’s eldest sister, Sylvie, and his best friend, Kent, stepping in to care for him. Before his attempt, William left a note to Julia giving up his parental right along with a $10,000 check he had secretly hidden - money he had received from his distant parents as a wedding gift, a symbolic final goodbye from them. 


The story grows more complicated and emotionally charged. While Sylvie visited William in the hospital, Julia was devastated by his actions. During this time, Sylvie and William developed deep feelings for each other, but both knew they could never act on them. Their love remained unspoken, a painful secret they carried. When Julia discovered the emotional bond between her husband and her beloved sister, she left her hometown with Alice, broken but determined to move forward, leaving her entire family behind.


While this story could easily resemble a cheesy soap opera, the exceptional writing elevates it into something far more profound. The characters’ decisions feel authentic, making their struggles and choices deeply moving. The story is bittersweet—complex, raw, and filled with emotional depth. People are complicated, and sometimes one thing becomes more important than everything else, while some things remain unchangeable. I found myself loving every character in this book. It’s a beautiful and keeps me thinking abou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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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지리학 - 기후붕괴를 수출하는 부유한 국가들의 실체
로리 파슨스 지음, 추선영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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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the World 를 읽으면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읽다 보니 그간 띄엄띄엄 읽던 것에 비해 많은 것이 연결되어 읽혔다. 

식민주의 시대를 읽다보면, 아니,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과거인데, 어떻게 이렇게 땅을 빼앗고, 집과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노예로 삼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과거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인문지리학자인 저자의 책을 읽으며, 식민주의는 한 번도 멈춘 적 없고, 바로 지금도 그 껍데기만 바꾼 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은 <기후책>에서 읽었던 '기후불평등'을 주제로 기후문제를 긴밀히 엮여 있는 정치,사회, 경제의 문제로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는 태풍이나 대화재처럼 급격하게 왔다 가는 것들 뿐 아니라 위의 문제들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느린 재난' 이기도 하다. 


인문지리학자인 저가가 '지리'의 눈으로 글로벌 공장의 '공급'에 대해 조명하며 거대 기업과 국가의 '그린 워싱'에 대해 파헤친 점이 돋보였다. 글로벌 공장이 있기까지, 제3세계가 기존의 생업 (농업)을 위협받고, 유지해가기 위해 공장으로 몰리게 되는데, 거기에는 '기후 위기'로 인한 불안정성이 물론 있지만, 기후 위기를 기회로 본 인간의 탐욕이 위기에 취약한 자들을 가장 먼저 착취하고, 공멸의 위기를 자초한다. 


우리가 저렴하게 사는 물건들이 세계 곳곳을 거쳐서 오는 동안 제1세계의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제3세계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기후 위기에 가속페달을 밟는다.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끔찍한 예시들이 펼쳐진다. 캄보디아의 의류 농장이 불법 벌채를 체계적으로 하는 이유는? 전기세가 비싸기 때문에 나무를 불법 벌채한 것을 태워서 '다림질'을 하려고. 공장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몰렸던 것은 아니다. 기후 변화로 농사의 변수가 늘어나고, 화학비료와 종자를 사기 위해, 가족 중에 공장에 가서 돈 벌어와야 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렇게 농촌의 생계수단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장은 노동력을 확보한다. 이것은 노동 조건의 악화로 이어진다. 


이 책은 환경책이라기엔 저자가 답 없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 없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에 기후 위기로 보는 사회 문제에 관한 책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강우 도박'에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개개인의 노력이 미신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란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겠고, 내가 변하면, 내 주변이 영향 받고, 그렇게 변화를 늘려가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고, 동의하기 힘들다. 


