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있는 거다, 훌리안. 비록 그걸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말야."
 
세속에 찌들어 살아가는 내게, 세상에 사랑은 딱 한번 있다는 말은 뜬구름잡는 몽상가의 말이나 다름없다.
첫사랑도 사랑이었고, 마지막 사랑도 사랑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한 세월동안 단 한명의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그러기를 바란다.
일생에 단 한명만을 사랑하고 영원히 함께 할수 있기를. 비록 그게 꿈일지라도.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지만, 삶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런 우직한 낭만을 찾기를 바란다.
책에서, 그림에서, 스크린에서, TV에서.
예술작품이 존재하고 오랜 세월동안 다른 형태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사람은 사라져가도, 작품은 길이 남는,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얼마 안되는 영원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리라.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꼬마 다니엘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름마저 황홀한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잊혀진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어째서인지 세상에 단 한권뿐인 책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
다니엘에게 그 책은 친구였고 환상이었고, 추적해야할 미스테리였다.
<바람의 그림자>의 저자 훌리안 카락스의 인생을 뒤쫓으면서, 다니엘은 알수 없는 위협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생각보다 더더욱 거대한 미스테리에 봉착하게 된다.
잊혀진 사람, 잊혀진 책, 그리고 잊혀진 사랑.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다니엘과 베아트리체의 사랑은 그 옛날, 책 밖에서 이제는 잊혀진 한 사랑 얘기와 겹쳐지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라틴어권 소설들이 그렇듯, 수려한 문체와 우수어린 분위기를 자아내며 단지 글만으로도 황홀한 <바람의 그림자>는 읽는데 꽤 오래걸린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났을때 다시한번 들춰봐야할 필요성을 느낄만큼 매혹적인 작품이다.
잊혀진 무언가를 찾는 것은 어찌나 황홀하도록 매력적인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숨가쁘게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그 사랑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또다른 비극에 빠지고 모든 것이 파탄나 버려도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과 사랑이야기.
이야기가 거듭되어 잊혀진 사랑의 실체들이 서서히 드러났을 때 이미 나는 책속의 사랑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줄을 몰랐다.

운명의 장난이란 이런 것이리라.
하나의 사랑이 더 많은 비극을 낳게 되는 이 이야기속의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어서 버리고 싶은 사람 하나 없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순수한 청년 다니엘과 그가 사랑하는 친구의 누나 베아트리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모성애만큼이나 부성애 역시 애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니엘의 훌륭한 아버지,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재간둥이 페르민(누가 이 사내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을까!),
고독을 몸에 세겨넣은 채 살아가는 잊혀진 작가 훌리안 카락스, 그가 사랑하는 페넬로페,
훌리안 카락스를 사랑하게 되고 끝까지 그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여인 누리아,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면서 그녀의 다른 사랑을 지켜주려 애쓰는 미켈,
비극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삶이 증오를 들이마시고 내뿜으며 살아가는 악마 푸메로...
비록 이 소설이 안개에 쌓여있는 폐허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일지라도,
주인공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힐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와 그들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게 만들수 있는 힘은 아무 작가에게서 나오는 힘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게있어, 안개 끼인 쓸쓸한 거리를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아이가 인쇄된 이 책의 표지와 딱 알맞는 우수 어리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애증의 대서사시와 거의 마술과도 가까운 수려한 명문장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걸작이다.
순문학과 추리소설, 고딕소설을 아우르는 이 우아한 소설을 사다놓은지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읽어버렸지만, 근래에 이렇게 가슴벅찬 경험을 책에서 찾기 힘들었던 가운데 이 책을 읽을수 있어서, 그리고 이런 작가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세상에 감사하게 되었다.

안개와 오래된 책의 냄새, 운명적인 비극에 봉착한 연인들, 잊혀진 역사.
사람은 유한하고, 세월은 잔인하게도 정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생애에서
무언가 남기고 떠나는 것이 있게 마련인 가보다.
무너진 바르셀로나의 회색 거리 그 안쪽의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내 발걸음도 사라져갔으면 좋겠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1-16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한 <바람의 그림자>네요. 그냥 이름만 들었는데, 시즈님 서평 보니 읽고 싶어요^^
와~ 수려한 문체와 우수어린 분위기...기대 됩니다.

Apple 2007-11-1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쥬베이님도 즐겁게 읽으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