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가격 - 예술품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지적 미스터리 소설
가도이 요시노부 지음, 현정수 옮김 / 창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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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에서도 일본소설을 출간하는 놀라움과 호기심 그리고 예술품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지적 미스터리 소설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책을 들었다. 옴니버스 형식의 각각의 단편이 만들어내는 예술 미스터리라는 색다른 장르가 지금까지 자극적이고 피냄새나는 추리소설만 보아오던 내게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물론이다. 

대학에서 미술 전공을 가르치는 강사 사사키와 미각으로 작품의 진품 여부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천재적인 가미나가라는 두 캐릭터의 독창성과 미스터리의 해결의 반전이 작품의 맛을 더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다면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을 아쉬움도 느껴졌다. 또한 일본 역사에 큰 비중이 있는 단편은 한국인으로서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추리소설이었다. 오랜만에 살인이 소재가 아닌 소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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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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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의 일본소설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시사성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 사형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소년범죄'의 모순을 다루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딸과 남편과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던 여인이 낯선 소년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범죄를 저지른 흉악한 소년들은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저 보호처분으로 처벌이 끝나게 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끔찍함에도 소년들의 인권이 더욱 중요시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던 남편은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해 추적하게 된다. 

나이가 적고 사리판단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살인이라는 가장 심각하고 큰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소년범죄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오래전에 시사 프로그램에서 갑작스러운 살인 충동으로 친동생을 죽인 소년에게도 이와 비슷한 처벌이 내려졌음을 본 적이 있었고, 학교폭력으로 급우를 죽음까지 이르게 한 소년들에게 또한 경미한 처벌만 주는 것은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소년범죄에 대한 처벌 시스템을 실시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소년'이라는 점에 앞서 '피해자의 인권'은 왜 보호받지 못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해에 과연 미래가 창창한 소년들의 갱생이 더 중요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소년범죄'를 이 책에서의 스토리를 제외한 현실에서는 과연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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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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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로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 매력에 빠졌었다. 곧이어 든 이 책<종신검시관> 또한 <그늘의 계절> 못지 않게 재미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는 인간심리의 예리함이 비교적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점을 상쇄해 줄 만큼 캐릭터의 독창성과 각각의 단편의 우수함은 놀라웠다. 

교장이라고 불리우고 스스로를 교장의 학생들로서 추종자임을 자처하는 팬들을 확보할만큼 인기있는 구라이시는 10년을 검시관으로 부임하고 있는 제목 그대로 종신검시관이다. 검시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철저함을 내세우지만 음주가무에 문란한 사생활은 마치 그의 인격이 두 개라도 있는양 괴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코야마 히데오 작품의 공통점인 '단편'을 지향하면서도, 각각의 단편에서의 구라이시의 활약상과 반전 그리고 휴머니즘 또한 엿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또 다른 작품에 기대를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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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노길명.박형신 지음 / 이학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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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도구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종교’는 꽤나 매력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한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숭배하며 의지하는 행위는 완벽해지고자 하는 인간 욕심의 한 맥락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길고 긴 역사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종교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며 그 나름의 설득력있고 탄탄한 교리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종교가 한 나라의 국교로서 존재하면 그 사회를 알아가기 위해서 그 나라의 종교를 아는 것 또한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며 몇몇의 대표적 종교 이외에도 수많은 신흥종교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한국이라는 국가의 이해에 종교가 비교적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국의 역사에서는 외래문명의 수용 이전에는 불교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전해진 다른 종교가 큰 역할을 했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의 많은 종교단체들은 그들 나름의 종교의 교리를 사회속에서 실천하며 신도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많은 사회적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흥종교가 존재하기에 많은 종교단체에서 그들 종교를 사회 구성원에게 알리고 그 교리를 전파하며 또 홍보하기 위해서 종교 그 자체의 교리에만 충실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을 접목시켜 보았을 때 특히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교단체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은 꽤나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그 취지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맥락에서 한국의 천주교, 개신교, 불교 및 원불교의 사회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실태 그리고 각 운동에서의 한계와 문제점 및 대안에 대해서 모색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종교단체의 사회운동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고, 각각의 운동에는 그 나름의 역사와 또 몇몇 단체들은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굳건히 신도들의 신념을 지키고 또 그 단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 한 흔적을 알 수 있었다.

