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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평점 :
흥미롭지만, 흥미롭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엮어놓은 "경성기담"은
근대 조선, 그러니까 일제시대에 일어났던 특이한 사건들을 엮어놓은 책이다.
1부에서 다룬 살인, 범죄 관련 사건과 2부에서 다룬 스캔들 관련 사건들-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실리지는 못하지만,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을 좀더 흥미롭게 볼수 있는 사건들을 모아놓았다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이 사건들이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은 이유는
일제시대를 겪어온 우리의 과거사를 끄집어 내 씁쓸한 느낌을 들게 하고,
당시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또한 여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가 잔혹한 "단두 유아 사건"-대낮에 경성 거리에 뒹굴고 있던 잘려진 한살짜리 아이머리를 둘러싼
근 한달간의 추적 이야기는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 듯 먼 발치에서 구경하는 입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일어난 사건도, 드러난 진실도 씁쓸해지는 이야기로 이 책의 포문을 여는 가장 하드고어한 이야기였다.
일제시대, 마음 갈곳 없는 식민지 사람들의 마음을 뺏고 돈도 뺏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아버린
역대 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 사건이 되어버린 백백교 사건은 지금 돌아봐도 무척 충격적인 사건이다.
시사프로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때마다
"왜 저런 시시한 종교에 빠질까?"하는 의구심이 들곤 하는데,
책을 보면서 이런 우스운 교리로도 사람을 혹하게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틀러는 뭐 설득력 넘쳐서 지도자로 선택이 되었나....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라는 것은 참 무섭다. 악용되었을 경우에는 더 무서워진다.
식민지 시대의 인권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던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 사건"과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죽이지 않았어도 죽이는 게 되었던 억울한 조선인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대상처럼 암울한 이야기들을 다룬 1부와 달리 스캔들을 주로 다룬 2부는 그나마 즐거운 부분이지만,
나라를 팔아 번 돈으로 흥청망청 자산을 탕진하고도 모잘라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죽기전까지 도피생활을 했던 윤택영의 이야기에서 알수 있듯,
나라 판 돈으로 재산은 있지만, 그렇다고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딱히 할 일은 없었던
당시 귀족들의 나태하고 사치스러운 삶의 모습이
고생하고 차별받으며 살았던 민중들만큼이나 허무해 보이는 것은 왜 일지...
사랑에 빠져 가족과 의무를 져버린 예술가의 이야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여제자 성추행 사건,
재산을 둘러싼 이인용 부부의 부부싸움 이야기를 거쳐,
책의 후반부로 가면 여자로써는 무척 씁쓸하고 슬픈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리 잘나도 여자였기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 두 신여성들의 이야기-
특히 나라의 발전에 헌신하기 위해 그 먼 스웨덴까지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
겨우 콩나물 파는 여자로 전락해 27세에 쓸쓸하게 죽은 최영숙 여사의 이야기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스웨덴 최초의 동양여자였으며, 황태자의 신봉을 받는 학자였으며, 5개국어에 능통했고,
남달리 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있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면 무엇을 하랴.
이 썩어 문들어진 나라는 여왕처럼 한평생을 누릴수 있을지도 몰랐던 여자 학자를 아무데에서도 써주질 않고,
그녀의 초라한 사후에 세상이 관심을 갖는 부분이라고는 고작 뱃속의 혼혈아의 출처뿐인데....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말이 잘 어울릴 법한 이 책의 사건들은
역사서에는 한줄 이상 기록된 바 없는, 그러나 신문자료를 모아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마냥 "항간에 떠도른 소문"이라고 보기는 힘든 사건들이다.
역사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개개인의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교과서에서 배운 일제시대 역사보다 이런 책이 더 각인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루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것이 진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사생활로 알아본 식민지 조선의 이야기-허무하기도 했고 한숨이 나기도 했고, 마음이 아파지기도 했다.
먼 미래에 지금의 역사서를 쓴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관심사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겠지.
화려하게만 보였던 여가수가 자살을 하고, 어디선가 토막난 시체가 발견되는 그런 이야기-
거시적으로는 역사를 바꿀만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이것들이 모여 시대상을 만들어가는
죽으면 역사서에 한줄 실리지 못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언젠가 먼 미래에 누군가 그런 이야기들을 엮어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