보통의 사람들의 기후지식은 주관적이어서 지구적으로 기후변화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취약하다고 한다. 장기적 기후변화의 신호가 아직 미약하다보니 보통 사람들은 기후변화로부터 오는 '소음'과 '신호'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자의 환경에 따라 더 절실히 느끼게 되는 기후 위기의 징후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기후위기로 인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시점을 나는 2024년으로 기억할 것 같다. 각자의 환경에 따라 기후 위기에 더 큰 타격을 받는다는 점에서 보면, 나는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서 직격탄을 맞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에 비해 취약하다면 취약한 시골, 섬 살이 하는터라 영향을 받고 있다. 여기서는 대략 신선식품과 냉동식품을 주문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배달 3일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에서 9월 정도까지 배달 자제했는데, 올해는 4월초부터 배달 대참사를 겪었고, 이제 내일이면 10월인데, 배달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내일이면 10월이지만, 여름 옷, 여름 이불, 에어컨, 선풍기가 아직도 한참 열일중이다. 이런 좋은 잘 분석된 책들 보면서 어떻게 하지, 뭐 하지 마음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올 한 해 목표중 하나가 '기후 문해력 높이기' 였다. 기후책들 많이 찾아 읽었고, 하반기에 오월의 책에서 내준 좋은 기후책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기후 문해력을 높여서 주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아니 모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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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이 사나운 곳에서도 - 배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11인의 일과 삶에 관한 이야기
김그루 외 지음,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 코난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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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개인은 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좁은 범위의 사람들을 만난다. 각각의 접점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를 늘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활동가와 운동가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알리는 이들이다. 덕분에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소' 는 배 만드는 곳이고, 한 때 우리나라의 조선업이 잘 나갔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산재로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열악한 처우로 농성을 하며 뉴스에 날 때에만 보게 되는 장소였고, 단어였다.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 '조선소, 이 사나운 곳에서도' 의 대담한 표지와 글꼴,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고, 부제를 보고 바로 구매했다. '배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11인의 일과 삶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기록에 평소 좋아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는 박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주의 책들 읽다보니 여성 노동자들의 책을 읽게 되고, '희정', '박희정' 과 같은 전혀 몰랐던 세계에 훅 들어가게 해주는 훌륭한 저자들을 만나게 되어 읽어나가게 되었다. 앞에 말했듯 '조선소'는 여전히 생소한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여전히 낯설지만, 이제 조선소와 관련된 뉴스를 읽게 되면,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추천해서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었는데, 이런 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일단 재미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아니 상상할 수 없었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해나가면서 느끼는 자부심이 존경스럽고, 유머가 재미있다. 평소 접할 일 없어서 전혀 알지 못했던 배를 만드는데 하는 일들에 대해 새로 알게 되는 사실들도 엄청 흥미롭고, 조선소의 스케일이 압도적으로 크다보니 평소 많이 접했다고 생각하는 청소 노동자, 급식 노동자, 세탁 노동자의 일들의 엄청난 스케일에 놀라게 되고, 그 노동량에 대해 놀라게 된다. 


"웰리브지회는 조선소에서 급식, 세탁, 미화, 수송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다. 2만 명 넘는 노동자들이 쓴 수건, 작업복을 수거해 세탁하고 말리고 다리고 개서 반나절 만에 돌려주는 세탁 파트에서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 건조기 소리, 침묵 속에서 수건과 작업복이 접히는 소리, 30-40킬로그램 세탁물을 지고 나르는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식사하는,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는 급식소에서는 식사 전후로 불과 칼과 물과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세탁이건 급식이건, 전쟁터 같았다." 


책은 도장 노동자 정인숙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배 도장은 사수들이 스프레이를 뿌리고 스프레이가 지나간 곳에 롤러대를 밀어서 색을 칠하는(터치업) 일이다. 선체 도장, 엔진룸 도장, 선행 도장, 블록 쪽 도장 등으로 그 안에서도 다양하게 나뉜다. 도장일을 할 때는 도막 개념이 중요한데 도장할 때 페인트의 두께를 맞춰야 한다고 한다. 각 배에 도막 게이지라고 맞춰야 하는 페인트 두께가 있다. 이 도막이 안 맞으면 배가 부딪혔을 때 용접 부분이 갈라질 수 있다. 도장은 블록과 블록을 잘 이어주는, 딱 부착시켜주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데, 정말 너무 흥미로웠다. 큰 배로만 알고 있던 큰 배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말이다.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고, 일하는 환경은 열악하고, 건강에도 정말 안 좋지만, 정인숙은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재미있다고 한다. 집에 있으면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현장에 가면 오만 소리 다 하면서 실컷 웃는다고. 외에도 아무리 힘들어도 언니들 동생들 만나며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집에서의 여자,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다. 


'네가 만든 배가 지금 파나마운하를 지나가고있다.' 며 배 만드는 모든 공정 담당하는 감독님이 사진을 찍어 보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고생해서 만든 배가 바다를 다니면서 돈 벌고 있는 사진을 보고 감동했다고 하는 그 마음이 와닿는다. 13여년 동안 50척 넘게 LNG, LPG, 벌크선, 리그선 등등 웬만한 배는 다 만들어봤다고 한다. 다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도장하는 이들은 도장은 조선소의 꽃이라고 한다. 


