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아니하고, 거울속의 나하고 얘기를 나누는 희대의 낙천녀 캔디같은 아이가 여기에 또 있다. 이 아이는 외롭고 슬플때면 울기는 하지만, 책장 유리문에 비친 자기자신에게 이름을 붙이고, 저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에 이름을 붙이는 등 캔디보다 더 한 짓을 한다. 그 아이가 그 유명한 "빨강머리 앤"이다.

버지윌슨이 지은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루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앤"의 속편격의 소설로, 커스버트 남매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원작 "빨강머리 앤"에서는 그다지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던 앤셜리의 구체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데, 소설 자체만으로는 무척 매력적이다. 원작만큼이나 흡인력있고, 동네 꼬마라도 알법한 앤셜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부여해놓아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갈수 있는 소설이다.
선생님이었던 부모에게 태어나 10달째 되던 해에 열병으로 부모를 잃고, 부모님의 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토마스 부인에 의해 여덟해를 길러지고, 그리고 해먼드 부부에게 두 해를 길러지고, 4달간 고아원에 있기까지- 버지 윌슨의 앤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행보를 걸어나간다.
누구나 아시다시피, 열악하기 그지 없는 환경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초인에 가까운 낙천주의자인지라,이런 환경에서도 밝게 자라났고, 그렇게 커스버트 남매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무척 재밌게 읽고 나서는, 루시 몽고메리의 원작 "빨강머리 앤"을 속히 펼쳐 들었다.
워낙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라, 전체적인 이야기와 사건들은 모두 기억하는데 섬세한 사실들은 놓치고 지나갔었다.
원작과 이어서 보다보니, 이 책이 무척 섬세한 솜씨로 태어난 후속작은 아니더라.
원작과 매치되지 않는 부분도 꽤 있고, 무엇보다도 버지 윌슨이 창조해낸 앤은 철이 든 아이라는 점이 다르다.
8명의 아이를 돌보는 앤. 지치고 힘들고 때로는 절망해도, 결코 어른들을 무조건적으로 원망하지는 않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기특한 아이가 버지 윌슨이 창조해낸 "앤 셜리"라면, 루시 몽고메리의 "앤 셜리"는 거두어준 은혜도 깜빡하고 요구하는 것도 많은 철없는 수다쟁이 아이였다.
두 앤셜리는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버지 윌슨의 "앤 셜리"가 꿋꿋하고 어른스럽다면, 루시 몽고메리의 "앤 셜리"는 철이 없어 귀여운 아이이다.
버지 윌슨이 원작이 있는 소설의 후속편을 쓰면서 행한 가장 큰 오류는 아마도 앤셜리에게 너무나 많은 고난을 짊어지게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앤 셜리가 커스버트 남매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날개를 달고 날라갈 정도의 일이라, 간혹 앤이 "이런 저에게 지금 당장 설겆이를 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마릴라 아주머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떼부림에 불과해져버린다. 이런 삶을 살아온 앤이라면, 설겆이 정도야 감지덕지이지.

그럼에도 나는 버지 윌슨의 "앤 셜리"가 더 좋다.
그녀가 창조해낸 앤 셜리에게는 아픔이 있고, 그에 걸맞는 절망이 있고, 거기에서 파생된 정당한 인격이 부여된 느낌이다. 원작이 무척 즐겁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앤 셜리의 초인적인 낙천주의와 변덕은 어린 나로써도 버겨운 것이었다.
빨강머리 앤은 어린 시절에 무척 즐겁게 읽었던 소설이기는 하지만, 나는 어릴때부터 이 시끄러운 아이 "앤 셜리"를 싫어했다.
철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지나치게 다혈질인데다가 변덕이 죽끓어서 엄청나게 절망했다가 곧바로 헤헤대는 이 계집아이가 나는 싫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사랑했던 것은 프린스 에드워드섬의 동화같은 분위기와 무뚝뚝한 마릴라 아줌마와 부끄럼쟁이 매튜 아저씨가 만들어내는 모성애와 부성애가 뒤섞인 따뜻함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원작인 "빨강머리 앤"과는 무척 다른 느낌의 앤셜리를 볼수 있는 소설이었고, 빨강머리 앤의 팬이라면 꼭 읽어볼 법한 책같다. 어른이 읽어도, 아이가 읽어도 즐거운 앤셜리의 이야기. 따뜻하고 뭉클하게 가슴아픈 이야기이도 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입체적인 과거와 성격을 부여한 사실이 제일 마음에 들고, (소설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속물이면서도, 인간적이다. 못된 부분과 착한 부분이 공존하는 정말 인간같은 느낌이었다.) 버지 윌슨은 캐나다에서는 엄청 유명한 작가라고 하던데,  이런 섬세한 점이 오래된 작가의 관록일 것이다. 100년간 베스트셀러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작가로써는 거의 도전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도 욕먹을 위험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렇게 자신만의 앤셜리를 창조해낸 작가에게 경외감을 표하고 싶다.

책을 보는 내내 캐나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과 봄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변덕스러운 봄과 끝도 없이 등장하는 요정이 나올것같은 울창한 나무숲, 겨울에는 허리까지 찬다는 눈밭까지... 냉혹한 자연환경이면서도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그곳에 가면 어디선가 앤 셜리가 물을 긷고 있거나 계란을 사러 달려가는 것을 볼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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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1-2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때 영국에서 전학온 친구 집에서 BBC의 빨간머리앤을 본 적 있어요. 아역배우들 캐스팅해서 그 배우들이 20여년간 찍은 드라마인데, 그냥저냥했던 애들이 어찌나 이쁘고 멋지게 자라던지 특히 오.. 길버트;;

BBC는 드라마를 하나 만들어도 대- 단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Apple 2008-11-24 16:40   좋아요 0 | URL
와, 대단하네요. 드라마를 20년간 찍었단 말이예요?ㅇ.,ㅇ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