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 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그랑블루>를 기억한다. 그 새파란 바다와 무호흡의 세계에서 점점 고요해지는 자아속으로, 또는 자유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
나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멈추어 느리고, 자유롭고, 그리고 파랗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검은선>에서 등장하는 연쇄살인마 르베르디가 꿈꾸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호흡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저 깨끗하고 청명하기만 한 자아정체의 안정감에서 오는 자유. 그것은 무한한 순수이면서, 절대악이기도 했다.
 
한때는 무호흡 잠수 챔피언 르베르디가 어느날 말레이지아 연쇄살인마로 변모한 채 세상에 드러난다. 그리고 파리에 살고 있는 전직 파파라치 출신의 범죄전문기자 마르크는 이 사건을 주시한다. 어째서일까. 단지 특종을 잡고 싶었을까.
사랑하는 친구 다미코와 사랑하는 여인 소피를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에서 떠나보낸 후,
마르크는 쏟아져나오는 세상에 대한 무기력함과 악의 본질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왔다.
대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있지? 어떻게 인간으로써 이렇게 잔혹한 짓을 저지를수가 있지?
그의 악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은 점점 집착으로 변해가고, 르베르디의 소식은 그의 집착에 불을 당긴다. 마르크는 그 악의 심연, 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마음이 존재할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는 말레이지아에 구금되어있는 연쇄살인마 르베르디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계산하여, 작전을 짜고, 관심을 가지도록 자신을 여자라고 밝히면서.
마르크의 편지는 르베르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르베르디와 마르크는 서로 떨어져있는 상태에서 교신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악의 심연을 향해. 죽음과 공포만이 늘어선 검은선을 향해.
마르크는 르베르디의 지시에 따라 그의 발자취를 따라 움직이면서,그 악의 핵심에 다다를수록 두려움과 경외감, 알수없는 흥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타 스릴러 장르와 <검은선>이 다른 점이라면 일단 범죄를 추척하는 목적성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들수 있겠다. 마르크는 특종을 잡기 위해, 또는 이 살인마를 응징하기 위해 르베르디를 쫓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집착하며 품고 있던 악의 본질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커지고 커져, 정확한 실체를 필요로 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는 자기안의 악을 찾아간다. 자기내부에 숨겨진 폭력성을 되찾아가는 일종의 악의 성장드라마랄까.
적어도 프랑스내에서는 스티븐 킹을 따를 자는 이 사람밖에 없다던데, 개인적으로는 스티븐킹보다 한수위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이한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와 적절히 속도감을 잡아 긴장감을 서서히 팽배시키는 점 또한 이 소설의 아주 근사한 장점중의 하나이다.
아주 흔하고, 그저그런 통속소설이 아닌 한격 격조높은 웰메이드 스릴러, 극찬받아 마땅한 멋진 소설이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참 재밌는 장르이다.
이 장르에 대한 나름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구조상에 숨어있는 트릭이나 수수께끼를 찾는 것에만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추리소설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내면의 심연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장르가 아닐까.
자신도 알수 없는 내면의 비이성적인 부추김이나 숨기고 싶은 욕망들은 이렇게 꺼내보면 참 신기하다. 이런 면도 가지고 있고, 이것 역시 어쩔수 없는 본능중에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이랄지, 죄책감이랄지, 안도감이랄지, 복잡한 심정을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장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악을 가지고 있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산을 뛰어다니고, 바다를 건너고, 짐승을 잡아먹던 우리 역시, 근본은 동물이라는 점은 피할수 없는 사실이고, 다른 마음과 더불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악, 본래부터 존재하는 육식동물같은 폭력성 역시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얼마나 이상한 욕망, 또 얼마나 가학적인 폭력성을 지니고 있을까.
우리 중 아무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극단적으로 비틀어진 경우를 예시로 들어 그 본능적인 폭력성을 여행하는 묘미가 바로 추리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스릴러는 무척 고상한 장르라 말하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한 편에서는 단순한 시간떼우기 용으로 가볍게 여기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쓰려는 이유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유럽쪽에서도 헐리우드 스타일의 스릴러에 대한 남모를 동경이 있었던지, 최근의 유럽 스릴러 소설을 읽다보면 유럽 스타일의 철학적 사색과 미국 스타일의 속도감을 갖춘 똑똑한 스릴러들이 꽤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어쨌거나 얼마번에 본 <악의 심연>도 그렇고 이번에 본 <검은 선>도 그렇고, 무척 정교하고 심도높은 고밀도 프랑스 스릴러이었다. 사실 작가들이 몽상가인 나머지, 뜬구름잡는 얘기를 늘어놓거나, 지나치게 냉소주의에 빠진 나머지 객관적으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는 프랑스 소설은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새로운 발견이다.
요즘 프랑스 스릴러 무척 삼삼하구나. 신난다.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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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4-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 이거 정말 재밌죠??^^
저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에 빠져버렸어요.
스티븐 킹보다 한수위라는 평가, 완전 동의합니다. 정말 대단한 작가에요.
이번에 새로 나온 <황새>읽었는데, 이 작품도 환상입니다ㅋㅋㅋ
데뷔작임에도, 감탄만.....

Apple 2008-04-1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벌써 새책이 또 나왔나요?ㅇ.,ㅇ 빨리 읽어봐야겠네요! 이책 정말 재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