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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ㅣ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평점 :
비비언 고닉은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를 오가며 자신의 과거들과 도시에서 마주치는 도시인들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그가 흩뿌리는 생각들을 홀리듯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의 과거들도 떠오른다. 리뷰들을 보니, 그렇게 떠오른 각자의 과거들은 고닉의 향을 듬뿍 묻힌채 독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빛나는 경우가 많다. 독자를 드러내는 글이다.
이전 같으면 공감했을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은 그저 흘러가는 반짝임으로 느껴졌다. 책의 제목은 '짝 없는 여자' 와 '도시' 이다.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에서 따온 짝 없는 여자는 고닉, 그리고, 도시는 뉴욕. 이것은 내가 더 이상 도시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의 생각은 주로 이 곳을 헤매었다.
고닉은 사랑과 열정에 매몰되었던 과거에서 짝 없는 여자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의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를 긷는다. 나는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사람이 없는 이곳으로 와서 사람 없음에, 도시 아님에 만족하고 있다. 사람, 자동차, 높은 건물들로 차 있던 시선은 이제 하늘, 나무, 산, 꽃, 새 등으로 채워졌다.
비비언 고닉은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을 사람에서 길어낸다. 그 사람들은 가족이기도 하고, 친구나 연인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훔쳐 듣는 것이다. 고닉이 훔쳐 들은 이야기들은 생생하고, 특별하게 들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중의 평범한 대화였겠지만, 고닉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그들 대화의 순간은 특별하게 독자 앞에 펼쳐진다.
도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도시의 사람에 대한 사랑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짝 없는 여자로 칭하지만, 이 책에서 그는 그가 맺은 많은 관계들을 돌아본다. 그가 짝 있는 여자였을 때와 달리 '짝 없는 여자'로서의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웅크린 집착, 열정, 강박 등에서 벗어나 세상과 사람들,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관조하고, 그제야 보이게 되고,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인상 깊다.
그가 맺어온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게이 친구인 레너드와의 우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 인간들끼리 친구가 되었고, 불평, 불만, 패배감으로 우정을 이어간다. 그 이후 다양한 인물들과의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들, 짝으로가 아니라도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뒤로 갈수록 사람과의 관계의 끈은 옅어지고, 외로움은 짙어지며, 용기와 고독으로 살아남는다.
에드먼드 고스의 회고록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의 거짓을 발견한 여덟 살 아이가 내면의 혼란을 겪으며 속으로 질문한다. 아빠라고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면, 아빠가 아는 건 대체 뭐지? 뭘 믿고 믿지 않을지 어떻게 결정하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닫고 고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 아직 여물지도 발달하지도 못했던 내 작은 뇌로 몰려들던 온갖 생각 중에서도 가장 신기했던 건, 내가 동행해줄 이도, 비밀을 나눌 친구도 전부 내 안에서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엔 비밀이 있었고, 그 비밀은 내 것인 동시에 나와 같은 몸을 쓰는 누군가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 둘이 있었고 우린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 나 자신의 가슴 속에서 나를 알아주는 이를 발견한다는 건 크나큰 위안이었다. “
자신이라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자 친구를 알게 되고, 위안을 얻는 것은 짝 없는 여자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이번 책에서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연극배우 존 딜런의 이야기이다. 뉴욕 연극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실어증에 걸린다. 그의 대표작은 베케트의 독백극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사람들을 모아 낭독회를 열었고, 고닉은 모임에 초대되었다. 존 딜런, 조니는 사뮈엘 베케트의 <무를 위한 글>에 나오는 독백을 읽기 시작한다.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점점 힘을 잃고, 불안정해진다.
"존의 목소리는 내려갔어야 하는 대목에서 올라가기 시작했고 단단하게 유지됐어야 하는 대목에선 갈라졌으며 주춤거렸어야 하는 대목에서는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밤의 불안은 신기하게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고 그의 낭독에 내내 마음을 빼앗겼다. 그건 존이 통제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에 맞서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서서히 깨달아갔다
마치 그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살아남을 전략을 미리 세워두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것과 동행하고 그것을 타고 달릴 생각이었으며 그것이 자기를 어디에 내려놓든 사실상 그곳을 활용할 심산이었다."
가장 절망적인 일이 닥치더라도 굳건하게 함께 가기로 마음 먹고, 자신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는 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지다. 그의 퍼포먼스는 그 자리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종류의 힘을 줬을 것이다.
첫 페이지 첫 문장은 레너드와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작했고, 책의 마지막 문장은 레너드에게 전화를 걸 시간임을 확인하며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