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 상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9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 해문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아서, 세상의 그 수많은 우연들은 어쩌면 필연으로 귀결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전생과 환생이 존재한다면,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우리는 만나서 알게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본인들조차 알지 못하는 세상의 수많은 인연들에 숨겨진 비밀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
<인간의 증명>.
인간의 무엇을 증명한다는 것일까.
당신의 무언가를 증명해보라고 하면, 당신은 어떤 것을 증명해보일 것인가.
인간은 무엇때문에 인간으로 불뤼는 것인지,
인간은 무엇을 찾기 위해 이다지도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바는 과연 무엇일지....
소설을 읽고 나서 많은 철학적인 물음들이 머릿속에 주어졌다.

뉴욕 할렘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던 흑인 청년 하나가 먼 일본 도쿄에 와서 살해당한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아니 빠듯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남루한 삶을 살던 이 흑인청년은
무슨 돈으로 일본까지 여행왔으며, 하필이면 여행중에 도대체 누구에게, 왜, 살해당한 것일까.
또 한편으로는 뜬금없는 고국에서 조차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밑바닥 인생 흑인청년의 부고소식에
내심 귀찮아하는 일본 형사가 이 사건을 두고 난감해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후, 미군에게 죽도록 맞아 아버지를 잃은 과거가 있다.
세상을 향한 배신감과 복수심으로 그는 형사가 되었다.
그는 살인자를 잡고 싶어한다. 흑인 청년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악랄한 세상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편으로는 뉴욕의 한 경찰이 등장한다.
건물 몇개를 사이에 두고, 엄청난 부자들의 천국과 생존본능과 폐배감만 남은
온갖 쓰레기같은 인생들이 버글대는 할렘이 공존하는 뉴욕-
갖가지 이유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나가는 악의 구렁텅이 할렘에서도 모잘라서,
골치아프게 어느 얼간이가 일본까지 가서 살해당했다.
귀찮다. 그러지않아도 해결해야할 일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조사해보기로 한다.

또 다른 편으로는 일본의 한 가정이 등장한다.
국회의원인 아버지에,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엄청난 명성속에서
이 가정은 동화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름다운 가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와 매스컴의 긴밀한 결탁, 아들마저 출세에 이용하려는 어머니의 야심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아들 교이치는 허래허식밖에 남지않은 가정에서 혼자 빠져나와
부모의 돈을 펑펑 써가며 고급 맨션에, 고급차에, 매일같이 무리를 끌고 다니며
마약과 방탕한 섹스에 취한 전형적인 부잣집 골치덩이 아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안정적이기 그지 없는 가정,
그러나 펼쳐보면 그 안에서 아이들은 상흔으로 썩어 들어간다.

또 다른 편으로는 아내를 잃어버린 남자가 등장한다.
데리고 다니면 누구나 한번쯤 뒤를 돌아보고, 세상 어느 남자나 침을 흘리는 아름다운 아내.
혼자만 숨겨두고 보려했던 아내가 남편의 실직과 건강 악화로 고급 술집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지고 만다.
남편은 애타게 아내를 찾아나선다. 경찰에 말해봤자 바람나 도망쳤다는 말을 들을게 뻔하기에,
자기 두 발로 아내를 찾아나선다.

이 수많은 주인공들은 도대체 어떤 인연이 있기에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게 되는걸까.
소설을 거의 다 봐 갈때까지만 해도, 부분적으로 예상할수는 있었으나 전체적인 감이 오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느낌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 읽고 나니 "아!!"하는 탄성이 지어진다.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무척 좋고, 어두운 사회 구석구석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시선도 멋지다.
사실, 나는 본격추리보다 사회파 소설쪽을 조금 더 좋아하긴 하는데,
볼 때마다 나의 경직된 사고에 반성하게 된다.
세상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에서, 보여지는 것만으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어쩌면 단지 '귀찮기 때문에' 더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보려 하는 노력을 할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사회파 소설을 읽을때 느껴지는 작가들의 속 알맹이를 파보려는 집요하고도 유연한 사고에
언제나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자는 언제나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나도 그럴 때가 많다. 자기부터 챙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지 않나.
모든 것에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나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듯,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인척 하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한다.
누구나 타인에게 질책당하는 것 보다, 나의 피해 사례를 털어놓고 내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받고,
동정받기를 바란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지하게 되면 절망에 빠질지도 모르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나의 과거의 오류를 다시금 생각해보고,
사고의 유연함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떳떳히 인정하며, 모든 일에 있어 피해자가 나만이 아님을 정확히 알게될 때 쯤에 우리는 더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찾기 위해 삶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짓는 것- 최소한의 진심이 아니려나.
우리는 가끔, 인간따위 믿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도, 예상 외의 믿음을 보기위해 기대한다.
그것이 깨어지면, 다시 "그럴줄 알았어"라고 비웃어버려도, 내심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다.
인간에 지치고 삶이 고단한 소설속의 모든 사람들-
인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희박한 믿음을 그리워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으로....

나는 기대를 깨어버리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기대를 깨어버리는 인간이 아니길 바란다.
세상이 어떤 우연과 오해의 소용돌이로 나를 절망으로 떨어뜨릴지 몰라도,
사실 우리모두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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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0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참 좋아서 증명 시리즈 다 봐야지 했다가 야성의 증명에서 무너졌습니다^^:;;

Apple 2007-02-0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래요? 야성의 증명도 볼까...생각했는데....

물만두 2007-02-1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볼만은 합니다. 추리적으로는요. 근데 무지 찝찝합니다. 나쁜넘이 많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