책에 다루어진 많은 종교들이 그 역사와 교리는 다를지언정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주의만은 하나의 공통된 기틀로 다루어졌기에 사회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종교에 비해 비교적 생소했던 원불교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원불교는 우리나라에서 생성되어서 험난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종교이기에 그만큼 사회운동 또한 활발했다고 본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히 원불교라는 종교가 있었다는 것과 그 종교에서 설립한 대학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었는데, 이에 대한 글을 읽으니 사회 곳곳에 설립한 여러 대안학교 및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특이한 점은 시설들이 주로 전라도 지방에 많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원불교가 주류 종교가 아니기에 사이비 종교의 하나라는 편견을 많이 가졌었는데,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은(恩) 사상을 교리를 축으로 하고 그 실천과 의례에 있어서도 쉽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종교라는 점에서 전에 가졌었던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자연히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점은 한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교들이 하나같이 그럴듯한 윤리적 규범을 갖고 있을까라는 의문이며 만약 사회적 통념과 배척되는 규범이나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라면 왜 그 종교를 사이비로 판단하느냐이다. 이는 명백히 그 근거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단지 그 역사가 짧고 신도수가 적다는 이유로 신흥종교가 아닌 무조건적인 사이비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경험상에 비추어보았을 때 내가 외국 생활을 하며 함께 지냈던 분이 한 신흥종교의 열렬한 신도였고, 그분의 설득으로 나도 매주 그 종교의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군대 및 수혈문제로 사회 규범과 많이 부딪쳤고, 나름의 충격적인 그 종교상의 규범으로 한국 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교에 매주 참석해보고 그 종교의 신도들 및 종교 내에서 배부되는 책자를 접해보니 사회에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종교에서 내세우는 내세에 대한 진실 및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또한 신도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이 이 종교에 많이 전도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다른 많은 신흥종교들이 겉만 보았을 때는 그 교리들이 모두 선하며 많은 이들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깊이 알게 되었을 때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원불교 또한 이 책 속의 논문에서 다루어진 부분은 책의 취지에 알맞게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교리를 면밀히 분석해보았을 때 그 교리가 모두 합리적이며 공감을 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는 내게 비단 원불교 뿐만이 아닌 다른 주류 종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아동복지단체로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책에서 다루어졌는데, 매우 귀에 익숙한 이름이었고 한국 내에서 많은 입양이 이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 주변에서 입양에 관련된 사례는 접해보지 않은데다가 요즘엔 입양이 예전에 비해서는 비교적 드물기 때문에 어쩌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입양된 한국인들이 친부모를 찾을 때 가끔 등장했기에 그 이름만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또한 입양의 날이 있는지도 몰랐고, 이 입양의 날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입법 청원과 관련이 있는지도 알리 만무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입양에 있어서 자연스레 한국 사회내에서 이 단체의 영향력이 상당함을 의미함을 알 수 있지만, 이는 즉 이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 또한 자연스레 커질지는 의문이었다. 한 분야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야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이는 그 종교에 있어서는 상당한 프로모션 역할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조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다수의 신흥종교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종교는 더 이상 내세의 영역만을 다루고 교리에만 충실할 수 없다. 마치 상업분야에서 생산자가 소비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여러 전략을 이용하듯 현대사회에서 종교 또한 이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일단 신도수가 많다는 것은 자연스레 그 종교의 이미지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쉽고, 많은 신도들이 타인에게 전도를 한다면 자연스레 그에 비례하여 더욱 신도수가 팽창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사회운동을 접목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사회운동은 이런 종교의 기능에 아주 효과적인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종교단체에서 이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많은 종교단체들의 사회운동을 조사하면서 부딪친 한계는 항상 그 종교의 색채가 사회운동을 함에 있어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였다. 이는 절로 전도의 의미가 될 수 있기에 아주 조심스레 다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각각의 종교운동에서 많은 한계상황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애를 중심으로 하였다는 운동에는 그 의미가 상통하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 각각의 종교의 교리를 수혜자에게 자연스럽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전해주는 것은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결코 종교 홍보에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책에서 다룬 사회운동 중 가장 흥미로운 운동중의 하나가 바로 개신교의 ‘좋은 아빠 되기’운동이었다. 나 또한 아버지에게 다정한 딸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런 우리 가정과 같은 많은 가정에서 노력하는 아버지들을 개신교에서 도와주고 있고, 생각보다 쾌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많은 종교에서 각각의 사회운동을 하는 것에 종교 교리와 접목하여 의의를 두고 있는데,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또한 좋은 아버지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의로 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좋은 아버지의 의미가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는데, 개신교의 운동에서 내세우는 좋은 아버지란 바로 그 의의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기에, 문제는 많은 아버지들이 이런 아버지상에 공감을 할지였다. 혹 다른 종교 신도로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아버지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교리와 아무런 관련 없이 하고 있는 운동도 있다고 하니 매우 건설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른 종교보다도 불교는 환경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의 여러 개발 정책에 항상 부딪칠 수 밖에 없는 환경 파괴 문제에 특히 불교단체에서 반발하는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많이 접해서 알 수 있었다. 주로 절이 산 속에 많이 위치해있고 이는 환경과 밀접해질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데다가 스님들의 하안거와 같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기 위한 의식 등을 보았을 때 환경 운동에 있어서 불교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불교환경연대에 대해서 다룬 글을 보았을 때 불교가 환경운동에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여러 정치적인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운동을 하는 등 여러 운동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이는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비록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앞으로의 대안과 평가가 불교적 입장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있었지만, 환경운동에 있어서 불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 종교가 큰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종교를 택하는 것과 특정 종교의 신도가 되는가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고, 이 역할이라 함은 그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신도수의 확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종교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종교를 믿게 되는가에 대한 결과는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내게 있어서 진정한 사회운동이란 그 취지와 실천에 있어서 모두 투명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단체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그 운동의 뿌리 깊은 의미는 그 단체의 색깔이 입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정치단체와 종교단체는 이를 수혜자에게 절대로 강압적으로 내세워서는 안 되며, 이에 충실한 종교단체의 사회운동이 실로 진정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며 그 어떤 단체도 이에 충실한 단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 자선이라는 명목하에 각 종교의 홍보에 은근히 많은 의미를 부여함을 알게 되었다. 결국 씁쓸함만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는 어딘가에 의지하기 쉽고 이는 즉 그 종교에 쉽게 영향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특히 책의 가장 마지막에 다루어진 기독교의 소망교도소를 통한 교정복지운동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흔히 보았던 기독교의 재소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이런 기관의 설립을 통해 한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여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불교에서의 환경운동의 영향력처럼 말이다. 이를 보았을 때 종교와 사회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도의 목적이 아닌 그리고 분야의 구분을 통해 시행되어서는 결코 그 취지의 올바른 실천이 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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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반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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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하나의 문장이 어쩌면 이 책의 모든 핵심을 압축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바야흐로 토머스 L.프리드먼이 말했던 ‘세계는 평평하다’가 현실화되는 순간이지만,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정보화의 기회 평등이 아닌 ‘위험’의 평등 또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집합행동론 수업에서 아주 잠깐 배웠던 위험사회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에 꽤 흥미가 생겼었지만, 막상 책을 읽고난 후에는 가장 궁금한 점이 20세기에 출간된 이 책을 21세기인 지금 울리히 벡이 어떤 부분을 수정할까라는 점이다. 이 책 속에서 그가 예상했던 미래가 실현되고 있는 지금, 비단 위험사회에 관한 내용 뿐만이 아니라 미래사회의 고용과 성적 역할분담 등에 관한 그의 예감은 사실 지금에 이르러 어딘가 모르게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200쪽의 ‘계속되는 대량실업, 그리고 한정되어 있으며 더 위축될 것 같은 노동시장의 일반적 상황은 남녀의 전통적 역할과 책임을 보전하고 재안정화할 것이다.’라는 그의 논리가 지금에 비추어보았을 때는 그 반대의 상황도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확고히하고 있는 듯한 태도가 무조건적인 일반화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계급격차가 산업화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비록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고, 어쩌면 계급의 양가성은 이 정보의 획득에 좌우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빈부의 격차는 시대의 변화 속도만큼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위험사회’와 결부시켜 보았을 때, 결국 위험을 가장 먼저 그리고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이들은 역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층이라고 할 수 있기에 자연히 그렇지 못한 하층계급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세태라고 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국엔 결국 스모그처럼 위험은 모든 이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불편한 손님이 되어버린다. 그때가 되어서는 부와 권력 그리고 정보 따위는 의미가 없어질 수 밖에 없다.

