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우물 1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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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은 고독의 연속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독하게 태어나 고독하게 죽는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덜 외롭게 살아갈수 있느냐는 그 고독을 얼마나 견딜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 같다.
단 몇분의 고독함도 견딜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고독해도 견딜수 있는 사람도 있다.
누가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질기냐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조금 더 고독했던 여자가 하나 있다.
좋은 부모에, 아름다운 저택, 팽생 넉넉하게 써도 남을 재산을 가지고도 이 여자는 고독한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여자는 한번도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남자의 영혼을 가지고 산다.
이름도 스티븐. 아들을 바라고 낳아놓았지만 딸이 태어나자 태명을 그대로 딸에게 지워준 부모가 문제였을까.
어린 시절부터 남장하기를 좋아하고, 예쁜 하녀를 짝사랑했던 이 소녀 스티븐은 그녀의 성정체성을 그녀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그녀를 향한 연민에 부족함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세상에 버려져버린다.
자신이 낳아놓고도 문득 문득 딸에게 섬뜩함을 느끼던 어머니와의 관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도식적인 냉랭함만 감돌뿐이었고, 스티븐이 처음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을 알아버린 어머니는 급기야는 자신의 딸에게 혐오감마저 표시하며 "네가 내 눈앞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망언까지 해버린다.
스티븐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뒤쫓는 기이한 시선들에 지치고 어머니에게조차 거부당해버린 채, 홀로 살아남기를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그녀가 이 세상에 꿋꿋이 존재하기 위해 그녀는 성공해야했고, 그래서 꽤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곁에서는 어머니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주는 다정한 선생님도 있지만, 어딘가 늘 허전하고 버려진 느낌이 든다.
그러다 그녀를 만난다. 자신보다 열살이나 어린 소녀같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허우적댈 때는, 그 사랑이 족쇄가 되어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현실앞에 내동댕이쳐 질지는 전혀 알수 없었다. 유일한 평안이자 구원이었던 그 사랑은 점점 치명적인 고독과 혼란으로 치닫는다.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어느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이고 연인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나 자신이 될수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무형의 벽은 결국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의 멍울을 만들어내게 된다. 내가 네가 될수 없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쓸쓸한 진리이다.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을 온전히 알수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있어도 고독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혼자라는 사실만 남는 순간, 사랑이 주는 것도 아닌, 세상이 주는 것도 아닌 본질적인 고독이 찾아온다.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고독의 우물>은 세상에 거부당한 채 태어난 한 여자의 이야기를 치명적인 사랑과 본질적인 고독이라는 주제 안에 담고 있는 소설이다.
"변종"이라 불륄수 밖에 없는 이 여자의 가련한 인생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내심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랬었는데, 소설은 페이지가 더해갈수록 지독하게 고독해지고 만다.
그것이 진리라 말하는 세상에 이해받을수 없는 사랑을 하면서 부숴지는 연인들의 마음이 고독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면 혐오감을 느낄 사람들의 보수적이고 냉정한 마음이 고독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안에서의 존재감마저 휘둘리고 마는 스티븐의 마음이 고독하고,
스티븐이 사랑한 메리의 나약한 의존성이 고독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면서도 애써 사랑을 져버려야하는 마음이 고독하다.
 
온통, 자신을 향한 거부와 혐오로 가득찬 것 같은 이 끔찍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녀를 잃고 스티븐이 살아갈수 있을까.
한 평생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험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갈수 있을까.
그 적막한 고독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녀가 사랑할수 있을까.
그 사랑을 잃는 순간,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게 비극적인 실연이 또 있을까.
참으로 모르겠는 일이다. 그저 사람 하나 사랑할 뿐인데, 이렇게도 수많은 물음과 고민들이 생겨나는 것은....
소설은 모호하게 끝나버렸지만, 나는 그 참담한 끝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마음이 조여왔다. 나는 스티븐이기도 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존재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본 적,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는 불안함에 치를 떨어본 적, 나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스티븐의 이야기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책을 덮으면서 거대한 폭풍같은 슬픔이 몰려왔던 것이리라.
 
<고독의 우물>은 평생 남장을 하고 살았다던 작가 레드클리프 홀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라던데, 1928년 출판되었던 당시에는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해를 받았던 소설이란다. 역시 발간 당시 금서였던 <모팽양>이 다소 엽기적이고 발랄했던 것에 비하면 <고독의 우물>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절망을 훨씬 더 농도깊게 다루고 있다. 물론 두 소설 다, 지금 보기에는 문제될만한 문란함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저 소설의 소재 자체만으로도 탄압을 받았던 시절이있다니 실제 그 시절의 소수자의 고통같은 것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한 문제이다. 최근 몇년간 읽어보았던 동성애 관련 소설들중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절망적이어서, 재밌게 읽었음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단지 동성애뿐만이 아니라 어느 방면에서든지 자신이 다수의 평범함과는 다르다고 느끼는 것에 괴로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나, 존재의 고독함에 치를 떨어본 적이있는 사람이나,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본 적이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이자, 현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독한 조언자가 될 것이다.


올해 내가 누군가에게 단 한권의 책을 추천할수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물론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자체만으로도 죄악시하는 호모포비아들은 제외하고.
사랑과 세상에 상처받아 마음이 조각난 사람이 있다면, 또 이 책을 추천하겠다.
물론 이 지독한 소설에 치유력은 전혀 없다. 그저 적어도 시원하게 실컷 우시길 바란다.
 

p.s 혹시 이 소설을 읽고 재밌어서 이런 소설을 더 찾아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핑거 스미스>와 <모팽양>을 슬쩍 추천해본다. 세 소설 다 매력은 다르지만, 모두 푹 빠져들어 즐겁게 읽을수 있는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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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9-2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 추천받고 <핑거 스미스>샀어요!!ㅋㅋ 아직 정신없어서 읽진 못했는데,
엄청 기대중입니다. 아, 이 작품도 사야겠어요 약간은 블루한 분위기 작품, 좋아합니다ㅋㅋ 시즈님 엄청 우셨어요? 저도 책읽다 잘 우는데, 이거...ㅎㅎㅎ

Apple 2008-09-22 02:12   좋아요 0 | URL
우헤헤...핑거스미스는 분명 쥬베이님도 마음에 드실거예요.^^두껍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아요.
이 작품도 굉장히 좋은데, 마냥 블루하지만은 않습니다. 뒤로 갈수록 그렇고요.^^; 저는 보면서 울지는 않았는데 보는 내내 참 기분이 외로워지더라고요.
일단은 무슨 이야기든 재밌는 소설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