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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크러셔 ㅣ 밀리언셀러 클럽 45
알렉산더 가로스.알렉세이 예브도키모프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악명 자자한 러시아산 스릴러 헤드크러셔.
난독증 유발이 의심되어 읽다가 포기해야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는 쉽게, 그리고 빨리 읽었던 것같다.
그도 그럴것이, 글속에서 헤메지 않을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기도 했고,
자주 비교되는 척 팔라닉과 견주어봐서도 이 쪽이 훨씬 잘 읽혔기 때문이다.
(척 팔라닉의 난독증 글을 읽다보면 이정도로만 해줘도 감지덕지.ㅠ ㅠ
딱 요정도로만 써줬어도 나는 척팔라닉의 광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과 "아메리칸 싸이코"와 비견된다는 보도자료의 말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척팔라닉이 아메리칸 사이코를 쓴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싶은 마음이 들었다.
REX 은행 홍보실 카피라이터로 일하고있는 주인공 바짐은
사회에, 회사에, 세상 모든것에 불만이 많은 젊은이이다.
사회주의체제안에서 정해진 루트를 따라 가면 당연히 성공길이 열린다고 안일하게 믿었지만,
사회는 갑작스럽게 자본주의사회가 되어버리고, 바짐은 경쟁을 해야할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니 당연히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자신이 좀더 대단한 인물이 될수있을거라고 철썩같이 믿었건만,
경쟁사회로 나와보니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말단직원에 불과해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먹고 살아야하기에, 윗선에 불만을 토로할수도 없고,
바짐의 내면은 점점 사회와 가진자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삐딱한 욕지거리로 난무하고,
상사는 갈구고, 자존심에 상처가나는 욕을 들어먹으면서 회사를 때려칠수도 없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바짐이 하는 짓이라고는 상사 욕, 직장 동료 욕을 컴퓨터에 질펀하게 늘어놓고,
가끔씩 들여다보며 낄낄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왔으면 인터넷에 악플다는 놈이 바로 요런 놈이 아니었을까싶다.
자, 악명이 자자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여기까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이 무려 130페이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앞부분을 얼추 "그래그래. 그래쪄?"하고 넘어가다보면 진짜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여기부터는 훨씬 스피디하게 진행되어서 훨씬 읽기 수월하다.
어느날 한가한 밤 할일없이 거리를 배회하다가, 충동적으로 아무도 없는 회사 사무실로 돌아간 바짐은
그간 자신이 컴퓨터에 저장해놓았던 욕지꺼리를 꺼내보며 낄낄댄다.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 돌아와보니, 맙소사-
자신의 상사가 사무실안에 홀연히 켜진 자신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열받은 상사에게 인간이하의 욕을 얻어먹으면서, 참고 참았던 스트레스가 한번에 폭팔-
우발적으로 상사를 살해하고 만다.
그래. 한번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훨씬 쉬워진다.
한번의 살인으로 이성이 우주로 날라가버린 바짐은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시 살인을 자행하고,
그후부터는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정말로 막가는 인생이 되어버린다.
어쩌다 얻은 총 한자루로 자신감이 채워지고, 몇번의 살인으로 세상 무서워질게 없는 이 젊은이는
이제는 길을 가다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도 그냥 죽여버린다.
한번의 살인 이후, 그의 인생은 점점 그가 즐기는 "헤드크러셔"라는 게임과도 같아진다.
장애물 발견. 빵빵!!
스트레스의 폭팔.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내가 위로 올라갔다는 쾌감.
게임에서 괴물을 헤치우듯이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면 된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귀찮으면 없애버리면 된다.
거울속의 자기자신을 바짐은 도플갱어라 부른다.
자기 내면안에 꼭꼭 감춰둔 오만방자하고 폭력적인 자기자신을.
몇번의 살인으로 도플갱어는 점점 바짐의 목을 졸라오고, 결국은 지배당하게 된다.
이성을 놓아버리고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들떠 가속화되는 인간의 몰락.
바짐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댓가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속의 바짐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이런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은 종종 있다.
불만, 스트레스, 또다시 불만, 욕-
그것은 또다른 이름의 열등감이다.
돈도 되고 빽도 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이 하고싶은 걸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바짐이 욕하는 진짜 이유는 그게 너무나 부럽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 더 초연했더라면, 조금더 만족했더라면, 그리고 조금 더 질투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
사실 따져보면 바짐도 그리 못난 놈은 아니다.
배운거 많고, 직업 반반하고, 먹고살기 빡빡할 정도로 박봉도 아니고, 몸매좋은 디자이너 애인까지 있는데-
경비원의 말처럼, 타인의 눈에는 그가 은행에서 일한다고 거드름 피우며 다니는 인간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
바짐의 투덜거리는 말을 듣고 있다보니, 소설 전반에서 스트레스가 줄줄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점 또한 소설의 긴장감을 배가 시키는지도 모르겠다.
무척 잔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한 기분도 들었던 이유는
이것 역시 그냥 살아가기에 급급한 내게는 하나의 소설로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9시뉴스에 요런 놈이 나왔더라면, 정말 무서웠겠지.)
비행기를 타고 타히티로 떠나는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 문제들이 아직 남아있어서 찝찝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아주 아주 인상적이고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