울리히 벡이 그린 ‘위험사회’가 현재의 사회모습인지 더욱 악화될 미래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의 사회가 더욱 위험해지고 있음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처음 산업화가 시작되고, 경험에 기초한 위험이 없어서 산업사회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여러 위험과 그에 따른 희생이 그 당시의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이미 그를 경험하고 난 지금은 대책 없이 그런 위험을 고스란히 겪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위험의 퇴출과 안전의 보장이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를 희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저발전에서 발전으로 가기란 쉽고 동의를 얻기도 쉽지만, 그 반대로 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제는 발전과 위험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발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산업화의 결과물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라 가장 안전해야 할 인간이 섭취하는 식품들 또한 해당한다. 식품의 발전이란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지는 않지만, 아주 오랜 옛날과 비교했을 때 새로 생긴 여러 음식이 발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음식들이 오랜 옛날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인체에 무해한 청정식품보다는 유해한 식품이 더욱 많다는 것 또한 이를 입증한다. 내게 있어 가장 실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위험이 바로 음식과 관련된 위험이고, 앞으로 이 위험이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을 해본다. 이미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위험사회에 사는 구성원의 하나로써 어떻게 위험사회를 정의하고 방지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사실상 전 세계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떻게 이 사회를 그나마 현명하게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위험사회의 도래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노력 또한 현명함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명함을 전지구적으로 실천할 날 또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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