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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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 겨울과 관련된 차가운 것들을 뜻하는 한자중에 얼음 빙(氷)자의 모양은 어쩐지 그 뜻처럼 차갑다.물 수자에 점을 하나 찍은 모양. 어딘지 비어있고, 그래서 공허하다.
책을 다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페터회의 초장편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느낌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낼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빙. 얼음. 차갑고 깨끗한, 이국적인 풍미마저 느껴지는 차가움의 결정체-
스밀라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하늘에서 소복소복 떨어지는 눈이 아닌, 단단히 맺혀서 물위를 부유하는 빙하처럼 종잡을수 없는 방랑자에 냉소적인 차가움, 먼 나라에서 온 신비로운 이국의 여자.
 
스밀라는 그린란드 출신 덴마크인이다.
네셔널 지오그래픽에서나 가끔 볼까 말까한 생소한 나라 그린란드, 스밀라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 인간을 알기 전에 야생을 먼저 알았다.
때때로 그녀는 그린란드를 추억한다. 그 곳에서의 생활과 강인한 북극곰같은 어머니를 추억한다.
기계과 건물이 지배하고 있는 것같은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칠때 쯤에는 때때로.
냉혹한 현실의 세계, 그녀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꿈의 차가운 유년의 세계.
스밀라는 덴마크와 그린란드, 두 나라에 걸쳐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한다.
덴마크에서 살기에는 차가운 야생에 길들여져 있고, 그린란드로 돌아가기에는 삭막한 현실에 발이 묶여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나, 어디에나 다 속하는 여자 스밀라는 책에서 그녀 자신이 언급하듯이,
폐배주의에 찌든 사람들에게 정을 느낀다.
불쌍한 사람, 낙오된 사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 소속감이 부족한 사람- 그것은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부유물처럼.
모든 것에서 떨어져 관조하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이웃집 소년 이사야의 의문의 죽음에 반기를 들고 뛰어든 이유는이사야 역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자식을 방치해두는 매정한 어머니에게서 낙오된 채, 불완전하게 세계에 섞이지 못하는 꼬마아이 였기때문에.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나마 정을 붙일수 있는 자신과 닮은 낙오자의 죽음에 깊이 한탄한 것은 아닐지.
스밀라는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이사야의 죽음을 파해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래본적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그것은 "희망"을 보기위해서가 아니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밀라에게 있어 세상은 희망이나 사랑, 인간애따위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열망과 차가운 관조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대변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혼자 존재하면서, 모두가 혼자이기 때문에 끌어안을수 있다.
스밀라가 이사야를 끌어안아 서로의 고독을 핥아주었듯이...
 
스밀라의 기나긴 여정이 도시를 두번 거쳐 바다를 지나 진실을 알게되는 얼음에 도달하고 나서야, 우리는 진실에 가까운 무엇에 도달하게 되지만, 스밀라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마치 세상은 쉬이 결론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언가로 꽉 체워진 얼음같은 세계 같다고 말하듯이....
그녀가 파해친 아이의 죽음과 더 깊고 찐득한 세상의 거대한 비밀들.
세상에 사랑이나 동정심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애를 보여주는 스밀라.
그 모든 것이 다 차갑게 느껴지기는 해도, 사실 우리는 모두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암흑이고, 두려움이고, 냉혹함의 연속이라고 해도, 결국 그 안의 인간은 타인의 온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여정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내내 서늘한 기운을 느끼다가 불현듯이 손끝이 차가워진다.
스밀라를 지배하는 얼음, 눈, 빙하, 차가움- 온갖 차가운 것들을 바라보며, 인간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차가운 손끝을 나눌수 있는 또다른 고독한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모두가 외롭다. 하지만 외로운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끔은 위로가 될때도 있지 않을까.
스밀라의 눈과 얼음의 세계에 온기를 나눠주기를 갈망하는 소년이 제멋대로 처들어 왔듯이,
늘 혼자라고 느껴도,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밀라의 말처럼, 어쩌면 인생은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을 위한 과정을 반복하는 성장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결정나지 않을 인생에서, 지치고 차가워진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아주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서른일곱 살이다. 50년 전 툴레에서 그나이는 평생 수명에 해당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걷는 데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누군가 내 뒤에 나타나 따귀를 때려주기를 바라고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모리츠가, 무언가 외부의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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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11-1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산지는 꽤 됐는데, 아직까지 못읽고 있답니다-_-
시즈님 서평을 보니 얼른 읽어야겠어요~

Apple 2007-11-13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고보니 저도 산지 1년 반이 넘어서야 읽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