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이란 젠가 게임
다 컸지만 우리집 아이 둘은 아직도 젠가jenga 게임을 즐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마련한 그 나무 블록은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하다. 몇 번의 이사를 거쳤고 아이들은 다 자랐는데도, 버리기 좋아하는 내 손에 그 장난감이 살아남은 것을 보면 아이들이 젠가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다.
각자의 기숙사에서 돌아온 딸과 아들은 스마트 폰과 친구하기도 지겨운지 젠가 게임을 시작한다. 3개씩 18층으로 블록을 올린 뒤 맨 위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의 블록을 하나씩 빼서 맨 위층에 다시 쌓아 올리는 놀이가 젠가이다. 블록을 제대로 빼지 못하거나, 제대로 쌓지 못해 탑을 무너뜨린 사람이 진다. 한 마디로 ‘잘 쌓은 것을 잘 지켜내야 하는’ 게임이다. 새로 쌓거나 덧대는 게 아니라, 아무리 빼고 쌓아도 18층 높이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라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순간의 실수로 블록을 잘못 뽑거나, 뽑은 것을 쌓을 지점을 잘못 선택하면 탑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아무리 제대로 쌓아도 지키는 데 무신경하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교양을 쌓고,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거두며, 경력을 높이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비거나 모자란 채로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진다.
하지만 실은 채우는 것보다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위로 쌓고, 옆으로 넓히는 것 못지않게 본래적 심성이 갖고 있는 고유결을 지키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잘 못 빼면 한 방에 무너지는 게 삶이기 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 한 방에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행(失行)으로 추락하고, 실언과 실문(失文)으로 낭패를 당한다. 있는 것을 재배치하는 것보다 더 쌓으려는 욕심이 강하다 보니 실수 또한 잦게 된다. 쌓아온 자신만의 사명을 유지하고 성찰하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내가 가진 소박함의 품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젠가 게임에서 읽는 저녁이다.
2.자원봉사라구요?
가끔 흥분지수가 높아질 때가 있다. 가령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사의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 같은 것을 접했을 경우가 그렇다. 6개월간의 제작 현장 서포터를 구하는데 이력서는 기본에다 운전 가능자 우대란다. 주말 근무까지 하는데 처우는 교통비 지급, 식사 제공, 활동증명서 발급이 전부란다. 자원봉사자란 그럴듯한 계급 포장을 씌워 무급 노역자를 구하겠다는 심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상업적 공연 예술이다. 영리 추구가 목표인 기획품이지, 문화생활에 소외된 자들을 위한 무료 공연 작품이 아니란 말이다. 상업적 활동에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되지 않지만, 스펙 쌓기나 꿈 이루기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업체의 이기심에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 화가 난다. ‘활동 증명서’ 한 장과 신성한 노동을 맞바꾸기엔 너무 기운 계산법이질 않나.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엔딩곡이자 주제곡은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팔아서 돈을 벌기는 쉬워도 가난한 민중의 노랫가락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이 아이러니! 하기야 노동을 착취당하고도 일정 부분 제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함정에 자발적 형식으로 빠져든다.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사회는 인간의 그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든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절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만만한 사람들에게 더 인색하고, 가진 쪽일수록 타인의 노동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나, 약자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부나 봉사란 자발적이라야 의미가 있고, 가진 자가 소외된 자들을 향하는 것일 때 더욱 가치가 있다. 못 가지거나 덜 가진 자가, 다 가지거나 많이 가진 자에게 노력 봉사하는 건 노예 생활이지 자원봉사가 아니다. 일상생활에 허덕이는 자들이 봉사나 기부에 동요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3. 마트로시카 속의 비결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의 긍정성을 나는 옹호한다. 천성이 곱고 바른 사람들이야 겉과 속이 같으니 가면 쓸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오감이 발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상황에 따라 적당한 가면을 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내면의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그건 잘못 없는 타인에게 무례한 일이고, 결국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학부모 모임에서 여중생 딸의 고민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다. 유독 한 아이가 ‘교복 치마를 왜 그렇게 길게 입어? 필기는 왜 그렇게 꼼꼼하게 해? 체육 시간에 뛰는 모습 진짜 웃겼어.’ 이런 말로 딸에게 스트레스를 준단다. 누가 봐도 흠 잡을 데 없는 모범생에 대한 시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행하는 신조어 중에 ‘중2병’이라는 게 있다. 사춘기 또래가 지닐 수 있는 심리 상태의 한 유형인데, 한마디로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그것은 나보다 잘 난 것에 대한 시샘과 피해의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위악과 허영심을 동반한다. 한데 그 중2병은 한 때로 끝나지 않고 성인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두 친구가 각자 회사를 차렸지만 하나는 승승장구하고 다른 한 친구는 문을 닫았다. 실패한 친구가 찾아가 성공 비결을 물었다. 친구는 러시아 목각 인형인 마트로시카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 답이 있다고 했다. 믿는 둥 마는 둥 차례로 다섯 개의 작은 인형을 꺼냈고 가장 작은 마지막 인형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내가 성공한 이유는 항상 나보다 큰 사람을 곁에 뒀기 때문이야.’
제 그릇 작은 줄은 모르고 타인의 멀쩡한 그릇을 탓하는 건 중2병만도 못하다. 나보다 큰 사람은 도처에 널렸다. 어딜 가나 그 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곁에 두려는 노력만으로도 일상은 풍성해진다. 마트로시카 다섯 개 인형이 뚜껑을 열수록 점점 작아지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답이 있는 건 제 그릇 크기를 항상 되새기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