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 정리하다 퇴근한 지루한 숫자싸움을 출근하자마자 하고 있었다.
초안이야 이미 혈압 올라갈 정도로 끙끙 거리며 다 맞춰놨기에 소숫점 2번째와 3번째자리의 경미한 변경이므로 나름대로는 크게 머리를 싸매며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룰루랄라 일을 마치고 가볍게 점심을 먹고 하드디스크의 잡다한 내용의 휴지통행 화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을 때 P소장이 다가오는 것이다.
언젠가 페이퍼로 소개를 했었던 P소장은 다시 한번 설명하지만 이름만 소장일 뿐 직원들에게 월급을 준다던가 혹은 회식비를 내준다거나 하는 돈들어가는 일은 일절 상관을 안하면서 일만 시키는 개인적으로는 비호감 소장이다.
다짜고짜 도면 하나를 던져주면서 여기저기 뻘껀펜의 흔적이 역력한 몇장을 수정하라고 지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러하다. 실장이 잠시 소장과 함께 외부 회의를 가버렸기 때문에 그전까지만 해도 실장이 맡아서 처리해줬던 일을 고스란히 들고 나에게 온 것이였다. 아마도 도면화일을 안띄우고 탐색기와 웹창을 번갈아 띄우고 있는 내 컴퓨터의 화면을 보고 내가 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여기저기 뻘건펜의 흔적이 낭자한 도면이야...후다다닥 정리하면 한시간꺼리 일도 아니였지만, 단지 P소장이..그러니까...여태까지 직원들에게 그렇게 일만 시키던 이름뿐인 P소장이...그러니까... 간식 사먹으라고 100원짜리 하나 주지 않던 P소장이 그러니까.... 콩반쪽이라도 가지고 와서 일하는데 힘드니까 좀 먹으면서 하라고 한적이 한번도 없는 P소장이...그러니까... 점심시간이 걸리면 사무실 비용으로 야금야금 점심값을 조달하는 그 P소장이....일을 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았던 기분이 단번에 김빠진 맥주를 마셨을 때 마냥 내 인상을 사정없이 구겨주는데는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였다..
인상구기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게 모르게 불과 단 몇초전의 그 고압적인 명령조의 목소리는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이미 난 불쾌할대로 불쾌해진 후였으니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
간단한 설명 후 일을 시작하기 앞서 주차장에 나가 애첩을 물고 아주 잠깐 생각의 전환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만약 P소장이 내가 지금 다니는 사무실의 메인이였다면.....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첫번째는..월급..제날짜에 절대 안나올 것이다. 하는 일 족족 꼬이는 P소장이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메인이였다면 제날짜는 고사하고 몇달째 밀리고 밀리는 악순환이 연속이였을 것이다.(그런데 참 묘한 것은 돈없다..돈없다..하는 이분은 몇달 전 자신의 승용차 그러니까 S사에서 나온 제일 비싼 승용차 C뭐맨 승용차에 새롭게 AV시스템을 깔았다.)
두번째는...회식은 가뭄에 콩나듯 할것이다 그리고 회식을 한다고 한들 어디 가격이 지나치게 저렴하여 부실하기 그지없는 삼겹살집을 전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회 먹어요 했다간 사직서 낼 판국이였을 것이다.
세번째는...이래저래 컴퓨터로 도면을 그릴 줄 아는 K소장에 비해 P소장은 도면은커녕 워드한장 못친다. 거기다가 팩스도 제대로 못보낸다. 고로 그 뒷수발을 다하느라고 정작 본업을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다.
세번째까지 생각했을 때 애첩은 필터 가까이 타들어간다는 경보음을 울렸고 재빨리 애첩을 비벼끈 나는 비교적 상쾌한 기분으로 그 P소장의 일을 후다닥 처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마인드 콘트롤이라는 것인가?
뱀꼬리 : 추석연휴 전 K소장과의 술자리에서 드디어 K소장이 P소장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고 한다.