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직업을 찾아야하는 사람들은 그 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소모시키며 성장시키는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공모전이라는 게 떨어지다, 떨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히스테리까지 생기게 된다는 것도.
하긴 어딘가에 속해야 돈벌이를 하고 살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업에 대한 고충은 있겠지만, 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재능을 단칼에 평가받을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냉정한 시스템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공모전을 통해 당선되는 부류는 거의 신경이 보통 사람보다는 조금 더 예민한 예술가인지라,자신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일에 더더욱 예민할수 밖에 없다.

이 책 "도착의 론도"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지나쳐왔던 공모전들을 떠올리며 은밀히 작가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는 일본 추리 소설계의 권위있는 공모전, 에도가와 란포상이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모두에 떨어졌던 작품이란다. 어쩌면 오리하라 이치는 이 작품 이전에도 더 많은 공모전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작품이 태어나게 된 것에는 이 작가 오리하라 이치가 그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을 재능으로 이끌어낸 작가에게서 놀라운 낙천주의를 발견했다면 착각인 걸까?
게다가 에도가와 란포상을 위한 소설을 써내려 가면서, 뻔뻔하게도 책속의 주인공이 에도가와 란포상에서 고배를 마시는 장면을 집어넣은 작가의 재치와 센스에 웃을수 밖에 없다.
비록 공모전에서도 떨어지고, 옆나라 대한민국에는 20년이나 늦게 소개된 작품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 이 책은 몹시 "익사이팅"한 소설이었고, 책장을 펼치는 순간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멈추지 않고 보았던 소설이다.

소설가 지망생 야마모토 야스오는 월간 추리상에 도전하기 위해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었고, 모아놓았던 돈은 떨어져가는데,
시골에 사는 어머니는 다 때려치우고 내려와서 농사나 지으라고 성화이다.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소설을 완성시킨 야마모토 야스오는 친구 기도에게 소설을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달라고 부탁하게 되는데, 친구 기도는 밤을 새워 타이핑한 복사본과 원고을 가져오던 중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실수를 해버리고 만다.
이에 낙심한 야스오는 기도의 사과도 뒤로한 채 절망에 빠져있다가 급하게 다시 원고를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또 한편에서 어떤 남자가 기도가 지하철에 놓고 내린 원고를 발견한다.
찾아주려다가 호기심에 원고를 읽게 된 남자는 상금과 인세에 눈이 멀어 이 소설을 자기가 가로채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되고, 당선이 되면 방해물이 될 "야마모토 야스오"라는 원작자를 제거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인 사람은 진짜 야마모토 야스오가 아니라, 원고를 운반하고 있었던 친구 기도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남자는 다시한번 야마모토 야스오를 제거하려 하고, 자신의 작품의 도작이 월간추리상을 받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야마모토 야스오는 "시라토리 쇼"라는 멋진 필명으로 데뷔하게된 이 도작작가에게 살의를 품게 된다.

요즘에는 서술형 트릭으로 독자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는 작품들이 꽤 많이 등장해서, 1989년에 출간된 이 책의 트릭이 대단할 정도로 기발하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이 재기넘치는 반전의 연속들에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나는 반정도는 예상하면서 보고 있었지만, 그외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도 많이 등장해서, 소설이 결말로 치닫을 때까지 속아주는 즐거움에서 비롯된 웃음이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거울속에 거울이 또 있고, 그 거울속에 또 거울이 있는 것처럼 예상밖의 사건이 이어져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긴장을 놓칠수 없었고, 희한하게도 살인이라던가 도작이라던가 하는 끔찍한 행위들이 반복되는데도 무척 유쾌해졌다. 작가가 독자에게 걸어오는 이 게임이 그렇게나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도작과 도착이 반복해서 등장해 혼란을 일으키는 말장난처럼 이 소설을 단지 "즐거운 소설"라고 말하기에는 표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같고, 한바탕 장난을 치고 났을 때의 희열감이 느껴진다고 표현하고 싶다.
책소개에 누군가 평해놓은 글귀처럼 이 소설은 정말 "쿨하다!". 그리고 화끈하고, 유쾌하고, 멋지다.
세상에는 트릭이 전부인 소설이 있고, 또 트릭을 알고봐도 재밌는 소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후자쪽였던 것 같다.
이제 재밌다고 유명한 추리소설들은 왠만큼 읽었구나...싶어서 최근에 나온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에서만 느낄수 있는 장난스러운 트릭의 즐거움을 한껏 만끽한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 후기 역시 소설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어놓은 작가의 센스에 반해버렸고,
예상밖으로 너무나 재밌게 봐서 다음 시리즈 또한 열렬히 기다리면서 보게될 것 같다.
(나는 가벼운 느낌의 표지를 가진 책들에 약간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 표지들의 소설은 별로 기대하게 되지 않는데, 예상과 달리 무척 재밌는 경우에는 그런 표지를 영광으로 여긴다!)
얼핏 책뒤 소개를 보고나니 나머지 시리즈들에도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독특한 생각을 하는 작가같고, 텍스트에서만 느낄수 있는 즐거움을 잘 표현해낼수 있는 작가같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올해 읽은 일본 추리소설 중 최고였다고 말하면,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는 오츠이치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음에도-)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간단히 표현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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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1-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어떨까 했는데, 재밌군요~! 공모전 하니 얼마전에 읽은 <미로관>이 생각나요.
재밌는 추리소설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다는!

Apple 2008-11-28 00:28   좋아요 0 | URL
네. 생각보다 엄청 재밌었습니다! 사실 저는 기대안하고 있었던 책이거든요.^^
빨리 다음 시리즈들도 읽고 싶어서 마음이 벌렁벌렁!!

보석 2008-11-28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 전 소설이란 말에 움찔했는데, 애플님 리뷰 보니 읽고 싶어졌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Apple 2008-11-28 16:38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재밌더라고요.^^ 근데 보석님 취향에도 맞으실지는 잘 모르겠어요.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