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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ㅣ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당장 구입했다. 이런 책 발견하면 마치 살얼음 낀 동치미 맛이 혀끝을 지나 빠른 시간에 뇌로 전달되는 기분이다. 패널이자 저자인 김상봉 교수는 한국 사회의 일보전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로 도덕교육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국정 교과서인 도덕 과목은 낡은 노예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선봉에 서 있다. 이 테크놀러지의 첨단을 향유하는 현대인에게 개인의 자발적 선택을 무시한 채 전통과 질서의 옷자락만 부여잡으라고 설교하는 측면에서는 일리있는 주장이다.
딸 아이 때문에 자연스레 접한 중학교 도덕 교과서(중 1 기준)는 거의 반이 '예절'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의 비판처럼 우리의 예절교육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헌사를 의미한다. 진정한 예절은 상호 호환성에 있지 않았던가. 예절에 대한 강자의 그 어떤 역할도 약자만큼 구체성과 강제성이 따르지는 않는다. 제도권의 이러한 지속적이고고 뭉근한 교육의 힘(?)은 약자에게 근거 없는 주눅과 스트레스라는 원하지 않는 선물을 안기고야 만다.
일례로 우리의 도덕 교육에 따르자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만으로도 어린아이는 졸지에 버릇없는 자, 가정 교육이 엉망인 자가 되기 십상이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의 본질이 인간 심성의 참된 교류에 있지 결코 위계질서의 선후를 따지는 치졸함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 교육은 나아가 여성을 보는 시각조차 편벽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덕 교과서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댁의 어린 여자에게는 '아가씨', 자신보다 어린 미혼 남자에게는 '도련님', 기혼인 남자에게는 '아주버님'과 '서방님'으로 부르라고 친절하게도 가르쳐주고 있다. 사회 통념적으로 학습되어 익히 알고 있는(하지만 분명 개선할 여지가 있는) 이런 호칭 교육이 도덕 교과서에까지 오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시대착오적이고 비생산적이다. 호칭대로라면 아무리 귀하게 자란 여성도 결혼만 하면 시가의 하녀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칭의 뉘앙스로만 봐도 아가씨, 도련님과 새언니, 형수님을 맞바꾸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굴욕감과 노예근성을 주입시키는 이러한 교과서을 단지 시험이라는 통과의례 때문에 투덜대며(혹은 개념없이) 외워야 하는 디지털 세대의 선봉에 선 딸들이 가엾다.
유교문화와 일제 강점기도 모자라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의 노예도덕은 더 깊은 뿌리를 내렸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 교과서의이러한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는 분명 문제제기 되어야 마땅하다. 한데도 가부장적인 질서와 사고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노에 교육의 전면에 서 있는지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않는다!)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된 무대가 되고 있는 저 높은 영역에 다다른 여성들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소수의 클레오파트라들마저도 '명예남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다.
왜? 축적된 체험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여성들은 역사의 주인공도, 사회의 진정한 주체도 될 수 없음을 항복하듯이 순순히 인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당연 남근주의 리무진에 합승하는 일이다. (얼마 전 김규항을 읽으면서도 이런 클레오파트라적 페미니즘(내 식 언어조합)을 비판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 먹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 생각 때문이 아니라 몇몇 문구 때문에 반발심을 사지 않았을까 싶다.)
명예남자를 자처하는 극히 제한된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임을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부정한다. 여성성을 버리고 싶은 자아는 뭇 남성들이 그러하듯 함바집 여주인은 작부와 동일시해도 무방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진한 농지거리를 자초한다고 단정지어버린다. 차라리 하층민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한 인간 정수기 역할 쯤을 해주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폭로하는 김기덕류의 영화처럼 솔직해지던지.
자신도 한 때 억압받은 여자였음을 아니,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잊은 채 남성적 코드로 세상을 읽는 '그미들'이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었으면 좋겠다. (실은 여성성의 자각에 대해서 이 책이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선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 아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도덕 전반에 관한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장면 장면을 볼 때마다 내 여성적 자각이 꿈틀댔음을 고백해야겠다.)
잘못된 도덕 교육으로 여성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내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의 것이라고 면죄부까지 쥐어주었다. 여성의 온당한 주체성보다는 모성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성이라고 교묘하게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우리의 오래된 관습적, 교과서적 여성 교육에 그 혐의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성이 더 이상 기득권 사회의 억압이나, 남성의 육체적 환타지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여성 스스로가 바랄 때 여성의 위상은 그나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명예남자들이 더 인식할 때! - 그들이 진정 남성적, 보수적 프리즘을 벗어던지고 아직은 약자인 여자의 입장에서 자매애와 동지애를 발휘할 때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쓰고 보니 '도덕 교육의 파시즘' 의 폐해 중 너무 여성 문제에 집착한 것 같다. 아무래도 피해의식이 남아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