남편이 죽고, 혹은 남편과 이혼하고 조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청소 노동자인 김순태 또한 남편이 죽고 사십여섯에 처음 조선소에 들어왔다. 그가 한 일은 사상(시야기, 마무리) 였다. 철판의 거친 부위나 각진 모서리를 그라인더로 매끄럽게 갈아주는 일이라고 한다. 사상을 15년 하고 체력이 떨어진 후로는 용접과 취부(임시 용접) 하면 나오는 슬러그와 찌꺼기를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빗자루, 통, 쓰레받이가 기본 도구다. 


용접 노동자인 전은하가 말하는 사정은 조선소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선소가 다시 호황으로 돌아서도 하청업체에서 숙련공 임금은 오르지 않고 최저임금을 겨우 넘긴다. 일로만 보더라도 생산성 자체와 드는 비용이 신입과 숙련공의 차이가 몇 배는 날텐데 사측은 숙련공을 대우해줘 일의 생산성과 정확성을 높이고 위험을 낮추기보다 낮은 임금이 유지되는것에만 더 힘을 쓰고 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노조를 시작하지만, 회사에서는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리고, 대체 인력으로 이주노동자를 넣고 있다. "세상 만물 다 노동자들이 일궈가고 있는데" 회사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일하는 사람을 천하게 보고 있다고 하는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 쇠를 깎는 밀링 노동자 김지현, 비계 발판 노동자 나윤옥, 세탁 노동자 김영미, 급식 노동자 공정희, 미화 노동자 김행복, 도장 노동자 정수빈, 화기, 밀폐감시 노동자 박선경, 밀폐감시 노동자 박선경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조선소 곳곳을 돌아보고 그 곳에서의 일과 일하는 사람들과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부당함과 그 부당함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가장 답답했던 것은 회사 이름갈이, 하청 회사들이 임금 밀리고 퇴직금 안 주고 파산 신청하고, 그러면 나라에서 세금으로 보장해주고, 새로운 이름으로 똑같이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니 진짜 나쁜놈들이다. 


미화노동자들이 일년도 아니고 11개월도 아닌 한 달짜리 계약을 매달 한다는 이야기도 어이없다. 


"배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그 나머지를 다 하잖아요. 새벽부터 와가지고 출근시켜줘, 밥 줘, 옷 빨아줘, 청소해줘. 직접 배를 안 만든다뿐이지 배를 만들 수 있게끔 우리가 다 케어해주잖아요. 근데 그거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미화노동자 김행복의 말을 읽으면서는 가정내 많은 여성들의 위치와 겹쳐 보이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 책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읽으며 알게 되는 것 외에 독자들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힘든 일들을 해 내는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힘듦만이 아니라 자부심과 뿌듯함, 재미와 유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 읽고, 그만큼의 세계를 확장하고, 연결점 없었던 이들과의 연결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호명에는 관점이 담긴다. 호명에 담긴 시선들이 교차할 때 우리의 인식은 확장되고 단단해진다. 11인의 목소리가 조선소 노동자라는 사회적 호명에 서로 다른 구조적 상황, 경험, 고통과 요구의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담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전에는 도장도 직영이 있었거든요. 직영 여성들이 터치업을 하고 다녔단 말이에요. 여자들이 일하는 걸 보니 잘하니까 여성을 점점 더 뽑은거죠. 백번 양보해서 예전에는 남자들이 높은 곳 도장을 하고 무거운 걸 들었으니까 임금을 더 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높은 곳 도장할 때는 로프맨들이 다 해요. 남자들이 많이 없어서 무거운 것도 여자들이 다 들어요. 그럼 임금에 남녀차별을 두면 안 되지. 근데 이상한 일이죠. 남자가 일당 오천 원을 더 받아요. 여자가 많고 남자는 적어서 할 일은 다 하는데 왜 임금은 다르게 줘요? - P38

힘쓰고 기술이 필요한 일은 자기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소에 들어오기 전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막상 와서 일해보니까 남자들 하는 일이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있더라고요. 남자라도 저보다 용접을 못하는 사람도 있죠. 저래도 월급 받아가나 싶을 정도로 일하는 사람도 보이고. 여자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네 싶기도 하고. 여자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남자들이 자기 직업을 뺏길까 싶어 안 시키는 일도 세상에는 많이 있겠다 싶어요.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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