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녀들이라면 한번쯤은 가져보고 싶었던 지붕밑 방의 로망이 시작된 곳은 아마도 빨강머리 앤에서부터 일지도 모르겠다.
한쪽 천장이 기울어지고, 양옆으로 여닫는 보통의 창문이 아니라 위로 올리는 창문을 열면,
눈의 여왕이 아침을 맞이한 아이를 환영하는 방-이보다 더 낭만적일수 있을까.
(물론 이 이미지는 소설에서보다 어린시절 보았던 TV애니메이션에서부터 기인하겠지만...)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이 사는 전원적인 풍경은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두고 살아가는 낭만과 몽상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책을 다시 보지 않더라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들이지만,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애니메이션 속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풍경보다도 더 진하고 아련하게 떠오르던 가로수길.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사실은 다정한 매튜 아저씨, 낭만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이 엄격하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지만 앤을 향한 모성애가 넘쳐나는 마릴라 아줌마, 통통하고 예쁜 소녀 다이아나와 참견쟁이 린드 아줌마, 갈색눈에 키큰 길버트 브라이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상상하는 빨간머리 소녀 앤이 살아가는 에이번리의 풍경이 아득하게나마 머릿속에 기억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옆집에 살던 남매와 그들과 함께 사는 어린 꼬마아이를 보다가 "빨강 머리 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토록 이 모든 풍경이 낭만적인 동화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곳에서 살아갔고 그곳에서 묻혔던 루시모드 몽고메리가 그곳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사랑했던 풍경을 독자 역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빨강머리 앤"을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거의 20년이 흘렀지만, 이 책은 어린 아이일때 보았을 때처럼 매혹적이었다.
다만, 책을 읽어내려가는 느낌은 달라졌다. 그 사이 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앤 셜리의 낭만적인 모험담이었던 책이 지금 읽으니 달콤 쌉싸름한 성장드라마로 느껴지더라.
앤의 수다와 앤이 일으키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슬픔이 몰려왔다.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노인이 되어가는 시간의 무심함을 어른이 된 나는 느껴버렸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일줄 알았는데, 네가 이렇게 자라버렸구나-라며 마릴라 아줌마가 처음으로 앤의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처럼, 나 역시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밀려왔다. 어린 시절의 모든 사랑스러움과 모험같았던 호기심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찡하면서도 아득하게 슬퍼져버린 것을 어쩌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부족한 게 많아서 상상할 것도 많다는 거야."라던 앤의 말이
어른에게는 비현실적인 몽상이 될수밖에 없어서 부러우면서도 부끄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불안에 안주하며 살아갔던 것일까.
눈을 감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상상하면서 현실의 부족함을 잊었던 앤의 방식이 더이상은 통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 안타깝고 슬퍼졌다. 그리고 "이제는 할수 없다"라고 단정해버리는 사실이, 책속의 모든 사건들이 즐거운 앤의 모험담이 아니라 아련한 기억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슬프다.

올해는 모두가 사랑하는 앤셜리의 100번째 생일이 되었단다.
100년동안 꿈꾸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꿈꾸는 몽상가로 존재할 앤셜리.
그 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몽상과 아름다운 에이번리에 푹 빠져 나는 현실을 잊었다.
꿈을 꾸고 살아갈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소녀일수 있을까. 지금보다 30년쯤 나이를 더 먹고도, 그렇게 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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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8-11-2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어릴 때 봤던 기록이 새록새록나면서 재밌네요 :)
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보고 있는데, 요 책도 땡기네요 ㅎㅎ

Apple 2008-11-25 23:04   좋아요 0 | URL
네..저도 오랜만에 읽어보니 무척 재밌더라고요.^^
근데 100주년 기념판인데 오타가 좀 보여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